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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제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
(출전: 스피노자 <에티카/정치론>, 추영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자연 안에서 생겨나는 것 가운데 자연 자체의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언제나 같은 자연이며, 또한 자연의 힘과 그 활동하는 힘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그것에 따라 생겨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에로 변화하는, 자연의 여러 법칙과 여러 규칙은 항상 같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정신은 어느 때는 스스로 작용(행)하고, 어느 때는 작용을 받는다. 즉 정신은 충분한(타당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작용하고, 불충분한(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받는다.
모든 인간 정신의 관념은, 일부는 충분하고 일부는 기형적이며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런데 신이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한, 정신의 내부에 있는 충분한 관념은 신 안에서도 충분한 것이다. 다만 그 조건으로서, 신이 그 정신의 본질뿐 아니라 다른 사물의 정신도 자신 속에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
정신은 보다 많은 불충분한 관념을 가질수록 더 많이 다른 것에 의해 작용되고, 반대로 보다 많은 충분한 관념을 지닐수록 더 많이 스스로 작용한다.
신체에는 정신의 사색활동思索活動을 결정하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정신에도 신체의 운동과 정지 또는 다른 무엇을(그런 것이 있다면) 결정하는 능력이 없다.
(…) 정신의 사색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유의 양태이며 연장의 양태는 아니다. 즉 그것은 신체가 아니다. (…)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며 그것이 어느 때는 사유의 속성 밑에서, 어느 때는 연장의 속성 밑에서 파악된다. (…) 사람들이 신체의 이런저런 활동 근원을, 신체의 지배력支配力을 장악하는 정신에 있다고 말할 때, 자신들이 하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들 활동의 참된 원인에 무지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을 그럴 듯한 말로 자인自認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 정신의 여러 결정은 충동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정신의 결정 즉 충동과 신체의 결정은 본성상 동시에 일어나고 혹은 오히려 동일물이다. 그 동일물이 사유의 속성 밑에서 관찰되고 설명될 때, 우리는 이를 결의decretum라 부른다. 또 그것이 연장의 속성 밑에서 관찰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서 연역될 때, 우리는 이를 결정determinatio이라 부른다.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만 정신의 결의에 의해서 실행할 수 있다. (…) 어떤 것을 상기하거나 혹은 망각하는 것은, 정신의 자유로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정신의 능동은 오로지 충분한(타당한) 관념에서 생겨나며, 반대로 정신의 수동은 불충분한(타당하지 않은) 관념에만 의존한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바로 실제 현존하는 신체의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많은 다른 관념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그 많은 관념 가운데 어떤 것은 충분한 관념이며, 또 어떤 것은 불충분한 관념이다. 따라서 정신의 본성에서 생겨나고 정신을 최근 원인으로 삼으며, 최근 원인으로 말미암아 파악되어야 하는 모든 것은 충분한 관념이나 불충분한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야 한다. 그런데 정신이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 경우 정신의 작용은 당연히 수동적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동은 오로지 충분한 관념에서 생겨나며, 정신이 불충분한 관념을 가질 때에만 정신의 작용은 수동적이다.
어떤 사물도 외부로부터의 원인이 없다면 파괴되지 않는다.
실제 각 사물의 정의는 그것이 정의인 이상, 그 사물을 긍정하는 것이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는 사물의 본질을 정립하는 것이지, 반대로 본질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만을 바라보고 외부로부터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물 안에서 그 사물을 부정하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사물은 한쪽이 다른 쪽을 파괴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에 한해 대립적 본성을 갖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와 같은 것은 동일한 주체 내에서 양립할 수 없다.
각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
개개의 사물은 (개물의 차별성을 나타내주는) 양태이며, 이 양태에 의거하여 신의 속성은 일정하고 한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 각 사물은 자기를 파괴할 수 있거나 혹은 자기의 존재를 제거하려는 어떤 것도 자기의 내부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려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그러므로 개물은 가능한 한, 그리고 자기의 주체 안에 머무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
각 사물이 신의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사물 자체의 실제적인 본질이다.
(…) 각 사물이 단독으로 혹은 다른 것과 함께 무언가를 행하거나 추구하는 능력 및 노력은, 결국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능력 혹은 노력이며 사물 그 자체의 주어진 실제적인 본질이다.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제한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포함한다.
(…)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개체의 본성이며, 개체 자신의 내적 필연의 힘이요, 개체의 존재 근거인) 노력은 자체 안에 제한된 시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괴멸하지 않는다면 현존하는 것과 같은 능력에 의하여 항상 존속하기 때문에, 이 노력은 무한정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은 명료하고 확연한 관념을 갖고 있건, 혼란한 관념을 갖고 있건 자신의 존재 안에 무한정한 시간 동안 지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신은 자신의 이런 노력을 자각한다.
정신의 본질은 충분한 관념과 불충분한 관념으로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 관념이 충분하건 불충분하건 정신은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것도 어떤 무한정한 지속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 안에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정신은 신체의 변양(자극상태)의 관념을 통해 자신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정신은 자신의 노력에 관하여 의식하게 된다.
이 노력은 단지 정신에만 관계될 때 의지라고 하며,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 충동이라고 한다. 따라서 충동은 곧 인간의 본질이다. 그 충동의 본성에서 자기 보존에 필요한 많은 것이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진다. 즉 충동의 본성은 인간에게 자기 보존을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질이다. 다음으로 충동과 욕망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차이가 없다. 대체로 욕망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이 좋다고(선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의도하며, 혹은 충동을 느끼거나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며 욕구하고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좋다고(선하다고) 판단한다.
우리 신체의 존재를 배제하는 관념은 정신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관념은 오히려 정신과 대립한다.
우리들의 신체를 파괴하는 어떤 것도 동일한 신체 안에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사물의 관념은, 신이 우리의 신체의 관념을 갖는 한 신의 내부에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물의 관념은 우리들의 정신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 오히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실제 현존하는 신체의 관념이기 때문에, 우리 정신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신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념은 우리의 정신과 대립한다.
우리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고 감소시키며 촉진하고 억제하는 사물의 관념은, 정신의 사유하는 능력을 증대시키고 감소시키며 촉진하고 억제한다.
그러므로 (…) 이런 정신의 수동은, 우리에게 기쁜 감정과 슬픈(고통스러운) 감정(정서)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준다. 기쁨이란 정신이 좀더 커다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수동을 뜻하며, 슬픔이란 정신이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수동을 뜻한다. 또 즐거운(기쁜) 감정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때, 그것을 쾌감 혹은 상쾌라고 한다. 그리고 슬픔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경우, 그것을 고통 혹은 우울이라고 한다. (…) 인간에 대해 쾌감과 고통을 말할 때, 그것은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강하게 자극될 경우이며, 이와 반대로 상쾌니 우울이니 하는 것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동일하게 자극될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슬픔, 기쁨(즐거움), 욕망) 이외에 나는 아무런 기초 감정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감정은 위의 세 감정에서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관념은, 육체가 존재하는 동안에만 신체의 존재를 포함한다. 즉 우리 정신의 현재 존재는, 정신이 신체의 현실적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정신이 신체의 현존재의 긍정을 중지한다면, 즉시 정신의 현존재와 그 표상력은 소멸되고 만다. (…)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표상하려 한다.
(…) 정신이 우리 신체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할 만한 것을 표상하는 동안, 신체의 변양(자극상태)은 자기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는 양식에 따른다. 따라서 그동안 정신의 사유 능력은 증대되거나 촉진된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표상할 때, 가능한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해 주는 사물을 가능한 한 상기하고자 한다.
정신은 정신 자신과 신체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표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즐거움)이다. 증오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현실에서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반대로 증오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가 증오하는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이 만일 어느 때 두 개의 감정(정서)에 의해서 동시에 자극받는다면, 정신은 뒤에 그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의해서 자극받았을 때 다른 하나에 의해서도 반드시 다시 자극받게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의 신체가 두 개의 물체에 의해서 동시에 자극된다면, 정신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표상함으로 인하여 즉시 다른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표상하는 상은 외적 물체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신체의 흥분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만일 신체가 두 개의 감정에 의해서 이전에 한 번 자극되고, 그 다음 그중의 어느 것에 의해서 다시 자극된다면, 그때 신체는 언제나 다른 하나에 의해서도 자극된다. 이런 일은 정신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각 사물은 우연에 의해 기쁨과 슬픔 혹은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기쁜 감정 혹은 슬픈 감정상태에서 사물을 관상하는 것만으로, 그 사물은 결코 기쁨과 슬픔의 동력인이 될 수 없는데도 그것을 사랑하고 증오할 수 있다.
우리는 정신에게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게 하는 대상물과 어떤 것이 유사하다고 표상하는 것만으로, 비록 그것이 감정의 동력인動力因이 아니라 그 대상과 유사점만을 갖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할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언제나 슬픈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한 항상 우리에게 동일한 크기의 기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다른 것과 무엇인가 유사하다고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증오함과 동시에 사랑할 것이다.
이런 것은 (가정에 의하면) 실제 그 자체가 슬픔의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슬픈 감정상태에서 표상하는 한 증오한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크기의 기쁜 감정을 항상 우리에게 주는 다른 무언가와 유사한 것을 상상하는 한, 이전과 같은 크기의 기쁨을 느끼면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그것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두 개의 대립하는 감정에서 생겨나는 정신의 이런 상태를 마음의 동요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의 동요에 대한 관계는 마치 의혹의 표상에 대한 관계와 같다. 마음의 동요와 의혹 사이에는 다만 정도의 차이에 따른 구별만이 존재한다. (…)
인간은 과거나 미래의 사물의 표상상表象像에 의해서도, 현재의 사물의 표상상에서 받는 것과 같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정서)에 자극받을 수 있다.
(…) 신체의 변화상태, 즉 감정은 사물의 상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나 현재의 것이건 모두 동일하다. 이로 말미암아 슬픔의 감정은 그 상이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사물의 상이라 해도 불변이요, 동일한 것이다.
(…) 희망은 불안정한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기쁨은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결과를 주는 사물의 미래 혹은 과거의 상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공포란 역시 의심스러운 사물에 관한 상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슬픔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감정 안에 있는 회의적인 요소가 제거된다면, 희망은 안도가 되고 공포는 절망이 된다. 즉 그것은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희망하는 사물의 상에서 생겨나는 기쁨 혹은 슬픔이다. 그리고 환희는 우리들이 그 결과에 관해, 회의적으로 보았던 과거의 사물에 관한 상에서 의심이 사라질 때 생겨나는 기쁨이다. 낙담은 환희에 대립하는 슬픔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물이 부정(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슬퍼할 것이요, 반대로 사랑하는 사물이 보존(유지)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기뻐할 것이다.
자신이 증오하는 사물이 부정(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뻐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물이 기쁨이나 슬픔으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역시 기쁨과 슬픔으로 자극받을 것이다. 이들 두 감정의 강도强度로 말하자면, 사랑받는 사물이 받는 자극의 강약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자극의 강약도 규정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기쁨(즐거움)을 준다고 표상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자극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슬픔을 부여한다고 표상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증오로 자극받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기쁨과 슬픔을 부여하는 사람은, (…) 우리에게도 기쁨이나 슬픔을 준다. (…)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기쁨이나 슬픔을 부여하는 것으로 표상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사랑하거나 미워하게끔 자극받게 된다.
(…) 연민(동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일어나는 슬픔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우리는 타인에게 즐겨 봉사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호의라고 한다. 또 반대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한 증오를 적의(분개)라고 한다. (…)
자신이 증오하는 사물이 슬픔으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쁨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증오하는 사물이 기쁜 상태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감정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들 안에 대립하는 감정의 강약에 따라 그 강약이 규정된다.
이런 기쁨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마음의 내적 갈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가 증오하는 사물에 기쁨을 부여한다고 표상되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증오심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우리가 증오하는 사물에 슬픔을 부여한다고 표상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끔 마음이 자극받을 것이다.
이러한 증오의 감정 및 그것과 유사한 감정은 질투의 감정에 속한다. 따라서 질투는 곧 증오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역경을 보고 기뻐하며, 반대로 타인의 행복을 보고 슬퍼하는 경우에 한한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물에 기쁨을 준다고 표상되는 일체를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슬프게 만드는 것으로 표상되는 일체를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들이 증오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면, 우리들이 표상하는 모든 것을 그 증오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증오하는 사물에게 기쁨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 자기 자신에 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거만(교만)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신착란의 일종이다. (…) 거만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즐거움)이다. 다른 사람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과대평가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과소평가(경멸)라고 한다.
우리와 유사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런 감정(정서)도 갖지 않았을 경우, 그것이 무엇인가의 감정에 의해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유사한 감정에 의해서 자극된다.
감정의 이런 모방이 슬픔과 관계할 때에는 연민(동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모방이 욕망과 관계할 때에는 경쟁심(대항심)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쟁심은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와 닮은 다른 것이 동일한 욕망을 갖는다고 표상하는 데서 우리 내부에 생겨나는 욕망이다.
우리는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것을 그 불행에서 해방해주려고 가능한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에서 생기는, 그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의지나 충동은 자비심이라고 일컬어지며, 따라서 이 자비는 동정에서 생겨나는 욕망일 뿐이다. (…)
우리는 기쁨을 촉진하려는 것으로 표상되는 모든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는 기쁨에 모순되거나 혹은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을 멀리하거나 부정(파괴)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표상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스스로 행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을, 우리는 행하기를 거부(혐오)한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어떤 것을 스스로 행하거나 중단하거나 하는 노력은 야심(명예욕)이라고 한다. 특히 자신이나 타인에게 끼칠 손해를 알면서도 어떤 것을 행하거나 중단하는 노력을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닐 때 그와 같은 노력은 보통 정중함이라고 한다.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 타인의 행위를 표상하는 데서 일어나는 기쁨을 나는 칭찬(찬미)이라고 한다. 반대로 같은 사람의 행위라도 우리가 그것을 싫어할 때 느끼는 슬픔을 비난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고 표상하는 어떤 일을 한다면, 그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자극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을 기쁨의 원인으로 자각할 것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쁨으로 고찰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타인에게 슬픔을 준다고 표상하는 어떤 일을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슬픈 것으로 고찰할 것이다.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며 미움(증오)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므로, 이런 기쁨과 슬픔은 사랑과 미움의 종류에 포함된다. (…)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명예라고 하며, 이것과 대립되는 슬픔을 치욕이라고 한다. (…) 내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나는 자기만족이라 하며, 그것과 대립되는 슬픔을 후회(회한)라고 한다. (…)
만약 우리 자신이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한다고 표상한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강하게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할 것이다. 또 거꾸로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혐오하거나 혹은 반대를(우리가 미워하는 것을 그가 사랑함을) 표상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느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오로지 혼자서 소유하며 기뻐한다고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가 그것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사랑할 때,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려고 가능한 한 노력한다.
사랑받는 것이 우리를 향해 자극되어 있다고 표상하는 그런 감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큰 명예를 느낄 것이다.
만일 자기로부터 사랑받는 대상이 다른 사람과도 애정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도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표상한다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증오를 느끼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
사랑받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결합되어 있는 증오를 우리는 질투(시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질투는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작용하는 데서 생겨나며, 이것은 그가 질투하는 다른 사람의 관념을 동반하는 마음의 동요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 미움(증오)의 강도强度는 기쁨의 강도에 비례한다. (…)
언젠가 자신이 즐거웠던 것을 상기하는 사람은, 처음 그가 즐겼던 때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 그것을 누리려고 한다.
슬픔이 사랑의 부재와 관계한다면 사모(동경)라고 한다.
슬픔이나 기쁨에서, 혹은 증오나 사랑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그것에 대한 감정(동요)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커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증오하여 결국 사랑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사랑과 증오의 원인이 동일하다면, 그는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큰 증오를 느낄 것이며, 이 증오는 이전의 사랑이 더 큼에 따라 그만큼 더 클 것이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더 커다란 화가 닥쳐올 염려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법칙에 따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려고 할 것이다.
(…) 하고 싶은 것을 욕구하지 않거나, 또는 하고 싶지 않는 것을 욕구하려는 감정을 우리는 겁이라고 한다. 따라서 겁은 일종의 공포이다. (…) 이때 만일 두려워하는 그 해악이 치욕이라면, 사람들은 그 겁을 수치라고 한다. 만일 미래에 닥쳐올 해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별개의 해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제되고, 그 결과 자기의 의욕하는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그 두 해악이 매우 크다면 그런 두려움을 우리는 공황(당황)이라 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증오받을 아무런 근거 없이 증오받는다고 표상한다면, 오히려 자신을 증오하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증오한다고 표상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상대가 자신을 증오한다고 표상하는 한 상대를 증오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도 그는 상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증오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 하는 노력을 우리는 분노(노여움)라 한다. 반대로 가해진 해악에 보복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복수라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이유와 근거 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표상한다면, 그도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에 의해서든 명예에 기대해서든 어떤 사람에게 은혜(선행)를 베푼 사람은, 만일 그 은혜가 보람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슬픔을 느낄 것이다.
증오는 증오의 보복으로 인하여 증대되며 반대로 사랑으로 인하여 제거될 수 있다.
사랑에 의해서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뀐다. 그때 이 사랑은 증오가 선행되지 않았을 때보다도 한층 더 크다.
누군가가 만일 자기와 유사한 타인이 마찬가지로 자기와 유사하며 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한다고 표상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주는 사람을 증오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과 계급이나 민족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계급과 인종이라는 보편적인 명칭 아래에 속하는 그를 원인으로 의식할 만한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 자극을 준 그 사람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이나 인종의 모든 것까지도 사랑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어떤 다른 화를 당하게 된다고 표상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은, 반드시 마음의 슬픔을 동반한다.
사랑과 증오, 예를 들면 베드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증오가 포함하는 슬픔 및 사랑이 포함하는 기쁨이 다른 원인의 관념과 결합한다면 사랑과 증오는 소멸된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두 감정의 유일한 원인이 아님을 우리가 표상할 때 두 감정의 힘은 감소된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표상하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필연적이라고 표상하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보다 강해야 된다.
자유롭다고 표상된 것은 다른 것 없이 그 자신의 힘에 의해서 지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기쁨이나 슬픔의 원인이라고 표상된다면 바로 그 자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
모든 존재물은 우연으로 말미암아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연으로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길조 혹은 흉조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런 전조는 그것이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인 한, 기쁨이나 슬픔의 원인이기도 하다. (…) 우리는 어떤 것을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는 한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
서로 다른 인간은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서로 다른 방법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자극될 수 있으며), 동일한 인간도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서로 다른 때에 다른 방식으로 느껴질(자극될) 수 있다.
(…) 후회란 원인으로서의 자기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며, 자기만족이란 원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
우리가 이전에 다른 대상물들과 동시에 보았던 어떤 대상, 또는 다른 많은 것과의 공통점 이외에 아무런 특징도 갖지 않는 것으로 표상되는 대상은, 어떤 개별성을 갖는다고 표상하는 대상에 대해서만큼 계속해서 고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의 변화상태(자극상태), 즉 개체에 대한 표상은 다만 그것이 단독으로 정신에 머물고 있는 한 경탄이라 한다. 또 만일 그것이 우리의 무서움에 의하여 야기된다면 공황이라 한다. (…) 우리가 경탄하는 대상이 인간의 총명함이거나 근면이거나 혹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이라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경탄을 우리는 존경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의 노여움이나 질투에 대한 놀라움(경탄)은 전율이라 한다. (…) 그리고 경탄이나 존경에 결부된 이런 사랑은 헌신이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미움ㆍ희망ㆍ안도 혹은 어떤 다른 감정을 놀라움(경탄)과 연관지어 파악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일상적인 어휘에 의하여 습관적으로 표시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경탄(놀라움)과 대치되는 감정은 경멸이다. (…) 조소(조롱)는우리가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경멸에서 생겨난다. (…) 모멸은 우둔함에 대한 경멸에서 일어난다. 결국 우리는 사랑ㆍ희망ㆍ명예 그리고 다른 감정을 경멸과 결부하여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또한 다른 여러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력을 잘 생각할 때 스스로 기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력을 좀더 분명하게 표상하면 할수록 정신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
이 기쁨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다고 표상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욱 커진다. (…) 게다가 그 기쁨은 그 자신의 관념을 동반한다. 이 사실로부터 그는 그 자신의 관념을 동반한 보다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된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활동 능력을 긍정(정립)하는 것만을 표상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의 노력이나 능력은 정신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런데 정신의 본질은 정신인 것과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고, 정신이 아닌 것과 정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이 가능한 표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신의 활동력을 긍정하거나 혹은 정립定立하여 주는 것뿐이다.
정신은 자기의 무력함을 표상할 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이 슬픔은 자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표상한다면 더욱 증대된다.
자기가 약하다는 관념을 동반하는 이 슬픔은 겸손(비하)이라고 한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은 자기애 혹은 자기만족이라고 한다. (…) 인간이 자신을 고려해봄으로써 최고의 기쁨을 얻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자기 안에서 관찰할 때이다. (…)
인간은 자기와 동등하지 않은 자의 덕을 질투하지 않는다.
질투는 증오 자체이거나 또는 슬픔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활동 능력이나 노력을 저해하는 감정이다. (…)
기쁨ㆍ슬픔ㆍ욕망 및 이들로부터 형성된 마음의 동요와 같은 또는 이들로부터 파생된 사랑ㆍ증오ㆍ희망ㆍ공포 등의 모든 감정은, 우리를 자극하는 대상의 종류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여기서 형성되거나 파생되는 감정은 수동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 한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작용을 받는다. (…) 따라서 각자의 수동의 본성은 우리를 자극하는 대상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 두 기쁨에 대한 감정의 본성은 상이한 두 원인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대상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감정은, 다른 원인에서 생겨나는 슬픔과 본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ㆍ증오ㆍ희망ㆍ공포ㆍ마음의 동요 등에 관해서도 같은 경우가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기쁨ㆍ슬픔ㆍ사랑ㆍ증오 등과 같은 모든 감정의 종류도 우리가 느끼는 대상의 종류만큼 많아야 한다. (…)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감정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으로 탐식ㆍ폭음ㆍ색욕ㆍ탐욕 및 명예심을 들 수 있다. 이들 감정은 사랑이나 욕망으로 설명되는 개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어떤 개인의 감정도 다른 개인의 감정과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 차이는 한 인간의 본질이 다른 인간의 본질과 얼마나 다른가에 따라 그만큼 커진다.
비이성적인 동물의 감정과 인간 본성의 상이점은, 동물의 본성과 인간 본성 사이의 차이점에 따라 결정된다. (…) 그러므로 각 개체는 자기의 본성에 만족하여 생존하면서 본성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각 개체가 만족하여 생존하고 있는 이 삶과 이 즐거움은 각 개인의 관념이나 정신에 불과하다. 이로써 어떤 개체의 즐거움이 다른 개체의 즐거움과 본성상 일치하지 않는 정도는, 바로 한 개체의 본질이 다른 개체의 본질과 상이한 정도에 대응된다. (…)
수동적인 기쁨이나 욕망 이외에,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함으로써(능동적으로) 우리에게 관계하는 기쁨과 욕망의 감정이 있다.
(…) 정신은 명료하고 판명한 관념을 가질 때나 혼란한 관념을 가질 때나 똑같이 자기의 존재에 머물기를 고집하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을 우리는 욕망이라고 한다. 따라서 욕망은 지적 인식을 하는 우리에게, 즉 스스로 활동하는 우리에게 관계하고 있다.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정신에 관계되는 감정은, 모두 기쁨이나 욕망에 관계하는 감정이다.
모든 감정은 욕망이나 기쁨이나 슬픈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 그런데 슬픔은 정신의 인식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한다. 따라서 정신이 슬퍼하는 한 인식력 즉 정신의 활동력은 감소되거나 억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슬픈 감정도 스스로 활동하는 정신에 귀속할 수 없으며, 다만 기쁨과 욕망의 감정만이 스스로 활동하는 정신에 관계된다.
지적 인식을 하는 경우의 정신에 귀속되는 감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활동을 나는 정신력精神力(=知力)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정신력은 용기와 관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개인이 다만 이성의 명령에 따라 각자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달리 관용은 개인이 다만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타인을 돕고, 그 사람과 우정의 유대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나는 용기(의지력)라 하고, 타인의 이익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관용(아량)이라 부른다. 따라서 절제ㆍ금주ㆍ위기 상황에서의 침착함은 용기(의지력)의 종류에 속한다. 한편 겸손과 자애 등은 관용의 일종이다.
감정은 대단히 많은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또 이로부터 많은 변화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 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의 정의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 나는 여기서 욕망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모든 노력ㆍ잠재적 충동ㆍ의지로 해석한다.
기쁨(즐거움)은 인간이 보다 적은 완전성에서 보다 커다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슬픔(고통)이란 인간이 보다 커다란 완전성에서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경탄(놀라움)이란 정신이 한 대상에 강하게 얽매여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경멸輕蔑이란 정신을 거의 감동시키지 못하는, 그렇기에 정신이 그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안에 있지 않는 것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어떤 사물의 표상이다.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미움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애호(호감)는 우연히 기쁨의 원인이 되는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혐오(꺼림)는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는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헌신이란 우리가 경탄하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조소(조롱)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에 내재하고 있음을 표상할 때 생겨나는 기쁨이다. (…) 이 기쁨은 순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희망이란 불안정한 기쁨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긴다.
공포(무서움=두려움)는 불안정한 슬픔이다. 즉 그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난다.
안도(안심)는 하나의 기쁨이다. 즉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나 과거의 존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나는 기쁨이다.
절망이란 하나의 슬픔이다. 즉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나 과거의 존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다.
희열(환희)는 공포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의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회한(낙담,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슬픔이다. 즉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의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동정同情은 우리가 동류라고 표상하는 다른 사람에게 당면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동정과 자비 사이에는, 동정은 개별적인 감정을 고려하지만 자비는 동정의 습성을 고려한다는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거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호의好意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분노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에 대한 증오이다.
과대평가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과소평가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증오)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하는 것이다.
질투(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보고 슬퍼하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경우의 마음이다.
자비심이란 타인의 행복을 보고 기뻐하며,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보고 슬퍼하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경우의 사랑이다.
자기만족은 사람이 자기 자신 및 자기의 활동을 고찰해 보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이다.
비하(겸손)란 사라미 자기의 무능이나 허약을 고찰해 보는 데서 생겨나는 슬픔이다.
회오悔悟(=후회)란 정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수행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거만(교만)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당한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 이런 감정에는 대립 감정이 없다.
자비自卑(소심)는 슬픔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간주)하는 것이다. (…) 보통 우리는 거만과 대치하는 것으로 비하를 꼽는다. (…) 실제 이런 감정, 즉 비하와 자비는 매우 희소하다.
명예名譽(=허영)는 하나의 기쁨이다. 즉 누군가가 칭찬하여 줄 것으로 표상되는 행위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치욕恥辱이란 하나의 슬픔이다. 즉 어떤 사람에게 비난받을 것으로 표상되는 행위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치욕이란 부끄러운 행위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다. 한편 수치는 치욕에 대한 불안 및 공포로, 그가 욕된 것을 범하지 않도록 억제해주는 감정이다. 수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파렴치가 대치된다.
사모思慕는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충동이다. 즉 그와 같은 욕망은 존재물의 회상에 의하여 유지되며, 또 그 존재물의 존재를 배제해 주는 다른 것을 회상할 때 억제된다.
경쟁심(대항심)이란 다른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표상될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다.
사의謝意 혹은 감사란, 우리에게 한결같이 사랑의 감정으로 은혜(선행)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욕망 혹은 사랑의 열의이다.
친절이란 우리가 동정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려고 하는 욕망이다
분노(노여움)란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다.
복수란 서로 증오하기 때문에 같은 감정에 자극되어, 자기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잔인 혹은 잔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동정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 잔인은 온화함과 대립된다. 온화함은 수동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노여움과 복수를 억제하는 마음의 힘이다.
겁(근심)이란, 우리가 무서워하는 보다 커다란 화를 보다 작은 화로써 회피하려는 욕망이다.
용감(대담)이란, 자기의 동류들이 떠맡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애써 위험을 무릅쓰고 추구하려는 욕망이다.
소심이란 자기의 동류가 대담하게 감행하는 위험을 보고 겁을 내어,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려 하는 인간에 대한 말이다.
공황(당황)이란 무서운 화에 대한 놀라움 때문에 화를 피하려는 욕망이 억제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 공황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해악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아연케 하거나 동요케 하는 공포이다.
공손함 혹은 순종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려고 하며, 또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욕망이다.
명예욕은 명성(명예)을 얻으려는 나머지 절제를 잃은 욕망이다. (…) 이런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탐식貪食(=포식)이란 미식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 혹은 사랑이다.
폭음暴飮이란 음주에 대한 절제 없는 욕망이요, 사랑이다.
탐욕貪慾이란 부富에 대한 절제를 잃은 욕망이며 사랑이다.
색욕色慾(=육욕)이란 이성과 교제하려는 욕망이며 사랑이다. (…) (명예욕, 탐식, 폭음, 탐욕, 색욕) 이 다섯 개의 감정에는 반대 감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