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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에서 행해진
불교와 기독교의 대논쟁(6)
송광섭
<대한불교 조계종 , 국제포교사>
석오진 스님의 저서 파아나 두라 대논쟁에 수록된 1873년 8월 28일 오후에 전개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와 구나아난다 스님의 역사적인 논쟁의 마지막 연설 내용을 인용한다.
1973년 8월28일오후 15시-16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행한 대론.
이번 대론은 오늘 저녁으로서 끝마치게 되므로 여러분들은 잘 들어주시고 잘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앞 8월 26일 오후 4시부터 5시 사이에 불교 측의 스님은 저를 적대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님을 반대론자라고 부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 같은 반대론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부른 것은 결코 굴욕적인 언사로서 사용했다고는 생각 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이 언사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인간을 짐승들에게 비유했다고 그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기독교의 성서를 인용했습니다만, 결코 그것은 입증이 될 수 없는 불필요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짐승(畜生)이 모두 늙고 죽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한 예는 결코 그릇된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분들께 불교의 연기설을 해명했습니다. 이러한 연기설의 해명은 대단히 훌륭한 붓다고사도 명확한 이해를 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듯 붓다고사 선생도 해명할 수 없는 연기설의 해석을 하려고 했던 저의 친구인 스님은 붓다고사 선생보다도 위대한 자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난해한 연기설에 대해서 약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기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식[識]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생기며, 몸과 마음[名色]에 의해서 감각이 생긴다. 6개의 감각[六根]79)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 이와 같이 진행되어 출생이 생기므로 생존(生存, bhava) 또는 윤회가 생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인식(認識)이라고 함은 눈,귀,코 등을 의미합니다. 또 연기설은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의 감각( yatana)이라 함은 눈,귀,코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가르침이 이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기설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나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영혼(immortal soul)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영혼은 천국에 가고 천국에 있는 것은 결코 멸하지 않는 행복한 인간들뿐인 것입니다. 더욱이 아담이 저지른 죄과에 의해서 영원한 지옥의 불 속에 떨어져 버린 모든 사람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이 그러한 사실을 마치 성경에 모순점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성경의 "삶을 얻으리라(Shall be made alive)"라는 성스런 말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불교의 무색계(無色界, ar paloka)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에 관한 가르침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 스님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기독교의 영혼설에 대해 스님이 우리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바보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는 경율론 삼장이라고 불리우는 불경은 불타가 생존하던 시대에도 나뭇잎(패옆)에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의 경전과 많은 주석徐들은 암기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불타가 죽은 450년 후에 그것을 책으로서 편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는 그의 답변은 도대체가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암기해서 전승된 불교 경전이 지금 현재의 경전 중에 그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나?를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스님은 모세를 살인자였다고 하고, 그가 그와 같은 살인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은 신성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 그 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모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세가 행한 범죄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마음에 걸릴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히려 불교 측에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에서 그들이 숭배하는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앙구리말라(Agulimla)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999명의 인간을 죽였습니다. 불타는 그에게 그 즉시 계를 받게 하여 출가시켜 성직자로서 허락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도를 깨친 성스러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알라바카(lavaka)라는 자가 4,300명 이상의 인간을 12년 사이에 죽여서 그들의 인육(人肉)을 먹었으면서도 그는 성현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러한 알라바카마저도 성현으로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보살행의 수행으로서 베산타라 왕으로 태어났을 때 자기 부인을 어떤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대론자는 보살행 중인 왕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론자 불교 측 스님의 종교인 불교 경전 소부경전(小部經典, Khuddaka mik ya)을 볼 것 같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횟수를 당신은 나를 타인의 부인으로 넘겨주곤 하였지만 나는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하지 않고 참고 견디었습니다." 라고 석가의 부인이었던 야수다라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대론자는 불교의 전문가들에게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명확한 의미를 왜곡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 "어서 오라. 무엇이든지 걸식에 응하겠노라"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구걸을 하러 온 모든 걸식인 들에게 자신의 머리, 피, 눈, 부인, 어린애까지도 주었다고 하며, 불타는 보시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명확한 형태로 그들의 불전에서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무엇을 논쟁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저는 불타가 되는 종자(붓단쿠라, buddhankura)의 본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쿠라(ankura)라는 것은 ‘허약한 묘목(苗木’을 의미합니다. 불타가 될 수 있다는 본성(불성)을 명기하고 있는 것을 <본생경>80)에서 약간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란타파 본생경(Parantapa J taka)>을 볼 것 같으면 주인공인 보살은 붓단쿠라(Buddhankura)라고 하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왕(父王)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왕은 파란타파(Parantapa)라고 하는 시종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산속 생활 중에 파란타파 시종은 왕비와 육체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시종은 사악한 인간으로 변질되어 왕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시종과 왕비 사이에 낳은 아들이 그의 아버지인 파란타파를 살해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인 보살 붓단쿠라의 반역적인 행위로 인해서 이와 같은 불상사, 즉 잔혹하고 부도덕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가 성불을 하려고 하는 자들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수손디야(Susondiya)라는 본생경의 아귀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보살은 가루다(Garu a, 힌두교의 신 이름. 전설의 큰 새)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도박을 하러 왕궁으로 놀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왕궁의 왕비와 눈이 맞아서 왕비와 함께 도망했다 합니다. 이러한 나쁜 행동 또한 불성(Buddhahood)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불성을 가지고 성불하기 위한 보살들의 행위라 하면 불타의 전지전능은 그만두고 라도, 오늘날 어린 학생들이 상식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식도 불타에게는 없었던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불타의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일층 명확하게 말해 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증지부경에 있는 <사푸타 수리요드 가마나 경전(Saptta Suriyod gamana S tra)>에 8만4천 유순의 높이와 8만4천 유순 정도 넓이의 대수미산(Maha mera, 大須彌山)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날 일곱 개의 태양이 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만4천 유순의 거대한 산이 8만4천 유순의 넓이와 깊이의 바다에 의해서 덮여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 그렇게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은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그것이 발견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지구의 기구를 보이면서) 이 지구의 원주는 2만5천마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인이라면 그 누구도 모두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거대한 산이 이 조그마한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 주일 동안이라도 지구를 일주하면서 그 거대한 산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를 몇 번인가 일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거대한 산을 목격한 적도 또한 발견한 조그마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한 말을 하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자를 전지전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타라(Matara)라는 스리랑카 남부 지방에서, 범천에 태어나기 위해서 불교의 승려 몇 명인가가 정신없이 명상에 잠겨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정신 이상자들에게 적당한 교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의 하나인 <파라지카(Prjika)>성전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생존시대에도 그의 제자들이 많은 나쁜 죄를 범했다는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나쁜 행동들이었는가에 관해서는 저의 입으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 책 중의 <맛카티 밧투(Makkati Vatthu)>라는 곳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떤 비구가 공동묘지에 가서 아직 (새나 동물이) 쪼지 않은 시체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 시체와 성행위[不淨法]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柱:이 같은 내용은 목사가 지적한 부분에는 없고 다른 부분에 있음) 그리고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불타의 제자 춘다(Cunda)라고 하는 수행자(柱:경전에 의하면 춘다는 수행자가 아닌 재가 신자임. 수행자 춘다는 다른 사람임.)가 공양을 올린 돼지고기(s kara maddava)를 먹고서 심한 이질(피설사병)을 일으켜 그것이 원인이 돼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柱:이 설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학설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이에 대해서는 불교 측 답변시에 상술하겠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불타는 돼지고기를 먹은 것으로 인해 심한 이질설사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가는 곳마다 수행을 멈추며 휴식을 취하고 이윽고 쿠시나라(Kusin ra)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신통력도, 그를 수호한다고 하는 모든 신들인 범천 등도 그의 고통을 멈추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명확합니다. 이와 같은 명확한 사실로 보아 불타에 관해서 기술된 것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기술된 넌센스의 책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우리들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우리들이 저지른 죄악을 위해서 그 괴로움을 대신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만인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린 많은 의문점을 그 어느 하나도 저의 대론자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한 것과,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의 모든 것을 제가 남김없이 답변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는 주목해 주시기 바라면서 저의 대론을 마칠까 합니다.
1873년8월28일오후 16시-17시까지- 목사의 반론을 승려 모호티왓테 구아나난다가 스님의 대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목사께서는 앞서의 대론 때 저를 적대자(敵對者, opponent)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가 잘못된 견해를 지적함으로 인해서 그는 저를 친구(friend)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즉,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치 않겠습니다.
이 앞에 화요일 오전 그의 대론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을 동물과 똑같이 취급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그러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인간과 짐승을 비유한 것은 불교가 아니고 오히려 목사들 자신들이 신앙하는 기독교에서 그 비유를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앞에서도 저는 기독교 성경에서 그와 같은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 새로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분들도 계시는 것 같기도 해서 다시 한 번 그 실 예를 들어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구약성서 전도서 제3장 제19절에 의할 것 같으면, 인생(人生)들에게 임(臨)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一般)이라 이 모두가 동일한 호흡을 하며 이들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로다.
이와 같은 성경의 구절은 사람을 짐승들과 비유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목사가 주장했습니다만, 위에서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증명해 준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연기설의 난해함을 손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밧투캄모 아함 앗자(Vattuk mo aha ajja)라는 계문을 해설했습니다. 그것은 이 가르침은 대단히 섬세 미묘하다는 취지로서 인용한 것이지 결코 저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는 취지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목사께서는 제가 붓다고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비꼬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아마도 저의 대론자 목사님께서는 제가 그에게 파알리어의 지식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대단한 불쾌감을 느끼고 이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또 다시 연기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조리 없는 길고 긴 연설만을 나열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 목사님의 논설을 그 누구 한 사람도 이해치 못했음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연기설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는 크나큰 모순투성이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지만 연기설은 그가 주장하듯 결코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며 크게 모순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또 선천적인 의식과 후천적, 즉 감각의 움직임에 의한 의식의 구별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이 구별을 이해했다면 불교의 연기설은 인간들을 혼돈시키고 모순된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전에 제가 그 누구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충분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는 연기설이라는 불교 교리가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할 때는 원형(円形, rotundity)의 탄생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야 말로 이러한 탄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됐다고 했을 때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여호와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聖靈, Holy Ghost)은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정리하면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들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마리아의 남편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그의 부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탄생 과정은 언어 도단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도 되지 않는 비유를 가지고서 불교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논리는 오히려 불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에 가장 적합하며 그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그의 반론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끝낼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고 그 어느 종교도 철학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목사님의 생각은 새로운 표현의 사고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영혼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여행을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넌센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이것은 그들의 미신성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의해서, 우리들의 논리는 오히려 그들의 비정당성을 밝힌 결과가 된 것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명이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애당초 기독교 측의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만약에 영혼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겠느냐.'는 저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 없었으므로 목사께서 자기 멋대로 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신앙하는 종교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론을 전개하겠습니까?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께서 더욱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천국에는 강력한 신들만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삶을 얻으리라(shall be made alive)'라는 말을 제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말들을 저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을 펴 보일 필요가 없겠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지구상의 생명체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구원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써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목사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인 천국으로 가는 영혼의 형상과 모습은 아주 정교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영혼이 그렇게 정교하다면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인간들의 본질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설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께서는 무색계인 범천에 태어나는 영혼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천이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 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영혼을 범천의 본질과 비유한 것은 크나큰 모순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오늘 오전 중에 대론한 전도사 사리만나씨의 연설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450년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책으로 엮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 앞에서의 대론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약에 더 듣고 싶으시다면 <사마야 산그라하(Samaya Sangraha)>라는 잡지의 제4절에 그 설명을 상세히 게재하고 있습니다. (柱:그는 참고 잡지를 기독교도들에게 전해 주었다)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전혀 무의미한 결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자기 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자기 나라로부터 도주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쭉 범죄자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결코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듯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와 같은 범죄자가 기록한 성경을 읽고 또한 그 가르침을 믿고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짜서 기름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목사님의 주장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또 다른 많은 사실을 대조해 보았을 때 기독교는 결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지상 최대의 종교로 믿고 있는 기독교도들은 지금 당장 그 삿된 신앙을 버리고 올바른 종교에 귀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목사께서는 불교의 앙굴리마 존자가 살인자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입니다. 앙굴리마라 존자는 결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미 한 마리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목사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불교 경전에서 입증해 보이려고 했습니다만 성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사께서 찾고 있던 살인자 앙굴리마라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앙굴리마라라는 이름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의 이름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존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해 깨침을 얻은 뒤의 앙굴리마라 존자인 것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죄를 지은 자는 앙굴리마라 존자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것은 앙굴리마라 존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반 재가인으로 있던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란티카(Harantika, 도둑), 알라바카( avaka, 살인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베산타라 왕의 보시 행위에 대해서도 비난을 했습니다만 이 역시 오늘 아침 전도사 시리만나씨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에게 말씀드린 대답이 목사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적합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보살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기부(보시)한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테리 아파다나(Ther Apad na, 長老尼의 비유)의 설문 중에 ‘네카 코티 사하사니 바리얏타야 다아시맘(neka ko i sahass ni bhariy tth ya d si ma )’ 등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문 속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입증할 만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바라문으로 위장하고 온 사크라(Sakra, 帝釋) 천신에게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기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바리얏타야 다아시맘(bhariytthya dsima)이란 말의 뜻은, ‘당신은 타인인 나에게 부인을 넘겨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천신은 맛디이(Madd) 왕비를 자기 부인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베산타라 본생경>에 의하면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사크라 천신에게 보시를 했으나 사크라 천신은 즉시 그녀를 베산타라 왕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설문은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바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명확히 입증하고 싶다면 보살의 부인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부인으로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은 이미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상의 대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목사님께서는 ‘아가타가타난(gatahagatnan)이라고 하는 파알리어 문장을 들추어 이 문장이 불교 경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을 우리들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불교 경전이 존재한다면 그 경전을 인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께서 그 같은 경전을 명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살이 수행 중 그의 보시 행으로서 눈머리육신과 혈액부인과 어린애를 원하는 타인에게 주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보시행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정도의 열성과 정열이 없으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안락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도 충분히 말씀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파란타파와 수손디야 <본생경>을 인용하면서 불도를 수행하는 보살도 죄를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타에 대한 비난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교 혹은 불타 그 어느 쪽도 그의 언동에 의해서 명예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번뇌에 오염된 중생들이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번뇌에 오염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번뇌를 끊어 버린 불타에게 불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십바라밀을 완성한 보살들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우리들은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깨달음의 경지에 든 후로는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일상 귀의하며 존경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이러한 불타이지 십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께서 그러한 보살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구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붓단쿠라(Buddhankura)라는 의미를 허약한 묘목(苗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넌센스를 말한 것은 그의 지식이 부족한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며, 어린애들의 평균적인 지식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미산이 존재한다는 의미의 시네루 비카베 팝바타 라아자(Sineru bhikkave pabbatar j )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수미산이라는 산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는 지리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리학을 만든 사람은 이삭 뉴우턴(Isaac Newton, 1642-1727; 영국의 과학자이며 수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비판해서 모리슨(R.J. Morrison)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영국의 학자가 저술한 책을 저는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 의할 것 같으면 뉴우턴의 지리학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인용하여 도움을 청한 뉴우턴의 지리학에 의하면 밤(야간)은 지구의 자전에 연유함이라 합니다. 그러나 모리슨의 저술에서는 태양이 회전하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현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국의 과학자들 자신조차도 결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리학을 가지고서 불교의 교리를 옳지 못하다고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목사님에 의해서 여러분들께 보여진 지구 모형을 여러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이 지구 모형은 뉴우턴의 지리학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가 반론으로 던진 공을 이제 다시 그에게 돌려보냅니다. 모리슨 역시 영국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가 회전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저술에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柱:모리슨의 저술을 기독교 측에 전해 주었다.)
이 저술은 당신이 저에게 공격의 무기로 던진 공을 다시 당신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영국의 과학자 및 <태양의 법칙(Srya Siddhnta)> 등의 책을 저술한 범어 학자들간의 지리학에서도 아직은 확실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지리학에 관한 이론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학으로서 인정되지 않은 지리학을 가지고 불교를 공격하려고 생각한 것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으며 어리석은 행동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북쪽에 수미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가 있음을 보여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입니다. 이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침반을 그 어느 쪽으로 움직인다 해도 결코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북쪽에서는 자석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인가의 물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은 4대륙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석을 끌어당기는 것은 수미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나침반의 자석 바늘 역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침반의 바늘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항상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은 북쪽에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은 수미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수미산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왜 북쪽으로 향해 있는가를 영국의 과학자들이 납득이 될 수 있게 설명한 것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도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한 과학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그 어느 분들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실 분은 단 한 사람도 안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수미산보다 거대한 산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 수미산에 관한 목사님의 반론에 대해서 저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으리만큼 충분히 답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미산이 존재함을 입증하기 위한 저의 증거는 가장 적절했고 논리적이었으며, 수미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목사의 반증은 전혀 비논리적이며 효과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음을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계속해서 이 목사님께서는 춘다라고 하는 불교 승려가 불타에게 돼지고기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춘다라고 하는 재가 신자가 수카라맛다바(Sukara Maddava)라는 반찬과 함께 음식을 불타가 돌아가시기 전날에 대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드신 것으로 인해서 불타가 병에 걸리게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대접을 받지 않았어도 그 이튿날은 불타께서 대열반(大涅槃)에 드시기로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만 불타의 최후의 식사로서 기록되고 있을 따름이지, 불타가 이 식사로 인해서 병환이 났다고 말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불타가 다른 음식을 드셨다고 한다면 그 음식에 의해서 돌아가셨다고 이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답변을 해 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이상으로 목사님께서 반론한 것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말씀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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