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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문답 2014년 5월(1-8)
1. 자식의 수행
2.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약입니다
3. 49재에 대하여
4. 수행을 잘하려면 대상에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십시오
5. 사념처 수행의 바른 이해
6. 관념과 실재를 구별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7. 괴로움은 자신의 현주소입니다
8. 집중이 되었을 때는 거친 대상보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2014년 5월 5일
1. 자식의 수행
< 질문 >
제가 요즘 일요일에 수행하러 다니니까, 남편이 우리 애들도 데리고 가서 수행 좀 시키라고 합니다. 본인은 수행을 하지 않지만 수행이 좋은 것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이지요. 더구나 우리 애들은 남보다 한참 뒤쳐져서 살다보니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남편도 수행을 하는 것이 애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첩경인 듯합니다. 물론 이것도 100%는 아니고 할 수 있는 확률이 좀 많아진다는 것에 불과하지만요.
수행이란 것이 이런 프레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식일이다 보니, 좀 더 좋은 방법이 있나 싶어 질문 드립니다.
얘들을 어떻게 하면 수행시킬 수 있을까요?
< 답변 >
만약 일요일에 자식들과 함께 수행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넌지시 권해보십시오. 그러나 수행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얼마간은 강요하는 뜻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은연중에 함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쳐야 합니다. 수행이란 하고 싶어도 하기가 힘든 것인데 하물며 하기 싫은 마음으로 했을 때는 오히려 더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거듭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힘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자식들의 수행을 위해서 몇 번이라도 함께 수행을 하자고 말씀드려보십시오. 이것도 진지하게 상의해야지 일방적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되 수행을 하는 쪽으로 인도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기술이라는 것이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처음에는 너무 오래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조금만 하다가 나중에 상황을 보아서 수행시간을 늘리십시오. 그리고 수행이 끝난 뒤에 가족이 외식을 하거나 극장엘 가거나 예술 공연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때로는 남산에 가거나 경복궁이나 인사동에 가서 미술 감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청계천을 걸으면서 종로 쪽의 골목에서 외식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매번 똑같은 것을 하지 말고 다양한 선택을 하십시오. 남편이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면 무리하지 않게 적절한 선택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요일에 가족들이 모두 오신다면 제가 명상원에 나가서 한 두 번은 수행안내를 하겠습니다. 이런 계획이 있다면 이번 5월 6일 초파일 명상원 행사부터 가족이 참여해 보십시오. 이렇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익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습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9일
2.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약입니다
< 질문 >
오늘 이상하게도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감기 기운이 좀 있긴 했지만 평소에 비하여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뒤엉겨 있었어요. 오후 늦게야 짐작이 가는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침 일찍 어떤 마음을 알아차렸는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정말 극적으로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 작가처럼 일을 꾸미고 반향을 계산하고... 순식간에 이 모든 것을 처리하는 마음을 보고나니, 하려던 말이 그만 쑥~들어가 버렸습니다. 마치 일을 꾸미다 들켜서 해코지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 나쁜 상태로 만들어 놓은 범인’이 마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서서히 나쁜 기분에서 놓여났습니다.
법구경에서 ‘마음은 미묘하고 알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에 지배를 당하고 살면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고 <알아차리기 어렵고 또 해코지를 하는> 마음이라면 좀 난감한 적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이런 마음에 기만당하고 또 이것이 내 마음인 줄 알고 살면서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있다는 자각도 일어났습니다.
< 답변 >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내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것을 법으로 보면 사성제 중에서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인 고성제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만족하기를 바라는 갈애와 집착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것을 법으로 보면 사성제 중에서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자신의 마음이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이 사성제 중에서 팔정도인 도성제입니다. 이 도성제가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기분이 놓여난 것은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를 향해서 가는 과정입니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만 있으면 연기가 회전합니다. 그러나 도성제와 멸성제가 있는 순간에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사성제와 연기가 이론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도성제인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사실 진리라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범인이라고 알아차린 것은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보긴 했는데 완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만 기분이 나쁘고 말았습니다. 이때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보아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보긴 보았는데 완전하게 보지 못해서 그만 기분이 나빠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알아차려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났는데 이때 이것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괴로움에 빠진 것입니다.
마음을 본 것은 알아차림에 의한 일차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보고 기분이 나빠진 것은 이차적인 현상입니다. 일차적 현상은 알아차림에 의해 바르게 본 것인데 그 순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이차적 현상에서 기분이 나빠진 것입니다. 이때의 이차적 현상에서 알아차림이 달아났습니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겪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자아는 이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추악한 마음을 보았는데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괴로움에 빠집니다. 처음에 알아차림에 의해 지혜가 났는데 그만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 수행자들이 겪는 과정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동안 나라고 하는 자아를 가지고 살아서 누구나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한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거나 이로 인해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을 꾸미다 들켰다고 생각한 것은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이처럼 자아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아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마침표를 찍지 말고 항상 알아차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마침표를 찍으면 그 순간부터 생각을 하게 되어 알아차림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진행되는데 무엇이 어떻다고 관념적인 결론을 내리면 이 순간에 알아차림이 끊어지고 생각에 빠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의식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다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만이 고정관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알아차림을 놓쳤다면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고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종합해보면 12연기의 진리와 사성제의 진리가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끌 때의 마음은 연기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마음의 무상함과 괴로움과 무아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을 때 법념처 수행으로 보면 마음의 무상함과 괴로움과 무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다보면 고요함이 생겨 이러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나를 각성하게 하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만약 기분이 좋았다면 이런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만이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나쁠 때 기분이 나쁜 상태로 두면 계속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쁠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기분이 나쁜 원인을 발견하여 지혜가 성숙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12일
3. 49재에 대하여
< 질문 >
대승권의 불교는 (티벳, 중국, 한국...) 사람이 죽은 후 49재를 지내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은데, 파욱 사야도의 가르침을 보니,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하셨다는데, 출처가 어느 경전인지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변 >
한국명상원 게시판의 묻고 답하기에서는 수행에 대한 것만 다룹니다. 교학에 대한 것은 토론이 되기 때문에 삼가고 있습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가르침만 있지 토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가르침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갖춘 문화현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인연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상좌불교에서 말하는 법문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빨리어 경전인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에 근거하여 법을 폅니다. 파옥 사야도의 말씀도 전부 여기에 기인한 내용입니다. 현재 저희 명상원에서 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도 경장에서 설하신 대념처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 한 생명이 태어나고 죽은 것에 관한 것은 경장의 전편에서 나타나지만 특히 아비담마의 연기법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다음 생으로 간다는 것도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현재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생에서 오고 내생으로 간다고 하면 나라고 하는 자아가 상속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연기법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4월 21일자 옹달샘 글에서 밝혔듯이 성냥불이 어디서 온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성냥불이 껴진 것처럼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냥불이 꺼졌을 때 불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꺼졌을 뿐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실상입니다. 성냥불을 장작에 붙였을 때 성냥불은 사라지고 장작불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냥불과 장작불은 다른 것입니다. 다만 불이라는 요소는 같습니다. 이 불이라는 요소는 하나의 생명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도서출판 행복한 숲에서는 지금까지 12연기 시리즈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인 논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2연기와 위빠사나, 12연기 1권, 12연기 2권, 미소 지으며 죽는 법,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이상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책이 아닌 한국명상원 게시판에서도 모두 읽어볼 수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7월 8일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마음 인문학 연구소에서 하는 강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곳에서 마음에 대한 특강을 초청받았습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면 이런 의문이 상당부분 해소될 것입니다. 현재 요일만 결정되고 시간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결정되면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만약 전주 덕진에 살고 계시면 한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음악을 올려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13일
4. 수행을 잘하려면 대상에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십시오
< 질문 >
묘원 법사님^^
3주 만에 뵈니 참 반가웠습니다. 먼 길인데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익산을 다녀가시는 모습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오늘도 조심히 올라가셨는지요.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올립니다.
팔정도는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며, 이 가운데 正定은 Samatha 수행에 해당되고, 正念은 Vipassana 수행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를 통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대해 공부하면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알아차림 = 正念 = Vipassana 수행이 성립되겠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하셨는데요.
질문1. 팔정도에 없는 분명한 앎(正知)과 알아차림(正念)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길 때 마음을 챙기면 알아차림(正念)은 하나씩 되어지나, 금방 잊어버리게 되어 시간이 지난 뒤 또다시 챙겨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계속 챙기는 거라 생각합니다.
질문2. 한번 알아차림(正念)하면 그 알아차림을 지속되게 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질문3. 처음 알아차릴(正念) 때 어떻게 알아차리면, 분명한 앎(正知)이 확고히 되어 다시 잊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해가 필요하여 질문 올립니다.
익산에서
< 답변 >
정정(正定)은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집중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근접집중과 근본집중과 찰나집중입니다. 여기서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은 사마타 수행의 집중입니다. 그리고 찰나집중이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입니다.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은 사마타 수행의 집중으로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선정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찰나집중은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으로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려 통찰지혜를 얻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선정의 상태에 따라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통찰지혜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며 이 중에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납니다.
정념(正念)은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정념은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집중의 상태에 따라 사마타 수행의 알아차림과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 나뉩니다. 어떤 집중이냐에 따라 어떤 수행인가가 결정됩니다. 이 결과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느냐 아니면 통찰지혜를 얻느냐로 구분합니다.
답변 1.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은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정에 속합니다. 분명한 앎은 팔정도 중에서 혜에 속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앎은 정견과 정사유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알아차림에는 두는 알아차림과 있는 알아차림이 있는데 있는 알아차림에는 지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답변 2. 알아차림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알아차리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바르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지속은 집중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라고 할 때 위는 분리한다는 뜻이고 빠사나는 통찰을 의미하는 빨리어입니다. 이때의 통찰은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 하나로는 대상을 통찰하는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려면 오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오력이 되어야 합니다. 오근은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노력할 수 있고 노력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으며 믿음과 노력이 지속되어 알아차림이 지속될 때 집중이 됩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지혜가 납니다.
스승들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가령 처음에는 발의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사라짐을 알아차리고 그 다음에 일어남과 사라짐을 모두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알아차림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과 알아차림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오근의 조화와 함께 스승의 수행지도방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더러 대상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싫증이 나지 않고 흥미를 느껴 대상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지속인 집중은 수행자들에게 매우 지난한 관문이라서 모든 수행자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집중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오온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합니다. 수행자들이 이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에 대한 면담을 해야 합니다.
답변 3. 바르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계율이 청정해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공손하게 모아서 대상을 가볍게 겨냥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힘을 주어서 꽉 붙잡으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서 오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측면이라서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용을 가지려면 먼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들이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로 알고 긍정할 때 대상을 바라보는 분명한 앎이란 새로운 시각이 생깁니다.
수행을 잘하려 해도 반드시 잘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수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중도의 견해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에 대하여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제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자세입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17일
5. 사념처 수행의 바른 이해
< 질문 >
1. 가만히 생각하니, 알아차림을 지속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이라고도 하시고,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셔서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제가 얼토당토않은 마음을 알아차렸는데, 금방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일으킨 파장 때문에 계속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알아차림을 지속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방 다른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지 않나요?
2. 상황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영어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외의 얘기를 하고 계셨는데, 문득 어떤 대꾸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본 것입니다. 그냥 좀 어처구니없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렸을 뿐, 그것 때문에 괴롭다든가 하는 건 전혀 없었고 금방 수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일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그걸 알고 나니 그 기분에서 놓여났습니다. 이런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올렸습니다.
3. 요 며칠 알아차림의 지속이란 뭘까에 대한 고민을 했다. 어쩌면 이게 단순히 시간상의 지속을 말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뭐든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만일 어떤 마음을 알아차렸는데, 알아차림을 지속하라고 해서 계속 그 마음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면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사념처 수행의 결함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속하라는 말은 그 마음을 계속 보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확실하게> 보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는 또 <확실하게> 현재에 마음을 두고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 마음이 일으킨 파장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이 두 종류의 <확실하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 그렇지, 아직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 대답을 지연하시니 혼자 생각하다가 풀렸다.
< 답변 >
1. 알아차림은 대상을 겨냥하는 행위고 알아차림의 지속은 겨냥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지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알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알면서 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아는 것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아는 것을 알아차림의 지속이라고 합니다. 이 알아차림의 지속이 바로 집중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행위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선결조건이 필요합니다. 수행자는 먼저 대상을 단순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단순하게 보지 않고 생각으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때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말이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법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린 뒤에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으면 이때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부터 벗어낫거나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방법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와 상대의 말을 듣거나 상대를 볼 때가 다릅니다. 수행은 안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가 있고 밖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가 있고 안팎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남이 말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와 다르게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남의 말을 듣다가 무슨 생각이 났다면 생각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때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지속은 특정한 한가지만을 대상으로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되었거나 현재 나타난 현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2. 영어선생님의 말과 자신의 견해가 다를 때 순간적으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선생님의 말을 듣고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언제고 자기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 말을 듣고 좋다거나 싫다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바른 알아차림이 있다면 어떤 말도 좋다거나 싫다고 반응하지 않고 단지 상대의 말로 듣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알아차림을 놓치면 즉각 좋다거나 싫다고 반응합니다.
이때 어떤 반응을 했건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지속입니다. 선생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알아차림의 지속이 아니고 새로운 상황이 생긴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의 지속입니다.
3. 하나의 대상을 선택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타 수행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근본집중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 나타난 모든 것이 다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렇게 할 때 존재하는 것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이 두 가지는 목적이 다릅니다.
사념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전혀 부작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나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중도의 견해를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사념처 수행은 결함이 없습니다. 만약 결함이 발견되었다면 수행자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이때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을 다시 알아차리려야 합니다. 자신의 견해로 마침표를 찍으면 사견에 빠집니다. 만약 사념처 수행이 결함이 있다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무엇이나 자기 하기 나름입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20일
6. 관념과 실재를 구별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 질문 >
교수님 안녕하세요. 원광보건대학교 간호학과 재학중인 김미정 학생입니다. 조금은 수행과 관련되어 있긴 하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한 질문의 내용이 더 큰 것 같아서 과연 게시판에 글을 올려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망설였지만 꼭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이렇게 카페에 질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가까워지려면 먼저 내 자신의 실재에 대해서 알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건대 저 자신을 알고자 노력을 해왔었지만 그 노력이 올바른 방향의 노력인지..........
여태껏 스스로의 관념적인 부분만을 보아왔고 중요시했던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의 '실재'를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저는 '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강의시간에 제가 관용에 대해 교수님께 여쭤봤을 때 교수님께서는 성냄이나 미움 등이 없을 때 관용이 생긴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냄이나 미움 등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화내고 있네.'란 것처럼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을 알아차려야 할 '대상'으로 하여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자기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남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대상으로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대해서 나온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인건가요?
사람들이 흔히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했을 때 저는 흔히 외모적인 부분이나 성격적인 측면(예로... 게으르다. 꼼꼼하다 등)을 봐 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관념인 것인지요?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 답변 >
관념과 실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단지 괴롭지 않게 살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관념과 실재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관념은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나 명칭, 고정관념, 편견, 표상 등을 말합니다. 이런 관념은 실재가 아니면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으며 자신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합니다. 이것에 비하여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이러한 진실은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실천을 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껍질이 아닌 내용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몸이라고 했을 때는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서 관념에 속합니다. 그러나 몸의 느낌을 알 수 있는 단단함 부드러움, 가벼움 무거움, 뜨거움 차가움 등은 실재에 속합니다. 이때 관념은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개념에 속합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몸은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의 진실을 알려면 몸이 아닌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몸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알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과 욕망이 사라지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부르기 위한 명칭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을 개념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명칭에 불과한 것을 진실처럼 알면 실재하는 진실을 볼 수 없어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불가피한 관념에서 실재하는 진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나’, ‘너’ 라고 하는 것은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이지만 실재에서는 ‘나’, ‘너’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 때만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지혜가 나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대상에 휩쓸려버리는 고정관념으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좋다거나 싫다는 평가를 하지 않아 무조건 탐욕과 성냄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현상이나 하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대상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에 의해 고요함이 생기고 더불어 지혜가 납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관용이 수반되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매우 좋은 계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차림이 필요하고 알아차림과 함께 대상을 이해하는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바른 실재를 알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어 지혜가 납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게 하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흔히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실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외모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격은 실재에 속합니다. 단지 사람일뿐인데 예쁘다거나 밉다고 했을 때는 관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으로 본 이런 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격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므로 실재에 속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 때 관념은 가볍게 여기고 실재를 중요하게 여기면 항상 진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아닌 내면의 성품이 그 사람의 진실입니다. 진실을 보는 자가 궁극의 승리자입니다.
곽준(묘원) 올림
2014년 5월 23일
7. 괴로움은 자신의 현주소입니다
< 질문 >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보면 너무 괴롭습니다. 왜 그런지도 압니다. 저도 제 욕망으로, 제 잣대로 보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냥 괴로워하며 사는 게 인생인가요?
알아차려도 괴로움은 변하지 않으며 단지 알아차림으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인가요?
< 답변 >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보고 괴롭다면 자신도 욕망을 가지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없으면 상대의 욕망이 단지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욕망 뒤에는 항상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서로 완전하게 모르기 때문에 욕망에 얽혀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인해 괴롭다는 것을 알아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은 생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 알면 상대나 자신이나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괴로움에서 홀연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 무아의 지혜가 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욕망도 누구의 욕망인가에 따라 괴로움이 다릅니다. 가장 기대가 많은 사람에게서 자신과 다른 욕망을 발견하면 그만큼 괴로움이 클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입니다.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부리는 욕망은 자신의 이해와 무관하기 때문에 그다지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욕망을 볼 때 상대의 축적된 성향으로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이러한 잠재적 성향으로 살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이 생을 거듭하게 합니다.
완전한 지혜가 나기 전까지는 알아차려도 괴로움이 있습니다. 아직 내가 있다는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아차려도 안 되는 것이 괴로움을 만드는 원인입니다. 이런 괴로움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알면 괴로움은 하나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이때 조금은 자유롭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 자아가 없다고 알 때 비로소 괴롭지 않습니다. 괴로움은 자신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알아차릴 대상이 될 때 법의 성품을 보아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괴롭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를 바라야 합니다. 괴로움을 보았다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무아의 지혜가 나 번뇌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습니다.
묘원 올림
2014년 5월 23일
8. 집중이 되었을 때는 거친 대상보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 질문 >
반갑습니다. 일전에 수행 중 경험 한 것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나서 온라인을 통해서는 앎을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 듣고, 만나 뵙고는 잠시 사띠와 삼빠잔냐에 관하여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후 평소처럼 수행을 하였는데 수행이 너무 안 되었습니다.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그냥 하루하루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지금까지 늘 하던 방식으로 몸에 익은 강도로만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앎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험이 부족하여 더 실전적으로 노력 기울이고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가르침을 듣고는 그만 아만심에 빠져 나태해져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니 바래서 괴로웠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있었고, 알게 되니 괴롭던 마음도 없고 괴로운 것도 한때고 또 괴롭더라도 그 실체는 그냥 괴롭다는 느낌이라는 것을 잠깐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수행이 안 됨에 스스로에게 인색하고 자책하던 마음들이 떨쳐지기도 했습니다.
그간 들어왔던 수많은 복잡한 수행에 관한 방법에 대한 집착도 생각으로는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고 굳이 스스로를 달래는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과 꾸준한 노력으로 귀결되는 듯하여 의심에서 조금은 더 해방된 듯한 느낌입니다. 만약 이것이 의식이 고양되는 과정에 나타난 것이라면, 이러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 부처님과 법과 스승들께. 그리고 애증이 교차하지만 지금의 조건 지어진 제가 있게 해 준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경행을 마치고 좌선으로 연결하여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최근에는 법사님께서 리드하시는 방식대로 눈, 입술, 손, 엉덩이 등등의 순차적 과정을 밟아도 집중이 잘되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무언가 빈틈이 있고 그 틈으로 망상이 흘러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운동선수가 순발력이 늘어나면 여유가 늘듯? 토끼처럼 자만에 빠져서 그런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알 수가 없으니 계속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생각하여 꾸역꾸역 해왔습니다.
오늘도 역시 잘 되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입술에서 손까지 보다가 숨이 느껴져서 호흡이나 보자하고 호흡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호흡도 그리 길게 보이지 않고 이내 사라졌습니다. 몸에 느낌들이 미세해지고 고요했습니다. 잠깐잠깐 호흡이 나타나면 호흡보고.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난 마음보고. 마음을 보고 사라지고 없으면 가슴에 느낌보고.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가슴느낌보고. 가슴 느낌 없으면 조용한 것, 편안한 기분 등을 느꼈습니다. 수행이 너무 덤덤하게 잘되니까 오히려 의심스럽고 약간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좋은 느낌을 더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림이 잘 지속 되다가 혼침이 있었습니다. 몸이 기울거나 꾸벅하며 졸지는 않았고 깜빡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졸다가 아차 하며 깨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 짧게짧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혼침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깨고 나서 졸았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집중이 잘되어서 그런지 혼침에 깊이 안 빠지고 깜빡거리듯이 빠지고-알고-빠지고-알고하는 것이 반복된 느낌이었습니다.(일상적으로 자주하는 경험이 아니다보니 글로 표현하자니 너무 막막합니다)
짧고 연속된 혼침과 함께 조금 강렬한 표상작용이 있었는데 비구니 절이 보였고 군인과 관련된 대검이 꽂힌 총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고요하게 집중이 잘 되었고 그 상태가 지속되며 한 시간 좌선을 마쳤습니다. 눈을 뜨고 몸과 마음을 살피니 가벼웠습니다. 다시 눈을 감고 10여분을 더 앉아 호흡을 보니 호흡이 잘 보이고 미세해지다가 호흡이 사라지고 앞전의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글을 올리고 있는 중 입니다.
고요한 집중 상태에서 혼침에 들었다가도 다시 집중이 유지되는 것이 정상 인지 알고 싶습니다. 혼침이라 하면 무언가 장애 같은 느낌이라서...
평소 좌선 중 고요하고 호흡이 사라지면 그때 지루함이나 그 고요함을 낯설어하며 생각을 일으키거나 망상에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정신적인 부분에만 몰두하고 있어 좌선 시 몸의 느낌을 많이 놓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반면 경행을 할 때는 발을 들고 옮기고 내릴 때 그 짧은 틈을 타 망상이 들어오는 듯합니다. 들고 옮기는 틈과 옮기고 내리는 틈 사이로 망상이 잘 파고듭니다.
수행 중 일상에서 현기증(현기증이 일어날 때도 정신 바짝 차리고 뚜렷하게 지켜보면 집중력이 생겨 고요한 느낌이 들기도 하여 조금은 재미있기도 합니다)과 건망증(무엇인지 느낌은 아는데 명칭을 떠올릴 수 없는)이 늘기도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수행은 매일 빼먹지 않고 하고 있는데 최근 집중도 많이 하고 활동량이 증가하다보니 식욕이 많이 당기는데 식사량 증가에 대한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두서없이 그냥 쓰다 보니 질문이라기보다 제가 경험 한 것들을 보고하는 형식의 글이 되었습니다. 막막하게 적어서 난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어떤 가르침이라도 주시면 감사히 받아들여 실천하겠습니다.^()^
< 답변 >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처음에는 혼란하다가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차츰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고요함은 혼란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깁니다. 고요함은 덤덤함으로 올 수 있습니다. 이때 덤덤함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고요함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고요함은 집중이 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고요함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노력과 알아차림이 약해지고 오직 집중만 커집니다. 그러면 졸음에 빠집니다. 수행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란 세 가지의 일정한 영역이 서로 유지될 때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많으면 균형이 깨져 바른 수행을 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균형이 바로 팔정도고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집중과 졸음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노력과 알아차림입니다. 이때의 노력은 더 미세한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친 대상에 익숙해졌다면 이때부터는 미세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노력과 알아차림을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이때는 대상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어남과 꺼짐이 매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집중이 되어 혼침이 온 상태에서 다시 바른 집중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이 순간에 노력과 알아차림이 다시 강화된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의 세 가지 조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지혜가 납니다.
집중의 상태에서 어떤 특정한 표상이 보이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이때는 표상을 따라가지 말고 ‘지금 표상이 나타났네’ 하고 단지 표상으로 알아차리십시오. 표상은 관념으로 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의 하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표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표상은 모양이라서 사마타 수행이지만 느낌은 실재하는 것이라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며 이러한 대상에서만 법을 보는 지혜가 납니다.
좌선 중에나 경행 중에 망상이 들어오는 틈을 발견한 것은 알아차리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망상을 할 때 망상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데 망상이 들어오는 틈을 발견했다면 집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호흡이 일어남과 꺼짐만 알아차리지 말고 ‘일어남, 꺼짐, 쉼’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보통 일어남과 꺼짐은 움직임이 분명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지만 꺼짐의 끝 부분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짧은 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바로 쉼에서 망상이 들어오고 졸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임이 없는 쉼의 부분을 놓치고 않고 알아차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경행을 할 때는 오른 발, 왼발의 움직임만 알아차리지 말고 오른 발을 들려는 의도와 내려놓으려는 의도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들어올릴 때의 가벼움과 내려놓을 때의 무거움을 느끼는 것도 망상이 들어오지 않고 알아차림을 지속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발이 닿았을 때의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을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특히 정지했을 때 돌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또 어느 방향으로 돌 것인가 마음을 내는 의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 뒤에 어느 발을 먼저 내디딜 것인가 의도를 내서 알아차리고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흥미를 느껴서 지루하지 않고 알아차림이 바르게 유지될 것입니다.
욕망은 음식을 먹을 때 많이 들어옵니다. 먹는 것을 시작할 때도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 하고 알아차리고 식사를 하십시오. 그리고 음식을 씹을 때 하나하나 알아차리고 씹으면 욕망으로 먹지 않아 과식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오래 씹으면 많이 먹지 않고도 충분히 영향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과식은 탐욕과 졸음의 원인입니다.
묘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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