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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9일 공연
엘가 교향곡 1번
프루아사르 서곡
Grania and Diarmid 중에서 '장송행진곡', 'There are seven' (소프라노 협연: Madeleine Shaw)
위풍당당 행진곡 3번
- 3월 12일 공연
엘가 '제론티우스의 꿈' (테너: David Butt Philip, 메조소프라노: Sasha Cooke, 베이스 바리톤: Iain Peterson)
할레 합창단 및 할레 청소년 합창단
할레 오케스트라
지휘: 마크 엘더(Sir Mark Elder)
최근 며칠 사이에 맨체스터 브릿지워터홀에서 열린 두 개의 연주회에 다녀와서 감상 소감 남깁니다. 3월 9일~12일 사이에 브릿지워터 홀의 상주 오케스트라인 할레 오케스트라가 '엘가 페스티벌 주간'의 일환으로 세 번의 연주회를 주최했는데요, 저는 11일 공연(수수께끼 변주곡 해설 및 연주)는 참석하지 못하고 저 위의 두 공연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영국에 온 이상 영국의 국민작곡가 엘가의 음악, 그것도 영국 지휘자와 영국 악단 및 합창단이 영국 공연장에서 펼치는 엘가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 아니겠습니까ㅎㅎ 게다가 마크 엘더는 현재 엘가 해석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로 꼽히는 지휘자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죠.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저도 이번이 처음이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내한한 적도 없어서 그런지 실력에 비해 덜 유명한 것 같고, 다만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 바비롤리의 악단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뭐 크게 예외는 아니었고요. 근데 알고보니 생각보다 훨씬 유서가 깊은 악단이더라고요.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1,2위를 다툴 정도..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뿌리 깊은 라이벌 의식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게 개인적으로는 흥미롭네요ㅎㅎ)
여기서 잠깐 할레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훝자면요, 1858년 독일 출신 영국 귀화 지휘자인 찰스 할레에 의해 맨체스터에서 창립됐고 악단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20세기 초에 한스 리히터가 상임으로 할레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 때 바로 엘가의 교향곡 1번이 이 악단에 의해 초연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해체 위기까지 가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여러분 다 잘 아시는 존 바비롤리가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악단을 살려낸 것은 물론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1970년 바비롤리의 사후 로프란, 스크로바체프스키, 나가노로 이어지면서 명맥을 이어가지만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기도 하는 등 다소 지지부분한 상황에서 2000년 마크 엘더가 상임으로 부임하여 17년간 악단을 이끌어 오면서 다시금 바비롤리 시대 못지 않은 영광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연주곡이 엘가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두 번의 공연을 통해 실제 들은 할레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와 연주력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17년의 파트너쉽이 빚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지휘자의 리드에 완벽하게 반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제가 기억하기론 두 번의 공연에서 단 한치의 오차나 작은 실수 하나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실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 곡을 그냥 씹어 먹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금관파트의 강력한 사운드였는데 덕분에 그동안 잘 느끼지 못했던 엘가 음악의 강인한 측면이 부각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후술하겠지만 제론티우스의 꿈에서 악마들의 합창 장면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악기 배치는 소위 전통적인 유럽식 배치를 따라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지휘자 양옆으로 나누고 더블베이스를 악단 제일 뒤에, 팀파니를 제외한 타악기들을 가장 오른쪽에 놓는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다만 제가 4층 측면 치우친 자리에 앉아 악기 배치에 따른 효과는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 3월 9일 연주
연주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약 30분 동안 지휘자 마크 엘더와 평론가 피터 에인스워스가 엘가의 삶과 음악에 대해 토론하는 프리 콘서트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서로 처음 들은 엘가 음악이 뭐냐고 묻는 것에서 시작해서(둘다 수수께끼 변주곡이라고 답함), 엘가의 생애, 그의 음악에서 드러나는 이중성(화려함과 우울함), 교향곡 1번이 갖는 의의 등에 대해 심도있는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토론을 보면서 지휘자 마크 엘더 경은 나이(70세)에 비해 엄청 정정하고 유머감각도 갖춘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이하게도 1부 순서로 교향곡 1번이 먼저 연주되었습니다. 엘가의 교향곡 1번 연주 스타일은 굳이 거칠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자면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해석(바비롤리를 비롯한 영국 지휘자들이 주로 보여주는)과 곡의 구조적인 면을 파고드는 해석(예를 들면 시노폴리 등 주로 비영국 지휘자들이 보여주는)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날 연주에서 보여준 엘더의 해석은 양자를 훌륭하게 결합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 지휘자들의 전통을 따라 유연하면서도 무리하지 않는 템포로 자연스런 감정선의 굴곡을 만들어내면서도, 단단하면서도 깔끔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이 곡의 복잡한 텍스처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솜씨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전술한 금관군의 활약에 힘입어 다이내믹한 측면이 아울러 강조되면서 곡이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곡 시작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 곡이 이토록 익사이팅한 곡이었다니! 솔직히 개인적으로 사랑해마지 않는 교향곡 2번에 비하면 1번은 음반으로 들을 때는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곡이었거든요. 여기에는 이 곡의 초연 악단이라는 자부심으로 임했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자신감도 한 몫 했을 것 같습니다.
2부 연주에 앞서서 마크 엘더가 마이크를 잡고 특이한 연주곡 배치에 대해 잠시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곡을 1부에 연주해서 집중력을 환기시켜놓고 2부에는 엘가의 좀더 가벼운 곡들(하지만 결코 작품성이 떨어지지는 않는)을 배치함으로써 엘가 페스티발 주간에 걸맞게 축전적인 분위기를 내게 해보려 했다는 취지의 말이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도 나름 신선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루아사르 서곡은 엘가의 본격적인 첫 관현악 작품이라는데 저에겐 익숙한 곡이 아니어서 연주에 대해서는 그냥 좋았다는 표현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라니아와 디아미드 발췌곡에서는 장송행진곡에서의 서서히 고조되는 감정의 파고(마치 지크프리트의 장송곡을 연상시키는)의 효과적인 표현과, 이어지는 소프라노의 신비스런 독창과 이를 뒷받침하는 엘가의 섬세한 관현악법이 인상깊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지휘자는 이 곡 이후 휴지 없이 바로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넘어가게 했는데 이 연결이 또 기가 막히게 어울리더군요. 5개의 위풍당당 행진곡 중에서 3번은 아마 가장 드물게 연주되는 곡이 아닐까 하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을 보신 분들이라면 도널드 덕 나오는 노아의 홍수 시퀀스에서 이 음악이 효과적으로 쓰인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위풍당당 행진곡 세트 중 가장 다크하고 치열한 포스를 내뿜는 이곡에서 지휘자는 예의 강력한 금관군의 활약을 앞세워 화려하게 음악회의 마무리를 장식했습니다. 혹시나 앵콜곡 하나 더 하지 않을까 기대 해봤는데 결국 하지는 않았습니다.ㅎㅎ
- 3월 12일 연주
꽤 빈자리가 있었던 9일 연주회에 비해 이날은 전석 매진일 정도로 많은 청중이 왔습니다. 공연장 로비에서부터 바글거리는 사람들 보고 이게 단순히 일요일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제론티우스의 꿈이 영국에서 원래 인기가 많아서 그런건지 의아해했는데 공연 후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고 후자 쪽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클래식 청중들이 이 곡에 갖는 애착이 상상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옆자리에 앉았던 한 할머니는 아이패드로 가사 펼쳐놓고 열심히 듣고 있는 동양인이 신기하게 보였는지 공연 끝나고, 혹시 음악가냐, 이 곡에 대해 잘 아냐 등 이것저것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음악가는 아니고 원래 곡을 알고있긴 한데 직접 공연장에서 들은 건 처음이라고 답해줬더니 흐뭇하게 웃으시더군요.^^
연주는 뭐 9일 연주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홀을 꽉채우는 오케스트라와 합창, 그리고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 만으로도 이미 천국에 와 있는 기분..ㅎㅎ 영국 합창 전통의 저력을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는데요, 상당히 큰 사이즈의 합창단 규모에도 불구하고 비브라토 최대한 자제한 깨끗한 발성과 맑고 선명한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블렌딩이 유지된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아무리 큰 볼륨에서도 전혀 시끄럽지 않고 낭랑하게 울리는 합창소리를 들으면서 이전 예당에서 들었던 우렁차게 내지르기만 하고 찢어지는 듯한 합창소리(말러 8번)가 생각나서 잠시 안습..ㅠ(홀의 사운드 차이도 분명 많은 영향이 있었겠습니다만)
1시간 40분에 달하는 대곡을 들으면서 감동적인 순간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부분을 언급하자면 먼저 악마들의 합창 부분("Low born clods of brute earth)을 들고 싶은데요, 사실 평소 이 부분에 대해서 엘가는 악마적인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독기가 부족하고 점잖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이날 연주는 그런 생각을 기우로 여기게 될 만큼 악마적인 성격을 제대로 표현해줬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금관군과 타악기 주자들의 현란한 활약이 컸고요, 여기에 더해 표현력 풍부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발성의 합창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연출했습니다. 또 하나, 천상의 재판정 입구 다다랐을 때 울려펴지는 천사들의 합창 부분("Praise to the Holiest in the height")은 최대한의 볼륨으로 끓어오르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에 풀 오르간 사운드가 더해지며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압도적인 천상의 광휘를 표현해냈습니다. 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유명한 독창 "Softly and gently"에서는 메조소프라노의 노래가 약간 감정이 억제된 느낌을 받았는데, 재닛 베이커의 달콤한 음성(바비롤리 음반)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약간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곡의 내용적인 면을(연옥으로 제론티우스의 영혼을 인도하는 천사의 노래) 고려해보면 다소 담담하게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곡의 중간 딱 한번 핸드폰 소리가 울리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금방 끄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연주회에서 거의 유일한 옥에 티였습니다.^^ 그리고 곡 완전히 끝나고 지휘자가 아직 손을 내리지 않은 정적의 순간에 누가 뭘 떨어뜨렸는지 쿵 하는 소리가 나고 그것을 박수 개시로 오해한 몇몇 청중들이 박수를 치다가 멈추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곡의 여운이 좀 반감되서 아쉬운 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맨체스터의 청중들은 이 곡에 애정을 갖고 진지하게 감상에 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곡 끝나고 연주회장을 나가면서 연주가 'fantastic'했다고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쉽게 들리더군요. 그동안 잘 몰랐던 할레 오케스트라의 저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자국 음악가 프리미엄(?)을 통한 연주력 버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은..^^ 암튼 앞으로 경험하게 될 할레 오케스트라의 다른 연주들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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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인적으로 자국음악은 자국음악가들이 제일 잘한다는 명제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번 경우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반 피셔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내한해서 들려줬던 바르톡 연주의 충격적인 경험을 잊지 못하는데(연주자들이 자국 음악가의 곡을 온몸으로 체화해서 갖고 논다는 느낌) 이번에도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와! 선빈님~이런 수준 높은 리뷰를 전해 주시다니요! ^^ 할레 오케스트라 내한 하면 꼭 보겠습니다. 공연 전에 지휘자와 평론가가 토론하는 프리 콘서트 이벤트가 정말 인상적이네요 ㅎ 우리나라는 언제쯤 그런 시도가 가능할지 부럽기만 합니다~^^
선빈님 영국 가셔서 직접 뵙지 못하지만 논문 같은 훌륭한 리뷰를 볼 수 있어 한편으론 좋은걸요? 안부도 전하실겸 자주 올려 주세요~^^ 좋은 리뷰 정말 잘 보았습니다~^^
특히 엘가나 영국 작곡가의 곡 하면 꼭 보세요ㅎㅎ 근데 그러고보니 같은 브릿지워터 홀을 쓰는 BBC 필하모닉은 몇번 내한한 걸로 아는데 할레 오케스트라는 내한공연이 없었던게 좀 의아하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할레 오케스트라의 역사도 깔끔하게 되짚어주셔서 감사하고ㅋ 선빈님의 주관적 느낌과 객관적 후기가 잘 어우러져 글이 술술 읽히네요~ 또 써주시길 기다립니다.
마침 제 차에선 근 3주간 자넷 베이커의 바다풍경만 울려퍼지고 있죠. 이 봄과 어울리지 않아 바꿔야겠다 했는데, 제론티우스의 꿈으로 바꿔야겠습니다ㅎㅎ
그래요. 영국에 가심 엘가를 들으셔야죠 ㅋㅋ 런던에 갔을 때 영국 사람들의 엘가에 대한 지지를 보고 살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좀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역시나 제 고장에서 듣는 느낌이 특별하긴 한가 봅니다. 저도 듣고 싶네요~^^ 특히 바비롤리와 시노폴리를 결합한 해석이라니요? 대단한데요!!
할레오케스트라 이름은 마르크스 슈텐츠의 프로필에서 보았었는데 맨체스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였군요. 톤할레와 비슷해서 스위스에 있는 오케스트라인줄 ㅋㅋ 내한공연을 한다면 꼭 들어볼께요. 리뷰가 참 유익하고도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엘가가 영국에서 고평가 받는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저평가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론티우스의 꿈 같이 유명한 곡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는 걸 보면.. 화끈한거 좋아하는 한국 청중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런 걸까요?ㅎ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제론티우스의 꿈도 꼭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