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39 10걸’(8) 晩翠 김정의
김정의(金正義)가 누구인가. 늘 깔끔하고 주위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친구 김정의를
대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가 서울 돈암동 집을 떠나 대구로 옮겨간 해가
1975년이라고 하니 서울친구들 중에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울 친구들의 아이들 결혼식이나 연주회 또는 이런 저런 모임에 대구의 누구보다도
자주 나타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많으리라.
작년 11월 정귀호 동문의 장녀 플롯 연주회에 친구동문의 손녀까지 데리고 와서 우아하게
참석의 예를 표하고 돌아가는 모습이나, 대구 친구들의 국회 단체방문 후에는 분당의 이윤재를
만난다고 어느 새 그가 보낸 차를 타고 청와대 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필자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선구적이라는 말이 맞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찍이 자기 사업을
시작했던 사람이다. 1969년경 우리가 모두 초짜 샐러리맨 시절 그는 회현동에 사무실을 두고
정룡산업이라는 콘 수프(Corn Soup)식품 제조 판매를 하면서 TV에 매일 식품광고를 내고 있었다.
그 무렵 이택근, 정귀호, 정지태와 필자 등은 토요일 오후 등을 택해 그 사무실에서 막 배운 포카를
멋모르고 함께 하기도 했지만 식품의 수요예측과 광고비에 관한 조언같은 것은 할 생각도 못했다.
지금의 대구 김정의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무엇보다도 의사들과의 친분과 장학재단
및 경북대 병원 발전 후원회 이사로서의 능력과 명성(?)을 우선적으로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깔끔한 매너와 아이디어에 매료된 경대의대의 주광 전 학장이 선친의 유산(100억원이라던가)
으로 세운 한곡의료장학재단의 상임이사를 오랫동안 그에게 맡기고, 이어 김극년과 이재섭이
각기 이사장과 이사를 맡은 경북대병원 발전 후원회의 이사를 함께 하면서 바야흐로
그의 봉사정신과 기여도는 한층 더 꽃을 피울 전망이다.
이미 오세용, 조복제, 최희장 등도 병원 발전을 위하여 일조를 하고 있고,
친구의 친척들이 저명의사의 치료를 받고 싶어 할 때에는 김정의의 소개가 제법 큰 도움도 되고
있다는 소식이니 우리 동창들은 이래저래 기분이 좋아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외모가 깨끗하고 복장도 항상 단정하다.
그리고 좋은 의미로 눈치가 빨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늘 잘 헤아리고 편하게 한다.
그가 법관 출신인 대구의 지홍원, 서정제나 은행장을 역임한 김극년,
또 확실하고 탁월한 기업가인 이재섭 회장이나 신망 받는 우리의 대표선량 정해걸 등과
비교적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의 이러한 성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창들 가운데는 혹 그의 이러한 깔끔함에 대하여 일종의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라고 하여 왜 어수룩하고 힘든 구석이 없겠는가?
그는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서 색스 폰을 불었다. 강영기 선생님이 음악을 담당하실 때에
(구) 키네마에서 열린 고교 밴드 경연대회에서 대륜, 계성을 물리치고 1등을 했던 기록을
그는 가끔 자랑한다. 그런데 그 1등도 사실 최상묵 선배의 플롯 실력을 바탕으로 합주곡을
소화하도록 이끈 고 강영기 선생님의 작전의 승리였다고 그는 지금 찍어 내고 있다.
외동딸을 시집보내고 부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낸 그는 쓸쓸함으로 가끔 술을
마실 법도 하지만 그는 사실 술이 매우 약하다. 그의 호가 滿醉가 아니라
늦을 晩 비취새( 쇠새 또는 물총새라고도 부르는 듯)翠의 만취(晩翠)인 점도 친구들이
잘 새겨볼 일이다. 한 마리 늙은 물총새임을 자처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그가 실제로
좋아하는 것은 술이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이재섭이나 지홍원의 표현대로 하면 그의 노래실력도 옛날에 비해
괄목할 만큼 늘었단다. 본인은 기분에 따라 옛날 곡, 최신곡을 가리지 않고 부른다지만
그중에서도 자주 부르는 노래가 ‘목로주점’과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나?.
이제는 그가 더 이상 마음 갈 곳을 잃지 않도록 친구들이 더 좀 마음을 써주는 것이
그런대로 한편의 아름다운 정경이 될 수도 있을 법 하다.
ㅡ 晩翠가 잘 부른다는 ‘목로주점’과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는 올리지 못해
언제 들어도 정겨운 흘러간 옛노래 白年雪이 부르는 '나그네 설움'을 삽입했습니다.
첫댓글 별난 세계 체육세계에서 오래 친구들 멀리 하다시피 지나온 세월 .金某는 가까이 하는 친구가 그의 한정되다 시피한 교우관계다. 솔직히 나는 김정의를 잘 모른다. 놀라운 것은 그를 포장 하는 작업을 정암이 해줄 정도의 인물임에 놀라고 앞으로 크게존경 해야 겠다. 그는 주로 상류사회 인사와 교유한 특징과 재주가 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그러나 그는 어떤 길흉사 이건 열심 이라는 동문들에 대한 애착이 훌륭 하다고 해야 겠고 그래서 정암이 이렇게 그를 포장 해주나 보다
滿翠 김정의 형을 잊을 수가 없군요. 素愚형이 그 따님의 결혼식때 촬영한 사진들을 들고와서 몇장의 사진들을 만들어 달라고해서 5*7사이즈로 만들어서 등기우편으로 발송했더니 보름 후에 사진이 반송이 되어왔었습니다. 그 사연은 매일 부인의 간병을 하느라 수취를 못했다고 후일 들었습니다. 그리고 49제에 쓸 영정사진을 만들어 준 인연으로 98년말 신장 수술후인 다음날 국채보상공원의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시각인 자정이 조금 넘어 동문 다섯명과 함께 경대병원에서 평생을 잊지 못할 문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떠나면서 며눌아이에게 슬적 위문금까지 쥐어주고 갔습니다. 언젠가 글로 써보고 싶었는데 한 마디로 깔끔한 신사입니다
晩翠와는 우연한 술자리에 두어번 같이 앉아본것 밖에 이렇다할 교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참 일본 말로 해서 사와리가
좋다고 할까, 대인 관계가 원만한 그런 인상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뒤
전화도 한번 못한 실례를 사과 하고싶다.
定庵의 담담하고 물 흐르는듯한 글이 晩翠를 잘 모르는 동문들이 그를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 같다.
만취는 나에게, 어머님이 우중하실때 먼저 찾아와서 대학병원에 어려움이 있으면 내가 도와 줄수 있으니 서슴없이 말하라며 상대방의 고충을 헤아려 손을 내미는 친절을 보여 주었네. 정말 고마웠오. 정암형의 소개를보니 정말 도움을 처리할수 있었구려. 허세도 부리지 않고 진정으로 다가오는 친절, 잊을수가 없구려.
어제(3월 4일) 대구에서 김정의형을 비롯해 지홍원 오세용 최희장 최태호 김상한등 제형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오늘 늦게 상경, 귀가 즉시 39카페를 열어 보니, 정암형이 晩翠형을 못말리는 39 10걸로 소개하였네요. 만취형은 예나 지금이나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하는 성품에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 함께한 친구들께 재삼 감사 드립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조회 수가 78회를 기록하고 있네요. 만취의 친화력과 동문에 대한 남다른 우의에 정암의 모범답안 같은 글이 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루는데, 백년설의 흥겨운 가락까지 곁들여지니 정말 분위기 좋습니다.
만취와 인연은 중,고교동창이다가 살던동네마저 남산동에서 이웃하고 지냈다,그이후 만취가 서울사업을 그만두고 대구에 왔을때부터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고 있다,그동안 그많은 세월은 책이 한권이라도 부족할것같다,집안에서는 엄한 어머님앞에 무릎을꾾는 효자였고 가족에게는 신의와사랑으로 부부싸움하는것을 한번도 본일이없다,무엇이든지 한번듣고 보고한것은 기억하는데 천재적소질이 있고,서울이던 지방이던 모르는 동문을 물어보면 모르는이가 없을정도이고,동문들의 크고작은일에도 꼭참석하여 축하,위로를 해왔다,만취야말로 중앙/지방인사를 총괄하는"못말리는39 10걸"중 1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간에 이루어지는 정이란 묘한 것이다. 만취와는 사귄지 오래지는
않다. 그의 인품은 누구와도 꺼리낌없이 대할 수 있는 푸근 함을 준다. 정암
형의 언급처럼 화술이 뛰어나서 좌중을 잘 이끌고 가는 재치와 분위기를
조정하는 기술을 잘 터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임에는 그의 조언이
필수다. 최근에는 친구들에 대한 그의 배려는 과공비례 일 정도다. 엄동설한의
푸른 솔 처럼 늦게 더욱 푸르른 솔 같은 친구다. 오래 오래 푸르기를 바라며.......
대구의 藝頌, 瑞軒, 小湖가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너무나 생생히 더 알려주어 저의 스켓치가 오히려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정의의 결혼식 때 사회를 봐 준 기억이 있지만 부인이 세상을 뜰 때는 문서로만 조의를 표해 무언가 미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덧붙이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아, 침묵하기로 합니다., 만취 김정의 대형 한결같기만을 빕니다.
晩翠는 주변사람들의 길사는 물론 어려운 일에 적극 참여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대구39동문들은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부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팔공산 동화사에서 근신하다싶이 백제를 마치고 주위에 대한 배려심으로 친구들께 조금도 부담되는 말한마디없이 항상 맑고 밝은 마음으로 생활을하며 그의 사회성과 봉사자세는 타고난 성품인것 같습니다. 그가 즐겨부르는 최백호의 " 내마음 갈곳을 잃어"에서 벗어나 이젠 "꿈이여 다시한번"을 불러 PMA가 더욱 풍부하길 또 깔끔한 신사 晩翠의 건투를 빕니다. 定庵의 晩翠에 대한글은 더욱 뜻이 있는것 같습니다.
이름 없는 직장인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십오명이였다. 그것이 오늘까지도 달마다 만나고 있는 무명회다. 그 무명회가 시작될 때부터 총무를 맡아서 지금까지 열다섯명의 친구들을 위해서 헌신 봉사하고 친구들이 어려울 때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돌봐주었던 우리의 희망이다. 대구에 살면서 서울, 부산, 대전, 등지에서 오는 친구들 눈살하나 찌푸리지 않고 반갑게 접대해서 보내곤 하는 친구다. 특히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친구다. 나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앞장서서 그 일을 해결해준다. 의성군수시절에 지역에 환자들이 생기면 친구에게 모든 떠 넘기면 다 해결해 주었다. 정의의 친구 정의!
定庵大兄. 늙은 물총새 한마리를 너무 하늘높이 올려서 정신이 아찔합니다.이모든 것이 버팀목이 된 39동문과 좋은 분들이 계셨기때문임니다. 우정어린 목소리로 잘보살펴주고 지도하여 주셨기에 晩翠는 작은봉사를 할수있는 것임니다.定庵大兄. 살아있는 동안 열심이 사회봉사 하라는 뜻으로 받아 드리겠음니다. 定庵大兄.서여사님. 항상 건강하시기를..댓글올리신 친우분 (劍農.藝頌.溪山.一松.東山.鶴軒.瑞軒.小湖.定庵.綠松.鄭貴鎬.丁海杰.))大兄에게 머리숙여 감사드림니다.변함없는 우정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 가시기를 바람니다.晩翠...(.영안양 첼로독주회 꼭 참석하겠음니다.) cyber 초보라서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