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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목적이나 용도에 대한 것은 앞서 ‘스에즈 운하 통과’에서 적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 개의 운하 가운데 이번 회에서는 파나마(Panama) 운하와 킬(Liel)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기록이다.
* Panama 운하(運河)
이 운하는 1979년 2월 18일, 신조선 Royal Lily호 선장으로 승선 중 처음으로 통과했다. 신조선으로 이 운하를 처음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하기 위해 크리스토발(Cristobal)항에 도착하여, 운하 당국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선박의 크기를 다시 측정해야 했다. 즉, 운하통과료를 계산하기 위한 것이다. (Royal Lily호에 대해 상세한 것은 ‘신항해일지_27과 28 : 나가사키의 추억’을 참조하시기 바람)
운하 통과료는 선박의 크기보다 용도, 즉, 컨테이너선은 20피트 컨테이너 개수. 여객선은 여객의 침대수, 일반 화물선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용적 등 영업에 해당 되는 부분만 계산해서 요금을 매긴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 통과하는 선박은 그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이다.
빨강선 내가 운하구역
파나마(Panama) 운하! 수에즈(Suez)운하가 ‘힘(力)’으로 건설한 것이라면 이 운하는 ‘꾀(技)’로 만들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가장 기초적인 자연의 원리를 이용하여 이렇듯 교묘한 운하를 만든 것이다. 역시 과학을 일찍 발견한 서양인들의 예지가 놀라웠다.
그 육중한 선박을 들어 올리는데 이용되는 물의 흐름을 조정하는 수문(水門)을 열고 닫는 데 필요한 동력은 단지 45마력. 그리고 갇힌 갑실(閘室)에서 선박을 끌어 이동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은, 개통 초기에는 말이 끌었다고 했으나,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의 작품으로 당시 시가로 대당 100만달러나 한다는 4대의 특수차량이 맡고 있었다. 지역은 분명히 파나마인데도 운하의 운영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다. 마냥 신기할 뿐이다.
갑실내에서 선박을 끄는 100만 달러짜리 차량
선박이 뉴욕에서 이 해협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하는데 운하를 이용하면 거리가 8,500km 정도인데, 기존 방식대로 남미의 최남단 칠레의 혼곶(Cape Horn)으로 돌아간다면 거리가 두 배가 넘는 21,000km에 달한다. 우리의 경우도 미국 플로리다주로 가야 하는데 이 운하가 없다면 남미 끝을 돌아가야 했다.
파나마운하의 효용(빌려온 사진)
대서양과 태평양을 파나마 지협을 거쳐 연결하는 이 운하는 태평양의 Balboa에서 대서양의 Colon에 이른다. 길이 82km, 평균수심 13.7m이상. 폭 30-90m. 수면은 해발 26m. 수문은 상하 각 3개씩이었다.
이 운하는 스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 기술자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가 당시 콜롬비아(Colombia)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운하회사를 설립하고 프랑스 정부의 협조로 1883년에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스에즈운하 건설로 요즘 말로 하면 꽤나 재미를 봤는지 이 운하 건설도 착수했던 모양이다.
당시 세계 여론은 수에즈운하 개통의 기술 경험을 가졌기에 파나마 운하도 문제없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워낙 난공사인데다 적도 부근 열대지역의 극심한 더위와 말라리아, 황열병 같은 전염병과 자금고갈 등으로 22,000여 명의 인부들의 사망자를 내면서 결국 프랑스는 9년 만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책임자인 레셉스는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하여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늘그막을 비참하게 지내며 죽었다고 했다.
추측컨대 당시는 허가 같은 것은 형식적이었고 그냥 무력으로 정벌하는 식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들 정복자들은 병력과 무기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말라리아, 뎅기열, 황열병 등으로 무장한 '모기' 군단 앞에서는 그저 속수무책이고 무력할 뿐이었다. 결국 '모기' 앞에 무릎을 꿇고 중도에 퇴각했다. 모기는 그렇게 지상의 권력과 경제적 패권을 이동시켰다.
최초 건설 당시의 사진(인터넷에서)
그 후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으로 인하여 이 운하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당시 미국의 T. 루즈벨트 대통령이 건설의 견인차 역할을 함으로서 1903년 Panama의 독립과 아울러 파나마와 조약에 의해 1904년에 건설에 착수 10년만인 1914년 10월 10일에 역사적인 개통을 보았다. 이 운하를 위해서 미국이 파나마란 국가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82km 길이의 이 뱃길은 1914년 8월에 개통되었으며 건설 후 10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도전적인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으며, 미국 토목 학회에서는 ‘현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고 있다고 한다.
이 운하는 갑문식(閘門式) 운하이다. 이 갑문식은 어디에서 처음 발견됐는지는 불명하나 대체로 15세기에 이탈이리 밀라노 부근에서 고안, 채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운하를 중심으로 양쪽 8km씩을 운하지대로 설정하고, 이 지대와 운하의 관리를 미국이 갖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운하지대의 사용권과 행정권을 미국은 일시금 1000만달러와 연간 25만달러(1939년부터 43만달러, 1955년부터 193만달러로 증액)를 지급하였으나 2000년에는 파나마로 이양되었다.
재미난 것은 이 운하 건설을 최초로 착수한 레셉스가 인부들이 전염병 때문에 실패한 반면, 미국이 건설하는 기간에 말라리아와 황열병의 전염매개체가 모기임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치료백신이 발명됨에 따라 인부들이 병으로부터의 손실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갑문식 운하를 통과하는 과정을 관광하는 코스가 있고, 관람석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를 지나갈 때 가장 비싼 통행료를 낸 선박은 259m 길이의 디즈니 매직 크루즈 라이너로, 2008년 5월 16일의 일이었다. 이 배는 331,200$를 지불했다. 가장 적은 통행료는 미국 모험가 리처드 핼리버튼이 1928년 파나마 운하를 수영하여 지나갈 때 낸 돈 39센트였다고 기록상에 나와 있다. 지금은 년간 수익금은 파나마의 연간 GDP의 약 6.5%에 기여한다고 하니 가히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선박들의 대형화가 계속됨에 따라 운하도 확장, 2014년부터는 선폭이 49m의 대형선박도 이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New Panamax’라는 이름으로 최대 통과 가능한 선박의 크기를 일컫기도 한다.
현재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은 지구 전체 물동량의 4%에 이르며, 이중 3분의 2는 미국 동부를 오가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국과 일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 킬 운하(Kiel Canal)
이 운하도 유럽쪽에서는 유명하기도 하고 중요한 운하다. 마침 이곳도 한번 왕래한 적이 있기에 적어 두고자 한다.
운하는 총 길이 98km (61마일)의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자리한 운하로 북해 엘베강 입구의 브룬스뷔텔에서 발트해 연안의 킬(Kiel)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1895년 개통되었다.
빨간선 안이 운하부분
킬 운하는 발트해에서 북해까지 유틀란트반도를 빙 돌아 운행하는 것보다 평균 280mile을 단축시키고 있다. 이 운하는 항해 시간만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한 폭풍도 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인공 수로이다. 쉽게 말하면 평평한 땅을 파서 만든 도랑인 셈이다.
독일의 북쪽에는 유틀란트 반도가 있는데, 이곳은 덴마크 땅인데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영향권이기도 하고 좁은 수로가 복잡하다. 발트해의 관문이 아닐 수 없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운하이다.
1987년 9월 12일 불가리아의 불가스(Burgas)항 입항에서부터 시작된 공산권 기항이 알바니아를 경유하여 중남미의 큐바(Cuba)까지 갔다. 공산국가 사이에는 무역 역시 개인사업이 아닌 국가가 관장하고 있으므로 구상무역(求償貿易) 방식인데, 담당자가 모두 공무원이라 개인적으로는 이해 관계가 없음으로 아무도 책임을 가지고 일하지 않는다.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도리가 없다.
당시에는 공산국가에 기항(寄港)하는 경우 선원들은 가까운 곳의 한국 영사관에서 허가를 받야야 했고, 후에 감상문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었던 네 나라, 불가리아, 알바니아, 큐바, 북한 중 북한을 제외한 3개국을 거쳤다. 이때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자유란 합법적으로 개인이 능력껏 일하고 벌어서, 쓰고 싶을 때 마음껏 쓸 수 있으며,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곳이 공산사회이다. 국가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사회였다. 게으름뱅이가 딱 살기 좋은 곳이다.
불가스항에 입항부터 12월 11일 큐바를 떠날 때까지 3개월 동안, 물론 상륙을 금지 당하는 등 마치 억류라도 된 듯 부자유스러운 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필요한 식자재(食資材), 특히 신선한 야채를 구할 수가 없는 것이 큰 문제이기도 했다.
12월 11일 큐바를 떠나 발틱해의 라트비아의 리가(Riga)항으로 가게 됨에 따라 독일의 Keil운하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운하 통과는 안중에도 없었고 입구에 있는 독일 브룬스뷔텔( Brunsbuttel)항의 입항이었다. 공산권 국가에서 처리가 어려웠던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23일 15:00시 Elbe강 Pilot가 승선.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개 속에서 Lock(갑문)을 지나 항내에 진입했다. 물론 Lock측의 레이더(Radar)에 의한 유도와 Pilot의 능숙한 교감의 덕분이다만 찬 바람 속에서도 땀이 난다. 이 운하 입구의 브룬스뷔텔( Brunsbuttel)항이다.
접안(接岸)하기가 바쁘게 급유, 선원 교대, 주부식 구입, 선용금 등이 가능했다. 역시 앞선 선진국이라 모든 일이 시원스럽게 일사불란하게 처리되었다. 큐바 출발전에 미리 편지로 연락해둔 배추를 비롯한 신선한 식품들이 순식간에 구입됐다. 선용금 14,000달러가 만져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외상처리도 가능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5DM(독일마르크)짜리 동전 하나로 부두의 전봇대에 달려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부산의 집까지 바로 통화가 가능했다. 너나 없이 잠결의 아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의 근심까지 밀어내고 용기를 더해주었다.
여름철 운하를 지나는 선박들(빌려온 사진)
그리고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이 운하에 들어섰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제서야 ‘킬 운하를 지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북위 54도의 고위도 지방이었지만 잔잔한 호수를 지나는 듯한 조용함 속에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육지의 성탄절 전야의 모습들이 진한 향수(鄕愁)를 자아내게 했다. 그림 같이 눈덮힌 양옥(洋屋)들과 그 속을 밝히는 불빛. 800년 묵었다는 교회에서도 불을 밝히고 Tree를 만들었다. 이러한 운하의 건설을 발상하고 건설한 게르만 민족의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면을 느낄 수 있다. 한 밤중에 지났기에 원경(遠景)은 볼 수 없었지만 불빛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근경(近景)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지만 그 밖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던 탓이었으리라….
한폭의 그림같은 물길(빌려온 사진)
안내해준 도선사(Pilot)가 떠나면서 ‘bon voyage(안전 항해 하세요)’와 ‘Marry Christmas’라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Rotten X-mas Eve(썩을 놈의 성탄절 전야)’였다.
그러나 새로 구입한 주부식으로 훤해진 식탁이 유일한 위안이고 즐거움이었다. 새로 부임한 김X익 주방장은 Excelsior Reefer호 승선 때 수석 조리사였던 사람이다. 남은 기간 그의 성의를 기대해 보는 것도 희망이었다.
그리곤 해를 바꾸어 1988년 1월 3일 추위와 강풍으로 얼어붙은 발트해를 거쳐 라트비아의 Riga항을 거쳐 다시 이 운하를 되돌아 나왔다.
첫댓글 Panam(파나마)운하. Kiel(킬) 운하. 수에즈 운하
단어만 익히 알고 있었는데 늑점이님으로 인해 눈으로 보면서 간접여행을 하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친구 잘 둔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