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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8
창세기 37:1-11
야곱의 족보
- 열 번째 톨레도트 -
에서의 톨레도트를 간략하게 처리하고 37:2에서 본격적으로 야곱의 톨레도트를 시작한다. 성경의 장별 구분은 에서의 족보에서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37장으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톨레도트의 흐름은 에서의 족보 끝에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1절)라고 언급함으로 에서가 가나안 땅을 떠나 세일 산에 거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야곱이 언약의 상속자로서 가나안 땅, 곧 이삭이 언약으로 받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아 거주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에서의 톨레도트를 끝낸 것이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2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야곱의 톨레도트가 시작된다. 열 번째로 창세기의 마지막 톨레도트이다. 사실 이제까지 야곱의 생애에 대하여 다 기록한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야곱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기록한다. 여기서 우리는 족장의 역사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세 부분으로 나눈 기록 형식을 통해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아들의 역사가 아버지의 역사에 속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세대가 다 마감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들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톨레도트 안에 기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이삭의 사망을 35:27-29에 기록한 후 이제 야곱이 언약의 상속자로 그의 역사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도 실제적으로는 요셉에 관한 이야기로 일관되고 있으나 성경은 야곱의 톨레도트로 말씀한다. 그러므로 요셉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과 야곱과의 언약 때문에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죽음 이후에는 요셉의 이야기를 급격하게 줄여서 보도하게 되는 것이다.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라고 야곱의 톨레도트에서 요셉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야곱 언약을 위해 요셉이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톨레도트를 역사로 이해하지만 족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족보상으로 요셉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장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장자의 역할을 바꾸어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르우벤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요셉을 합환채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르우벤이 범죄한 것 때문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 편의 조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르우벤의 범죄가 있기 전에 “아들의 합환채”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언약적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다.
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창 30:14-15, 22)
“십칠 세의 소년”이라고 하여 완전수 ‘10’과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내는 ‘7’로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소년”이라는 말의 ‘나아르’는 ‘아이, 소년, 젊은이, 시중드는 사람, 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시중드는 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라고 요셉을 주어로 표현한다. “칠 때에”라는 말의 ‘하야 로에’는 ‘하야’는 ‘~이 되다,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있다’라는 뜻이고, ‘로에’의 원형 ‘라아’는 ‘방목하다, 돌보다, 다스리다, 먹이다’라는 뜻이다. 즉 요셉이 이스라엘에 속한 형제들을 말씀으로 먹이며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양을 치는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라는 말씀은 요셉이 고자질을 잘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차원에서 형제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폭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런 일들로 요셉은 죽음에 처하나 그 죽음이 형제들을 구원한다.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창 30:24)라는 요셉의 이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요셉을 통해 다른 아들들을 참 이스라엘 안에 더하실 것이다. 이 이름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하신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3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이란 표현은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진리의 터 위에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라는 말씀은 편애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서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 땅에 참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언약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8-29)
“채색옷”의 ‘케토네트 팟심’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를 가리킨다. ‘팟심’의 원형 ‘파스’는 ‘손바닥, 발바닥, 길고 소매달린 옷, (여러) 색깔들’이라는 뜻이 있다. 긴 옷이라는 측면에서는 후에 출애굽하여 성막과 제사 제도에서 제사장들이 입던 옷과 같은 것이며(출 28:4, 레 8:7), 색깔 있는 옷이라는 측면에서는 왕의 옷이라는 의미도 있다(참고 삼하13:18-19). 요셉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지었더니”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와우 계속법으로 낡아질 때마다 계속 이 옷을 지어주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별된 아들을 통해 언약을 이루실 것을 이스라엘 안에 계속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4-5절).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원인은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와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고 그저 율법적인 행위에 목숨을 거는 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형제들이 이 사랑을 증오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살해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6-8절). 요셉의 형들이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미 알았다는 것이다. 꿈의 의미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형제들은 요셉의 꿈이었기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요셉의 꿈을 그의 비전으로 말한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비전으로 품고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으로 주어진 계시는 요셉을 통해 언약으로 일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주어진 자와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자는 갈라지게 되어 있다. 말씀이 갈라놓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있기 때문에 계시의 말씀을 없애(죽이고)버리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죄성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죄성이다.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8-10)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9-10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라는 말씀으로 반복된 꿈으로 나타낸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이루실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밭의 곡식단에 대한 꿈이 땅의 통치권에 대한 것이라면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는 꿈은 하늘의 통치권에 대한 계시이다. 따라서 요셉의 통치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단순히 총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땅과 하늘의 통치권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이다(마 28:18).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6-20)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절). “시기하되”라는 말의 ‘카나’는 ‘시기하다, 질투하다, 열심이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져도 형제들은 여전히 자기 율법에 대한 열심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라고 말씀한다. ‘샤마르’는 ‘지키다, 마음에 품다, 보존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이다. 즉 야곱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품게 된다. 그것이 은혜이다.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안에 이루실 것이다(202412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