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추에서 닭 기르던 추억
지 석 동
경칩 무렵이면 송추계곡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응달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고 개울에 얼음이 허옇게 널브러져 있다. 무당개구리가 녹은 틈으로 나왔다 다시 물밑으로 들어가는 때지만 이 계곡을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봄이 아닌 병아리 장수다.
음력 정월에 내린 정월 병아리다. 어미 닭 없이는 추워 하루도 살 수 없는 어리디어린 생명이 늙수그레한 사람 등에 수백 마리가 업혀 올라오며 삐악삐악 울어대 송추골의 긴 잠을 깨운다.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마저 없어 녹이 슨 문을 열고 내다보는 것은 식당주인뿐이다. 송추에 처음 들어가던 해 이웃사람이 지금 사놓아야 여름 장사를 한다고 일러주어 병아리 어미가 되기로 했다. 부화한 지 이삼일밖에 안 된 어린놈들을 한꺼번에 사면 기르기 어렵다고 보름 간격을 두고 흰색이 아닌 색깔을 가진 놈으로 골라 50마리씩 두 번을 쌌다. 유원지에 사는 사람들이나 놀러 오는 손님들이 흔히 말하는 토종닭이다. 그러나 비행기나 배를 타고 온 다문화 가족의 몇 대 후손들이다. 사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온 토종닭은 황갈색이나 적갈색 회색 흑색 점박이 등 털에서 광채가 났고 선홍빛 홑볏과 꼬리가 화려했다. 다리도 외래종에서는 안 보이는 검거나 검푸른 빛이 났고 며느리발톱이 달린 것이 특징이다. 안타깝게도 6·25 이후 외래종에 밀려 거의 사라졌다. 육질이 뛰어나고 병에 강해도 더디 크고 성체가 작고 산란율이 적다는 이유로 하마터면 멸종될 뻔했던 걸 근자에 유전자를 복원해내 농가에 보급하고있다.
큰 상자 몇을 구해다 숨구멍을 내주고 낮에는 햇살 좋은 곳에 내놓고 비닐을 씌워 해바라기를 시켰다. 먹이는 사료에 좁쌀을 조금 섞어주었다. 밤이면 들여놓고 상자마다 30촉 알 전구를 넣어 보온을 해주고 아침엔 밤새워 먹고 싼 오물을 치워주는 일의 반복이었다. 아내는 냄새나고 시끄러운 걸 방에 들여놓는다고 잔소리가 심했다. 계곡에 바람이 사납게 부는 밤이나 봄눈이 심술을 부리면 온도를 높여주고 곁에서 함께 날을 샜다. 그래도 밀려서 밟혀 죽고 못 먹어 죽고 추워서 죽는 놈이 하룻밤에 서너 마리씩이나 된 때는 정성이 모자라 그런 것 같아 밥때도 잊고 매달려 지냈다. 밤낮없이 울어대서 시끄럽고 냄새도 고약했지만 주는 대로 먹고 크는 걸 보면 신통해 들여다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리해도 3할 정도는 죽어나가 가슴에 묻는 아픔을 맛봤다. 그 가슴 아픈 손실이 처음 기른 사람으로는 성공이라는 이웃의 칭찬을 들을 때는 고마워 안 보이는 분에게 감사했다.
애물단지들이 자라 벼슬이 발갛게 나오고 날개를 퍼덕일 만큼 자라면 밖으로 옮겨야 했다. 냄새도 심한데다 시끄럽고 방에서 기르기에는 너무 커버려 집 뒤에 닭장을 짓고 이사시킬 준비를 했다. 구멍이 촘촘한 철망을 사다 문 낼 자리만 남기고 위와 사면을 막고 그 위에 포장을 둘러쳤다. 횃대를 아래위 이단으로 둘씩 매주고 밤이면 30촉 전구를 둘이나 켜주어 공포감을 줄이고 추위를 막아주었다. 삵이나 족제비 오소리가 물어갈까 바닥을 꼼꼼히 막아주고 수시로 들여다보는 사이 봄이 와 계곡 앞뒤로 진달래천지를 이루어 황홀했다, 새들의 노래로 날이 밝고 손님 가는 발소리로 어두워 송추계곡의 봄은 병아리 크듯 날마다 환해져갔다 했다.
사월 말이면 큰놈은 까치보다 크게 자라 밖에다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때면 뻐꾸기 꾀꼬리도 와서 울었고 밤이면 내시 댁 선영머리 고목에서 접동새 지랄스럽게 울어대 군대 간 사이 고무신 바꿔 신었던 내 첫사랑 벌판집 큰딸 생각이나 아내 몰래 소주병을 땄다.
내놓아 자유를 얻은 놈들은 금세 자라 암수가 구별됐고 수평아리가 월등하게 컸다. 벌써 우두머리가 생겨 낮이면 근 칠십 마리를 이끌고 다녔고 저희끼리 서열 다툼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저희끼리 힘 겨루기를 하는 걸 보면 유치원 아이들 노는 거나 다름이 없다. 금방 상대 벼슬을 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날개를 툭툭 털고 마는 걸 보면 꼭 아이들이다. 먹이는 봄 여름내 풀숲과 뒷산으로 다니며 풀 나뭇잎 벌레 개구리 등을 먹는 게 일이고 나머지는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흙 목욕하는 게 하루였다. 신기한 것은 윗집 닭장과 거리가 불과 십여 미터밖에 안 되는 데도 용케 저희 무리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한 번도 썩여서 찾느라 애를 먹은 적이 없었으니 제 식구들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칠십여 마리가 무리로 풀밭을 누비고 산자락을 헤집고 다니는 걸 보면 장관이다. 이 멋진 무리가 6월 말이면 큰놈은 약병아리를 지나 닭이 다돼갔다.
이때부터는 무리의 대장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절대복종하지 않는 놈은 벼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단호하게 부리로 응징했다. 그리고 이웃 대장과 결투가 시작된다. 이 결투는 주도권싸움이고 영토싸움이라 지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지는 걸 보면 주인도 속이 터졌다. 사람도 그렇지만 닭이라는 짐승은 한 번 얕보면 시도 때도 없이 달려와 영토와 남의 아녀자를 넘보고 마구 쪼아대는 바람에 약자는 벼슬에 피 마를 날이 없다. 그걸 보는 주인은 약이 올라 어찌해야 하나 궁리로 골머리를 앓는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닭싸움에 이웃이 다툰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웃집 센 놈의 등쌀에 밀려 먹이 활동 범위가 좁아질 뿐 아니라 약한 대장의 아리따운 후궁들이 센 놈을 따라 가버리는 일이 생긴다. 그리되면 어느 놈이 내 암탉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는 수가 생겨 재산상의 손실을 볼 뿐 아니라 자존심까지 구겨지는 바람에 통쾌한 복수를 생각하게된다.
경험 있는 주인은 대장이 밀리는 낌새가 보이면 강장식(强壯食)을 시작한다. 그건 대장에게만 하는 게 아니다. 대장이 없어진 후를 생각해서 적어도 서열 3위까지는 정성을 들여 강장식을 먹인다. 유원지 식당은 거의 매운탕이나 장어, 닭, 산나물을 손님에게 내놓고 그 돈으로 먹고 서울로 유학 보낸 아이를 가르치며 산다. 따라서 손님이 남기고 가는 것은 물론 매운탕거리에서 나오는 내장이 닭들에게는 특급 식단이 된다. 거기다 어항에서 건져낸 죽은 물고기와 사람이 먹어도 좋다는 장어 쓸개에 소금을 섞어 먹여 힘을 길러준다. 힘이 될 만한 것은 눈에서 빛이 날 정도로 깃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도록 먹이고 또 먹인다. 그렇게 해서도 못이기면 이웃집 센 놈이 어느 손님 눈에 띄어 생을 마감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대장이 밀려 속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윗집 대장이 안 보이고 우리 대장이 그쪽 무리에 들어가 판을 치고 다녔다. 어찌 된 일인가 궁금했는데 어느 손님이 씨닭으로 쓴다고 고가를 주고 가져갔단다. 이후로 우리 대장이 이웃을 평정하고 총대장에 올랐다. 윗집의 이인자가 권력을 승계했지만, 경험부족으로 맞잡이가 되지 못했다. 가만히 보니 윗집 영감님이 대장 판 것을 후회하는 것이 여실해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 쉬이 쉬이 소리와 함께 쿵쿵 발 구르는 소리 가나 나가보면 영감님이 우리 대장을 쫓는 소리였다. 그리고 저녁이면 암탉을 찾는다고 우리 닭장을 드나들었다. 얼굴빛이 사나워진 영감님이 새로 권좌에 오른 대장에게 강장식을 시키느라고 애쓰는 눈치다. 산과 들을 뒤져 눈에 띄는 뱀은 다 잡아다 토막을 쳐서 먹이는 게 눈에 띄었다. 그 여름 영감님 네 대장 체력보강에 들어간 긴 동물이 십여 마리는 족히 넘었지만, 우리 대장의 힘을 넘지 못해 영감님 애를 태웠다. 덕분에 나는 손에 피 안 묻히고 상대를 굴복시킨 셈이 됐다.
광복절 전후가 되면 암탉은 특이한 소리를 내며 걸음도 섹시하게 걷는다. 그 모습이 꼭 키 작은 당숙모 걸음같이 엉덩이를 쭉 빼고 아장아장 걸으며 "고옥 곡 꼭" 알 짓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암컷이 됐다는 소리고 임신을 했다고 대우해달라는 소리다. 발을 옮길 때마다 섹시하게 똥구멍을 옴찔옴찔 하며 다소곳이 걷는 숙녀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나 입이 귀에 달린다. 미녀들의 알 짓는 소리를 들으면 닭장에 상자를 들여놓고 볏짚을 깔아주어 알 낳을 수 있는 둥지를 만들어줬다. 출생이 같아 알 짓는 소리도 거의 같다. 그 소리를 들으면 다 자랐구나! 생각과 함께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때면 대장 수탉의 발목은 참나무 장작같이 억세 지고 어깨도 쩍 벌어진데다 화려한 꼬리로 치장 한 그 늠름함이 가히 용맹한 장수로 손색이 없다. 날개를 서너 번 퍼덕이고 나서 선홍빛 벼슬을 단 머리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목을 길게 빼고 멋진 울음을 우는 것도 대장만의 특권이고 지배자의 상징이다. 그러나 대장은 날마다 여러 후궁을 단속하느라 잠시도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조금이라도 경계를 게을리하면 항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인자나 삼인자에게 후궁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져 대장의 권위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암컷이 권력과 부 앞에서 거부 못 한다는 것은 물고기나 새나 사람이나 같아 보였다.
울 뒤에 심은 호박이 누렇게 익어 어린애만 하고 앞산에 옻나무 잎이 빨갛게 물들고 머루 다래가 맛 들면 아래윗집에서 꿩알만 한 알을 몇 개 들고 와 자기네 닭이 낳은 것이라고 자랑을 하고 가면 부아가 났다. 알 짓는 소리를 듣고 아늑하고 푹신하게 알 낳을 자리를 만들어 주고 먹이도 신경을 쓰는데 알 짓는 소리만 들었지 알 구경을 못해 답답했었다. 그런 중에 이웃 아줌마가 오리걸음으로 알을 들고 와 약을 올릴 때는 시선을 건너 산 소나무에 앉은 까치에 두고 머리만 박박 긁어댔다.
속상한 마음 삭힌다고 대소쿠리 들고 닭들이 잘 노는 상수리 숲으로 가 철 지난 도토리를 줍다 놀랐다. 풀숲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다 세상에 알 무더기를 찾아낸 것이다. 꿩알같이 작은 알이 십여 개는 족히 돼 보였다. 순간 누가 보나 주위를 살폈다. 분명히 우리 닭이 낳은 것인데 누가 풀숲에 알 낳는 걸 알면 꺼내 갈까 싶어서. 근처를 뒤졌다. 아니나다를까 너덧 군데서 알 무더기를 찾아냈다. 남들이 알을 낳았다고 자랑할 때, 우리 닭들은 풀숲에다 나았던 것이다. 산밑으로 다니며 먹이 사냥을 하다 산기가 있으면 답답한 닭장으로 가지 않고 아무도 안보는 으슥한 풀숲으로 혼자 들어가 낳기 시작한 것이 쌓인 것이다. 알을 찾은 순간 동화 속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고, 한 장내 모은 알을 꾸러미를 지어 들고 가 사오던 할머니 봉초와 박하사탕 그리고 조개젓이 떠올랐다. 손님이나 와야 해주시던 뚝배기 계란찜도 생각났고. 한편, 삵이나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가 다닌다고 했는데 한 군데도 아닌 여러 군데 낳은 알을 여러 날 내버려뒀어도 고스란히 있는 것이 고맙고 신통했다. 알을 찾은 뒤로는 닭들이 어디서 노는가를 엿보아 두었다 심심하면 산을 뒤져 알 꺼내는 쏠쏠한 재미를 남모르게 즐겼다.
밑 알을 서너 개씩 넣어주어도 한 번도 둥지에 낳은 적이 없어 애를 먹이던 미녀들. 숲에 눈이 허옇게 쌓이고서야 섹시한 악녀들은 둥지에 알은 낳아 산 뒤지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송추를 떠나 올 때, 우리 손에 길러지고 죽어간 것들을 위해 간단하나마 촛불을 켜고 술을 따라놓고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눈도 녹기 전에 솜 병아리로 와 우리 애를 태우며 닭으로 자라주던 기쁨, 똥구멍을 옴찔 옴찔하며 가만가만 숲으로 걸어 들어가 풀숲에 알을 낳아 속을 썩인 여러 고집불통 미녀들. 돌이켜보면 고 예쁜 고집들이 있었기에 밤이면 적막하던 유원지 생활이 덜 외로웠다 싶고 제 손으로 동물을 길러 본 사람이 생명을 귀중하게 다루고 사랑하는 줄도 알게되었다. 2011. 2. 13.
|
첫댓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안산 꼭대기에 살 때 닭을 키워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때 생각 떠올리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원고 양을 계산해 보니 원고지 30장이 넘는 방대한 원고입니다. 조금만 늘이면 단편소설 분량입니다.
안산소리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우리가 자랄 때는 말바위 그 낭떠러지에서 내려다보는
무악재는 깊기도 했었지요.
돌굴리면 맞을 것 같이 형무소가 발아래 있었고
껑충뛰면 인왕산 배꼽마당에 건너 갈 듯 했습니다.
뒤로보면 저 멀리 한강따라 파주 뜰이 좋았고
남으로는 관악산이 오라는 듯 자리를 내주는 듯 했답니다.
이제 그 안산 어느 바위 틈에서 진달래 필 날이
산벚 환한 날 다 된 듯 합니다.
네 제가 살던 동네가 말바위 밑 봉화둑이란 동네였습니다.
오늘처럼 대보름날 쥐불놀이 한답시고 온 산을 다 태워먹고
가을엔 안산 너머 새절에서 과일 서리하다가 풋승들과 투석전 벌이던 일...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남북회담 한다며 산꼭대기에 있는 집 창피하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판잣집들 다 철거하던 그때 안산을 떠났었지요...
새절이라는 말을 들은지 50년이 더 되었네요.
눈물이 나도록 내게는 정겨운 곳입니다.
우선.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소풍을 갔던 곳으로
그 때 오셨던 어머님 사진이 남아 있어 내게 제일 오랜 된 소중한 추억이고
그 새절이 6.25전쟁에 타버리고 전각 하나만 남아있어 그 쓸슬함이 골 가득 했덨답니다.
내가 마직막 본 새절은 군대 가던 전 날 이었다 기억이 되네요.
그때는 신촌에서 절까지 숲이고 전답뿐이라 아주 산골 이었어요.
그곳에서 승무를 보았고 봄밤에 피는 목련을 처음 보아
지금도 그 수려하던 경내가 보이는 듯 합니다.
잠못드는 밤이면 목련을 보려 산등을 넘던 때가
소월을 줄줄이 외던 사춘기였나 봐요.
석동 님 글을 읽고 보니 유원지에서 파는 '닭도리탕' 앞으론 그놈들 면면을 살펴보고 대장놈인지 아닌지 확인한 후에 먹어야겠습니다. ㅎ
아마 대장을 잡수실라면 곱도 더 주어야 할 겁니다.
지도자를 일으면 한참동안
전열이 흩어져 주인이 속을 태워야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