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5년 2월서울을떠난강씨일행이압록강과만주벌판을지나심양에도착한때는 4월이었다. 강씨가도착한곳은심양궁궐근처의심양관(瀋陽館·현재심양시아동도서관자리)이었는데, 이곳은사실상주청조선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소현세자는청나라와직접상대하기를꺼리는인조를대신해많은일을수행했다. 청나라의파병요구에응하고반청활동을하다끌려와재판받는김상헌같은대신들을보호하는것도큰일이었다.
소현세자가이런정치적일에몰두하는동안강씨는심양관의경제문제해결이자신의몫이라고판단했다. 심양관에정착한조선인일행은 192명이었는데이대식구의식생활을해결하는것자체가큰문제였다. 당시심양의남탑거리에는조선인포로를매매하는노예시장이있었는데돈이있으면이들을속환(贖還)할수있었다. 이무렵의사정을적은‘심양장계’인조 15년 5월조는속환가가수백또는수천냥이나되어희망을잃고울부짖는백성들이도로에가득찼다고기록하고있다. 강빈은이들을구할수있는현실적수단이돈이라는사실에주목한것이다.
그녀는돈을벌기로결심했다. 인조 17년에심양의팔왕(八王)이은밀히은자(銀子) 500 냥을보내면포(綿布)·표범가죽(豹皮)·수달피(水獺皮)·꿀등을무역할것을요구할정도로청나라는물품부족에시달렸다. 강씨는청나라지배층의두둑한지갑을조선의질좋은물품과연결시키면큰돈이된다는사실을깨달았다. 면포·표범가죽뿐만아니라종이와괴화(槐花) 등약재와생강도좋은무역품이었다. 담배도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