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상가희는 요동인입니다. 상가희의 아버지 학례는 명나라의 유격이었고, 본인도 명나라의 장수로 활동하다 1634년 후금에 항복, 청태종으로부터 총병을 제수받고 우대되었습니다. 이미 그는 일찌감치 1636년부터 지순왕(智順王)에 봉해졌고, 도르곤이 이자성 군대를 격파할 적에도 종군했습니다. 또한 이후 호남 평정에서도 활약했고, 광동과 광서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고 광동의 평남왕(平南王)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정충의 할아버지, 경중명 역시 요동인입니다. 그는 모문룡 부대 출신으로, 원숭환이 모문룡을 제거하자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투항했습니다. 1636년 회순왕(懷順王)에 봉해졌고, 역시 1644년 도르곤이 이자성 부대를 격파할때 종군했습니다. 이자성이 패배한 후에는 공유덕과 함꼐 호남을 정벌하여 장사와 형주, 무강등을 점령했습니다. 그 후 1649년에 정남왕(靖南王)에 임명되었는데, 소속 부대가 도망간 죄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왕작을 박탈당했고, 벌금을 냈습니다. 경중명은 죄가 두려워서 자살했습니다. 경중명의 남은 부대는 아들 경계무의 통솔하에, 상가희와 협력하여 광저우를 공격했습니다.
1651년,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耿繼茂)는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고, 이후 여러곳에서 명나라 잔존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아들 경정충은 숙친왕 호격의 딸과 결혼하여 화석 친왕이 되었고, 이후 병이 들어 경정충이 이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삼대에 걸친 자리였습니다.
오삼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이자성 부대를 격파하고 장헌충을 토벌했으며, 남명 최후의 잔존세력을 버마까지 추격하여 소탕한 그의 공은 청나라 공신들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최고 순위에 둘 만 했습니다. 이들 세명이 바로 청나라의 삼번입니다.
본래 청나라의 제도로 따르자면, 황족과 같은 성씨를 쓰는 동성왕이나 성씨가 다른 이성왕 모두 토지를 분봉받지 않고, 정사를 관리할 권력도 없으며, 제왕이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면 명을 받들어 잠정적 군사 지휘관을 주는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남명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한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주 계급의 세력을 빌어야 했음으로, 군사와 정치, 경제 등의 특권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삼번은 각자 개별적인 군사적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서로의 번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비교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경계무 ─ 15좌령
상가희 ─ 15좌령
오삼계 ─ 53좌령
5정(丁)에서 1갑(甲)을 내고, 갑 200에 1좌령을 둡니다. 그렇다면 15좌령은 갑병 3000명인데, 그 번 휘하에 정구(丁口)를 각각 1만 5000구(口)를 두었습니다. 오삼계의 경우는 갑병이 1만 600명이고, 정구는 5만 3000구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더 세력을 넒히기 위해 삼번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부대에는 막대한 녹기병(綠旗兵)과 투항병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경정충 ─ 6,000 ~ 7,000
상가희 ─ 6,000 ~ 7,000
오삼계 ─ 녹기 병정 수만 명
오삼계의 경우가 더 위험한것은, 그 부대의 성질입니다. 일전에 명나라 숭정제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에게 "오씨 부자의 병력이 어느정도인가." 를 묻자, 오양은 "책에는 8만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3만 명"일 뿐이라고 말했고, 숭정제가 다시 그들이 용맹한 병사인가 묻자, 오양은 "단지 3000여명 정도만 쓸만 할뿐" 이라고 했습니다. 숭정제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3000여명이 수십만 청나라 군을 막아세우는가 물었는데, 오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3000명은 병사가 아니라 신(臣) 양의 자식이고, 신 자식 삼계의 형제입니다. 신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이래, 먹는것은 거친 음식이나 3000명에게는 모두 맛있는 술과 양고기를 주고, 신이 입는것은 거친 베옷이나 3000여명에게는 비단옷을 입힙니다. 이들 3000명은 각자 수백 무의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웁니다."
즉 오삼계 주위에 있는 이 부대는 오삼계와 혈족이나 다름없이 이어져있고, 오삼계는 그들에게 경제적 대우를 확실하게 보장해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오삼계를 위해 목숨 조차 걸레짝 처럼 내던지고 싸울 수 있는, 대단히 용맹하며 충성스러운 최강의 군단이자 충실한 사병이 됩니다. 이런 요소는 상가희와 경씨 집안의 번에도 있었습니다.
이들 부대의 편제, 그리고 군관의 선택과 발령은 물론 형식상으로는 청나라 조정과 병부의 비준을 받는 형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로지 번왕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삼계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습니다. 그는 운남의 소수민족들을 정벌하면서, 그 후의 인사배치를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했습니다. 강희 5년인 1666년, 병부는 조정에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운남과 귀주, 두 성의 무직(武職)에 결원이 생기면, 신의 부서가 (인재를)추천하여 올립니다. 그러나 관원이 아직 임지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평서왕 오삼계가 따로 문서를 올려 사람을 선정하므로, 부서에서 천거한 관원은 중도에서 돌아와 큰 곤란을 겪습니다. 이부의 예에 따라, 이 두 성의 무직에 결원이 생기면 해당 번의 추천을 들어주고, 만일 천거할 만한 사람이 없음을 해당 번이 문서로 분명히 할 경우에만, 부서가 다시 추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물론 오삼계가 인명한 장수들은 모두 그의 최측근이며, 가족들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지방 독립 군벌인 셈입니다. 운남과 귀주의 총독과 순무는 오삼계의 통제를 공식적으로 받았으며, 그들이 주둔하는곳 조차도 오삼계가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그 영향력이 운남과 귀주 밖으로까지 퍼져, 다른 성의 쓸만한 관원을 오삼계가 자신의 관할로 옮겨오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사천 도어사 양소온이 이에 항의하여 상소를 올리자, 오삼계는 반박 상소를 내어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 정부는 양소온을 해임했고, 그는 10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중용되었습니다. 오삼계의 힘은 이처럼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집단의 진정한 힘은 결국 경제력에서 나오는바, 삼번의 경제력도 가공할만 했습니다. 경씨 집안은 복건을 끼고 있었는데, 복건의 생선과 소금은 가히 그 이익이 천하에서 최고이며, 백성들은 이에 의지해서 생활 하였을 정도인데, 경정충은 그 이익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하고 상인을 몰래 해외에까지 파견하여 대단한 부를 누렸습니다. 독자적으로 산을 뚫었고, 광산을 개발했으며, 바닷물을 끓이고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이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했고, 티베트와 운남 경계에서 티베트와 몽고의 차와 말을 교역하였고, 티베트 및 몽고의 말을 운남으로 들여온 것이 한해에 무려 1000만 필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오삼계의 영향력은 고향인 요동에서도 막대하여, 그는 요동의 약재를 운남에 팔아 큰 이윤을 남겼습니다.
운남과 귀주의 관리들도 전부 오삼계에게 매수가 되어있었고, 무엇보다 그 군대를 유지하는 군량은 오로지 청나라 정부의 부담일 뿐입니다. 오삼계의 공이 너무나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호부에서도 조사를 이유로 재물을 삼번에 퍼부어대는데 시간을 늦출수가 없었습니다. 1660년의 경우에는, 천하의 토지세와 정은(丁銀) 등이 875만냥이었는데, 운남 한 성에만 무려 900여만 냥을 퍼부어야했습니다. 즉, 청나라 전부를 들어부어도 운남 한성에서 쓰는 쓰임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광동과 복건의 경우는 이를 초월했습니다. 무려 2,000만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재정은 이미 부족한지 오래이므로,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세금을 살인적으로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오던 판국입니다.
"천하의 재물과 부는, 삼번에서 그 절반을 소비한다."
즉 삼번은 가히 그 번영이 상상을 초월하는데도, 그 쓰임세가 독자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오히려 삼번의 지원을 받아야할 다른 성들이 말라 비틀어지면서 이 삼번에 지원을 퍼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번이 이상할 정도로 과소비를 하여 무엇을 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 삼번은 또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세금을 뜯어내고, 소수민족들도 처참하게 수탈당했습니다. 이제 최후의 농민군 잔여 부대와 남명 정권의 세력이 모조리 사라지고 나자, 청나라 정부는 삼번에 부담을 분명하게 느꼈지만, 문제는 이들이 너무나 강력하여 손조차 쓰기 힘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강희제가 이 문제에 뛰어들 당시의 모습이 이러하였습니다.
삼번을 제압하여야 한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관리들은 이미 많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양소온도 있었고, 왕희, 부홍렬 등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삼번을 제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청조의 치하에서 가장 부유하며, 수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그들을 말입니다. 오히려 삼번 문제를 이야기한 관리들이 처벌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지는 판국이었습니다. 심지어 부홍렬은 사형까지 선고받았지만 강희제가 막판에 특명으로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삼번의 가공함은 이제 조정까지 주무르려는 판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삼번의 비위를 최대한 덜 거스르면서, 그들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순치제와 그 이후 네명의 섭정이 정국을 주도할때, 오삼계에게 대장군의 인(印)을 수여했고, 평정이 끝나면 반환하도록 했지만 오삼계는 이를 미루면서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9살의 강희제는 북경에 머무르고 있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에게 대신을 보내 이러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자네의 부친은 이미 운남으로 간 지 몇 해가 지나도록 갖가지 핑계로 아직 인장을 반납하지 않고 있다. 이제 나라가 평온해졌으니, 인장을 반납하는 것이 어떠한가?"
아들을 통해 이 뜻을 전해 들은 오삼계는 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딱히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대놓고 언질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대장군의 인장을 조정에 반납했습니다. 또한 강희 4년에 신하들이 이미 평정도 거의 끝났으니 운남의 병력을 5천명 감축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강희 6년에 왕회가 군량미 감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강희 6년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군량미 1백 석을 감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강희 6년 5월, 오삼계가 조정을 정탐해볼 요량으로 안질에 걸렸다면서, 스스로 운남과 귀주를 다스리는 직책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보이자 강희제는 이를 윤허했습니다.
"오랜 세월 변방에 주둔하여, 두 성을 관리하는 공로가 대단하다. 일의 번거로움으로 말미암아 노쇠하고, 두 눈이 혼미하여 정럭이 날로 쇠하는 상황을 적극 배려하겠다."
같은 해 9월, 오삼계의 패거리인 운남 총독 변삼원, 운남 제독 장국주, 귀주 제독 이본섬 등이 운남의 상황이 급박해, 그 통치권을 다시 오삼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17살의 강희제는 태연하게 이를 받아쳤습니다.
"오삼계는 몸이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직무를 내놓았고, 지금 운남과 귀주는 모두 평온하다. 다시 오삼계가 과중한 업무를 맡았다가, 건강에 크게 해가 되면 두려운 일이 아닌가.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한다면, 그때 가서 짐이 다시 적절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물론 명목상의 지위 정도가 없더라도 운남과 귀주에서 오삼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니, 실질적으로 오삼계의 번이 해체된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후에 오삼계가 계속 군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변방 지역의 난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하였으니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잠시나마 견제하는 정도는 되고, 또 부분적인 행정과 군정 대권의 일부분을 중앙에 귀속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한 후, 운남, 귀주, 광동, 광서, 복건 등의 총독과 순무에 자신의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투하' 했습니다. 이를테면 운남 및 귀주의 총독으로 임명된 감문혼은 명망이 높고 위엄이 있어, 오삼계에 매수되거나 꼭두각시가 되던 이전의 인물들과는 달리 어느정도는 대적해 볼만 했습니다. 강희제는 감문혼의 어머니가 병사하여 임지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기겁하며 그를 저지했고, 그가 계속해서 장례를 해야 한다고 요청하자 3번째가 되서야 내키치 않지만 상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는 대신, 조속히 임지로 복귀하라고 전하였습니다. 그 정도로 강희제는 이런 인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삼계
물론 강경책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것이 눈에 뻔합니다. 강희제는 일부러 삼번에 굽실거리는듯한 모양새를 취해 그들의 경계심일 할 수 있는 최대로 줄였습니다. 강희 11년인 1672년, 경계무의 인척 범승모가 복건 총독으로 위임될때, 범승모는 완곡하게 사의를 표시했다면 강희제는 마치 좋은게 좋은것이라는듯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 7월, 범승모가 몸이 안좋자 강희제는 즉시 어의를 파견하여 그를 진료하게 했습니다.
또한 오삼계는 오응웅을, 상가희는 셋째 아들 상지륭(尙之隆)을, 경계무는 둘째 아들과 셋쩨 아들을 황제 곁에 두었는데, 사실상의 인질들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그들을 우대하여 부마로 삼고 작위를 올려주었고, 태자대부 등으로 우대하는가 하면, 일부러 감시를 느슨하게 하여 아버지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잠시 삼번으로 돌아가 군무를 맡는 일까지 어느정도 허락해주었습니다.
또한 값비싼 옷이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물품들을 삼번의 수장들에게 선물하는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삼번은 이러한 행위들에 의식적으로 일정 범위 내에서는 어느정도 권한을 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지키려는 술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서로가 가면을 쓰고 겉으로 웃으면서 보내는 시기가 길어지던 참에, 마침내 화약고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상가희가 은퇴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첫댓글 돈지출이참...망하는게 당현..
그렇다고 만만히 보이면 진즉 깔끔하게 털려버릴터인즉.. 사냥이 끝나면 개부터 삶는것이 만고의 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