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앙코르 왕조, 왜 소리 없이 사라졌을까오마이뉴스 입력 2013.01.07 18:49 [오마이뉴스 박찬운 기자]여행을 해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이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추구를 넘어 우리의 삶을 분명 풍요롭게 한다. 나는 이것이 없다면 인생은 너무나 재미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행은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약간의 흥분감도 없지 않지만 현지에 도착하여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적지를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여행의 재미는 어느새 사라지고 빨리 호텔로 들어가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사진만이 남는 것이라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중에는 며칠이 지나면 돈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 피곤한 여행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 눈에는 앙코르의 그 불가사의한 신전이든, 이집트의 위대한 피라미드이든 한낱 돌무덤에 불과하다. '내가 이 돌 보러 이 돈 들여 이곳까지 왔는가' 하면서 신세타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자에게 여행은 재미와 흥미, 그리고 그 이상이다. 그에게는 유적지에서 만나는 돌 하나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이 인류의 유산이요, 보고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앙코르 어느 사원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앙코르에 와서 이곳의 이 찬란한 문명을 접하며 조금이라도 캄보디아인들의 위대한 유산에 찬사를 아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알고 이곳에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캄보디아, 그 찬란한 역사 ▲위 지도에서 보듯 시엠립은 앙코르 와트를 포함하여 수많은 유적이 있는 곳이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캄보디아도 과거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한때는 동남아시아 최강국의 면모를 보였고,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의 도시가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참 개발도상국으로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캄보디아의 역사에는 위대한 조상이 있고, 조상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김용옥 선생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한국의 역사를 말하라고 하면 대강 신라, 고려, 조선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캄보디아의 역사를 말하라고 하면 부남(후난, AD 1세기~550), 진랍(쩐라, 550~802), 앙코르(802~1432) 이 3개의 시대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캄보디아 고대 왕조는 부남과 진랍을 거쳐 9세기에 들어와 앙코르 왕조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통일 왕조를 맞이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앙코르 와트를 중심으로 하는 앙코르의 유적은 모두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앙코르 왕국의 역사적 산물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통상 캄보디아 시엠립의 유적을 단순히 앙코르 와트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유적 중 하나일 뿐이다. 시엠립의 앙코르 유적은 600년 앙코르 왕조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유적의 집합체이다. 결코 앙코르 와트만이 앙코르 유적을 대표할 수는 없고, 더욱 그것이 이 지역 유적 전체를 부르는 대명사가 될 수 없다. 앙코르 왕조는 다시 크게 3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앙코르 유적의 특징에서 오는 구분인데 알아 두면 사원의 형태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1기는 9세기 초(자야바르만 2세)부터 11세기 초(자야바르만 5세)까지로 약 2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자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왕조의 시조로서 프놈 쿨렌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캄부자(이것이 뒤에 캄푸치아라는 이름으로 변한다)라 정한다. 이 시기의 유적군에 속하는 것이 룰루오스 유적지에 있는 프레아 코와 바콩 사원이며, 이 시기에 속하면서 후기의 유적지로는 반테이 스레이가 유명하다. ▲앙코르 와트에 양각되어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 수리야바르만은 앙코르 와트를 세운 왕으로 앙코르 왕조 최전성기의 왕이다.ⓒ 박찬운 제2기는 11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부터 12세기 후반 참족(베트남)에 의한 침략기까지로 약 160년 정도의 역사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왕자의 난을 통해 등극한 인물인데 전쟁과 외교를 통해 당시 앙코르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고 굳건한 내치를 통해 앙코르 왕조의 번영을 이끌었다. 앙코르 유적 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앙코르 와트는 바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왕실 전용 사원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 학자들이 항공촬영 등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시기 앙코르 지역은 인구 1백만 명이 사는 세계 최대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프랑스 동양박물관의 자야바르만 7세의 상.ⓒ 위키피디아 제3기는 12세기 말(자야바르만 7세)부터 샴족에 의해 캄보디아가 멸절되는 시기까지(1432년)로 약 250년 정도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기에 바로 앙코르 와트 근방의 앙코르 톰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가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다. 주달관은 정확히 1296년 당시 원나라 황제 성종(테무르 칸)의 사신으로 진랍국이라 불리던 앙코르 왕조의 수도 앙코르 톰에 도착한다. 그는 1년간 인드라바르만 3세 곁에서 머물면서 생생한 기록을 남긴다. 이것이 그 유명한 < 진랍풍토기 > 다. 앙코르 왕조는 600년 역사를 간직한 왕조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종이로 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인 주달관이 종이에 앙코르 왕조를 기록했으니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40장 분량의 이 기록은 당시 앙코르 왕조의 종교, 법 제도를 비롯하여 동식물, 의식주, 상거래 등의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주달관 저 < 진랍풍토기 > . 이 책은 최근 번역되었다. 소책자이지만 이런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인문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백산자료원 한 가지 알아 둘 것은 이 진랍풍토기를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가 바로 폴 펠리오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실크로드 기행 중 돈황 막고굴을 이야기할 때 본 그 인물이다(관련 기사 :< 세계문명기행III: 실크로드 문명기행⑥ 여행의 하이라이트, 세계문화유산 막고굴 >참고). 막고굴 제17굴에서 혜초의 < 왕오천축국전 > 을 발견한 이 말이다. 그는 프랑스극동학원의 교수로서 1902년에 극동학원잡지(BEFEO)에 < 진랍풍토기 > 를 <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 >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게재한다. 위의 역사에서도 말했거니와 우리가 앙코르에 가서 불가사의한 고대 캄보디아(크메르)인의 거석문화를 보고자 한다면 적어도 위의 역사를 대표하는 유적들은 보고 와야 한다. 그래야만 앙코르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앙코르 왕조의 초기를 대표하는 프레와 코와 바콩 그리고 반테이 스레이, 중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와트, 말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톰 등의 유적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으로 증발한 앙코르, 어떻게 그런 일이?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는 1432년 샴족의 침입을 받은 이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백만도 넘는 인구가 살면서 어쩌면 세계 최고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아니 믿기지 않는 석조 문명을 만들어 낸 앙코르 시대가 어찌하여 그리도 소리 없이 소멸되었는가. 물론 앙코르 지역은 위의 샴족 침입 이후에도 두 번에 걸쳐 잠시 크메르족의 수도로 사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앙코르의 영화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고 몇몇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에 앙코르 유적의 존재는 알려진 바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수 세기 동안 열대 밀림 속에 잠자고 말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앙리무어에 의해 서양사회에 알려진 후에야 인류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잠시 풀고 가자. 이 의문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을 모아 볼 수 있다. 첫째, 14세기부터 2세기에 걸친 샴족의 지속적인 침략이다. 앙코르 지역은 지리적으로 타이와 가까운 관계로 타이가 국력을 키울수록 그들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잦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앙코르는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수도를 남쪽의 프놈펜 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둘째, 자야바르만 7세 치하에 너무나 많은 사원의 건축이 있었고 왕족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민심이 이반하였으며 마침내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권력이 점점 강력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앙코르 지역은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잦은 전쟁은 많은 남자들의 사망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앙코르 지역의 수리 시설을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고 앙코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넷째, 환경적 재앙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13세기경 이 지역의 숲은 황폐해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농업생산력의 저하로 나타났다. 거기다가 가뭄과 다른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여 이 지역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전쟁으로 인한 남자의 부족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지 못하자 모기의 비정상적인 증식을 가져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도 한다. 다섯째, 외교적으로 14세기 후반부터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였고 해상 무역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런 상황은 캄보디아 북부의 앙코르 지역에 수도를 유지하는 것보다 남부의 메콩강 유역의 프놈펜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이런 설명에도 한때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는 앙코르 지역이 거의 수세기 동안 밀림으로 방치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던 앙코르가 하루아침에 지구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수세기 뒤에서나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어떤 설명에 의해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힌두신과 설화에 관한 정보 앙코르 유적을 탐방할 때 제일 필요한 지식이 힌두 신에 대한 정보이다. 앙코르 유적은 대개 힌두교 또는 불교, 혹은 그 결합의 소산이다. 특히 힌두교는 초기 유적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9세기와 10세기의 유적지에서는 시바신앙이, 11세기의 유적지에서는 비쉬누 신앙이 넘친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 벽면 부조를 볼 수 있는데 이 부조는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전쟁, 시장의 모습, 고기 잡는 모습도 있지만 힌두의 설화를 소재로 한 것도 많다.따라서 앙코르 여행을 하면서 이러한 힌두신과 힌두 설화를 전혀 모르고서는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유적지의 이해를 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이하에서는 힌두의 주요 신과 설화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남부 인디아 촐라 왕조의 춤추는 시바(사진 왼쪽), 12세기 캄보디아의 비쉬누(가운데), 태국의 4면상 브라마(오른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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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브라만계급(
캄보디아의 건국 신화는 이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에서 넘어온 이민족과 뱀과 달을 숭상하는 원주민의 결합으로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을 터이다. 여전사들이 지켰다는 캄보디아 땅의 원주민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는 캄보디아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실제로 캄보디아의 상점이나 논밭에서 남성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여성들은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남성들은 전쟁터로 나가곤 했다. 툰레삽 호수에서 본 남성들은 배구 놀이에 여념이 없거나, 때론 도박에 빠져 있거나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관광객이 한두푼 던져준 '돈맛'을 알게된 부모들에 내몰려 거리로 나서 구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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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한편으론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지금의 캄보디아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200불 남짓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도 라오스, 소말리아 등과 함께 '최빈국(最貧國)'을 다투는 국가이지만, 국민들의 삶에 대한 행복지수 또한 방글라데시와 함께 1,2위를 다투는 국가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이 땅에도 엄청난 문명 국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앙코르 왕조'(802~1431)이다. 우리로 치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이어진 왕조였다. 사실 앙코르 왕조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캄보디아에는 거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베트남이나 중국, 인도 등 주변국의 기록에 의존하여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 왕조는 한때 강력한 왕권을 가진 대제국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추정컨대 서기 1000년을 전후로 해서는 앙코르 일대에 인구 100만을 헤아리는 당시 세계 최대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앙코르 유적의 존재는 1861년 프랑스 탐험가에 의해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전쟁과 무모한 복원 작업으로 인해 때론 파괴되고, 때론 왕래가 끊어지면서 앙코르 유적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앙코르 톰, 앙코르왓, 반데이 스레이와 같은 유적은 그 당시의 위용을 짐작하게끔 해주고 있다. 다만 그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목조건물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앙코르 유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1일권이 20달러, 3일권은 40달러, 7일권은 60달러. 3일권 이상은 사진을 부착한다. 입장권을 끊으면 기한 내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나, 수시로 검표를 하므로 반드시 입장권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제시하지 못하면 30$의 벌금과 함께 새로 표를 끊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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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앙코르 유적 가운데 비교적 후대에 지어진 앙코르 톰(Angkor Thom)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01)는 힌두교 대신 불교로 개종을 하고 '거대한 도시'란 뜻의 '앙코르 톰'을 지었다. 따라서 앙코르 톰에는 불교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앙코르 톰 내부의 모든 것이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바이욘 사원을 제외한 많은 것들은 그보다 이전부터 있었던 유적으로 추정된다.)
앙코르 톰은 사방이 약 3km 정도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매표소에서 가까운 남문. 남문 앞에서는 해자(垓子: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는데, 우기가 막 시작된 때여서 물은 없었다. 옛날에는 악어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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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톰 남문을 지나 숲길을 가다보면 거대한 사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사원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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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 사원 인근에는 앙코르 초기(우다야디티야바르만2세)에 세워진 바푸온(Baphuon)사원이 있다. 이곳은 지금 한창 복원작업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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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인근에는 '하늘의 궁전'이란 뜻의 '피미아나까스'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앙코르 초기(라젠드라바르만2세)에 지어진 왕실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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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정문인 동문쪽으로 가다보면 코끼리 여섯마리의 형상을 한 단상(檀上)이 나타난다. 이곳이 '코끼리 테라스'. 왕의 공식 행사나 사열을 거행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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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톰을 나와 향한 곳은 따 쁘롬 사원.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에게 봉헌한 것이 쁘리야 깐 사원이고 어머니에게 봉헌한 것이 따 쁘롬 사원이라 알려졌다. 따 쁘롬 사원에는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비롯한 각종 보석이 엄청나게 소장되어 있었다는데, 물론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근래에는 '툼 레이더'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툼 레이더의 주인공 '라라' 역을 맡았던 안젤리나 졸리는 영화 촬영 후, 캄보디아 고아 두명을 직접 입양하기도 하고, 캄보디아 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서 그딴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참기 힘들지만, 안젤리나 졸리의 마음만은 진심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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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 쁘롬 사원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무화과나 보리수나무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벽과 지붕을 휘감고 있는 모습들이다. 거대한 나무 때문에 사원은 붕괴될 듯 싶기도 하고, 붕괴될 듯한 사원을 거대한 나무가 떠받치고 있는 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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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물의 틈새에는 그것을 부술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네. 지금은 이런 모습이 이곳 타 프롬 사원에만 남아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밀림에서 뻗어나온 나무들이 앙코르의 모든 사원을 뒤덮고 있었지. 바람이 휭 하니 불어와 승려의 장삼을 펄럭였고 당신의 땀을 증발시켰다. 승려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때까지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네.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네. 그렇게 나무와 부처가 서로 얽혀 9백 년을 견뎠다네.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캄보디아의 노승은 해맑게 웃었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견딘 승려는 불과 수백이었다. 나이로 미루어 그는 프랑스 식민지배와 론놀과 크메르 루즈와 베트남의 침공과 최근의 내전을 겪어내었을 것이다. 끝내 살아남았고 이렇게 사원 근처에서 불교도와 관광객의 보시로 연명하고 있다. 그런 그가 부처를 쪼개는 나무를 어루만지더니 휘적휘적 갈 길로 가버렸다. 당신은 다시 나무를 본다. 나무는 대꾸가 없다. - 김영하 "당신의 나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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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명인의 눈으로 보기에 따 쁘롬 사원은 폐허와도 같다. 폐허가 되어버린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시멘트를 이용해 복원을 한 흔적도 있다. 시멘트의 수명은 100년 남짓. 100년이 흐른 뒤, 이 사원이 어떻게 처참한 모습으로 변할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그나마 캄보디아였기에 이 정도로나마 유지되고 있는걸거다.
첫댓글 시엡엠 유적 공부 잘 했습니다...
올리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따끈따끈한 캄에서 고생하셨네요...^^
유익한 글 고맙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기도 힘든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덕분에 캄보디아에 대해 공부합니다. ^^
준설을 못해 망한 왕조가 프랑크 왕국 하나인 줄 알았는 데..
준설 못한 호수가 물이 넘쳐 홍수가 나서 곡물 생산이 줄고
그 것이 나라의 멸망으로 기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