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깨달음을 얻으려면 최종 무엇을 체험해야 할까?
답;
깨달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무색계선정을 얻어야한다.
무색계선정이란 앞뒤가 없고, 위아래가 없고, 생사가 없고, 너와 내가 없는 “텅빈 무한대 허공” 상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무색계선정을 체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앞뒤가 없고, 위아래가 없고, 생사가 없다]는 말을 전혀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경전에서 (이와 같은) 둘로 나누어진 양변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지만
눈앞의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생생하게) 앞뒤가 있고 위아래가 있으며 생사가 있고 미움과 사랑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앞뒤가 없고 너 내가 없다는 경전의 말씀이 도저히 실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이치를 알고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 환각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까?
그것은 단 하나,
우리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난 후에 얻어지는, 무색계선정인 [텅빈 무한대 허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수행을 통한)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무색계선정인 텅빈 무한대 허공을 체험하게 되면,
그땐,
그렇게 탄탄하게 버티고 있던, 앞뒤, 상하, 좌우가 사라지는 경이로운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경전의 말씀이 맞았구나!
정말 앞뒤가 없고, 너와 내가 없고, 위아래가 없고 생사가 없구나! 하고 강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졌을 때,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가지고,
미움 앞에 적용시키고, 원망 앞에 적용시키고, 죽음 앞에 적용해보면,
즉시즉시 그것들이 해체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여태 나를 묶었던 굴레로 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벗어남을 해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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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수행할 6근6처수행에 적용해보자.
6근;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6처; 색처, 성처, 향처, 미처, 촉처, 법처.
장미꽃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장미꽃은 대상이니까 색처(色處)가 되고, 그것을 보는 눈은 안근(眼根)이 된다.
이 둘이 결합하여 “눈으로 장미꽃을 보는” 행위가,
전적으로,
뇌가 만든 환각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6근6처 수행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환각인 줄 알게 될까?
예로,
빨강장미꽃에는, 원래부터 빨간색이 없다. 왜냐하면, 그 빨간색은 태양의 색깔일 뿐이다. 그러므로 장미꽃은 원래 색깔이 전혀 없다. 또 태양이 없으면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장미꽃의 빨간색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뇌가 만든 환각일 뿐이다.
또 하나 더,
장미꽃의 크기는 작은 손바닥만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키 높이에 견준 크기다,
만약 키가 작은 “개미”가 보면 운동장만 하게 보일 것이고, 더 작은 이불진드기가 보면 지구만큼 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것을 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큰 우주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생명체들은 모두 그들의 업대로 각자 다른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먼저 주관인 내가 있어서 객관인 대상이 생긴다.
만약 주관인 내가 없어지면 객관도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없어도 장미꽃은 재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런 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상대성 속에서 나타나는 양변 현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데도 장미꽃은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대인 장미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바깥 장미꽃이 재 스스로 피어있다고 착각한다.
사실 그 장미꽃은 나 때문에 피어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내가 장미꽃을 만들었다=一切唯心造”는 뜻을 깊이 새기자).
그렇다면 각자의 업으로 장미꽃을 본다면, (각자가 그들의 업력으로 다르게 본다고 하면),
업력 없이, 그리고 가장 정확히 보는, 신(神)이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신의 눈에는 장미꽃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 답은 “신도 모른다”이다.
전지전능한 신도 장미꽃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왜 모를까? “이 세상에 정확한 진짜 모습이라는 것”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가 자기의 업대로 만들어 볼 뿐이다.
이런데도 우리는 아무 비판 없이 내 뇌 속에 저장되어있는 정보들을 철석같이 신뢰한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큰 깨달음이 일어나,
나의 뇌 속에 저장된 정보가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자각한 순간,
더 이상 뇌 속의 정보를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무시이래로 저장해놓은 나의 관점(나의 정체성)을 단숨에 부셔버리는 것이다.
이런 과단성 있는 자각이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이 부서지면,
“나와 대상”, 즉 주관과 객관세계가 모두 허물어지면서 “텅빈 무한대 허공”이 그 자리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무색계선정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6근6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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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주관인 6근과 객관인 6처를 부수는 순서는
첫째; 먼저 주관인 나를 부순다.
둘째; 객관인 장미꽃을 부순다.
(이 순서는 뒤바꿔서 해도 괜찮다).
이것을 수만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는 순간 내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힘이 없어지고, 대상인 장미꽃도 집착되는 힘이 없어진다.
이렇게 집착하는 힘이 없어질 때, 과감히 내 몸을 장미꽃 속에 넣어 한꺼번에 둘을 부셔버린다.
그러면, 내 몸도 쉽게 장미꽃 속으로 들어가서, 나와 장미꽃이 함께 부셔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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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의 정체성이 부서지면,
“나와 대상”, 즉 주관과 객관세계가 모두 허물어지면서 “텅빈 무한대 허공”이 그 자리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무색계선정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6근6처 수행이다.
결론;
깨달음이란 결국 “내 몸”과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모두 우리의 뇌가 만든 환각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