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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주의의 착각과 망상
2022 06 03 망종(芒種) 사흘 전
푸꼬는 서구의 280년 산업화 이후의 역사를 주지주의가 낳은 광기의 역사라 부른다. 이의 발광으로 세계대전을 두 차례를 지내면서 지성이 성찰하지 못하고 냉전을 낳았었다. 규소의 시대의 시작에서부터 이제 겨우 70여년이 지나 자본제국은 경제적 신냉전의 광기를 만들고 있다. 벩송에 따르면, 주지주의의 특성은 공포를 심고 안전의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위협을 하며 천국을 약속하는 하는 짓을 하더니, 이를 배워 자본제국도 따라하는 것인데 다단계로 포장하는 것이 주지주의의 폐해이다.
지역의 활성화를 통한 자치와 자주는 인민이 최종심급이라는 토대에서 성립하고 발전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당’의 꾸준한 노력과 성과에 찬사를 보낸다. 진보 정치가들은 진보가 주지주의 방식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진심이라면, 결선투표제의 도입은 중요하다. 대선과 지선에서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어느 정당에서 결선투표제를 무력화시킨 것이 민주체제의 길을 아직도 멀게 만든 것이었다. 그 정당의 진보정치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보다 앞에 가는 것이 진보라 여기며, – 이는 한 분야를 잘 안다고 하는 것은 주지주의자의 착각이며 독단인데 말이다 – 마치 다단계처럼의 선두를 차지하는 것이 진보를 떠드는 정치이다. 대선과 지선에서, 소승적 사고가 대승적 사유를 우습게 여기며, 선거가 끝나면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이 진보정치라는 망상에 젖어있다. 상층의 사고와 심층의 사유 사이의 차히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해야 할 것이며, 심층이 대략 51% 보수가 49% 정도일 때, 조화로운 정의 사회와 인민이 최종심급인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97%의 주지주의의 신봉자들의 사고에는 자연주의가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 달리 살기, 달리 말하기, 같잖은 모임, 같잖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집회 결사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럼에도 심층을 말할 수도 모일 수도 결사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협박과 약속으로 인민을 졸로 여길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삶을 살면서, 부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같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같지 않은 모임들에서, 교감과 공감을 통하여 합의를 보고 약속(계약)을 실행하는 것이다.
인민은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합의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정의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또는 주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산술적이고 비례적인 계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폴리스 사회에 대해 말하듯이 정의란 지혜, 용기, 절제의 세 가지의 조화로서, 정의를 포함함 네 가지 덕목이 있다고 한다. 조화로운 세상, 정의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은 남북관계에서도 소중하다.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55Q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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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에게 다양하게 의미를 붙이는 경우에 사람들은 총체적으로 생각하는데 혼란을 일으킨다. 안다는 인식과 다시 알고 행위 할 수 있게 안다는 재인식사이에도 표상을 통한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분분하다. 인식한다는 손발을 움직여서 응용하여 아는 것과 의식 속에서 추억의 중첩을 통해서 아는 것이 차이가 있다. 인간의 삶에는 둘 다 필요하다. 전자에서 보고 따라 하기에서 이루지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또는 주지주의가 있다면, 의식의 내부를 반추하고 성찰하여 교감과 직관을 통해서 아는 것에는 자연주의 또는 본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논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고대에는 5관을 통한 상식에 의해 생각하는 것이 먼저 있다고 여기는 이데아론이 주류이며, 그러한 이데아가 실재하고 그에 걸 맞는 관념과 개념들이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런 상식의 시대가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에서 이상적인 대상들, 즉 천국과 천사들도 실재한다고 믿었었다. 서양의 근세는 5관을 토대로 통합적 관점 또는 통찰을 통하여 인식하는 것들을 두 부류로 나누면서, 정신과 물질 또는 영혼과 신체가 실재한다는 의미에서 두 실체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런 둘 사이의 분열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적 법칙아래 인식의 토대와 규정을 만들려고 했다.
상식을 넘어서 양식의 시대라 한다. 양식의 시대에도 이데아와 같은 사고의 대상이 먼저이고 이에 상응하는 물질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원성을 논의하면서도 고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물체와 신체의 변화에 비해, 불변하는 사고의 대상들을 중심으로 체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와 달리 물체와 생명체에서 에너지와 생명력(의식)이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내재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며, 직관의 재인식으로 여겼다. 1830년까지 고생물학적 논쟁을 할 때에도 생명체에서 조차도 형상이 먼저 있고, 변화는 그 형태의 변이 정도로 여겼다.
고대의 관점이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인식론적 차원의 상층이 우선이었다. 그러다가 원자의 내부와 세포의 내부의 논의를 거치면서, 화학의 발달과 더불어 열역학과 전자기학의 발달과 더불어 1859년쯤에서야 다윈의 진화론이든 비유클트기학이든 새로운 관점의 인식의 토대는 외부의 형태나 형식이 아니라, 내부의 실재성이 먼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지주의에 대한 자연(본성)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은 내부의 과학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 자료들에 대한 성찰에 있었다.
외부와 내부에 대해 인식의 차원에서 의식문제로 들어가 보니,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식 상태에 관한 것에는 재인식이라는 것이 필수불가결 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벩송은 사물들을 외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지성의 기능(la fonction)이라 부르고 내부적으로 공감하는 인식을 직관의 능력(la faculté)이라 부른다. 철학사를 통하여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과 탐구는 2천5백년이 지나서야, 내부의 직관적 통찰의 방식이 외부에 투사하여 표상하는 것을 실재인식이라 여겼으나 표상 또는 현상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식 상태는 표상과 현상이 아니라 내재적 실재성이며 변화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식과 양식은 대상을 외부로 다루는데 익숙하여 기호(symbole)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내부를 탐색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잴 수 없는 내부에 대해 아는 것을 인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벩송의 담론은 두 번의 전쟁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다가 외부적 형태를 내부와 연관 속에 체계를 맞추려고 하니, 고대에서 근세처럼 계속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 사이의 탐구방식이든 체계화이든 인식론적 단절을 겪게 된다. 경제적 이득에 젖은 부의 획득과 탐진치에서는, 외부의 체계와 논리가 더 많은 생산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또다시 과거처럼 내부를 무시하려 들었다.
물질계를 다루는 데는 형상적이고 외부적인 도형의 모습으로 다루는 것이 이득이 있고 안정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부의 문제로서 생겨나는 자연과 생태의 문제는 형상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후기 구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지성이 행한 방식으로서 주지주의가 실재로는 많은 인민을 희생하면서 상부의 안락을 누리는 철학이라는 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을 후기구조주의자라 부르지만, 이미 19세기에 있어왔다. 특히나 도덕과 공동체에 관한 한, 상부와 하부의 구분이 맑스의 정치경제학에서 니체의 도덕학의 계보에서 있어왔다.
그런 상부와 하부의 구별이 21세기까지 계속되는 것은 구별이 차별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것이 먼저이지, 주지주의자가 말하듯이 도구의 편의에 의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비판의 요지는 산업화 이래로 근대화라는 주지주의가 인간의 본성(la nature)을 위협하고 공포를 심으며, 미래의 장밋빛 공상과 망상을 심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주지주의는 없는(망상) 세계를 있는 것처럼 여기며, 고대의 이데아론의 아류로서 부의 확장과 자본의 축적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불평등과 인성(la nature humaine)의 파괴 위에서 이룬 과업이었다는 것이다. 즉 주지주의자들이 인민을, 마치 물체처럼, 조작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두 번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소위 말하는 정치체제를 강압과 폭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비판은 한마디로 지성의 광기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광기에서 저항하는 이들은 인민들이며, 인민들은 여전히 삶의 터전에서 상부상조를 기본으로 교감과 공감을 통해 합의 계약을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의식의 상태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서 이원화가 아니라, 인간이 의식의 중첩과 응축을 통하여 또한 오랜 과정의 추억들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인간이면 누구나 존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오랜 전통의 형이상학의 상층의 주지주의자들이 베푸는 동정으로 인민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이래로 인민의 생산과 노력으로 상층이 잘 먹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혁명은 그래서 일어났던 것이고, 일어나려는 흐름은 간헐적이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인민의 합의과 계약은 우여곡절과 시간의 지체와 주저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지체를 빠르게 또는 체계 속에서 일체화한다고 해서 인민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삶은 노력을 통하여 기나긴 역사에서 전진하고 발전하면서, 본성을 발현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주지주의 광기는 언제나 공포와 위협을 넘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인간 자연(인간 본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자연주의는 확장적이며 심층적이라는 측면에서 실재적인데 비해, 주지주의는 숫자와 상징에 의해 소수화하고 추상화의 길을 간다. 자본을 통한 추상화의 확장은 자본이라는 이름의 제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에 굴복하는 여러 작은 나라들은 제국의 마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주, 자치, 자유를 이루는 노력은 제국의 마름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며 시간을 지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석기시대, 구리시대, 청동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온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숙명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사유에서 존재와 무로 대립되는 관계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허무주의의 극복이라고. 인간은 그 대립에서 운명적으로 극복할 것이라는 착각이 계속된 것이 2천5백년이었다. 박테리아는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세균을 제거하는 살충제(DDT)가 자연을 죽이고 인간도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생태적 방식의 농업생산을 해야 한다고 했었다. 바이러스가 인체에 미친 영향이 알려지면서 생태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늦지 않았다.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을 중심으로 삼고, 또한 인민 속에서 정치한다는 사유의 발상을 바꾸는 것이 늦지 않았다는 시발점일 것이다. 주지주의의 착각과 망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이미 싯달다가 말하듯이 탐진치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벩송이 말한다: 사는 것이 먼저며, 그 다음에 철학한다. 자연 속에 산다, 인민 속에 산다는 것에서 철학을 하게되면, 주지주의 방식과 달리 살기, 같잖은 이야기가 소중하다. 같잖은 철학에는, 프랑스에서는 푸꼬와 들뢰즈처럼 별종으로 살았던 철학자들이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박홍규 같은 철학자가 있다.
산다, 그리고 철학한다고 할 때, 하루를 삼분할하여 8(자고).8(일하고).8(먹고논다)에서 셋째 8시간 중에서 놀면서, 인민 속에서 인민으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라도 소은 박홍규의 글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프랑스가 그리스를 받아들인 것은 르네상스 이후 고전시대였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인류사의 과정을 추억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박홍규의 대화록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속에 진솔하면서도 다른 형이상학을 말하고 있다.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를 말하지 않더라도. (4:09, 55QKA)
*옮김**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 217-283
§05. 587 av. J.-C. - 70 ap. Sur quelques régimes de signes 140-184
§05.03. 두 가지 망상과 정신의학의 문제 233 - Les deux délires et le problème de la psychiatrie. 151
20세기가 시작될 때 진료술(la clinique)의 정점에 있던 정신의학은 비-환각적 망상(des délires non hallucinatoires)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환자에게는 “지적 쇠약”도 없이 정신적인 온전함이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편집증이고 해석적 망상들(délires paranoiaques et d’interprétation)을 보이는 첫째 주요 집단이 있는데 이 집단은 이미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타나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독립적인 [둘째] 집단이 있다는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 (150, 231-232)
이들과 다른 독립적인 [둘째] 집단은 에스키롤(Esquirol, 1772-1840)의 ‘편집광(Monomanie)’, 크래플린(Kraeplin 1855-1926)의 ‘호소망상(Quérulence)’에서 예시되며, 세리외(Paul Sérieux, 1864–1947)와 카프그라(Jean Marie Joseph Capgras, 1873–1950)의 ‘불평망상(délire de revendication)’ 그리고 클레랑보(Clérambault)의 ‘수난망상(délire passionnel)’에서 정의 되고 있다(“호소망상, 또는 불평, 질투, 색정광”). 한편으로 세리외와 카프그라, 다른 한편으로 클레랑보의 매우 훌륭한 연구에 따라 우리는 의미생성의 이상적체계, 즉 해석적-편집증적 체계와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 즉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를 대립시킬 것이다. (150, 232) [의미생성의 이상적체제가 상층이고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가 심층인 셈이다. 전자는 전-체제에서 대상화를 기능으로 이유를 찾고 후자는 탈-체제에서 사건에서 조건을 찾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50MMA)]
첫째 체제는 기만적인 시작에 의해, 하나의 관념 주위에서 조직되는 내생적인 힘들을 증언하는 숨은 중심에 의해 규정된다. (150, 232) [이들은 자신의 복사물 또는 대상물을 실재하는 것을 본떴다(simulacre)고 주장한다. 이 상층 철학사 주류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 왔다. 도덕이 아니라 정태종교가 뒷받침 해온 허구이다. ].
반대로 둘째 체제는 결정적인 외적 사건에 의해 관념보다는 정서(émotion)로, 상상보다는 노력이나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바깥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관념의 망상이라기 보다 행동의 망상). 또 그것은 한 구역에서 작동하는 제한된 성좌에 의해 규정된다. 또 그것은 하나의 선형적 계열이나 하나의 과정의 출발점인 “기본전제” 또는 “간략한 공식”에 의해 규정된다. 이 출발점은 새로운 과정의 출발점이 될 끝 지점까지 이르게 된다. 요컨대 그것은 무제약적으로 팽창 중인 원들의 동시성보다는 유한한 과정의 선형적이고 시간적인 이어짐에 의해 규정된다.
지적 쇠약을 동반하지 않는 이 두 가지 망상(deux délires)의 역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정신의학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정신의학자의 구성에서 핵심부에 있었다. 이것은 정신의학자가 태어날 때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51 233) [나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신학이 지닌 마지막 보루의 정신병 최료(퇴마)의 영역이 정신의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19-20세기 초의 일이다. 1차대전은 한꺼번에 형식논리의 학문을 무너뜨릴 것인데,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이 1919년 비엔나의 통일과학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지도 모르면서 체제의 수호자들(기사단)이었다. (50MLD)/ 20세기 초인데, 벩송의 저술(EC까지)에 반대자들 중에는 한사람은 카톨릭의 신부이며 파리 공식퇴마자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50MMA) ]
망상증 환자의 두 유형을 고려해 보자. 우선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미치지 않은 자들이 있다. 법원장 슈레버는 자신의 발산적 편집증 및 신과의 자신의 관계를 모든 방향으로 전개시킨다. .. 다른 쪽 극에는 결코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미친 자들이다. 다툼, 방화, 살인 같은 갑작스런 행동에 빠져드는 자들이 그들이다(에스킬롤의 네 가지 주된 편집광인 성적, 지적, 방화적, 살인적 편집광이 이미 여기에 해당한다. 요컨대 정신의학은 광기 개념과 관련해서 구성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광기 개념을 수정하면서 구성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두 방향 속에서 광기 개념을 와해시키면서 구성되었다. (151, 233-234) [둘째 편집광이 무섭다. 행동대들이다. 어벙이 연합과 일베가 이에 닮았다. 광기가 아니라 신앙으로 행하는 자들인데 45년 서북청년단을 그렇게 만든 것이 이승만 등과 합작한 일제부역자들의 사주를 받은 집단이다. 이들이 공산화 반대를 외치게 한 것은 1930년대 히틀러 집단과 유사한 점이 있다.]
따라서 정신의학자는 한편으로는 관용과 이해를 주장하고, 감금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개방식(open-door) 수용소를 호소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증대된 감시, 고도로 안전한 특수 수용소, 나아가 광인이 광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점 때문에 더 엄격한 척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234, )
우연히도 이 두 가지 주된 망상, 즉 관념적 망상과 행동적 망상을 구분하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 계급간의 구분을 따라간다(감금될 필요가 없는 편집증 환자들은 주로 부르주아인 반면 편집광과 정념적인 호소 망상증 환자는 대부분 노동자 계급과 시골 출신, 또는 정치적 암살범같이 주변부 계급에서 나온다). (152, 234)
따라서 우리는 기표작용적이고 편집증적인 전제군주적 기호 체제와 주체적이거나 정념적인 후-기표작용적 권위주의적 체제를 구분하려고 한다. 확실히 권위주의적인 것은 전제군주적인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정념적인 것은 편집증적인 것이 아니고, 주체적인 것은 기표작용적인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152, 235)
예컨대 편집증적인 파라오와 정념적인 히브리인은 어떤가? 유대 민족을 보자. 기호들의 집합은 그것이 속해있던 이집트의 제국적 그물망에서 떨어져 나와, 도주선(une ligne de fuite)을 따라 사막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장 권위주의적인 주체성과 전제군주적인 의미생성을 대립시키고, 가장 정념적적이고 가장 덜 해석적인 망상과 해석자의 편집증적 망상을 대립시키고, 요컨대 선형적인 “소송이나 호소”와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물망과 대립시킨다. 너희의 호소(Votre revendication), 너희의 소송(votre procès), 그것은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한 말이며, 소송은 ‘수난’의 선위에서 계속된다. 역서 카프카는 자기 자신의 호소망상 또는 소송(procès) 개념을 끌어내며 ... (153, 236)
(24:27, 50MMC)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