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라는 무르팍에 잊힘을 누이고 싶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잊는다고는 말자
한분옥
1.
잊는다고는 말자 만나자고는 더욱 말자
마음이 흘러간 뒤 정은 흘러 무엇하랴
아, 문득 무너져 내린 산그림자였다 그러자
2.
이미 한번 울고 나온 목숨의 비탈길에
설움의 돌 수레를 또 어찌 굴릴까 보냐
먼발치 신발을 끄는 다저녁때 쑥부쟁이
3.
출렁이던 그늘마저 앙금으로 앉았던가
휘굽은 밤의 허리 훠이훠이 넘다 말고
긴 울음 가운데 앉아 성긴 모시 올을 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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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관조적 시점으로 현상이나 행위 혹은 사실들이 드러나는 문체적 특징을 보이는데 독자에게 안심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게 하기도 한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거리를 두고 행간을 관찰하거나 투영하며 읽어 내려가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다가도 공감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폐부를 건드는 것 같아 긴장해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나게 한다. 각 수를 나눠서 살펴보면.......,
1. ‘잊는다고는 말자 만나자고는 더욱 말자’라는 표현은 나도 모르게 ‘잊는다’와 ‘만나다’를 대립어로 받아들이는 관성에 빠지게 한다. 잊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고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잊거나 만나는 것이 동시에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역설적 표현으로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자고 시인은 선제적 제시를 하고 있다. 마음과 정이 융합되어야 선한 영향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차라리 ‘무너져 내린 산그림자’로 메타포적 관조의 틀로 순식간에 긴장감을 내려놓고 있다.
2. ‘이미 한번 울고 나온 목숨의 비탈길’은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체험적 감성으로 공감을 끌어내는 대목이다. 그런 비탈길을 또 굴러가느냐 하는 긴장 속에 ‘먼발치 신발을 끄는 다저녁때 쑥부쟁이’는 공간에 대해선 ‘먼발치’를 가져와 관조적인 문체를 견고히 하면서도 시간에 대해선 ‘다저녁’을 가져와 중년 이상의 시기를 나타내고 쑥부쟁이는 그 형상이 수레바퀴와 닮아 신발을 끈다고 시인이 환유법적 표현을 활용하고 있다.
3. ‘앙금’이 주는 결은 인간관계에 있어 부정적인 정서 치유를 어렵게 하는 감정이다. ‘휘굽은 밤의 허리 훠이훠이 넘다 말고’는 시간적 정서적으로 허리춤에 찬 화기와도 같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것을 가까이하는 중에 ‘긴 울음’이 성기게 한 인내와 끈기와 집중의 매개체 ‘모시 올’을 세면서 앙금을 풀어내는 것으로 반전의 갈무리를 하고 있다. 없었던 일로 그 마음을 ‘훠이 훠이’ 흘려보내고 그 정마저 ‘훠이 훠이’ 흘려보내고 있다.
만남이라는 무르팍에 잊힘을 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