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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8
베데스다라는 못은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자비의 집은 온갖 희망없는 중환자들과 불구자들이 모여든 곳으로 자비완 전혀 관련이 없는 참으로 비참한 곳이었다.
이 못엔 간혹 천사들이 물을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먼저 기다린 사람도 아니고 병이 중한 순서도 아니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라니...
그러니 병이 깊지 않고 행동이 잽싼 사람에게 유리한 못이었다.
사실 베데스다 못은 질병치유에 도움이 되는 온천수가 흘러들어오는 간헐천으로 못 아래에서 가끔 온천수가 분출되는데 이때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일 것이다.
하지만 온천수는 아무리 효험 있다 해도 피부병이나 고칠수 있지 선천적인 불구나 중병환자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뭐 하나 붙잡을 게 없는 폐기물과 같은 인생들이 달리 할게 없으니 허망한 그 소문만 믿고 그 못가에 와서 죽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물이 일렁이는 것 같기만 해도 아우성 치며 밀치고 그런 난리가 없었을 것이다.
교회 이름에 사랑이 들어가면 사랑이 없고 은혜가 들어가면 은혜가 없고 축복이 들어가면 복이 없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 것처럼 참으로 살벌한 자비 없는 자비의 집인것이다.
그곳에서 38년된 혈기마른 자가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만 하고 누워있었다.
혈기 마른자는 공동번역으론 중풍병자로 되있다.
중풍병은 대부분 나이든 사람이 걸리는 병으로 38년간 병에 걸려 있었다면 아마도 이 남자는 70대는 족히 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중풍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나 자기 성격을 못 이길 때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는 것은 그가 그닥 유순한 성격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하튼 그는 그런 자기의 원만치 못한 성격 탓에 그 오랜 시간들을 병마와 같이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38년이면 한때 누렸던 인생의 즐거움도 다 잊을 만한 오랜 세월로 그의 삶엔 온전한 절망과 고통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 인생이니 아무리 온천수로 매일같이 몸을 담근다해도 중풍 병이 나을리 없는데도 그 못을 떠나지 못한 채, 물이 언제 동이나 기다리며 마른 침만 삼키고 있는 것이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고, 아마도 가족들도 그의 존재가 귀찮아져 좀이라도 안보려고 매일 같이 그 베데스다 못가로 그를 옮겨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물이 동일 때 까지 기다려 주진 않은 거 같다.
가족조차 외면한 그런 신세인데, 38년 병자는 '누가 나 좀 못에 넣어 주지..다들 자기 밖에 모르네.' 하고 사람들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자들도 불구에 병자인데, 조금이라도 물이 움직일라치면 서로 밀치고 들어가기 바쁘지, 누가 누굴 넣어 준다는 것인가.
사실 38년 된 병자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실 물이 동여 들어간다해도 나아져 나온 경우도 그닥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 할 수 없는 인생이어서, 그 마저 없다면 정말 살아 갈 아무런 희망도 없어 그러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인지도 모를 피부 병등이 나은 사람들의 허황된 성공 신화와 같은 소문에 '나도 혹시..'하는 기대감으로 한심하게 그 못가에 몰려 있었을 것이다.
단지 스스로 움직여 그 못으로 들어갈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지 정말 무능과 불쌍함의 극치인 인생들인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나타나신다.
자비가 없는 거짓자비의 집에 참 자비이신 예수님이 오신것이다.
모여 있는자 중 아마도 얼마는 예수님을 보고 '멀쩡한 사람이 여긴 왜 왔지?' 하는 눈으로 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통 못에 신경쓰고, 또는 한숨이나 쉬느라 오신 대부분 예수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둘러보다 자기 발치에 있는 그중 제일 무능하고 병이 심해보이는 38년 중풍병자에게 묻는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이 물음에도 남탓을 하며 인생을 한탄한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넣어주는 자가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내려가나이다."
절름발이, 소경, 귀머거리 등 온갖 폐인들의 경쟁에도 진 너무나 못나고 비참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불쌍함이, 무능함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는 현대에 이르기 까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스프링벅이란 동물이있다.
마치 스프링처럼 통통 뛰며 무리를 지어 다니는 캥거루과의 동물인데 간혹 절벽 아래로 집단으로 추락사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그 추락 이유가 풀을 뜯어 먹다가 앞의 동료 보다 더 많은 풀을 먹기 위해 앞으로 가고, 또 뒤에 쳐진 놈은 질세라 더 앞으로 가고, 그렇게 서로를 추월하기 위해 뛰어가다가 나중에는 왜 뛰어가는지도 모르게 집단으로 뛰어가다 한꺼번에 벼랑아래로 떨어져 죽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 살아남는 놈들이 있는데, 무리들에게 치여 넘어져 다치거나, 힘이 떨어져 뒤쳐져 무리에 끼지 못한 낙오자들이라고 한다.
너무나 우리 모습과 닮아 있지 않나.
누구보다 더빨리, 더 많이, 경쟁에 이기기 위해 서로 밀치고 넘어트리는 일까지 서슴치 않는 현대인들 속에서, 본인을 포함해, 그런 사람들에게서 도태된 자들이 예수님께 은총을 입기 쉽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 병자는 예수님의 한마디에 몸이 달라짐을 느낀다.
그러나 감격의 눈물도, 감사하단 말도 없이 쭈뼛쭈뼛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 간다.
아마도 이 병자가 감격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몰라서 그런 건 아닐것이다.
물론 속으로 너무나 기뻤지만 이 날은 안식일이라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걸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 일단 시키는 데로 복종을 한다.
그렇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데, 이 모습을 보고 가만 있을 리 없는 유대인들이 불러 세워 세차게 추궁을 한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하기 위해 '미쉬나'라는 책에 몇백조항의 안식일 금칙을 만들어 놓아 서로를 감시하며 지켰다.
그 책에 의하면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자는 부주의로 하였으면 제사로 죄를 씻어야 했고, 만일 고의로 했으면 사형이라고 써져있다.
그러니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그들에게 충분히 기함 할 노릇인것이다.
안식일에 목숨 거는 유대인이니, 남자가 38년된 병에서 치유됐든 그건 상관할바가 아니고 이남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할지 아니면 속죄제사로 가볍게 넘겨야 할지가 중요한 것이다.
38년 병자는 유대인의 추궁에 겁이나 대답한다.
"나를 낫게 한 그가 나보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습니다."
38년 된 병이 낫자마자 죽을수도 있으니 이런 변명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한자가 누구냐?"
유대인은 38년 된 병이 나은 것을 보고도 '누가 널 낫게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했느냐'고 묻는다.
38년 병자는 대답한다.
"거기 사람이 많아 이미 피하셔서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자의 말 대로 예수께선 38년, 중풍 병자였던 사람을 고치자, 많은 자들이 예수께로 우루루 벌떼처럼 몰려들어서 피하셨을 것이다.
이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 38년, 병자를 앞에 두고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서로 격론을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와라. 네가 일부러 안식일을 범한게 아니란걸 증명해야 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말을 들은 38년, 병자는 마음이 급해진다.
자기를 고쳐준 예수를 찾지 않으면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이제 멀쩡해진 몸으로 부지런히 찾았을 것이다.
그후, 남자가 예수를 찾다가 만났는지 아니면 우연히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성전에서 예수를 만난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마음을 알고 그에게 이른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 죄를 범치 말라."
모든 병이 그렇진 않지만 심한 질고는 죄로 인해 오는 경우가 많다.
이 38년 병자도 죄로 인해 병이 온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가 죄를 지을 것을 아신 예수님이 더 심한 것이 오지 않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38년 병자는 병이 낫자마자 또 죄를 범한다. 38년 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지은 것이다.
남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찾아가 자기를 고쳐준 이가 예수라 말한다.
자신을 구해 준 예수님이 아닌 반대편의 힘 있는 유대교 지도자 들과 한 편이 되길 택한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찾아가 왜 안식일을 범했느냐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이 일 외에도 예수와 제자라는 사람들이 이미 안식일을 범한 전적이 있는데다,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며 신성모독을 하니 율법에 의해 죽어 마땅하다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일이 빌미가 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게 됐다.
아마도 이 38년, 중풍병자는 자기를 고쳐 준 이에게 자기가 어떤 일을 한 것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중풍병보다 더 심한 병이 걸렸을 것이다.
이러한 38년된 병자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불신앙의 죄로 혈기 말라버린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유대광야에서 헤맨 연수가 똑같은 38년인데다,
은혜를 입었으나 은혜를 모르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또한 2차적으로 현대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비없는 이 세상에서 던져진 채 아무런 소망없이 물이 움직여도 들어 갈수도 없는, 또한 들어간다해도 고쳐질지 모르는 못가만 바라보던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단번에 구원해주셨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님은 아무런 댓가없이 우릴 그 무능과 처참한 처지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린 때때로 그 은혜를 저버린다.
38년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그 은혜를 자기의 안위를 위해 저버린 38년, 중풍병자처럼 예수님을 배반한다.
주변 눈치 때문에, 주변인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
배척당하기 싫어서, 불이익 당하기 싫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은 옛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 날 것이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란 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란 옛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사실 3년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위기의 상황에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아무런 유대관계 없는 이 남자는 오죽할까.
그러나 이해는 해도 동조는 할수 없다.
무려 38년간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사람 아닌가.
이는 도저히 정당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우린 이와 같이 38년을 혈기 마른 자, 중풍병자로 산 사람들이다.
가짜 자비의 집인 못가만 바라보며 살다가 너무 불쌍해서 너무 무능하고 대책이 없어서 예수님께 은혜를 적선받아 고침을 받은 자들이다.
이 정도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아야 하지만, 우린 너무 무능해 은혜를 갚지 못하며 지낸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안위 때문에, 예수님의 적인 유대지도자와 한편이 되었던 38년 중풍병자가 되서는 절대 안된다.
외부의 압력이나 불이익이 두려워 예수님의 반대 편, 세상의 편에 서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기 엔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모두 다시 한번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무슨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기도한다.
주님의 산 교회 ㅡ 나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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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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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문
우리모두 거룩한 주님의 산에 오릅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