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고후4:6-10)
2016,8,2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난 주 중에 브라질 리우올림픽이 끝났다. 우리나라는 전에 비해서 기대한 것만큼 많은 금메달을 탄 것 같지는 않다. 메달을 딴 선수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고, 그들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금메달 숫자로만 선수나 국가의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봐야할 진짜 본질은 메달 색깔이 아니라 모든 선수들의 노력과 땀과 마음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어떤 것의 진정한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그 이면에 있는 보아야할 것에 숨겨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운동선수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면, 자칫하면 황금만능주의, 출세주의, 세속적인 성공주의의 늪에 빠지기 쉽다. 이처럼 마땅히 보아야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얼마 전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한국과 독일에서 은퇴무대를 가졌다. 강수진씨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인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고, 우리나라 국립발레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몇 년 전 강수진씨의 발이 세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연습에 찌들어서 휘어지고 뭉툭한 그녀의 발은 흉측하게까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발이 그 정도가 될 때 까지 매일 평균 19시간을 연습했고, 1년에 천여 켤레 신발이 닳도록 연습했다고 한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환호소리를 들으며 춤을 추는 것이 보이는 모습이라면, 그 이면에 숨겨진 그녀의 발은 우리가 보아야 할 모습이다.
이러한 시각을 갖는 것은 영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점잖은 양복을 입고, 손에는 검은가방과 두꺼운 영어책을 들고있는 사람이라도 그의 겉모습 보다 그 영혼의 안타까운 상태를 먼저 보아야 하고, 반대로 아무리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의 겉모습보다 그의 영혼의 귀중함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성경 속에서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세상이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겠지만, 이 모든 것보다 진정으로 가장 먼저 보아야할 근본적인 것은 이 모든 것 위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본다’라는 말은 바꿔말하면 ‘그것이 곧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개인적인 말씀묵상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또는 음성을 듣는 것)이라면, 설교는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으신(=성도들이 보아야할)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모세는 인류역사상 가장 크게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일군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출애굽을 주도했고, 홍해를 갈라지게 했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던 사람이었다. 모세는 애굽군대와 홍해 앞에서도 홍해나 애굽군대를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이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아야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볼 때, 우리가 마땅히 보아야할 것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홍해 같은 상황 속에 처해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이요, 우리들이 마땅히 보아야할 모습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이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광야훈련소에서 혹독한 훈련의 시기를 거쳤다. 우리가 다윗에게 보아야할 것은 다윗이라는 사람 이전에 극한 고난 중에서 늘 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를 더욱 성숙시켰고, 왕으로서 자질을 준비시키셨다. 그래서 사울왕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셨다. 높은 건물일수록 기초를 더 깊이 파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실 때, 보이는 것을 보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은 고난보다 고난 너머에 있는 즐거움(구원사역의 완성, 하나님의 영광, 부활승리, 영생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것은 지금 내가 나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때로 다른 사람은 둘째치고라도 내가 나를 바라볼 때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흙수저처럼 하찮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김빠진 음료수나 힘없고 하잖은 시골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에, 낙망과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연약하고 초라한 나의 껍데기가 아니라, 내 속에 숨겨진 보배다. 그 보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본문말씀인 고린도후서 4장 6-7절을 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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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귀중함은 나의 질그릇같은 외형적으로 껍데기(환경, 조건, 외모, 몸상태 등) 같은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에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앞으로 ‘가질 것이다’가 아니고, “가졌으니”라고 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질그릇같은 모습이라도 내 안에 예수님이라는 참된 보배를 가졌기에 우리는 이미 심히 큰 예수님의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흔히 상당수의 신자들이 이 점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큰 능력 주시면 그것을 받아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겠노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앞으로 승리할 것이다(또는 승리할지도 모른다)’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이미 승리했고,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록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아직 안변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했고, 내 안에는 이미 성령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굳센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확신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9절에서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나를 보지 말고, 매사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고 싶으신 보배로운 복음의 비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배후에 숨겨있는 보아야할 것들이다. 세상 사람들을 볼 때나, 성경 속의 인물이나 사건 또는 우리들 자신의 상황이나 나 자신을 볼 때에 보이는 것 보다,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보라. 그리고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도 함께 하고 계신 것을 확신하라. 질그릇같은 모습이라 할지라도 이미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있다. 이러한 믿음과 시각을 갖을 수 있도록 이 시간 성령님께서 내 눈을 열어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순종할 수 있는 힘주시기를 간구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