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국가의 새로운 상상력 /권보드래 | 문학강좌 2005/06/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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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소설의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권보드래(서울대)
1. 가족․민족․국가라는 말
2. 나라와 집― 은유와 환유의 놀이
3. 동등권의 의미와 母性 교육론
4. 부부 관계의 재구성과 계약
5. 家父長, 혹은 민족주의와 은유의 힘
1. 가족․민족․국가라는 말
대부분의 어휘가 그렇듯 가족․민족․국가 등의 단어 역시 그 자체로 새삼스런 관심을 끄는 일은 별로 없다. 家族․民族․國家라고 한자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이들 단어는 또렷한 실체를 갖지는 않을지라도 그때 그때의 맥락 속에서 일정한 합의를 생산하면서, 투명한 의미 전달체vehicle로 행세하고 있다. 그렇지만 ‘家의 族’, ‘民의 族’, ‘國이라는 家’라고 단어를 분해해 본다면 좀 다르다. 한 집의 무리, 백성의 무리, 나라라는 집…이란 무슨 뜻인가? 근대 들어 새로 창안된 번역어 ‘민족’은 물론이거니와 ‘가족’과 ‘국가’ 역시 字意를 규명함으로써 의미를 속속들이 밝힐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곧이곧대로의 字意는 오히려 원래의 글자 뜻이 어떻게 오늘날의 다양한 용법으로 변화했는가, 곧 어떻게 수사학적 전이가 이루어졌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물음을 떠올리게끔 해 준다.
‘가족’이란 본래 가문의 구성원을 총칭하는 개념이었다. 漢書 公孫賀傳에 “家族巫蠱之禍, 起自朱安世, 成於江充”라는 서술이 있으니 주안세와 강충의 滅門之禍를 일컬은 것이요, 鮑照의 시에 “一身仕關西, 家族滿山東”이라는 구절이 나오니 멀리 벼슬길을 떠나온 후 가깝고 먼 친족이 모두 산동 지방에 남아 있음을 탄식한 것이다. 이때 ‘가족’이란 부부 한 쌍을 중심으로 하는 오늘날의 ‘가족’과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국가’ 또한 왕실 및 그 영토를 가리켰으나 보다 좁게는 卿․大夫의 관할지를 뜻하였고, “國家年少”라 쓸 때처럼 때로 천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일본의 江戶 시대에 ‘국가’란 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61) 독립 관할지라는 뜻에 가까웠던 ‘국가’가 nation의 번역어로서 정착하게 되기까지는 邦國․國 등과의 경쟁을 거쳐야 했으며62) 國과 家를 연결시키는 발상 자체를 새롭게 정비해야 했다. ‘가족’과의 相似性에 기반해 생겨난 ‘민족’이라는 신조어 또한 ‘국가’의 새로운 용법을 만들어 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충고를 떠올려 본다면 身→家→國→天下로 이어지는 확산의 상상력은 예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관계는 근대 들어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저가 진실로 개혁 쇄신한 정치 아래 살며 나라집에 한 충실한 신민이 되기를 바라더니”63)라든가 “우리 시조 단군께서/ 태백산에 강림하사/ 나라집을 창립하여/ 우리 자손 주시셧네”64)(강조 인용자)에서의 ‘나라집’이라는 낯선 어휘 또한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국가’라는 한자어의 한글 대응어인 ‘나라집’은 근대의 ‘국가’라는 단어가 나라와 집이라는 단위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국가’는 근대적 변이를 거쳐 새롭게 유행하면서 “一人이 積하야 一家를 成하고 一家가 積하야 一鄕을 成하고 一鄕이 積하야 一國을 成”65)한다는 人․家․鄕․國의 선 중에서, 또한 身․家․國․天下라는 전통적 연상 중에서 家와 國을 특별히 강조하였고, 둘을 직선으로 연결시켰다. ‘국가’라는 단어에서 나라와 집의 연결을 目睹하고 그 관계를 통해 사회의 새로운 이념과 조직 원리를 개발해 내려는 상상력― 1900년대는 이런 상상력의 토양이자 그 산물이었다.
2. 나라와 집― 은유와 환유의 놀이
‘국가’라는 단어는 나라와 집 사이의 연관을 직접 함축한다. 서구의 ‘nation’이 가족과의 관련을 간접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데 비해, ‘국가’라는 말은 단어 자체로서 나라와 집을 동시에 연상시킬 수 있다. ‘국가’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전부터 있었던, 집의 조직 원리를 통해 더 큰 단위를 이해하려는 발상은 ‘국가’의 유행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라는 조광조의 유명한 절명시가 보여주듯 군주에게서 부모의 모습을 겹쳐 보는 상상력은 널리 퍼져 있었고 나라와 집을 같은 원리로 설명하려는 논리 또한 그러했으나, 1900년대 들어 나라와 집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수사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연상의 경로는 다양했다. 한국어의 ‘집’이라는 단어가 가옥과 혈연 집단을 동시에 가리킨다는 특수성 때문에, 나라와 집을 연관짓는 상상력은 처음부터 두 갈래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국가를 가옥에 빗대는 쪽이라면, 다른 하나는 국가와 가족의 관계를 다양하게 설정해 보는 쪽이었다. 국가를 가옥에 비유하는 상상력은 지금은 별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양 보이지만, 1900년대 당시에는 관용적 수사가 될 정도로 널리 활용되었다. “국가라 하는 것은 만민의 자기 가옥”66)이라는 발상은 위기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낡은 가옥의 예를 들어 애국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수사학이 특히 자주 등장하였다. “큰 집이 하나 있는데 잘못하다가 무너지기가 쉽거늘(…) 힘을 다하여 그 집을 일으켜 세울 생각은 적고 만일 그 집이 무너지면 다른 데 또 큰 집이 있는 줄로 생각하더라”67)는 비유는 곧 국가의 위망을 구해야 한다는 결심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곧 일개 큰 집”이라 “대저 민족이 집을 잃으면 그 민족은 멸망되”기 마련이라고 했다.68) 혈연 집단으로서의 ‘집’이라는 의미가 가옥으로서의 ‘집’에 섞여드는 일도 적지 않았다. 가옥을 잃을 위기를 말하고는 이어 사천년 동안 이어져 온 족보, 삼천리에 달하는 田庄, 그리고 한 조상이 자손인 이천만 민족을 들어 한국이 “엄연히 일개 큰 집”에 비견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격이었다.
‘국가’라는 말이 가옥으로서의 ‘집’을 연상시킬 때 용법이 비교적 단순한 데 비해, 혈연 집단으로서의 ‘집’에 이어지는 ‘국가’의 의미는 좀더 복잡하다. 그 복잡성은 어떤 가족상을 전제하느냐에 따라서, 또한 나라와 집의 일치를 어떤 각도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나라는 가옥과 마찬가지이니 무너지면 몸 붙일 곳이 없으리라고 설득할 때, 나라와 가옥은 당연히 1:1의 자격으로 수사학적 일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나라를 가족에 빗댈 때라면 그 관계는 1:1의 대응일 수 있는 동시에 여러 가족이 모여 국가를 이룬다는 집합적 증식일 수도 있었다.
(가) 여보시오 동포님네 내 육신이 생겨나면 한 집안의 혈속이나 이천만의 형제 되어 한 강토에 생장한다 나라이라 하는 것이 한 집안과 일반되니 몸과 나라 그 관계가 이렇듯이 밀접하고69)
(나) 今夫 國이란 者는 일가족의 결집체(西諺에 云, 국가란 者는 가족 二字의 大書)며 역사란 자는 일국민의 譜牒이라.70)
(다) 나라라 하는 것은 여러 가정을 합한 것이라. 좋은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고 좋지 못한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지 못하나니, 이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가정에서 시작할 것이요 가정을 다스리는 도는 실로 혼인에서 시작할 것이라.71)
국가라는 말에서 가족이라는 혈연 집단을 연상하는 상상력은 크게 두 가지로 방향을 잡는다. (가)처럼 나라란 한 집안과 마찬가지라고 역설하는 쪽이 하나의 방향이라면 (다)처럼 국가란 여러 가정의 총합이라고 주장하는 쪽이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각각 은유의 상상력과 환유의 상상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두 축72) 사이에 (나)와 같은 절충이 있다. 신채호는 먼저 “國이란(…) 일가족의 결집체”라고 함으로써 여러 가족이 모여 국가를 구성한다는 환유의 상상력을 지지하는 듯하지만, 괄호 안의 주석을 통해 “국가란 자는 가족 二字의 大書”라고 할 때부터 환유는 교란되기 시작한다. 가족을 확대한 것이 국가라는 말은 곧 一家의 상상력으로 국가를 해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어 “역사란 자는 일국민의 譜牒”이라는 말이 국가와 가족의 1:1 대응 관계를 승인하면서 수사는 환유에서 은유로의 이동이라는 양상으로 일단 종료된다.
가족을 국가의 은유로 바라보든 국가의 일 요소라는 환유적 상상력으로 바라보든, 국가가 “일정한 토지와 인민”을 구성 요소로 하는 정치적 결사체라는 생각은 1900년대에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비록 “인민과 토지가 생긴 후에는 임금이 통치하는 권리가 있어”라는 식으로 군주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添言이 종종 따라다니기는 했지만73) “백성은 오직 나라 근본”74)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국가’라는 말이 일정한 지역과 군주․조정을 함께 의미했던 전근대의 공존은 이로써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동시에 ‘국가’라는 말을 둘러싼 상상력 또한 차츰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 이전에도 그러했거니와, 1900년대 초에 우세를 점한 쪽은 나라가 한 집안과 마찬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은유적 상상력이었다. 군주를 부모에 빗대는 수사학의 영향력 또한 아직 뚜렷하였다. “임금은 집안 어른이요 백성은 자식들”75)이니 임금은 백성을 애휼하고 백성은 임금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군주가 곧 국가는 아니요 다만 통치자일 뿐이라는 제한이 역설되는 가운데서도 군주의 특별한 지위는 거듭 인증되었다.
이같은 상상력은 조선 후기에 확립된 가부장제 가족의 모습을 국가의 상에 겹쳐 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른바 壻留婦家 관습에 따라 남편과 아내 양쪽의 가족을 모두 포괄하는 가족 형태가 다수를 점한 것이 조선 전기까지의 사정이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남편 쪽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직계 가족이 지배적인 가족 형태가 되면서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확고해졌다.76) 조선 후기 들어 유교 윤리가 강화되고 신분 제도가 엄격해지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군주를 부모에 비견하는 수사 역시 가부장제 가족 내의 엄격한 상하 구별을 전제해야 했다.
그러나 가부장제적 상하 질서는 1900년대의 새로운 정치․사회상과 부조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부조화는 가부장제 질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부모의 자애와 자녀의 자발적 애정을 강조하는 전환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神을 大君主․大父母로 선전한 기독교의 영향력도 컸다. “성경 중에 세상 사람은 다 한 아버님의 자녀라 하는 말”77)은 부모자식의 관계를 신인간의 영역으로 이월시키면서 국민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각인시키는 논리가 되었다. 뒤늦게 전파된 프로테스탄트교가 “교황의 명령만 준행”하는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사람마다 각기 제 권리가 있어 각기 스스로 빌게 하매 남이 대신하기를 허락지 아니”하려는 자세로 설명한 것78) 역시 모든 국민의 평등이라는 사상으로 합류되었다. 이전에는 “나라이 위태한 때를 당하여도 백성은 전혀 권리가 없으므로 나라의 위망을 정부에다만 미루”79)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국가의 성쇠가 진신과 평민에게 관계가 다르지 아니하”80)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공동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주백성의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에 견줌으로써 국가를 이해하려는 은유가 힘을 잃었을 때, 새롭게 제시될 수 있었던 은유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아마 형제 관계를 앞세우는 상상력이었을 터이다.81)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同胞’라는 말이 민족 전체를 일컫는 말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형제의 은유가 새로운 국가상을 형성하는 데 유력한 근거일 수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동료 신자를 형제․자매라 불렀던 기독교 수사학의 영향도 있었다. “예수를 믿는 형제 자매”82)라는 수사는 관습적인 것이었으니, 예컨대 눈물에서 악녀 평양집을 구원한 구세군은 계속 평양집을 ‘자매’라 칭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의로 맺은 형제 관계라는 설정 또한 신소설에 종종 나타난다. 월하가인에서 남편이 노동 이민을 떠난 후 갖은 고난을 겪던 장씨 부인은 장시어와 의남매를 맺은 후 그 보조에 의탁해 살아가고, 시가에서 쫓겨난 봉선화의 박씨 부인 역시 의남매로 결연한 차두형․갈춘영의 도움으로 연이은 위기를 벗어나며, 능라도의 도영은 간호부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인 다과점을 경영하는 김운경과 “형제지의”를 약속한다. 특히 월하가인에서의 장씨 부인장시어와 봉선화의 박씨 부인차두형은 희생자 대 유혹자였던 관계에서 의남매 관계로 변화를 겪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온통 순결성의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이들은 예외적으로 호의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여성과 남성이 ‘同胞’의 관계로 다시 조정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빈상설이 이란성 쌍둥이인 남매를 등장시킴으로써 여성과 남성의 동등권을 상징적으로 제안했듯, 신소설에서의 의남매라는 상은 국민 모두가 ‘同胞’로서 결속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위를 부정하고 형제애를 앞세우기에는 기존 가부장제의 질서가, 또한 군주의 위상이 너무나 막강하였다. 長子의 특권이나 嫡庶 차별의 전통 또한 걸림돌이었다. 평등한 형제애가 지배적 이념이 되기에는 현실적 난관이 많은 상황이었다. 가족과 국가를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이 지점에서 방향을 튼다. 가족의 모습을 빌어 직접 국가를 표상하기보다 가족이 국가의 중요한 요소임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까지도 ‘國父’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은유의 상상력 역시 계속 존재했지만, 전근대와 다른 ‘국가’의 상을 세우는 데는 환유의 상상력 쪽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나라라 하는 것은 여러 가정을 합한 것”이라는 환유는 물론 “나라이라 하는 것이 한 집안과 일반”이라는 은유에 의해 계속 제약을 받았다. 마치 “만일 내가 없으면 나라에 일 개인이 없어서 나라의 일분 힘이 감하나니”83)라 하여 개인을 국가의 한 요소로 평가했던 환유가 국가란 “참 나”, “큰 나”이고 國事의 성패가 오직 “나 하나 때문”이라는 은유의 상상력84)으로 계속 포섭되었듯, 가족의 의의 또한 국가와의 직접 일치라는 색채를 한켠에 띠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개인․가족 등의 소단위를 자율성을 지닌 일 요소로서 주장하게 된 것은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 이후, “小로는 자기의 사익을 得며 大로는 전국의 공익을 圖지어다”85)처럼 개인․국가와 私․公을 병렬시키는 발상이 일반화된 이후였다. 자율성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채로, 그럼에도 1900년대에 가족은 국가의 기본 단위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가족 공간이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제일 강조된 것은 교육이었다. 집안을 가리키는 동시 중앙 뜨락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던 ‘家庭’이 새로운 용법을 구축한 것 역시 교육과의 관련을 통해서였다. 1900년대에 대대적으로 유행했던 ‘가정교육’이라는 말, 이것이야말로 가족을 국가의 기본 단위로 선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의 최대 화두였던 교육은 지육․덕육․체육이라는 범주로 이론화됨과 동시에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의 삼분법을 통해서 정리되었고, 특히 어린 시절에 행해지는 교육의 의미를 절대시함으로써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서 위치지웠다. “예로부터 교육이 발달되는 근본은 가정교육에 있”86)는바 “일반 남녀교육은 학교에 있고 학교 기초는 가정에 있고 가정의 기초는 태내교육”87)에 있다는 식으로 가정교육, 그 중에서도 영아 교육의 의미는 지대하다는 것이었다. 가정은 미래의 국민을 훌륭하게 길러냄으로써 국가의 기본 단위로서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고 했다. 가정은 국민 양성의 책임을 나눠 맡음으로써 “나라라 하는 것은 여러 가정을 합한 것”이라는 환유의 수사를 이룩할 수 있었다.
3. 동등권의 의미와 母性 교육론
“나라는 곧 백성의 나라”이며 “한 민족의 가진 바”라는 선전88) 속에서 한국의 근대는 개시되었다. 국가의 핵심은 국민이요, 국민이라면 모두 평등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班常․老少․男女 같은 전통적인 구별의 선은 약화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같은 개인이요 모두 같은 자격으로 가족에 귀속되어 국가를 구성한다는 사유를 설득하려면, 예컨대 主家에 속해 있던 노비 역시 독립적인 가족을 구성할 수 있어야 했다. 조선 후기 들어 가족 형태를 강화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主從 관계에 일차적으로 매여 있던 이들89) 역시 개인가족국가의 선을 구축할 수 있어야 근대의 가족․국가는 성립할 수 있을 터였다. 신소설에 등장하는 노비는 여전히 主家의 질서에 수렴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난의 여정 중에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실현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치악산의 검홍이나 추천명월의 김순, 재봉춘의 계순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고목화의 갑동이나 봉선화의 은례, 목단화의 금년 등은 후자에 속한다. 惡婢가 정절 지키는 데만은 엄격해서 결국 상전의 동생과 정식 혼례를 올리게 된다는 설중매화의 설정이나 경제적․사회적 자립을 위해 악행도 불사하는 점순이라는 인물형을 소개한 귀의 성의 묘사 역시 전통적인 주종 관계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班常이나 老少의 차별을 철폐할 것보다 한층 꾸준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권이라는 주제였다. 班常 차별에 대한 비판이 “국가의 성쇠가 진신과 평민에게 관계가 다르지 아니하”다는 소극적인 선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老少 위계의 전도 또한 자녀 교육을 강조하는 간접적인 양상을 띠었던 반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이었다. “나라의 분자에 근본된 것과 의무를 부담한 것이(…) 남녀가 다르”90)지 않으니 “여자 동포는(…) 남자와 같이 활동하여 국가 분자된 자격을 잃지 말고 자의자식할 능력을 얻”91)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一男一女는 均히 上帝의 자녀”92)이니 “동등의 학문과 동등의 지식과 동등의 기예와 동등의 사업을 무애히 함께 할” 기회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93) 陰陽의 이치를 동등권의 근거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의 자질이 다르고 맡은 바가 다르다는 시각이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윤치호는 서재필과의 토론 와중에 “구라파 각국에서 남자가 여자를 경대함은(…) 남자의 강함으로써 여자의 약함을 보호함이요 여자가 남자의 동등권을 가진 까닭은 아니”며 게다가 “대한 인민은 몇천년을 이미 구습에 젖어 남녀가 유별”하니 “학문을 어찌 함께 배우며 강약이 현수한 즉 동등권을 어찌”94) 줄 수 있겠느냐고 회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남성만으로도 직업 경쟁이 치열한 마당인데 여성의 사회 참여를 실제로 용인할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여자가 생리상 정신상에 멀리 남자에 不及함은 天定한 성분”95)이라거나 적어도 “남녀의 책임은 다르”96)다는 견해 또한 드물지 않았다.
남녀 동등권의 실내용이 무엇인지는 사실 따져보아야 할 문제였다. 일본에서 森有礼가 유명한 「처첩론」을 쓰고 잇달아 福澤諭吉이 「男女同數論」으로 일부일처제를 남녀 동등권의 기초로 강조했을 때, 역시 근대화론자 중 한 명이었던 加藤弘之는 서양 풍습이 스며든 流弊라며 반감을 표시하였다. “서양 풍속에 서양인이 부인을 존경하는 것은(…) 부인은 체질이 연약하고 덧붙여 천성이 겸손”하여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거늘 일부에서 이를 오해하여 부인의 권한을 강대하게 만들고 있다면서, “공화정치를 하는 나라라 해도 정부는 필히 인민 위에 서”듯 남녀 사이에도 그런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97) 윤치호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리는 약자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森有礼 또한 加藤弘之의 비판에 답하면서 자신은 부부 사이의 ‘동등’을 말했을 뿐 ‘同權’은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있다.98)
남녀의 동등이 꼭 동등한 권한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 주장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리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인민이라 칭할 시는 남녀를 합칭”99)한다는 목소리는 실상 동등한 권리보다는 동등한 의무를 상기시키는 방향으로 울려 퍼질 때가 많았다. “일천만이 하던 책임 의무를 이천만이 분담하”100)는 것, 이것이 남녀 동등권의 참된 의미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식은 언제나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남녀의 동등을 위해 고려해야 할 영역은 교육 이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1900년대의 첫 걸음은 일단 여성 교육을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 또한 교육을 통해 무지를 깨쳐야 하며, 그럼으로써 국민된 의무를 나눠 맡고 무엇보다 자녀 교육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의 교육은 “오늘 어린 계집아이들은 이후대 자손의 어머니”이니 “지금 이 여자들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이는 장래의 나라 사회를 멸망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101)으리라는 시각에서 적극 추천되었다.
‘이후대 자손’은 당연히 남성이라고 전제될 때가 많았다. 자녀 교육은 “우리 나라 아들 둔 동포”를 대상으로 역설되었고102) “대개 여편네의 직무는 세상에 나서 사나이를 가르치라는 것”103)이니 “일천만 부인이 일천만 남자를 가르”104)쳐야 한다고 했다. “여자에게 교육을 施할 필요가 즉 여자에게 교육을 被할 필요로 由함이라 하노라”105)는 말이 이런 상황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여성의 교육은 여성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다음 세대 남성의 양육을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신소설 여주인공들의 활동 역시 “부인계에 모범”(혈의 누), “여자계의 모범”(모란병)이라는 제한을 뛰어넘기 어려웠다. 여자가 교육을 받으면 자녀에게 좋은 스승이 될 뿐 아니라 남편에게는 “백년에 아름다운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든가106) 교육에서는 물론 실업에서도 동등한 활동권을 가져 “해외의 타국을 지척 평지같이 왕래”하고 “외양의 타종을 동포 친족같이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107)도 있었으나, “백년에 아름다운 친구”의 실상은 “그 남편을 도와 편지도 대서하며 문서도 기록하며 한가할 때에 서책을 보며 학문을 토론”한다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칠 따름이었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본격화될 기회 또한 드물었다. 여성은 남성인 국민의 母性으로서 국민된 의무를 다해야 했다. 자녀가 개인의 私物이 아니라 국가의 公物임을 깨닫고 충실한 가정 교육을 베푸는 것이 최선의 역할이었다.108)
자식의 효도를 받는 것이 어찌 내 몸만 잘 봉양하면 효도라 하리요. 증자 말씀에 임금을 잘못 섬겨도 효가 아니요 전장에 용맹이 없어도 효가 아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생각하면 자식이라는 것이 내 몸만 위하여 난 것이 아니요 실로 나라를 위하여 생긴 것이니 자식을 공물이라 하여도 합당하오(…)
옛날 사파달이라 하는 땅에 한 노파가 여덟 아들을 낳아서 교육을 잘하여 여덟이 다 전장에 갔다가 죽은지라. 그 살아 돌아오는 사람더러 묻되 이번 전장에 승부가 어떠한고. 그 사람이 대답호대 전쟁은 이기었으나 노인의 여러 아들은 다 불행하였나이다 하거늘 노구 즉시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가로되 사파달아 사파달아 내 너를 위하여 아들 여덟을 낳았도다 하고 슬퍼하는 법이 없으니 그 노구가 참 자식을 공물로 인정하는 사람이니 그는 생산도 잘하고 교육도 잘하고 영광도 대단하오이다.109)
자유종의 국란 부인은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는 스파르타 여인의 일화를 들면서 자녀는 “나라를 위하여 생긴 것”이라고 설득한다. 세상에서 일컫는 자식 사랑이란 자기 노후를 염려하는 이기적 계산에 불과할 뿐, 참된 사랑이란 자식을 잘 교육하여 “나라의 사업을 성취하고 국민에 이익을 끼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까지도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워할 수 있는 마음가짐, 이것이 자녀 양육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충실한 자녀를 낳기 위해 조혼을 삼가야 할 것은 물론이요, 가정 교육을 책임질 수 있게끔 여성 자신이 교육을 받아야 하며, 아이를 키울 때는 분명한 규율로써 임해야 한다. 젖먹는 시간을 정하고, 대소변 보는 시간을 지키게 하고, “아이가 우는 것은 기질도 손상하거니와 국가의 화기를 손상”하는 것이니 울음을 “국법에 금지”할 것까지 불사해야 한다.110)
‘家政’과 ‘主婦’라는 신조어가 등장, 家事를 교육․위생․경제 등으로 전문화하고 조직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이 때였다. 家政은 家人의 감독 및 風範․衛生․理財 등으로 나뉘어져 일일이 지도․교육의 대상이 되었다.111) 胎敎와 授乳의 방법에서부터 자녀 양육의 세칙을 낱낱이 교육하고 위생상 주의 사항을 알리며,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잡는 법을 일러주는 식이었다. 여성은 전문가의 권위에 복종․협력함으로써 주부로서의 역할을 확립하고 가정을 국민 양성의 장소로 만들 수 있었다.112) 모성이 국민 양육의 분담자로서 의료화․과학화되는 것, 이것이 1900년대 남녀 동등론의 실질적인 결론이었다.
4. 부부 관계의 재구성과 계약
“대저 한 집에는 부처가 다 어진 후에야 그 집이 흥하고 한 나라에는 남녀가 다 문명하여야 그 나라이 문명”하다는 진단은 “어진 처”, “어진 어미”의 필요를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113) 빈상설화세계옥호기연의 예처럼 어진 여인의 짝은 어리석거나 악한 인물일지라도 改心을 기약할 수 있었고, 눈물의 예처럼 소년은 훌륭한 양육 아래서 비로소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좋은 어머니로서의 자격이었다. 국민 양성의 요체가 가정 교육에 있고, 가정 교육의 책임은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녀의 문제가 직접 형상화된 예는 뜻밖에 드물었다. 눈물은 예외적으로 남편과의 離散과 자식과의 離散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이는 1913년의 일이요 부부 관계를 “연애”의 시각에서 기초하려 한 예외성과 연관된 특징이었다. 1900년대의 신소설은 아직 자녀가 생기기 이전의 부부 관계를 다루는 것을 일반적인 설정으로 하고 있었다. 화세계원앙도설중매화나 추월색금강문처럼 정혼자와의 재결합 과정을 그린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빈상설치악산봉선화나 광악산운외운처럼 이미 결혼한 부인과 남편 사이의 離合을 다룬 소설에서도 자녀는 일관된 배제 항목이었다. 젊은 남녀가 헤어져 고난을 겪고 다시 결합하기까지의 과정은 윗세대와의 관련 속에서 설명될 뿐이었다.
가족이 자녀 교육을 핵으로 재구성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신소설에서의 이런 배제는 일견 기이해 보인다. 그러나 1900년대 당시, 자녀 교육은 아직 미래의 가능성으로 실천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국민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야 일반적인 합의 사항이었지만, 그 구체적인 면면은 확인될 수 없었다.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다음 세대의 국민을 양육할 이상적인 부모상, 즉 젊은 남녀의 이상적인 결합이었다. “가정의 중심은 자녀”114)라는 대담한 선언은 그 다음에야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었다. 국가의 기본 단위로서의 새로운 가족 구상은 젊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재구성으로 일단 마무리되어야 했다.
이러한 재구성은 물론 주거 공간의 변화, 식사 습관의 변화 등 온갖 소소한 세부에서의 변화를 거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부부 윤리는 서로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못하게끔 규제할 정도로 엄격한 분리 의식에 바탕한 것이었다. 제사 때나 喪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부부 사이에 직접 물건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불가피하게 주고받을 일이 있으면 아내가 네모난 대광주리로 받아야 하고, 광주리가 없으면 바닥에 물건을 일단 내려놓아 아내가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우물이나 목욕간, 잠자리를 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115) 班常이나 빈부에 따라 실천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고는 해도, 부부 관계의 모범으로 추천된 것은 정교한 분리 의식에 바탕한 和順과 敬禮였다. 부부가 가족의 핵심 단위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엄격한 분리는 점차 사라져야 했다. 夫婦有別이란 부자 중심성과 짝을 이루는 것이어서, 부부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약화되어야 할 윤리였다. 궁극적으로 부부를 중심에 놓고 가족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內庭과 外庭 사이의 엄격한 구분은 ‘가정’이라는 단일체 안으로 통합되어야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된 공간 배치가 가족 공동 공간 및 부부 침실을 중심으로 하는 배치로 바뀌고, 서열에 따라 치르던 식사가 공동의 행사가 되어야 했다. “부모 처자와 한 집안 권속이 한 곳에 모여 한가지 먹으면서 서로 이야기도 하며 각기 종일 할 일도” 들려주게 되는 변화116)란 가히 혁명적일 것이었다.
부부가 중요한 단위임을 주장할 수 있는 이념적 근거도 필요했다. 부자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 질서가 구축된 이후 부부 관계의 의의는 주변화되어 있었다. “사람의 처라 하는 것은 사정(私情)에 지나지 못하고 사람의 부모라 하는 것은 천리(天理)의 떳떳한 대의”117)라 하는 인식이 1910년대까지도 완강히 살아 있었던 터이다. 부부를 가족의 핵으로, 상위의 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대의 명분을 보충하거나 혹은 선회하여 情 자체를 긍정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오늘날의 가치 체계를 기준으로 보자면 부부 관계를 높이 평가하는 데 적절한 근거는 부부애, 혹은 자유 연애 및 자유 결혼이라는 장치일 것처럼 보인다. 자발적 애정이야말로 인간의 핵심이고 부부 관계는 애정의 완성이라는 시각이야말로 부부 관계를 고평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1900년대 당시에도 이런 시각의 단초는 있었다. 추월색에서 어린 시절의 정임과 영창이 보여주는 미숙한 애정, 그리고 홍도화봉선화재봉춘 등 기혼 여성의 축출을 다룬 신소설 대부분이 묘사하고 있는 부부 사이의 친애가 여기 해당한다. 그러나 1900년대에 개인적 애정은 공인을 받기 어려웠다. 공적인 차원에서의 열정이야 ‘열혈주의’라는 말의 유행을 불러올 정도로 뜨거운 것이었지만, 사적인 열정은 금기로 남아 있었다.118) “사랑에 빠지는 자는 밝지 못”하니 “집에 있으면 사랑하는 자식의 악한 줄을 모를 것이요 나라에 처하면 괴이는 신하의 간악함을 모”르고 “임의로 행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119) 중요한 표어로 등장한 ‘자유 결혼’ 역시 열정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의 나라에서는 사나이와 여편네가 나이가 지각이 날 만한 후에(…) 만일 사나이가 여편네를 보아 사랑할 생각이 있을 것 같으면 그 부인 집으로 가서 자주 찾아보고 서로 친구같이 이삼년 지내보아 만일 서로 참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으면 그때는 사나이가 부인더러 자기 부인 되기를 청하고, 만일 그 부인이 그 사나이가 마음에 맞지 않을 것 같으면 아내 될 수가 없노라고 대답하는 법이요, 만일 마음에 합의할 것 같으면 허락한 후에 몇 달이고 몇 해 동안을 또 서로 지내보아 영영 서로 단단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때는 혼인 택일하여 교당에 가서 하나님께 서로 맹세하되 서로 사랑하고 서로 공경하고 서로 돕겠노라고 하며, 관허를 맡아 혼인하는 일자와 남녀의 성명과 부모들의 성명과 거주와 나이를 다 정부 문적에 기록하여 두고 만일 사나이든지 여편네가 이 약속한 대로 행신을 아니하면 그때는 관가에 소지하고 부부의 의를 끊는 법이라.120)
자유 결혼의 성립 과정을 보여주는 독립신문의 논설은 부부 관계가 신중한 고려의 결과여야 함을 역설한다.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고 몇 년, 청혼하고 다시 몇 년 혹은 몇 달,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공인을 받아 결혼한 다음에도 “약속한 대로 행신을 아니하면” 계약을 종료해야 한다. 집안의 결정에 따르는 대신 자기 의사를 중시하는 자유 결혼은 기나긴 기다림과 숙고로 특징지워진다. “하인을 하나 두려고 하더라도(…) 몇 해를 부려 본 후에 만일 사람이 착실하면 그때는 더 친밀히 부리고 더 중한 소임을 맡기거늘”이라는 비교가 보여주듯, 결혼은 열정이 아니라 치밀한 관찰과 합리적 타산에 기초해야 한다. 낭만적 열정이 시간과 불화하는 반면, 1900년대의 자유 결혼은 시간을 필수적인 고려 사항으로 둔다. 우연을 숭배하여 운명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낭만적 열정과는 달리, 1백년 전 한국의 자유 결혼 주창자는 우연성의 신중한 배제를 권고한다. 구체적으로 자유 결혼은 법률의 지원을 받아 결혼을 공식화할 것, 그리고 격에 맞는 남녀가 짝을 이룰 것을 충고하고 있다. “세계 각국들이 오늘날 백성들이 자주 독립한 마음이 있고 인종이 강성하며 신체 골격이 충실한 것은 얼마큼 혼인하는 법률이 엄히 선 까닭”이니 결혼은 일정 연령에 달해 생활 능력을 갖춘 후 행하도록 규제해야 한다거나121) “병신이 성한 사람과 성혼하거나 천치가 총명한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금 같은 난새가 나무 같은 상닭과 짝을 짓는 것”과 일반이니 나이․지식․외모가 두루 걸맞는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122)고 제안하는 것이다. 고려 사항이 문벌에서 지식 중심으로 바뀌었을 뿐, 자유 결혼론은 낭만적 열정보다는 근대적 계약 정신에 의지한다. 雁의 聲의 주인공 상현의 말을 빌자면, “그전에 양반은 양반끼리, 상놈은 상놈끼리 하던 대신에 지금은 우매한 자는 우매한 자끼리, 지식 있는 자는 지식 있는 자끼리 결혼할 것 같으면 좋지 않겠습니까?”123)라는 것이다.
결혼은 계약이요 의무의 이행이며, 계약을 맺을 때 첫 번째 고려 사항은 교육 여부여야 한다는 사고는 신소설에서 특이한 남녀 관계를 낳는다. 추월색의 정임은 어린 시절 영창과 천진한 애정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를 벗어난 이후로는 “열녀는 불경이부”라는 덕목을 앞세우며, 현미경의 박참위는 빙주의 결기 어린 효행을 전해 듣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상태에서 빙주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서로 지켜야 할 의무와 걸맞는 자격, 부부 관계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킴으로써 비로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이상 열정은 철저히 은폐될 수밖에 없다. 화세계원앙도설중매화 등의 여주인공 역시 오직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출까지 불사하면서 정혼자를 찾는다.124) 특히 남녀 주인공이 “학문이 유여한 후에(…)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하기를 청하는 말”로 청혼을 대신하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결혼을 약속한다는 장면은 기억해 둘 만하다.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지 5년여, 그런데도 옥련과 구완서는 오직 공적 책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주체인 젊은 남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신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기존의 가족 질서에서 벗어난 후 부부 관계를 통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기까지 몇 년을 주로 교육의 시간으로 보낸다. 혈의 누의 옥련이 부모와 헤어진 후, 추월색의 정임이 가출을 감행한 후, 설중매화의 옥희가 서모의 흉계를 피해 집을 나온 후 떠난 외국 유학이 이들을 새로운 가족 질서의 담당자로 세우기 위해 필요했던 경험이다. 화세계의 수정이나 모란병의 금선, 금강문의 경원처럼 가출 이후 유랑 생활의 간난신고만을 체험하는 주인공도 있지만, 보다 보편적인 것은 결혼이 지연된 기간을 교육의 기간으로 전용하는 쪽이다. 기혼 여성의 경우조차, 목단화의 정숙, 홍도화의 태희, 같은 이름을 가진 광악산의 여주인공은 시집에서 축출당했다는 치명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가족 질서에서 소외되어 있는 동안 고등교육을 마친다. 교육이야말로 이들을 새로운 가족의 주체, 새로운 국가의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자원인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적 가족을 떠나 수련의 세월을 보낸 후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지만, 이 때 가족은 가부장제 가족의 형식을 탈피한 새로운 가족, 곧 부부 중심의 가정이다.125)
5. 家父長, 혹은 민족주의와 은유의 힘
신소설 여주인공의 고난의 시간, 혹은 교육의 시간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인물은 보통 어머니라는 형상이다. 친어머니가 적대자가 된다는 극단적인 설정은 보이지 않지만, 서모나 시모, 혹은 계시모는 어머니로서의 특질을 공유하면서 주인공을 핍박한다. 치악산봉선화운외운광악산에서는 계시모가 박해자이고, 홍도화재봉춘에서는 시어머니가 적대자로 등장하고 있다. 목단화처럼 시아버지와 아버지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은 최악의 경우라도 아내의 흉계에 넘어가는 수동적 인물일 뿐이고, 적극적으로 음모와 박해를 주도해 가는 것은 어머니 쪽이다. 전대 소설에서는 드물게 나타났던 시어머니며느리 사이의 갈등126)이 갑작스럽게 증가한 데 비해, 중요한 갈등 양상이었던 처첩 갈등의 의미는 신소설에 와서 현저히 축소된다. 귀의 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본처의 투기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빈상설이나 눈물처럼 첩의 모해에 의해 본처가 핍박받는다는 설정은 비교적 드물고, 귀의 성과 마찬가지로 惡妻․善妾의 구도를 내세운 다른 예는 우중행인 정도에 그치고 있다.
1900년대에 새로운 국가상을 구축하고 가족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것이 가부장제적 질서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시모 혹은 서모가 대립자의 전형이 되는 설정은 다소 부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국가의 기본 단위, 국민 양성의 장으로서의 새로운 가족에서 가장 강조된 존재가 어머니이기는 해도, 비판받아야 할 가부장제적 질서의 핵심은 당연히 가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은 직접 공격 대상이 되는 대신 부재 혹은 무능 때문에 스스로 약화되는 선에서 그칠 따름이었다. 은유적 상상력의 전통에서 가부장은 흔히 군주와 교환되었으니 만큼, 군주제가 엄존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가부장을 직접 비판 대상으로 삼기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권위의 주변부를 먼저 공격하는 편이 손쉬웠던 까닭일 수도 있다. 동시에, 가족과 국가를 재구성해야 할 필요의 근간에 민족주의라는 가치가 놓여 있었고, 민족주의는 은유의 상상력을 완전히 끊어내기 힘들다는 사정 또한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이다. 국민으로서의 평등과 일치를 무엇보다 강조해야 했던 근대 초기, 가부장제적 상상력은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국가와의 완벽한 일체를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계속 활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00년대의 상징적 가부장은 은폐되어 있으되 언제고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아버지, 무능하지만 다시 힘을 찾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존재가 침묵되어야 했기 때문에, 가족과 국가의 새로운 상징은 여성을 중심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했다. 신소설의 여성 주인공, 갈등의 여성적 양상, 가정소설의 압도라는 특징은 그 상징적 실천이었다.
이상은 장석주선생님의 글. |
첫댓글 이건 대성이만 읽으면 되지?? ㅎㅎㅎ 대성이 머리좀 아프겠구나~~ㅎㅎㅎ
어이구~!! 머리아프다. 근데 난 군생활 23년만에 나와 가족은 소중하게 배웠어도 국가와는 별개로 느꼈다. 나와 가족에 있어서는 내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국가에서 나는 아웃사이더일 뿐이야.. 전혀 연관될 수 없었다...
근데 이거 너무 많고 글씨가 작아서 읽다보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의미없는 국가관때문인지는 몰라도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이 나라에서 나의 존재가치를 못느꼈으니까.. 난 10년정도 살다가 이민갈것을 고려하고 있다. 생활을 관조하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인생마지막 부분에서 가지고 싶거든
하하...양택이가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사실 나도 대충 훑어봤을뿐이야! 하지만 관조이야기엔 나도 관심이 많거든 목요일 현현기가에서 만나 이야기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