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남이흥장군 숭모시
1. 안주성 백상루 빛 정묘독전 살신위국
곤룡포로 애도하고 충신에 봉안되니
명국황제 충절열고 청군대장 감탄했네.
2. 충장공 백상루빛 충민사에 이어지고
충장사 충신정여 불천위로 봉안되어
당진 넋 애국충절 무궁토록 이어지리
시문해설
평안병사 남이흥장군 은 1627년 정묘호란시 청군(누르하치 여진족)이 조선을 침공한 안주성 싸움에서 36.000 청국의 대군을 대적함에 남이흥장군은 3000군사를 이끌고 혼신을 다해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이 불가하게 되자 적을 화약고 있는 곳으로 유인하고 화약고에 점화하여 많은 적과 함께 자분 순국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조선을 침공한 청군대장 아민은〃조선은 충의의 나라라 하더니 과연 대단 하구나 하며 이에 참모습을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도다 하며〃감탄하였다.
장군의 순국 직후 명나라 황제는 그 나라 식민들에게 조선 남이흥장군의 애국충절을 귀감토록 하는 특전을 황제궁(자금성) 앞에서 하였다.
인조임금은 장군을 국장으로 장례 하도록 하고 장례시 인조 임금은 곤룡포를 벗어 장군의 관(棺)위에 덮어주라 명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다, 전해오며 (“곤룡포” 충장사 모충관 에 보존)
또한 평안도민 안주시민들은 안주성에서 순직한 3000군사 시신을 유가족에게 알려 장례하도록 하였으며 평안도민 안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백상루(百祥樓)에서 남이흥 장군을 비롯 3000군사의 충혼들에게 제향을 하며 애도하였다. (백상루 북한 국보31호)
55년간 백상루에서 제향 하다가 당시 숙종 때 평안감사 유상훈과 평안병사 이세화가 임금께 상소하여 충민사(忠愍祠)를 건립 제향토록 하였다, (충민사: 1681년 건립,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740호 지정, 현 보존)
그 시기 우리 당진에 불천위 사당 충장사(1667)와 양세충신 정려(1627.10) 종가(1643)를 건립하였으며 장군의 애국 충절을 자손만대 전하도록 하게 되었다.
장군의 그 업적은 안주성 백상루와 충민사로 충장사와 충신 정여로 보존 기록되어져 있고 중국의 명. 청나라 사기에 비변사록에 조선왕조실록에 동국전란사 (외란 내란편)에 기록되어져 있다.
장군의 살신성인 애국충절의 역사적 유물은 충장사 경내 유물 모충관에 모셔져 있다.
장군의 생시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 영정과 인조임금이 장례시 덮어 주었던 곤룡포를 비롯 장군께서 쓰시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은 역사문화적인 가치는 물론 군인 학생들의 교육적 소재 가치로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당진의 자랑이며 더나가 충남과 나라의 자랑인 장군의 살신위국의 충절을 당진시민이 더욱 귀감으로 삼고 그 정신을 전통예술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왜군 적장을 껴안고 물에 빠져 죽은 논개로 말미암아 진주촉석루가 관광의 도시로 부상하였고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로 말미암아 정절의 귀감이 된 남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석한 생각하는 것은 몇 배나 더 훌륭한 충의의 선조를 우리는 침묵으로 섬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조인의 한사람으로서 감히 숭고한 남이흥장군의 민족자존 애국충절을 선양하는 마음으로 장군의 행장 업적을 요약하여 서툰 문장으로 옛시조로 창시를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은 문장이지만 당진시우회 에서는 이 시조를 시조창에 담아 전국에 장군의 업적을 알리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충장 남이흥 장군의 업적과 증명된 유품은 당진 한 귀퉁이의 유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오페라 뮤지컬 시조 등각계의 예술행사를 통해 재조명 한다고 하면 전국의 유명한 충절의 관광 도시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 중국 자금성 명나라 황제는 그 나라 식민들에게 조선 남이흥장군의 애국충절을 귀감토록 하는 특전을 황제궁(자금성) 앞에서 하였다. 출처=동국전란사 외란편 수록.
26세- 충경공- 충간공-부정공 -충장공13대손 현곡 기은 게재 010-5475-5116. 홈페이지 chungjanggong.or.kr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