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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 역사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인스토리
[3-1]그리스도의 세계 1]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님 탄생 시기와 비슷한 우리 나라의 역사는 BC57년에 박혁거세가 신라왕으로 추대되었다. BC37년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고, BC18년에 온조 왕이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 역사는 신화 속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는 탄생하셨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백제의 건국과 14-18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구원의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에 구현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은 일이었다.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이다. 이 계약의 핵심은 사랑(agape)이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이 계약을 인류에게 실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이스라엘의 남왕조(BC586)가 멸망한 후에 나라 없이 앗시리아, 바벨론, 헬라, 셀레우코스 시리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당한 고통은 대단하여 종말사상이 퍼지고 많은 가짜메시아가 등장하였으며,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대단히 기다리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미리준비하셨다) 1)로마 세계통일-압비아 가도를 따라 전세계로 복음이 빨리 전파하기 위함이다. 2)언어 통일-알렉산더를 통하여 복음전파가 쉽도록 헬라어로 통일하였다. 3)유대인 이용-나라 없는 유대인을 전세계에 흩어 놓았고, 처음에는 유대인의 통하여 전파되었다. 4)메시아 갈망-축복의 근원인 유대인이 빨리 복음의 불씨가 되기 위하여 메시아를 갈망하게 하였다. [참고로 플라톤(BC428-348)은 절대왕이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였고, BC 42년에 씌어진 '전원시'에도 예수의 탄생과 생애가 예언되어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BC7년과 BC4년 두 가지 설이 있다. BC4년이 유력하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메시아'의 뜻이고,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 또는 왕의 의미이다.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는 유대인 중에 3직분이 있다. 왕, 제사장, 선지자인데 예수그리스도는 3가지 직분을 모두 가지셨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정확하게 추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요한 복음을 기준으로 대충 더듬어 보기로 한다. 로마황제 아구스도가 호적을 하라고 명령하여 베들레헴에서 아기예수는 태여 난다. [탄생 후의 일들은 복잡하여 단순하게 기술하면] 구유에서 태여 나섰고, 목자가 경배할 때는 구유에 있었으며, 동방박사가 경배할 때는 구유가 아닐 것이다. 박사의 예물은 이집트로 피신할 때에 경제적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피신을 하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8일만에 할례를 받으러 갔다. 제사장 시므온과 과부 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었다. |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
필자의 생각으로는 베들레헴에서 나사렛으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리신 후에 헤롯이 2살 이하 유아 살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피난하신 것 같다. 탄생 때에 나타난 별은 적어도 몇 개월 동안 떠 있었으나 관심 없는 유대인의 눈에는 안보이고 동방박사들에게 만 보였을 것이다. 헤롯이 죽고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와 12살 되던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구약성서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30세(디베료 15년)에 공생애의 시작으로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40일간 금식 후에 사탄으로부터 3가지 시험을 받아 승리하고 광야를 떠나 베다니로 가서 안드레, 시몬, 빌립, 나다나엘 이라는 제자를 얻어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하셨다. (다른 3복음서에는 갈리리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가 복음의 제일 성이라고 한다.) 공생에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몰래 찾아 온 바리새파의 니고데모에게 하늘에 들어가는 조건은 중생(거듭 남)의 교리를 일러주었다.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성의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 여인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혀 그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가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 그 뒤 가버나움으로 가서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하였다. 복음전파 외에 병자들을 고쳐 주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이 때에 산상설교를 하고 12제자를 선발한 것 같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안식일에 이사야 대목을 읽고 자신이 하실 일을 예언하면서, 예로 엘리아가 시돈 땅 사렙다 과부에게 간 것과 엘리사가 수리아(앗시라아제국)의 나아만 장군의 병고 침을 말하고, 구원이 유대민족만의 것이 아니고전 인류에 미칠 것을 예언하셨다. 이에 화난 사람들이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려고 하였다. 그후에 가이사라 빌립보로 가는 중에 제자에게 자기가 누구인가 물어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변화 산에 가서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을 계시의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 주어 제자들이 깨닫게 하였다. 병자를 고치는 권위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예수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유대인과 율법주의 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죽음의 원인이 되었는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상당히 어렵다. 자세한 것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가 베다니에서 죽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살린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사로를 살린 것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는 긴급 소집되고 의회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예수의 제자가 많아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당시에 많은 이가 메시아로 자칭하고 나타나 로마의 제압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다시 그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도 두려웠다. 의회는 로마에 반대하는 인물로 죽일 것을 공모하였다. 제자 유다의 배반으로 계획은 순조롭게 되어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감람 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은 체포되어, 매 맞고, 조롱 받고, 멸시받으면서 골고다 언덕에서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돌아 가셨다. 이것은 자신의 목숨을 주고, 우리 죄인의 목숨을 사는 구원의 하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극치였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하여 부활하시고 또 다른부활의 진리를 우리에게 믿게 하려고 표징의 본이 되셨다. 부활하여 40일간 세상에서 활동하시다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시고, 10일 후 오순절에 성령의 하나님이 강림하신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이제는 그의 가르침과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갈리리 호수 언덕의 팔복교회> |
그의 가르침은 간단히 요약하면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가는 길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40)'이다. 예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올 자가 없다(요,14:16). 예수님은 문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요, 10:9). 실천의 중심은 사랑이지 만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꼭 예수를 통해야 가능함으로 예수를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후에 심판자로 오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간단하게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조심스럽게 적어 본다. 하나님(Deus)은 성부의 하나님, 성자의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가 없어도 안 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지는 않다. 어거스틴(354-430)은 삼위일체론을 완성하고서는 '진실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인데 역할을 분리하기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하여 역할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부(Pater) 율법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의(Tustitication-죄인을 의롭다)를 선언하신다. 2. 성자(Filius-로고스는 말씀) 요한복음(1:1-14)에 태초에 말씀의 하나님이 천지창조에 함께 하신 이가 인간으로 오신 것이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유일한 중재자이고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이 땅에 오시여 말씀으로 하늘의 비밀과 미래의 일을 가르쳐 주셨다. 3. 성령(Holy spritus sanctus) 하나님의 영,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오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다. 현재 인류 구원사업에 동참하시고 재림 시까지 활동하신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 천지창조는 같이 하시고, 활동도 같이 하시나, 활동의 주역은 구약시대는 성부의 하나님, 다음에는 성자의 하나님, 지금은 성령의 하나님이 주 역할을 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하나님이 오순절에 강림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의 바탕 위에 성령의 힘이 충만하여 복음 전파에 시동이 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게 된다.] 1. 베드로(시몬) 요나의 아들이며 안드레와 형제이다. 그의 타고난 기질이 지도자 타입이라 예수님의 수위 제자가 되었다. 성격은 성급하여 충동적이며 정열적이라고 한다. 갈릴리 호수주변의 가버나움 출신이며 숙달된 어부로 요한의 배에서 일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와 소아시아와 바벨론에서 전도하였다고 하며 바벨론에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에 로마로 가서 전도하다가 68년 네로에 의하여 거꾸로 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
<요한에게 세례 받는을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한 곳에 나타난 그림> |
2. 요한 아버지 세베대와 살로매 사이에서 태여 낳으며 (大)야고보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자매간이라고 하며 또 세례요한과 친척이라고 한다. 예루살렘 출신으로 재산이 있는 어부이며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한다. 세례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제일 먼저 안드레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격렬하고 난폭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아시아에서 전도하고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요한 복음서와 요한 1,2,3 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3. 마태 그의 성격은 겸손하였고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기록을 잘하였다고 한다. 그는 마태복음서를 기록하였고, 전도는 페르시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에티오피아에서 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한다. 4. (大)야고보 요한의 형으로 44년에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순교 당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아그립바 1세는 하나님이 충을 보내서 죽게 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스페인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5. (小)야고보 알패오의 아들로 키가 작아 (소)야고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 모친이 마라아로 에수님의 모친과 자매라고 한다. 그는 갈릴리 출신으로 전도는 이집트와 유대를 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유대인들이 그를 성전서 밀어 떨어지게 하고 돌로 머리를 때려 순교하였다고 한다. 6. 안드레 베드로의 동생으로 형을 예수님께 전도하였다. 그는 헬라와 소아시아 그리고 스구레아를 전도하였다고 한다. 헬라 밧으라에서 x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x 십자가를 안드레 십자가라고 하며 영국의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이 십자가가 선택되었다. 외경에 안드레전이 전한다고 한다. 7. 빌립 그는 벳세다 사람으로 성격은 실리적이라고 하며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하였다. 그는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에서 전도하다가 핍박받아 순교하였다고 한다. 8. 도마 그는 쌍둥이로 갈릴리에서 태어났고 성격은 소심하고 생각이 깊고 회의적이라 우울하였다고 한다. 전도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인도에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고, 이곳에 도마교회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9. 바돌로매 나다나엘이라고도 하며 갈릴리가 고향으로 예수님을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하여 최초로 이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게 하였다. 그의 전도는 알베니아, 아라비아, 인도에서 하였고, 인도에서 그는 가죽을 벗기는 고통스러운 순교 당하였다고 한다. 10. 다대오 유다라고도 하며 아버지는 야고보라고 한다. 그는 수리아, 아라비아, 바벨론, 페르시아에서 전도하였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활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한다. 유다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
<삼위일체의 이해를 돕기위한 도표> |
11. 시몬 |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의 만찬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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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고난 당한 로마의 병영인 '안토니우스 요새' 현존모습> |
헤롯대왕(BC73-AD4)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헤롯은 마르쿠스 안티니오(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BC 41년 헤롯을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헤롯은 그의 이름으로 안토니오 요새를 만들었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로마병사들이 조롱하고 매로 때리고 가시면류관을 씌웠다(마 27:28-29). BC47년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유대를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냈다. 그는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의 지원이 필요하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하였다. 그는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여 그녀가 죽은 후에도 시체와 7년간 잠을 잤다고 한다. BC 40년 36세인 그는 로마로 도망 가는 중에 이집트를 지나다가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받았으나 미리암의 사랑때문인지, 안토니우스의 우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넘어가지 않아 그녀의 원한을 샀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참조] 안토니우스의 정부인 클레오파트라는 헤롯을 미워하여 정부를 이용하여 헤롯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전쟁에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하였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편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유대를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이라 왕으로 인정해주었고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롯에게 돌려주었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이고 악티움의 승리로 이끈 아그리파 장군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어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베니게의 시돈, 두로),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나바테아 왕국의 후계자가 없을 때에 헤롯에게 줄려고 하였으나 정신과 육체가 너무 쇠약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헤롯은 건축의 왕으로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항구도시 가이사라(카이사리아)로, 훗날 로마령 유대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가장 웅장한 헤롯 성전 전체를 다시 건축하였다.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하였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바리새(바리사이)파는 그를 외래인으로 간주하여 대립하였기 때문에 마음껏 자기과시를 하지 못하였으나 최대한 유대인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노년에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장남과 며느리 그의 아들 2명과 장모까지 죽였으며,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수 백명을 학살한 일은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그가 죽는 해에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하는 사학자도 있다. 헤롯은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고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서에는 4아들이 등장하는데,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보, 영주 빌립보이다. 그는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켈라오(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필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뒤섞여 있으며, 나바테아 왕국과 페트라가 있었던 요르단 역사를 여기서 다룬다. [요르단 역사]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며, BC 9000년 전 구석기시대에 가나안 족과 아모리 족이 살기 시작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뒤섞여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바빌로니아 수메르인의 아카드 왕 사르곤의 침입이 있었다. BC 1800년경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목민들을 이끌고 가나안 산맥에 정착했으며, 가장 오래된 국가는 BC13세기 이후 존립했던 기드온, 암몬, 모압, 에돔 등이 있었다. BC1000경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대부분은 이스라엘 왕국에 복속되었으며, 그 후 다른 중동지역과 함께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BC 330년경에는 셀레우코스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싸우는 사이에 아랍어를 쓰는 나바테아인이 요르단 동남부에 왕국을 세웠으며, 이 왕국은 BC64-63년 로마인들에게 정복하여 헤롯왕이나 빌라도 총독을 비롯한 여러 집정관의 지배하에 두었다. AD135년 하드리안 황제 때 유태인 반란으로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유태인은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밀라노칙령으로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이 지역은 성지로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
<2살 이하의 유아를 살해하는 헤롯병정들> |
638년 예루살렘은 우마이야왕조의 2대 칼리프 오마르에게 함락 당했으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그 후 아바스 왕조 때는 바그다드로 옮겼다. 예루살렘은 성전의 꼭대기에서 모하메드가 천국을 다녀왔다고 하여 이슬람의 3대 성지로 선포되었으며, 유럽의 기독교 국가는 이러한 것에 반대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였고,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도읍한 라틴제국이 요르단 강 동쪽까지 영토를 넓혀 100여 년을 지배하였으나 1187년 이슬람 지배로 넘어갔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1291년 마지막 십자군 성채를 함락시켰으며, 이후 500년 간 이 지역은 조용했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마스쿠스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1920년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이 영주가 군(軍)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통치 받았으나 밸포어 선언의 대상에서 제외된 후 1927년 입헌국가로 독립했다가 1946년 완전 독립하였다. 1953년 후세인 왕의 즉위로 광산업과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과의 휴전으로 웨스트뱅크를 합병했으나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6일 전쟁 동안 땅과 농지를 잃고 대신에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도망친 수천 명의 난민이 들어와 PLO세력은 후세인 권력을 위협하여 1970-71년 요르단정부군과 요르단의 팔레스타인게릴라 사이의 전투로 쑥밭이 되었지만 결국 게릴라를 몰아냈으며, 1999년 후세인 왕의 죽음으로 장남인 압둘라 왕자를 후계자가 되었다. 나바테아(아랍인)인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국경 지역에서 살았다. BC 1세기-AD 1세기에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아라비아인 (아랍인)들을 일컬어 '나바테아인'이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에는 이들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들과 연관된 기록으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레다왕 4세의 방백이 그를 잡으려고 하자 광주리를 타고 도망쳐온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후11: 32) 이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설명(행9: 23-25)을 하고 있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 갔다고 기록(갈1: 17)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나바테아의 영토를 뜻하는 것 같다. 요세푸스(AD37-100)는 유대군대의 장군으로 유명한 유대역사가이다. 그의 글에는 나바테아인들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나바테아가 성서에 나오는 에돔의 수도 *페트라(Petra)인 것을 밝혀낸 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의 문명과 왕국이 알려지게 되었다. BC13세기에 이곳에는 에돔인이 살면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최근 고고학적 발견으로 밝혀졌다. 에돔은 에서의 다른 이름으로 '붉다'는 뜻인데 땅의 색깔과 관련된 이름인 것 같다 출애굽시 유대인의 통과를 에돔이 방해하였다.(민20:14-21, 21: 4) 다윗이 정복하였다.(삼 8:14, 왕하3:8) 아마샤가 이곳을 정복함.(왕 14:7) 에돔이 유대 성읍을 점령함.(애4:21, 겔35장) 마카비시대에는 이곳을 '이두메'라고도 불렀고, 헤롯도 여기 출신이라 유대인 들이 반감을 가졌다.(말1:2,3 롬 9: 18) 선지자들이 그들이 가진 유대의 반감을 책망함(사 34:5-15, 63:1-6, 렘 49:7-12, 겔25:13, 암1:11,12) 등이 성서에 나온다. BC 6세기초에 나바테아인이 이곳으로 이동하여 에돔 땅과 수도 페트라를 점령하여 페트라를 수도로 삼고, 에돔사람을 유대의 남부로 쫓아냈던 것 같다. BC 4세기에 에돔과 모압 땅에 정착하였고, 네게브(Negeb)의 남부를 점령하였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또 침략도 받았으나 물리치고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다. BC 2세기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그들은 차츰 세력을 동북쪽으로 확장해나갔으며, 남쪽으로는 홍해 동쪽 해안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BC169년은 역사에서 최초의 분명한 연대로 야손(Jason)이 아레다(Aretas)의 성전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야손은 유대 대제사장의 직위를 얻으려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레다(아레타스) 왕(마카베오 하 5:8)은 나바테아의 폭군이었고, 아레다 2세는 BC 96년까지 통치하였던 왕으로 수리아 왕조의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왕과 통치기간이 알려지게 되었고, BC 85년 직후 아레타스 3세가 다마스쿠스와 코엘레시리아 (레바논)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자, 아레타스는 로마의 봉신(封臣)이 되어 다마스쿠스와 다른 정복지를 계속 장악하였다. 그 뒤 로마 황제 네로가 다마스쿠스를 로마 제국에 합병하였고, 헤롯 안티파테르(안디바)가 그의 조카딸이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나바테 왕의 딸과 이혼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전쟁을 하였다. 말기에는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번영을 누리며 살았고, 나바테아 왕실 주화와 페트라에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건축물을 보면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나바테아를 로마제국에 합병된 이후 더 이상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다가 그들의 동질성을 잃어버린 채 그 지방의 다른 주민들 속에 동화되고 말았다. AD 363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의 80%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유적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 받고 있다. |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 장소가 된 페트라에 있는 '알카즈네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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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의 '모세 계곡(와디)' > <와디 럼(기묘한 하천)의 큰 사진> |
헤롯의 손녀이며 아그립바 1세의 누이로 살로매의 어머니이다. 삼촌 빌립보(헤롯)의 부인이 되었다가 또 다른 삼촌 헤롯 안티파스의 부인이 되었다. 이것이 불가하다는 세례요한의 소리에 그를 원수로 여겼다. 마침 남편 생일 날 딸의 춤에 반한 남편이 소원을 물었을 때에 세례요한을 목을 달라고 시켰고,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온 것을 받았던 악독한 여인이다.(마14;1-10) 살로매는 빌립보(영주)와 결혼 하였다. 아그리파 1세의 딸로 미인이다. 아지스의 아내이나 벨릭스가 유대를 통치자가 되었을 때에 아지스를 버리고 그의 음란의 여종(부인?)이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친어머니이고 아우구스투스의 부인인 이름이 두루실라이고, 칼리굴라 누이 이름이 드루실라이다. [로마시대 참조] 그녀들의 이름을 따라 딸에게 붙인 이름인 것 같다. 헤롯 아그리파 2세(AD27-93경)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로마 황실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17세에 불과하여 클라우디우스는 유대를 왕국에서 속국의 상태로 바꾸었다. 50년에 남부 레바논 칼키스의 왕이 되었으며 54년 로마의 황제 네로는 갈릴리 해 근처의 영토를 아그리파가 지배하던 왕국에 합병시켜주었다. 60년 사도 바울이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 베스도는 그에게 바울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여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26:1-26). 그는 바울의 무죄를 입증하였으나 황제에게 고소되어 놓아주지 못하였다. 66년 가이사라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하였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하였다. 67년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도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은 극도로 파괴되었다. 아그립바 2세의 누이이자 아내로 바울을 오빠와 함께 심문하였다.(행25:13,23) 드문 미인으로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여러 번 남편을 바꾸다가 나중에는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형과 함께 로마에 유학하고 부친의 사후에 유대, 이두메, 사마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가 악독하여 애굽에서 돌아 올 때에 마리아는 갈리리로 피하였다가 나사렛으로 돌아 왔다(마2: 22). 즉위 12년에 로마황제가 그의 악독을 듣고 '우엔나'로 추방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형 아켈라오와 함께 헤롯대왕의 4번째 부인 사마리아 여인 말디스의 소생이다. 갈리리, 뵈뢰아, 요단강 남부를 다스렸다. 예수님은 그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는 나바테아 공주 아레다를 부인으로 삼았으나 로마에 가서 형 빌립보의 집에 유하면서 형수 헤로디아와 간통하고, 아내를 버리고 형수를 탈취하여 부인으로 삼는 것을 세례요한이 부당하다고 지적하여도 듣지 않고 왕궁의 지하에 가두었다가 자기 생일 날에 죽였다.(막 6:16-28) 예수님이 그를 여우라 불렀다(마14:8-12). 헤로디아의 전 남편이다(마14:3). 헤롯 1세의 5번째 부인 클레오파드라의 소생으로 헤로디아의 딸 살로매를 부인으로 삼았고, 세례요한이 전도를 시작하였을 때에 이두매, 드라고닛의 본분 왕이었다(눅3:1). 바네아성을 확장하여 가이사라 빌립보라고 명하고, 37년간 선정하다가 아그립바 1세에게 양위하였다. |
<바울이 갇혔던 폐허의 가이사라 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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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복사하는 서기관> |
에세네파는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고 여자를 배제하고 재산을 공유하였고, 모든 일체를 관리자에게 통제를 받았다. 모세 율법, 안식일, 특히 정결의식(세례)을 철저히 지켰고 불멸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였고, 공공생활에 뒤섞여 살기를 거부하였다.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고, 은거지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는 금욕생활에 만족하였다. 안식일은 하루 종일 기도하고 토라(모세 5경)를 묵상하며 맹세는 하지 않으나 한번 맹세를 하면 철회할 수 없었다. 에세네파의 수를 약 4,000명으로 짐작한다. 구성원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경건히 살 것, 사람들에게 정의로울 것,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에세네파의 모든 교리를 충실히 지킬 것을 서약한다. 이렇게 하여 새 구성원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점심과 저녁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5]성전의 변천사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만든 것으로 천막으로 만들어 '실로'에서 400년간 있었다. 성막의 2배의 크기로 지었다. 영광도 짧아 솔로몬이 죽고 5년도 못되어 애굽의 느고에게 약탈당하고 BC586년 에 파괴되었는데 이것을 1대 성전이라 한다. 바벨론 포로시대에 생겼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고 무소부재(無所不在 -안 계시는 곳이 없다)의 사상이 생겼다. 조그마한 건물로 유대인이 모이는 곳이면 유대나 이방 땅 어디든지 분산되어 세워졌다. 회당에서 교훈과 예배의 장소로 건립하였다. 예수님도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고, 초기 사도들도 이곳을 이용하여 전도기지로 이용하였다. 예배당도 이것을 모방하였다. 실제의 성전이 아니고 이상적 환상의 성전이다. 포로에서 돌아와 건축한 것으로 초라하여 유대인이 울었다고 한다. 학개, 스가랴가 도왔고 500년간 지속되고 2대 성전이라 한다. 예수님이 다니셨던 성전으로 헤롯이 유대인에게 환심을 사려고 정치차원에서 만든 성전이다. 46년이라는 세월과 금과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었다. AD70년에 티토의 파괴로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 졌다.(마24:2) 유대인과 기독인의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90년간 지속하였고 3대 성전이라 한다. 이제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몸이 성전이 되었다(고전6: 19). 교회하면 건물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되었다. 건물은 예배당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성도가 모이는 곳이면 교회이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코노이아(Ekknoia)라고 하는데 '죄에서 벗어나 불러모았다'라는 뜻이다. 성도의 집단을 가리킨 것이지 지금처럼 조직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개인의 집합이지, 집단이 구원받는 것 아니다.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자연이 모인 것이지, 조직이나 규칙에 의하여 모인 것이 아니다. 지금의 조직이나, 규칙이 하나님을 능가하는 것이 참으로 두렵다. 구원은 하나님과 나와 개인의 문제임으로 아무 것도 볼 것 없이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
<2대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의 모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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