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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2.8]
특집 동경대전에 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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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문
운암 변종제-신인간사 대표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지난 4월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경대전1,2』 주해본을 출간하였습니다.
주해본 출간과 함께 유튜브 등을 통해
‘동경대전’ 강의를 하면서,
천도교인과 동학•천도교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2004년 상반기에도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MBC 방송을 통해
동학 특강을 하여 많은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는 천도교를 일반에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주장’이라는
일부 공감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2004년 방송한 ‘우리는 누구인가’에서도 그러하였고,
이번에 출간한 『동경대전1,2』 주해본과
유튜브 강의를 통해서도,
기존의 동학•천도교의 교리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어
교인들과 교단 내 학자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운 대신사께서 겪은 ‘을묘천서(乙卯天書)’가
‘천주실의(天主實義)’라고 하는 주장.
둘째, 동학•천도교에서 모시는
‘한울님’을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
셋째, 용담유사의 한자 표기가
‘龍潭遺詞’가 아닌 ‘龍潭諭詞’ 라는 주장 등입니다.
첫 번째 ‘을묘천서’에 대한 사안은
동학을 창명한 교조 수운대신사님과 직결된 문제이고.
두 번째 ‘한울님 명칭’은
동학•천도교의 정체성과 직결된
신(神)에 관한 문제입니다.
또 세 번째 ’용담유사’에 대한 한자 표기 문제는
경전에 관한 것이 됩니다.
『신인간』에서는 문제가 되는 이 세 가지 내용 중
7월호 특집에서는 ‘을묘천서’에 대하여,
8월호 특집을 통해서는
교단 내외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동경대전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에 나설 예정입니다.
먼저 이번 특집 내용은
신인간사나 천도교중앙총부의 공식입장은 아니고
전문가들 각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또 우리 교단 내 일분에서도
이번 도올 깅용옥 교수의 주장에 대해
학자로서의 의견이고,
동학을 알리는 좋은 기회도 되니
비판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교단 내 학자들이
도올 선생의 주장과 배치되는 점을 더욱 연구하여
진실을 채움으로써
우리 교단의 외연 확장에 도움 되도록 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인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연속기획으로 마련한
신인간 7월호와 8월호 특집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 바라면서,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1,2』 주해본에 대한
여러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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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경대전에 관한 견해
도올 『동경대전』의 용어 문제
김용휘_대구대학교
“우리의 종교도, 우리의 학문도, 우리의 정치도,
우리의 과학도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이 새롭고도 진실된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은
바로 동학, 즉
조선의 학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동학은 유구한 조선문명의 총화이며
인류의 미래 이상이기 때문이다.”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 출간은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동학이 더이상 비주류 학문이 아니라
당당하게 주류적 학문으로 발돋움하게 하였다.
특히 『경진초판본』의 가치에 대한 평가라든지,
『대선생주문집』의 상세한 주해를 통해
수운 선생의 오리지날리티를
가감 없이 그리려 한 점도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동학을
동국의 학, 조선의 학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나아가 동학을
‘조선혼의 총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사상사에서
동학의 위치를 정당하게 자리매김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나는 2006년에 출간된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책세상)에서부터
‘동학’은 서학에 대응해서
상대적인 개념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동국의 학’이란 의미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우리학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 주장이 도올을 통해 이제 거의
정설로 인정받게 된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한다.
도올 선생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운 선생의 동학은
단순히 한국사상사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철학사에서도 동서를 회통시킨
탁월한 사상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잘못된 생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탁월한 사상체계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 대도의 실현은
서구적 신관의 파기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동학을 통해서 서양의 우월성,
과학과 자본주의의 예속된 서구적 근대를 넘어서
새로운 문명의 단초를 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도올 선생의 책을 읽고 우선 반갑고 기뻤다.
1997년 고려대 철학과의
한국철학 전공으로 들어가
동학으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했을 때 받은
무시와 편견이 다 씻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론 뭔지 모르게 불편하고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동학을 한국사상사에서, 아니
세계철학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 의의를 드러낸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동학을 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으로 접근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동학은 일차적으로
수운 선생의 종교체험으로 창도된 종교이기도 하다.
그 부분을 간과한다면
정작 수운 선생이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수도를 통한 ‘새로운 삶(新生)’으로의
혁명적 변화를 놓치게 되고,
단지 서구적 신관에 대한
대안적 신관과 해석체계로 머물게 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말이다.
특히 천도교에 언급한 부분은
사려깊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오로지 학문적인 측면에서
애정어린 비판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온당한 비판인지,
그리고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그것을 접했을 때,
천도교에 대한 오히려 잘못된 선인견을 주면서
천도교를 백안시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몇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한번 적어보겠다.
1. ‘한울님’ 용어에 대한 비판
도올 선생은 마치
천도교가 용어 사용을 잘못해서,
원래 수운 선생의 표현대로 하지 않아서
쇠퇴한 것처럼 비판을 하고 있다.
특히 ‘한울님’ 용어에서 가장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선생의 주장대로 ‘ᄒᆞᄂᆞᆯ님’이
원래 용담유사의 표현인 것은 맞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 표기로 하자면,
하늘님, 또는 하느님 하는 게 맞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울님’이라고 표기한다고 해서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 때문에
‘천도교가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이다.
‘한울님’이란 표현은
동학의 신관을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이다.
도올 선생은 ‘한울’을 ‘one fence' 라고 풀이하면서
희화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 일면적인 이해이다.
『한살림선언』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한’이란 말로 표현해 왔다.
‘한’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한’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이다.
본래 ‘한’은
‘하나’의 의미와 ‘전체’라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전일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체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울’은 ‘울타리’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의미도 있고,
수운 선생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라고 할 때처럼
‘우주 전체’를 의미할 때도 있다.
그것은 공간적인 울타리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다 포괄하는 용어이며,
물질과 생명, 정신을 다 품고 있는 혼원한 세계이다.
따라서 ‘한울’은 요즘 우리 말로 하면
‘전일적 생명’, 또는 ‘우주생명’에 해당되는 말이고,
그것이 동학의 신관에 가장 부합하는 용어이다.
『한살림선언』에서 다시 말한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있는 한울님은
삼라만상 속에 충만하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그윽하고 아득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것이다.
한울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동참하면서 나누어 받아
체험할 수 밖에 없는 한大 생명인 것인다.
동학은 이러한 한울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같이 ‘한생명’이라는 우주적인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侍天) 키워 살림(養天)으로써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내가 ‘한살림’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울님’이라는 용어를
천도교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한살림선언』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하여,
김지하, 박재일, 최혜성 등이 함께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 우주생명에 의해 태어났고,
우리 안에는 우주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 우주생명은 만물을 통해서,
특히 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본체로서는 완전하지만,
그 생성의 과정으로 본다면 불완전하며
우주적 진화를 통해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고 실현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의 근본, 본체에서 보면
불변의 영원한 일자,
궁극적 실재이고 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 무(無), 무극(無極), 또는
『무체법경(無體法經)』의 표현을 빌자면
‘원각성(圓覺性)’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현상의 측면, 생성의 측면에서 보면
불완전하며 늘 생성 중에 있는
음양의 역동적 기운이다.
음양이 교차하는 태극(太極)이요,
다양한 현상세계가 그대로 펼쳐진
비각성(比覺性)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
나의 존재의 본질로서, 마음의 본체로서
모셔져 있는 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의 자각이었다.(혈각성血覺性)
따라서 천(天)은
하나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존재의 층차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본체의 차원,
하나는 생성의 차원,
하나는 만물(개체) 속에 내재한 차원이다.
빔프로젝트로 비유하면
한울님은 빔프로젝트 본체이기도 하고,
거기서 나오는 빛이기도 하고,
그 빛이 스크린에 비쳐 드러난
구체적 형상이기도 하다.
본체로서는 불변이지만 빛은 늘 변한다.
완전하지 않다. 생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이 구체적인 사물 속에 들어와서
우주적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교인들이 너무
‘한울님’의 용어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끔 학술대회에서 학자들이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표기했다고
일어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는 일이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친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ᄒᆞᄂᆞᆯ님, 하ᄂᆞᆯ님, 하늘님,
한울님, 한우님, 하눌님, 하날님,
하느님 등의 용어가 함께 쓰이다가
1978년에 교서편찬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한울님’으로 정착되었다.
‘하느님’이라고 안 될 이유도 없고,
‘한울님’이라고 쓴다고 안 될 이유가 없다.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 되고,
이에 대해 유연할 필요가 있다.
용어는 그 자체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그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변천한 데는
나름의 해석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맞고 틀리다’라는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천도교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2. ‘신사’, ‘대신사’, ‘선천’, ‘후천’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고 본다.
분명히 수운 선생 시절에는
대신사라는 표현이 없었다.
그냥 선생님, 대선생님, 대선생주라고 했을 뿐이다.
물론 ‘(대)신사’에서 ‘신’자가 명사로서
흔히 신(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신’은 형용사로 ‘신령한’, ‘거룩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대신사는
‘거룩한 큰 스승님’이란 의미 이상의
신격화하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천도교에서는 결코
수운, 해월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신사’라는 용어가
신격화의 의미, 심지어는
일본에서 온 용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이건 사실이 아닐다.
그렇지만 ‘대신사, 신사’ 라는 용어가
종교적 구태의연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젊은 사람들에겐 용어 하나가 중요하다.
뭔가 무거우면 다가가기 힘들다.
따라서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추후에
‘교서편찬위원회’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후천’의 용어에 관해서 보자면,
수운 선생은 ‘후천’이라고 한 적이 없다.
‘다시 개벽’이라고만 했다.
물론 해월 선생은 ‘후천’이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후천개벽’은 오늘날 증산도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증산의 후천개벽은
다분히 종말론적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나는
‘후천’이라는 용어를 굳이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다시 개벽’이라는 의미가
오히려 ‘문명적 전환’의 의미를
더 잘 살리고 있는 용어라고 본다.
3. 성경신의 해석
논학문의 해석 중에
‘오도는 무위이화’라의 해석에서,
오도(吾道)를
유교문명으로 해석한 부분은 납득이 안된다.
(도올 김용옥 지음, 『동경대전』 2권, 132쪽)
도올은 현재 기독교 문명, 나아가서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동학을 주로 내세우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동양문명, 유교문명에 대해서는
무조건 긍정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오늘날 유교에 대한 비판이
그 본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양난(兩難) 이후의 병폐에 대한 것이라고 할 때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유교 문명, 특히 조선의 성리학이
다 긍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신분질서를 인정하고
가부장적 체제를 강화하고,
장유유서를 강조한 것은 오늘날 비판되어야 한다.)
그런데 도올은
유교를 무조건 긍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동학의 성경신이나 수심정기조차도
유교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성경신의 성(誠)을
『중용』을 언급하면서
‘우주적 성실성’으로만 해석한다든가,
경(敬)을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등
마음의 경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유교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신(信)을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기복적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일면적 해석이다.
동학의 성경신에서 성은
우주적 성실성을 내포하면서도
『해월신사법설』에서도 적시하듯이
‘순일하고 쉬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우리 말로는 ‘정성’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또한 경은
단순히 성리학의 그것처럼
마음의 경건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마음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물건을 공경하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한다.
내면의 경건성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용어이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운 선생의 『용담유사』에 그대로 확인된다.
정성있는 그 사람은 어진사람 분명하니
작심으로 본을보고 정성공경 없단말가 (교훈가)
믿음 역시
무조건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도 여러 단계들이 있다.
오강남 교수에 따르면, 믿음에는
기복적인 신앙의 단계도 있고,
모든 에고를 내려놓고 신앙대상에 완전히 내맡기는
‘자기비움’으로서의 믿음도 있고,
믿음직스러움, 신실함으로서의 믿음도 있고,
더 나아가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서의 믿음도 있다고 한다.
직관이나 깨달음을 통한 확신같은 믿음이다.
이처럼 여러 차원이 있는 믿음을
단지 초보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일면적인 해석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공경’의 의미를 잘 살릴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동학의 실천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공경’,
해월 선생이 강조했던 삼경(三敬),
‘경천, 경인, 경물’의
세 가지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공경을
단순히 내면적 경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성리학적인 공부론에서 못 벗어난 느낌을 준다.
4. 수심정기
수심정기 해석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도올 선생이 수심에서 심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새기고 있는 것은 좋다.
나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오히려 불완전한 마음의 현상이 있고,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마음인
내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로
‘수심’을 새기고 있다.
또한 ‘정기’의 ‘기’는
“귀(鬼)와 신(神)의 묘합으로서의 기이며,
이 기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귀신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새기고 있다.
그래서 수심정기를
“하늘님 마음을 (끊임없이) 닦고,
몸을 포함한 전일적 기(귀신)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님 마음을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해석이 과연
현실에서 어떤 실천성을 가지게 되는지,
귀신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 또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연할 뿐이다.
그러면서 기존 학자들이 ‘수심정기’를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잡는다’는 해석을
한심한 역주라고 비난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도올의 해석 역시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추상적인 해석이라는 느낌이다.
나는 수심정기는
그렇게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나의 몸을
우주적 기운에 다시 연결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요령을 말하는 것이다.
수운 선생은 본인의 시천주 체험을 통해
한울님과 연결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그것을 ‘강령지법(降靈之法)’이라고 하였다.
‘강령(降靈)’을 통해 한울 기운과 연결됨으로써
각자위심(各自爲心)에서 오는
온갖 병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해월 선생은 수심정기를 해석하면서
“천지와 운절되었던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눠서 보면,
한울 기운과 다시 연결하는 것이 정기이고,
마음을 한울 마음에 합치시켜 자기 삶의 운전대를
바로 잡고 가는 것이 수심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한울마음과 합치된 상태,
온전히 깨어서 집중한 마음의 상태,
‘마음의 주체적 각성’의 상태가 곧 수심이다.
비유적으로 보면
수레를 말과 연결하는 것이 정기이고,
말고삐를 잘 잡고 주재(主宰)하고 있는 상태가
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 비유를 들면
자동차 시동을 거는 것이 정기이고,
운전대를 잘 잡고 있는 것이 수심이다.
이는 한울의 기운과 지혜로 살되,
수동적으로 그 명령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운전대를 내가 쥐고
한울과 함께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마치 철새가 기류를 타듯이,
연어가 해류를 타듯이,
서핑하는 사람이 바다의 파도를 타듯이
그 흐름을 타면서도 그 흐름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주도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심정기는 막연한 이야기도 아니며,
수련을 할 때만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상에서
그런 특정한 마음의 상태와
특정한 기운의 상태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과 기운이
한울의 마음과 기운에 합치된
어떤 특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여기’의 공간에 지극히 화해진 상태이다.
논학문에
“지기와 지극히 화해지면 지극한 성인이 된다”고
했을 때의 그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한편으로는 지극한 마음의 평화와 고요가,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벅찬 열망과 기쁨과 감사함이
넘쳐흐르는 상태가 된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자연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성인(聖人), 거룩한 사람, 지상신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아니냐”라고 노래했다.
우리 스승님이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나의 마음과 기운을 잘 써서,
한울의 마음과 기운에 합치되는 삶,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주체로
우뚝선 창조적 주체,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사람,
숭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오늘날 동학이,
현대인들의 생태적·정신적 위기와
소외에 대한 진정한 대안으로서,
‘다시 개벽’의 전환을 부르짖는
근본적 삶의 혁명으로서,
그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
진정한 주체철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이제 K-POP를 넘어 K-정신으로서,
진정한 한류 4.0으로서 재해석되는 길이 아닐까?
나는 도올 선생을 존경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학자라고 생각한다.
나도 선생을 통해 동양철학을 배웠고,
학문이 무엇인가를 배웠고,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넘어서는 철학정신을 배웠다.
나는 도올 선생이 동학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그 진의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천도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의 진의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동학을
새로운 사유, 새로운 세계관으로만 해석해도
“기존의 세계문명에 염습되어 있는
모든 유치함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동학은
철학만이 아니다. 종교이기도 하다.
기존의 제도적 종교와는 문법이 다른,
신중심주의가 아니라 인간을 주체로 하되,
우주적 신성함과 내면적 성실성과
만물에의 공경심을 잃지 않는
실천철학이자 신학적 인간학이자
새로운 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수도를 통한 새로운 인격의 변화,
신생(新生)의 삶으로의 전회(轉回)에 있다.
그러니 동학의 핵심이 어찌 글자에만 있겠는가?
그게 어찌 경진판 원본에만 온존되어 있겠는가?
그 글자 너머에 있는
수운 선생님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수운 선생이 정말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성지우성(誠之又誠) 공경(恭敬)해서
정심수신(正心修身) 하였어라.”
“열세자 지극(至極)하면
만권시서(萬卷詩書) 무엇하며
심학(心學)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不忘其意) 하였어라.
현인군자(賢人君子) 될것이니
도성입덕(道成立德) 못미칠까.”라고 하신
수운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금 뼈에 새겨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