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
노론이 한밤의 기습 날치기로 연잉군(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만든 지 한 달 반쯤 지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노론은 두 번째 정치일정을 시작했다. 사헌부 집의 조성복(趙聖復)이 상소를 올려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성복은 세제가 “서정(庶政)을 밝게 익히는 것이 당면한 급무”라면서 경종이 모든 국사를 처리할 때 세제와 그 가부를 상확(商確:서로 의논해 정함)하라고 주청했다. 조성복은 또한 이 일에 대해서도 “자지(慈旨:대비의 교지)를 청하라”면서 대비를 또 끌어들였다. 1년 전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장희빈의 명호(名號)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상소했을 때 ‘신자(臣子)가 어떻게 이런 말을 제멋대로 입 밖에 낼 수 있느냐’고 성토해 국문을 받고 죽게 만든 장본인이 조성복이었다. 신자 운운하던 조성복이 국왕의 왕권을 빼앗으려 나선 것이었다.
이 놀라운 상소에 경종은“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즉각 수락했다. 경종은 당일 저녁 비망기를 내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년 이래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며 “세제는 젊고 영명하니 만약 청정(聽政)한다면 국사(國事)를 의탁할 수 있고, 내가 편안하게 조양(調養)할 수 있을 것이니 크고 작은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재단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승지 이기익(李箕翊), 응교(應敎) 신절(申<6662>) 등이 즉시 청대해 반대했다.
경종의 친필.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글이다. |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고 춘추가 한창이시며, 또 병환도 없고 기무(機務)도 정체되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갑자기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신 등은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
서른셋의 국왕에게 스물일곱의 세제를 대리청정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기익 등은 “지금 대궐문이 이미 닫혔기 때문에 이처럼 고요하지만 조정이 장차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힘써 다툴 것이니 온 나라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예견했다. 노론은 세제 책봉 때처럼 저녁을 이용해 상소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소론도 무작정 당하지는 않았다. 좌참찬 최석항이 유문(留門:궁문 개폐를 막는 것)하며 입대를 요청한 것이다. 『당의통략』은 ‘승지 이기익이 깊은 밤이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최석항이 강요해 임금에게 아뢰자 특명으로 접견했다’고 전한다. 최석항이 눈물을 흘리며 환수를 호소하자 경종은 명을 거두었다. 소론은 연일 조성복을 공격해 진도로 귀양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종은 대리청정 명을 환수한 지 사흘 뒤 시·원임대신과 2품 이상 고위 신료, 삼사를 소집해 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느닷없는 명령에 소론과 노론 모두 당황했다. 경종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간의 정청(庭請:백관이 특정 사안의 전교를 기다리는 것)에도 경종이 명을 거두지 않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연명 차자를 올렸다. 이 소식에 놀란 소론 우의정 조태구가 선인문(宣人門)으로 달려가 청대를 요청했는데 승지 홍석보(洪錫輔)와 조영복 등이 ‘조태구는 탄핵을 받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면담 주선을 거부했다. 세제 책봉을 비판한 유봉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종이 “우상(右相)이 왔다고 하니 들어와 보게 하라”고 입시를 명했다. 승지들은 할 수 없이 만남을 주선했는데 영의정 김창집도 따라 들어가 조태구와 함께 명의 환수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리청정 명은 환수되었다. 『경종실록』 사관이 “이때 김창집·이건명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시(嘗試:속마음을 떠봄)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고 비판한 대로 노론이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만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었다.
경종을 쫓아내고 세제(연잉군)를 추대하려는 노론의 정치 행위에 반발이 일었다. 행 사직(行司直) 박태항(朴泰恒) 등은 상소에서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其心所在, 路人所知)’고 조소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론의 것이었다. 행사과(行司果) 한세량(韓世良)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라면서 “남의 신하가 되어서 감히 몰래 천위(天位:왕위)를 옮길 계책을 품었다”고 공격하자 승정원과 노론 대신들이 일제히 공격했고 경종은 그를 절도로 유배 보내야 했다. 국왕을 옹위하면 귀양 가는 상황이었다.
『당의통략』은 승지 홍석보가 “오늘 우상이 온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느냐”고 재삼 따져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경종이 대답하지 않자 대간에서는 ‘조태구가 내시와 통해 몰래 뵙기를 청했다’면서 ‘조태구와 내시를 처벌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경종은 “내가 진수당(進修堂)에 앉아 있는데 합문(閤門) 밖에서 길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을 뿐 내시는 죄가 없다”고 변명해야 했다. 경종은 여전히 노론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 1년(1721) 12월 6일 사직 김일경(金一鏡)을 소두(疏頭:상소의 우두머리), 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을 소하(疏下)로 한 연명 상소가 올라왔다. “강(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머리가 되는데···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무너짐이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신축소였다.
김일경 등은 “조성복이 앞에서 불쑥 나왔는데도 현륙(顯戮:공개처형)하는 법을 아직 더하지 아니하였고, 사흉(四凶:노론 4대신)이 뒤에 방자했는데도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임금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합니다…적신(賊臣) 조성복과 사흉(四凶) 등 수악(首惡)을 일체 삼척(三尺)으로 처단해 조금도 용서하지 마소서”(『경종실록』 1년 12월 6일)라고 했다.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 노론을 역당(逆黨)으로 모는 초강경 상소였다. 노론에서는 즉각 총 반격에 나섰고 승지 신사철·이교악 등이 ‘(김일경 등을) 엄하게 통척(痛斥)해 간사한 싹을 끊어 없애고 형벌을 쾌히 베풀어 나라 일을 다행하게 하소서’라고 주장했다. 대부분 김일경 등이 국문 받다 죽거나 절도에 유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경종은 ‘나의 천심(淺深)을 엿본다’고 꾸짖으며 승지들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켰다.
경종은 서소위장(西所<885E>將) 심필기(沈必沂)를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을 ‘간흉하고 윤리가 없으며 몰래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서 문외 출송하고 병부(兵符:군사동원패)를 빼앗아 소론 윤취상에게 주었다. 이홍술은 포도대장이던 작년 김창집의 사주를 받아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때려죽이고도 훈련대장으로 승진한 노론 무관이었다.
병조판서에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한 소론 최석항을 임명해 군사권을 모두 소론에게 넘긴 경종은 이조판서 권상유(權相游)를 남인 심단(沈檀)으로, 이조참판 이병상(李秉常)을 소두 김일경으로 삼아 인사권을 주었다. 은인자중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경종이 반전의 칼을 뽑은 것이었다. 후속 조치는 전광석화 같았다. 신축소의 소하(疏下) 박필몽을 사헌부 지평(持平), 이명의를 사간원 헌납(獻納), 이진유(李眞儒)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아 백관에 대한 탄핵권을 주었다. 예조판서 이광좌, 형조판서 이조, 호조판서 김연, 대사간 양성규, 도승지 이정신 등 소론들을 대거 등용해 정국을 순식간에 뒤엎었다. 이것이 소론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인데, 당일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공묵(恭默)하여 말이 없고 조용히 고공(高拱:방관함)해서 신료를 인접(引接)하여 더불어 수작하지 않고 군하(群下)의 진달하고 계품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니, 흉당(凶黨)이 오만하고 쉽게 여겨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질병이 있는가 염려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했으므로, 군하가 비로소 주상이 숨은 덕을 도회(韜晦:재덕을 숨기어 감춤)함을 알았다.”(『경종실록』 1년 12월 6일)
극적인 반전으로 경종의 친정시대가 열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