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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힘겨운, ‘다른 사랑’의 탄생
-황인찬, 이이체, 성동혁의 시들
안서현(문학평론가)
이체(異體)들이 온다
요즈음 평단의 관심이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게로 쏠리고 있다. 이른바 ‘1980년대생’ 시인들이 그들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포스트 미래파’라 호명하며 이들에게서 앞 세대인 ‘미래파’ 시인들과의 차별점을 찾아내려 진작부터 고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별이 뜨기도 전에 별자리부터 찾는’ 이러한 비평의 성급함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잇따르면서 이 신성(新星)들에 대한 개별적인 ‘관측’과 ‘이름 붙이기’부터 해보자는 것이 중론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도 황인찬, 이이체, 성동혁 시인들의 시를 중심으로 하여 ‘젊은 시’의 가능성을 살펴보되, 세대론적 의미부여에는 자못 신중하고자 한다.
‘젊다’는 것은 반드시 ‘새롭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다른 1980년대생 시인들에게도 이 말을 일반화하여 적용하고자 한다면 별도의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적어도 이 세 시인들은 공통적으로 존재론적 위기에 관한 감각에 의해 추동된 시 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가 몰락하는 문명의 징후를 품고 있든 혹은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든 간에(이이체의 경우에는 그러한 문명사적 징후가 여러 시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경우이며, 이 글에서 논하는 다른 두 시인의 경우에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시인들은 자기 세대의 고유한 경험적 세계(이를테면 몇몇 시인들이 보여주는 ‘성장담’의 세계)를 의미화하기 위하여 시작(詩作)ᅙᅡ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실존적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통파’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가 여지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들이 그러한 존재론적 고투 속에서 개성적인 시적 주체들―순서대로 몽상적 주체, 식물적 주체, 증여적 주체―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들이 치열한 존재론적 고투를 통과하며 산출해내는 새로운 시적 주체의 형식은 존재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지닌다(‘존재’라고 하기보다 ‘주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의 정치성은 ‘문학과 정치’라는 담론 영역을 점유한 몇몇 시인이나 평론가들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나타난 ‘다른 주체’, 그리고 ‘다른 사랑’의 가능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이체(異體)와 이형(異形)의 사랑의 형식에 주목해볼 시간이다.
예감의 세계, 그리고 꿈의 방어-황인찬의 경우
황인찬 시인은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의 「자서」에 “나무는 서 있는데 나무의 그림자가 떨고 있었다 / 예감과 혼란 속에서 그랬다”라고 썼다. 실로 이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에는 “서 있는 나무” 즉 안정적 세계와 “떨고 있는 나무의 그림자” 즉 불안의 세계가 기이하게 겹쳐져 공존하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한 예감(불길한 징조)와 혼란(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반어적 꿈이나 환상에 의한 혼돈의 이미지)이 절묘한 마블링(marbling)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황인찬 시인의 시에는 대개 불길한 예감이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집의 표제작인 「구관조 씻기기」에서 “나”는 구관조 기르는 법에 관한 책을 읽다가 구관조를 직접 씻겨줄 필요가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구절을 읽는다. 애정이 넘치는, 평온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라는 차분한 진술은 어쩐지 금방 “나”의 세계가 비닐로 감싸여질 것만 같은 폐소공포를 남긴다.
그밖에도 황인찬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바다에 있는데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라는 환청이 들려오거나(「파수대」), “귀신을 본다고 하는” 개가 “지금은 나를 보고 있”는 까닭에 기이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일도 있고,(「구조」), “불안과 슬픔”을 숨긴 채 “우리”가 그 옆을 지나가는 동안 “저수지의 수면이 생명을 얻은 무엇인가처럼 꿈틀거리”기도 하며(「저수지의 어둠」), 극소량의 독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독개구리를 잡아온 뒤에 그것을 보고 불현 “극소량의 공포”를 느끼는 “나”가 등장하기도 한다(「독개구리」). 장막 뒤의 어둠 속에서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어 너의 손을 잡”으려 하니 네가 없고(「장막의 뒤에서 자꾸」), 매미 허물을 들여다보면 “영혼을 빼앗길 거”라고 말하는 “너”의 앞에서 계속해서 매미 허물을 들여다보다 끝내 “너”에게서 “이젠 정말 끝이구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듣기도 한다(「말종」). 벽에는 징조처럼 “검은 얼룩”이 번지며(「얼룩-개종4」) 어느날 눈밭을 걷다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알아차리는 일도 있다(「예언자」).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는데, “저녁의 공원”의 일상적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돌연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라서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엔드게임」), 아카시아 향기를 맡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묻는 “너”에게 누군가 “네 무덤 냄새다”라고 불길한 대답을 하자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생각에 모두들 과장되게 웃기 시작하고(「유독」), “나”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는 내 머리 위를 선회하는 “검은 거위가 장단을 맞추며 계속해서 울”기도 한다(「세컨드 커밍」).
그리고 그중 가장 아름다운 시편이 바로 상실의 기미와 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주제를 포착해낸 바로 「기념사진」이다. ‘안정된 세계 위에 드리워지는 불안정의 그림자’라는 황인찬 시의 공식은 이 시에서 ‘아름다운 연인들의 마주잡은 손 안에서 느껴지는 어둠’으로 변주된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의 행복은 모래와도 같아서 일단 손에 잡힌 한 언젠가는 손을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사랑은 불행히도 늘 이러한 예감의 연속인 것인데, 이러한 사랑의 슬픈 진실을 시인은 ‘손 안의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해내고 있다.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 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전문)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것은 그것의 소멸이나 그것으로부터의 유리(遊離)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나”는 “너”의 두 손을 잡은 채로 걷는 순간에도 그러한 상실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여전히” “너”와 함께 걷고 있지만 “나”는 이미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기념사진”은 본래 그 사진 속의 대상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대상의 이미지의 포박(捕縛) 행위이다. 따라서 “기념사진”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이들의 사랑이 예속되어 있는 유한성이라는 조건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끝까지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시를 끝맺고 있다. 마치 이 해변 산책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임박한 별리(別離)―이 모래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의 기미를 부인하려는 듯이, 이 사랑의 장면을 언어 속에 영원히 결박해두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부인의 화법은 대상의 상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황인찬의 시적 주체의 일관된 전략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 「유독」에서 “너”의 아름다움을 보며 문득 불안을 느끼고 “계속 웃”으며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말로 그러한 불안을 방어하듯이, 「속도전」에서 “너”를 안으려 하다 말고 창의 커튼을 열어젖혔다가 “생각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놀랐을 때 “괜찮아?”라는 질문에 “괜찮다고 답”하듯이 그의 시 속 “나”들은 끊임없이 강력하게 부인한다. 불안에 사로잡혀 ‘말의 주술사’가 된 화자들을 우리는 본다.
이러한 ‘부인하는 말’과 함께 ‘반어적 꿈’은 그의 시적 주체에게 가장 강력한 방어 기제이다. 「무화과 숲」을 보자.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는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내다 보이는 집에 “나”는 머무르고 있다. 평온을 가장한 일상을 영유한다. 그러나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나”는 “그 사람”의 실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상실의 취소와 사랑의 성취에 관한 꿈을 꾼다. 미귀(未歸)하는 상실된 대상을 다시 눈앞에서 마음껏 사랑하는 꿈,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다. 이러한 꿈이 보여주는 현실의 역상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부터 나를 보호한다.
이렇게 현실의 반전상으로서의 ‘꿈’과 함께, ‘환상’ 역시 황인찬의 시적 주체들의 주요한 현실 방어 기제 중 하나이다. 그것은 주로 ‘사물화의 환상’으로 나타나는데, 가령 우리는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과 같은 시에 주목해볼 수 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중략)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위 시에서 “백자”는 눈부신 고유성과 함께, 사라지면서도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불멸성까지도 지니고 있다. 이에 “나” 역시 “백자”처럼 차라리 존재의 빛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남아 있”기를 선택한다. 이는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필사적 방어이다. 「건조과」에서 그려지는 “말린 과일”의 사물성 역시 이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라는 대목에서는, 차로 끓이더라도 계속해서 그 고유성을 유지하며 오히려 그 “향기”를 널리 퍼뜨리기까지 하는 “말린 과일”이 예찬되고 있다. 이렇게 소멸과 무화라는 존재론적 위기를 의연히 극복하는 사물들의 모습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초월한 어떠한 신성의 차원까지도 살짝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황인찬의 몽상적 주체에게 사랑이란 상실의 부인이며 죽음의 폐제(廢除)이다. 이 지점에서 시 「기념사진」의 의미가 다시 선명해진다.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랑의 순간을 한 장의 종이로 남기고자 하는 사물화의 꿈이기도 한 것이다. 존재의 빛과 향을 잃지 않는 “백자”나 “건조과”처럼 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사랑의 지속에 대하여 절박한 꿈을 꾸고 있다. 위태로움 속에 그러한 순정함을 감추고 있기에 「기념사진」의 세계가 더없이 아름답다.
식물 되기, 그리고 잎 속의 검은 입들-이이체의 경우
이이체의 시에서는 시 속의 주체가 세계 속에서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로 추락, 유기, 은닉, 유배, 망명, 외면, 격리, 배척, 배제, 탈각, 누락, 봉인, 수감, 소외, 폐쇄, 안치, 수몰, 거부 등의 시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서술어 가운데 가장 자주 채택되는 것은 ‘버리다/버려지다’라는 시어이다. “나는 버려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언젠가 네가 나를 버릴 것임을 안다”, “누군들 누군가를 버리지 않고서야 배길 수 있을까”(「Bestie Boy」)와 같은 문장들이 징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하고 직설적인 시어들 때문에 이이체 시인의 시 세계가 ‘세상에 유기되고 유폐된 고아’의 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내 분명해진다. 하지만 결국 ‘고아’란 이름 불리워질 수 없는 존재이며, ‘고아 의식’이란 끝내 언어로 발화될 수 없는 정서이다(「고아」라는 시를 그의 시 세계에 대한 지도로 활용하자. “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왜 내 이름이 아닌지 궁금해졌다.”(전문)). 따라서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말해진 것’ 혹은 사용된 어휘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보다도 오히려 말해지지 않고 평범한 시어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표정’을 읽어내는 일이 더욱 긴요하다.
가령 우리는 존재론적 알레고리로서의 “바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이체 시인의 시에서 바다는 시적 주체의 상상적 기원(起源)의 장소로 제시된다.
바다에서도 건지지 못한 물고기를
소금기 어린 모래 속에서 찾는다
텅 빈 소라 껍데기가 옹알이하는 소리,
신생아는 늘 징그럽고 하얀 느낌
나는 빨갛고 노란 점들도 있었는데
왜 파란 몽고반점만 남았지
그마저도 잃었지
여러 혈관들을 헤집고 다니는 상상을 한다
붉은 갈매기가 버리고 간
둥글고 넓은 거북이 등껍질
익사하지 않은 책을 그 위에 싣고 나는 떠난다
(「가족의 탄생」, 부분)
“나”는 자신의 기원에서 사랑의 신화를 삭제하고 “피는 발굴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자신은 “소금기 어린 모래 속”이라는 잘못된 장소에서 발견된, 숨을 헐떡이는 물고기였다고 그는 상상한다. 여기에 “빨갛고 노란 점들”을 잃었다는 근원적 상실의 서사가 덧붙여진다. 다른 시 「실외투증후군」에서도 이 기원적 장면은 유사하게 재상상된다. 이 시에서는 “내가 흘러들어왔던 바다”에서 “나”는 몸이 시렸고 모래에는 소금기가 가득하였다고 했다. 소금은 “하얗게 굳은 눈처럼 몸에 맺힌 채 / 떨어지지 않았”고 “소녀”는 소금기에 불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때 “나를 감싸안아주었”던 자신의 외투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외투를 잃어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그 목 언저리의 속살
너 또한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멀어지는 나의 빈 몸,
외투가 벗어둔 여생
너는 나를 벗고 간 거였구나 (「실외투증후군」, 부분)
자신의 정체와 관련된 시인의 존재론적 고뇌가 이 바다 알레고리 속에서 가장 눈부신 표현을 얻은 것이 바로 외투가 자신을 이 세상에 벗어둘 때 몸의 일부를 가져간 것이라는 위의 구절에서이다. 이 외투와의 결별 장면은 ‘근원적 이별로서의 삶’을 암시하고 있다. 황인찬 시인에게 존재론적 위기가 유한성(죽음)에서 온다면 이이체 시인에게는 출생에서부터 이미 그러한 위태로움이 깃들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단위가 되고 싶었”(「실외투증후군」)지만 외투를 잃어버리고 “빈 몸”이 되면서 그 일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 또한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다음 “나”는 다시 “홀몸으로도 단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스스로 “진심으로, 무성한 식물원”이 된다. 원초적 분리에 대응하여 이이체 시인이 홀로 충만한 주체, 자족적 주체로서의 식물적 주체를 상상해내고 있는 대목이다.
(전략) 잎보다는 입이 더 많았던 식물들. 화분이 눈엣가시처럼 남았다. 전부 다 죽여버리지는 못했다! 전부 다 죽여버리지는 못했다! 몇몇을 뺀 몇몇이 그리웠다. 음력으로 된 달력을 한 장 넘겼고 엎질러진다는 것이 애처로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이 행복하다고 중얼거렸다. (「Alacrima」, 부분)
식물성은 “나”가 선택하는 독신(獨身/瀆神)의 삶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식물원”은 그러한 “홀몸의 단위”를 받아들인 주체의 자족적인 공간이다(그의 세계는 아무래도 ‘자폐적’이라는 말보다는 ‘자족적’이라는 말로 더 잘 설명된다. 「나무 라디오」 연작의 차라리 아늑한 “실내 정원”의 세계를 참조하자.). “잎보다는 잎이 더 많았던 식물들”이 그곳을 메우고 있다. 기형도를 뒤집어 말해보자면, “입 속의 검은 잎”이 아닌 “잎 속의 검은 입”들이다. “입 속의 검은 잎”이 죽은 혀, 혹은 말할 수 없는 혀의 이미지였다면 “잎 속의 검은 입”은 고립된 입, 혹은 키스하지 않으려 하는 입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연인.」과 같이 타인과의 사랑의 풍경을 노래한 시는 이이체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드물고도 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첫 시집에서 거의 유일한 애정시이다.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중략)
우리는 유기되었다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이다
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올 것임을 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몸이 부풀어 오른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연인.」)
제목에서 ‘연인’ 뒤에 마침표가 찍혀 있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마침표는 시 속의 연인이 앞으로 열고 나가야 할 문이자, 그들이 이미 닫고 들어온 문이다. 이들은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인 동시에, 세계로부터 함께 “유기”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식(移植)과 고립의 식물적 주체가 세상을 향해 다시 열리는 존재론적 모험인 동시에 다시 둘만의 폐쇄적 낙원 속으로 들어가는 ‘식물적 사랑’의 발명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 / 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연인.」)라는 일구절에서와 같이 타자성에 대한 애무인 동시에 타자성을 지워나가는 기적인 사랑의 모순적 본질이 이이체 시인의 시적 주체에 의해 이제 막 발견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나갈 것인가. 앞으로 이이체 시인의 시를 더 읽어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일이겠으나, 일단은 낙관적이다. 황인찬 시인의 시 속에서의 사랑이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금세 손아귀를 빠져나갈 듯 안타까운 예감에 사로잡힌 것이라면, 이이체 시인이 그려내는 사랑은 지독하게 힘겨우면서도 금세 “몸이 부풀어 오”를듯 “예쁜 예감”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감의 시간, 그리고 증여의 모험-성동혁의 경우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출간된 시집 6에 실려 있는 성동혁 시인의 시들을 읽어볼 차례다. 황인찬 시인의 시 세계에서와 달리 성동혁 시인의 시 속에서는 백자가 존재의 무한성의 차원을 드러낼 수 없다. “도자기는 자주 깨지는 가구다 / 고정된 가구는 없다”(「창백한 화전민」)라는 언명이 말해주듯,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소멸의 위태로움을 숨기고 있다. 또한 성동혁 시인의 시에 드러나는 ‘유기’(“나는 그곳에서 버려진 후 이곳을 고향이라 소개한다”, 「유기」)되었다거나 삶에 ‘수감’되었다는 느낌은 이이체 시인의 그것과도 닮은 점이 있으나, 그것이 ‘잃어버린 몸’(이이체, 「실외투증후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몸’,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몸’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성동혁 시인의 시적 주체는 “나무처럼” “가슴이 열린 채로 묶여 있는”(「측백나무」) 육체의 수인으로 상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동혁 시인의 시에서 몸은 이중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편백나무가 사람의 팔에 꽂혀 있는 도시”, “팔뚝의 바깥 해체되지 않는 거대한 고체”에서는 딱딱한 고체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는 반면, “파라핀을 녹인다”, “누군가 날 따라올 순 없을까 던져지는 횃불” 등의 양초 이미지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여 / 당신의 묽은 제자가 되고 싶어요 / 묽다가 묽다가 맑게”(이상 모두 「쌍둥이」)와 같이 수액을 맞고 있는 이미지는 유동적 액체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몸이란 부자유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반대로 금방이라도 “창문을 활짝 열어 내 영혼이 갈 수 있게 해 줘요”(「촛농」)이라고 말할 것만 같은 불안정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성동혁 시인의 몸은 「쌍둥이」나 「그 방에선 물이 자란다」처럼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아픈 몸을 바라보는 ‘고통의 나르키소스’의 이미지이기도 하면서, 슬픔의 등고선을 상상하며 “우리의 얼굴은 참 구불구불하구나 / 어느새 낮아지고 높아지는지도 모르게 이어졌구나”(「독주회」)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와 같이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이거나, “난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 / 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에서와 같이 타자를 위안하거나 감싸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위로의 연인’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동혁의 시적 주체는 이러한 이중적인 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아픈 몸’의 두 가지 성격인 나르시시즘과 타자성 사이에서 그는 자주 후자를 택한다. “나”는 자신이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는 다만 일어나/ 실눈을 뜨고/ 푸른 간격으로 떨고만 있는 아이들에게/ 안대라도 씌우고 싶었다”(「측백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게 병실은 실존적 고통을 나누는 통로가 된다.
그의 시적 주체가 꿈꾸는 몸은 다름 아닌 타자에 대한 증여의 도구로서의 몸이다. 증여는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모험에 속한다. 마치 말건넴이나 시 쓰기가 언제나 그러한 모험인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타자에게 가닿고자 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모험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언제나 “오역에 의해 태어”난다(「독주회」).
성에가 낀 유리창으로 향하는, 나의 침대맡엔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내가 아주 희미해지면
누가 앉아 있을까
마지막 애인에겐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 둘 수 있다면”(「리시안셔스」 부분)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이라는 말과 함께, “나”는 다가올 미래에는 “내가 잠든 후에 잠드는” “당신”을 위하여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두고 싶다고 노래한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증여의 모험, 그것은 성동혁 시인의 시적 주체가 ‘무의미한 고통’의 육체에 의미를 불어넣음으로써 미래의 시간을 열어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새것을 먼저 갖고 하얗게 무르익는 나는 너의 형
나의 생일에도 그랬고 너의 생일 때도 그럴 거야
하얀색만 두고 알록달록을 해체하는 것도 재미있게
옷장 속에 레고를 두고 오듯
비탈길 아래로 나의 마을을 버린다
집을 떠나며
내가 챙겨 온 짐
동생아 그만 태어나 (「라일락」, 부분)
위 시에서 성동혁 시인의 시적 주체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쌍둥이 동생을 상상하여, 자신이 받은 것을 그에게 주려고 한다. 형으로서 항상 “새 것을 먼저 갖”는 일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진 “나”는, 동생을 위하여 “옷장 속에 레고를 두고 오”는 것을 신나게 상상한다. 솜사탕처럼 “달고 금방 사라지”는 하얗고 창백한 것들은 자신이 갖고, “알록달록”한 “레고”는 동생의 몫으로 두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을 태어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삶의 일부를 주는 일을 상상한다. 이렇게 쌍둥이 동생에 대한 증여 혹은 삶의 모든 것을 나누어갖는 분유(分有)를 통해 또 다른 미래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성동혁의 시적 주체가 꾸는 꿈이다. 그것은 자기 몸의 한계를 넘어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방식인 것이다(여기에서 마지막으로 꼭 부연해야 할 것은,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이며, 리시안셔스의 꽃말은 바로 ‘변치않는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변치않는 첫사랑, 그런 불가능한 사랑의 꿈을 시인은 이 시들에 힘겹게 담았다).
존재론의 귀환
지금까지 젊은 시인들 가운데 착실한 행보로 자신만의 시적 영토를 일정 정도 확립해가고 있는 시인들―황인찬, 이이체, 성동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시령(詩嶺)을 탐방해보았다. 섣부른 ‘성좌 그리기’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들의 시는 직전 세대의 시에 비하여 덜 난해하고, 덜 실험적이며, 또 스타일에 대한 욕심을 조금은 덜어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서정의 본령 쪽으로 조금은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출현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이것은 여전히 거꾸로된 독법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 아니라 그 ‘서정’이 산출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랑(주체와 타자의 동일화)에 관한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시 백 편에 걸쳐 벌이고 있는 존재론적 사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건져올린 한 편의 시를 가지고 너무 쉽게 ‘서정의 귀환’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소비적’인 독해 방식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시인들의 시는 ‘힘겹게 온 사랑의 시’다. 허약한(무너진) 존재의 기반 위에 주체를 일으켜 세우고, 그 주체로 하여금 끝없는 불안과 고립의 욕구와 육체의 고통을 넘어서 타자에게 말을 걸게 하고 손을 내밀게 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의 (불)가능성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이들의 시를 ‘서정의 귀환’이라 부르지 말고 ‘존재론의 귀환’이라고 부르자. 서정을 보지 말고 그것을 길어올리기까지의 치열한 존재론적 싸움을 보자. 그래야만 이들이 창안하고 있는 ‘다른 주체’와 이들이 발명해내고 있는 ‘다른 사랑’의 의미가 비로소 우리에게 돌올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