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지 『좋은 생각』 2016년 10월호 ‘(특집) : 끝내지 못한 숙제’ ]
황혼길
“학력 무관, 경력 무관, 계약직 1년, 우대 조건. 단 54세 미만”
구인 정보를 검색하던 나는 또다시 맥이 풀렸다.
내가 10년은 젊어져야 그나마 1년 계약직에 지원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어쩌다 조건이 맞고 연봉도 괜찮은 곳을 찾아 연락했다.
서울 강남의 큰 빌딩 방재실 대리를 구하는데 ‘기술 자격증 소지자에 한함.’이었다.
나는 은퇴한 첫해에 열심히 공부해서 그 어려운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땄다.
“주 6일 근무고, 회사 근처에 살아야 합니다. 밤중에라도 비상사태가 생기면 급히 출근해야 하니까요.”
집에서 전철로 2시간 걸리는 출퇴근이야 감내하겠지만, 초등 동창인 아내와 단둘이 살면서 주말부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교차로>와 <가로수> 구인란을 뒤적거리다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보, 나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해도 괜찮겠어?”
“나는 상관없어요. 이 나이에 누구 눈치 보겠어요? 경비원도 직업인데.”
마침 집 근처에 자리가 있어 고민하다가 소개소에 연락했다.
이력서를 보내고 간곡히 부탁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로 월급은 140만 원인데 취직되면 소개비 14만 원을 선불로 달란다.
이틀 뒤, 소개소 안내로 그 아파트 입구에서 용역 회사 부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두 명이 더 있었다.
“이력서 가져오셨죠? 이리 주세요.”
얼핏 모두 동년배로 보였다.
샌들을 신은 키 큰 사람은 다리를 조금 저는 것 같았다.
작고 등이 구부정한 이는 힘든 일을 많이 한 듯 손이 거칠었다.
부장은 우리를 아파트 관리사무소 회의실로 안내했다.
“심삼일 씨는 경력이 화려한데, 일할 수 있겠어요?”
“아, 다 지난 일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해볼까 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이미 경비원 경험이 있는 듯했다.
등 굽은 박 씨 아저씨에게 한 시간 거린데 문제없겠느냐 물으니 자가용이 있어 괜찮다고 대답했다.
“여기는 한 명만 필요합니다. 낼모레 건너편 B 아파트에서 한 명 더 뽑아요. 다음 주에 저~기 20분 거리에 C 아파트가 있고요. 근무하긴 제일 나을 겁니다.”
부장은 우리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결정을 내렸다.
“여기는 박ㅇㅇ 씨가 나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B는 어느 분이 원하세요?”
이력서 주소를 봤으면 내 집에서 5분 거리인 줄 알 텐데 싶어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 가까워 B면 좋겠습니다.”
“아이고, 나는 바로 옆이에요.”
키 큰 샌들이 확실히 하겠다는 듯 점을 찍었다.
나는 3명 중 최하위인 느낌이 들어 귓불이 붉어지려 했다.
“그러면 생각해보고 연락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올 때만 해도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하리라 다짐했는데, 휑한 가슴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삼 일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다.
어쩌면 연락이 안 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다 버린 줄 알았던 자존심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다른 일을 하게 됐다며, 미안하단 말을 전했다.
“내가 부업 하면 되니 당신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림을 그리든지, 색소폰을 불어도 좋고.”
아내가 진지한 미소로 위로했다.
자신감 있는 체력만으로, 마음을 비우겠다는 결심만으로, 쉽게 얻어지는 일자리는 없을 터였다.
“글을 써 볼까 싶어, 여보. 당연히 벌이는 안 되겠지만 뭔가 남기고 싶어!”
세상살이에 휘몰려 잊어버렸던, 때 묻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컴퓨터에 ‘황혼길’이라는 작문 파일을 새로 만들었다.
2014년 11월
(이모작 인생 출발 후 두 번째 작성 수필)
첫댓글 멋진 인생을 위하여 파이팅!!
네, 난정 작가님. 격려 감사합니다. 파이팅~!
저는 이모작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것도 이제는 힘이 부쳐서
손을 놀까말까생각중입니다.
네, 뱃사공님. 그러시군요.
농사가 제일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