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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제28장 베르그송 436-450
러셀은 베르그송에 대한 적대적 의식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러셀은 프랑스 19세기의 생물학과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베르그송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소련과학 아카데미판 철학 사전에서처럼, 즉 유심론철학의 최정점에 있는 자로서 우파의 거두로 평가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러셀은 논리주의자로서 수학에서 직관주의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측면은 독일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후설의 현상학이 언급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철학에서 언어 논리와 경험적 대상(실재)와 관계를 다루는 논리학을 통한 인식론의 틀에 머문 것 같다.
러셀은 벩송의 후기 작품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과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를 읽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벩송의 도덕론과 종교론은 없다. (50VLG)
영국의 수학자이며 작가이자 사진가인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본명, 찰스 도지슨: 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965)에서 엘레아학파의 제논에게 “운동 부정”에 대한 이의제기 하듯이, 벩송은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에서 제논의 운동부정에 대해 귀류법적으로 운동긍정을 설명하였다. 벩송이 운동 긍정을 설명한 이 수학적 모델에 대해 이해를 해준 사람은 프랑스 수학자 르화(Eduard Le Roy, 1870-1954)였으며, 그는 새로운 철학: 앙리 베르그송(Une philosophie nouvelle: Henri Bergson, 1912)를 썼다. 벩송의 새로운 수학적 개념 정립이 논리주의자인 러셀과 형식주의자인 힐버트와 다르다는 것은 1904년 브로우베르(Luitzen Brouwer, 1881-1966)가 대학 박사학위에서 논리주의나 형식주의와 다른 직관주의의 가능성을 열었고, 1930년대에는 헤이팅(Arend Heyting, 1898-1980)이 이를 정식화하면서 벩송의 개념은 직관주의에 속한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들뢰즈가 벩송의 철학적 서술에서 “질적 다양성”의 개념이 수학자 리만(Riemann, 1826-1866)의 다양체개념에서 왔음을 추론해 냈다.
말하자면 벩송은 철학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든 것만이 아니라, 수학에서도 새로운 수학 이론의 발생의 근원에 있다. 이런 벩송의 사유가 늦게 나온 것은 인류가 19세기 말에 와서야 이성이 속 좁은 이성이 아니라 열린 이성으로 바뀌는 시절이라는 점이다. 20세기에 열린이성, 열린사유, 열린 학문, 노마드 과학, 열린도덕, 열린종교 등으로 나가는 사유의 과정을 걷는다. 러셀은 이런 사유의 확장 즉 확장적 자아를 들여다보지 못한 폐쇄적 사고에, 즉 정적 사고에 머물렀다. 그는 논리 실증주의, 논리 분석철학에 머문 것이다. (50VMC)
****내용
제28장 베르그송 436-450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세기의 지도적인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와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에게 영향을 주고, 프랑스 사상에 상당한 공적을 남겼다. 생디칼리즘(Syndicalism, 노동조합주의)을 열렬히 지지하고, 폭력에 대하여(Réflexions sur la violence, 1908)라는 책을 쓴 소렐(Georges Sorel, 1847-1922)은 일정한 목표를 갖지 못한 혁명적 노동 운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렐은 생디칼리즘을 버리고 왕당원이 되었다. (436)
베르그송 철학의 실제적인 영향은 보수적이었으며, 그것은 비시 정권하에서 쉽사리 그 정점에 도달한 그 운동과 조화되었다. (436) [베르그송은 독일치하에서 철학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이차대전의 발발이래로 프랑스 철학계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 시대로 접어들고, 다른 한편 인류학적 관점에서 문화론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는 널리 퍼졌지만 정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예컨대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므두셀라로 돌아가라(Back to Methuselah)」(역주: 므두셀라는 노아의 홍수 이전의 족장으로 96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는 순전한 베르그송주의이다. (436)
그러나 철학을 분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 우리는 행복을 사랑하는 감정의 철학(philosophies of feeling)과, 지식의 사랑에서 비롯된 이론적인 철학(philosophical philosophies)과, 활동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실천적인 철학(practical philosophies)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437) [이론철학(인식론), 실천철학(윤리학), 감정(감성)의 철학(예술론)으로 볼 수 있는데, 이론 철학에는 존재론(형이상학)을 평행해야 인식론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벩송의 경우에는 기존 형이상학을 전복하고 새로운 형이상학으로부터 인식론을 전개하여, 영혼과 신체에 관해 기존의 전도된 사고를 제자리로 놓은 사유를 한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들뢰즈 표현으로 왕립과학이 아니라 노마드 과학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50VLG)]
한편 실천적인 철학에는 활동을 가장 선한 것이라고 보고 행복은 하나의 결과요, 지식은 성공적인 활동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철학들이 속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의 주요한 대표자는 실용주의자들과 베르그송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그리스, 특히 플라톤의 권위에 대한 현대의 활동적인 사람의 반역[전도, 전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쉴러 박사(Dr Schiller)가 말한 것처럼 제국주의와 자동차에 관련시킬 수도 있다. 오늘의 세계는 그런 철학을 찾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얻은 성과도 놀랄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437) [벩송은 과거의 형이상학이 전도(l'inversion)된 사고를 한다고 하고,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이 과거 철학을 전복(la subversion)해야 한다고 한다. ]
우주는 이 두 반대 운동[생명과 물질]의 충돌과 투쟁에 불과하다. 생명은 위로 오르는 것이고 물질은 이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의 커다란 힘이요 생의 약동이다. .. 그것은 물질의 저항을 받고 그것을 뚫고 싸워 나가는 그것을 조직하여 점차 이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438) [벩송은 충돌과 투쟁이라 하지 않고 타협안(modus vivendi)라고 한다.
진화는 본래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적응은 단지 마치 산이나 많은 지역을 통하여 도시로 향해 뻗어 있는 꾸불꾸불한 도로와 같이, 진화에 있어서의회전과 꼬임이 나타날 뿐이다. (438) (벩송의 진화 또는 발전은 선형이 아니라 나선형이 비선형적이다. 러셀의 벩송 설명 중에서 가장 잘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충분치 못하다. 진화의 맨 끝에는 성부(城府)도 없고, 일정한 목표[정해진 목적]도 없다. 기계적인 우주론이나 목적론은 다 같은 결함을 갖게 마련이다. .. / [기계론과 목적론] 두 견해를 반대하여 .. 베르그송이 말하기를 진화는 예술가의 작품 활동처럼 창조적이라고 한다. 활동에 대한 충동,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한 욕망은 미리 존재한다. (439) [내재성의 권능이 이미 있어왔다. 과거의 기억처럼, / 벩송의 “창조적 진화(EC)”에서 “창조”란 창세기와 전혀 무관하며, 새로운 생산의 실재성이다. (50VMC)]
그러므로 진화는 예정할 수 없으며, 결정론은 자유의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439) [벩송이 사용한 귀류법적 설명인데, DI에서 사용한 것이며, EC에서는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형이상학적으로 착각이라고 한다. 벩송은 착각(l'illusion)의 세 가지를 강조한다. 무, 무질서, 정지가 그 착각들이다. 들뢰즈에서 무질서는 준안정상태, 인격에서는 전개체적이라고 한다. (50VLG)]
이와 같은 개관은 지구상의 생명의 시제적인 발전을 설명함으로써 완전하게 될 것이다. 이 흐름의 제일 처음 분화는 식물과 동물들로, .. 식물은 에너지 저장소로, 동물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베르그송에게는 개미나 벌의 본능이 최상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철학에서 지성과 본능의 구별은 근본적인 것이며, 샌드포드와 머톤(Sandfrord and Merton)처럼 착한 소년은 본능이고 악한 소년은 지성이다. (439) [러셀의 잘못된 이해.. 인간의 인식에서 지성과 본능은 상보적이다. 도덕론이 아니다. 도덕론에서 본능은 고착적이고 정태적 도덕을 만든다. (50VLG)]
본능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직관이라고 부른다. 베르그송은 말하기를 “나는 직관이란 무관심화된 자의식적인, 그 대상에 반성할 수 있는, 그것을 무한히 확대시킬 수 있는 본능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439)
지성, 즉 지력[지능]은 “그것이 자연의 손에서 떠나자 무기체적인 고체를 그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 지성은 공간에서 분리시키고, 시간에서 고정시킨다. .. “지성의 특성은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다.” 기하학이나 논리학은 지성의 대표적인 산물로 엄밀하게 고체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439)
지성의 기원과 물체의 기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양자는 서로 적응함으로써 발전되어 왔다. “동일한 과정이 물질과 지성, 양자를 다 포함하고 있는 재료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440) [EC에서 그 재료가 생명체이다.]
이와 같이 물질과 지성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매우 오묘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지성이란 사물들의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능력이다. 물질[물체]이란 분리된 사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실은 분리된 고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생성의 끊임없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 흐름 속에는 아무 것도 생성하지 않으며,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성의 흐름[운동]은 올라가지 않으면 내려간다. 이 움직임이 올라갈 때 생명이라 부르고, 내려갈 때에는 지성에 의해 잘못 이해되어 물질이라 부르는 것이다. (440)
나는[러셀은] 우주는 하나의 원추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가 그 정점이며, 상향 운동은 사물을 합치게 하고 이와 달리 하향 운동은 사물을 분리시킨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440) [상향과 하향 운동의 설명은 EC 3장에 나온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안과 밖으로, 벩송이 의식의 활동을 원추(고깔)로 비유한다. 고깔의 꼭지점은 현재이다.]
지성은 언제나 고체를 자르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닭을 칼로 잘라서 산산조각을 낸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440) [플라톤 작품에서 요리사의 예를 벩송이 들고 있다.]
지성이 공간과 관련되는 것처럼, 본능과 직관은 시간과 관련된다. 다른 대부분의 학자들과는 달리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가하는 것은 그의 철학의 중요한 특질이다. 물질의 특징인 공간은 흐름(the flux)을 잘라내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 이와 달리 시간은 생명과 정신[영혼]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그는 “무엇이든지 살아있는 곳에서는 그 생명의 흔적을 시간에 남기게 된다.”고 말한다. (440-441)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다. 즉 외부적인 순간들의 균일한 집합이 아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수학적인[의식적인] 시간을 지속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지속개념]은... 시간과 자유(Time and Free will, 1910)(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에 나타난다. (441)
“순수지속은 우리의 자아가 그 자신을 살게 해 주었을 때, 즉 우리의 자아가 그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상태에서 분리하지 않게 되어 있을 때, 우리의 의식 상태가 갖는 상태이다.” / “순수지속은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인 전체로서 형성한다. 거기에는 상호침투와 구별 없는 연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자아 속에는 연속[지속]이 있고 상호 관련된 외부적 형태는 없다. 자아의 외부, 즉 순수 공간 안에는 상호 관련된 외부적인 형태가 있지 연속은 없다.” / “우리의 주관과 직관에 관련된 문제, 즉 양자의 구별에 관련된 문제나 결함에 관련된 문제는 공간의 항목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항목에 속한다.” (441)
지속은 기억에 있어서 그 자신을 특히 잘 나타낸다. 왜냐하면 과거는 기억에 남아 현재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 1896)에서 “물질과 정신은 다 실재하는 것이며, 기억은 이 정신과 물질의 교차(交叉)이다.” ../.. “과거는 두 가지 상이한 형태로 남아 있다. 첫째로 운동 매커니즘 속에, 둘째는 독립적인 상기[기억]로 남아있다.” (442)
예컨대 [첫째 기억은] .. 누가 어떤 시를 암송할 수 있다면, .. 어떤 습관 또는 메커니즘을 획득했다면 그는 그 시를 기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 이와 같은 종류의 기억 중에는 과거의 일에 대해서 아무 의식도 없다. / 둘째 종류의 기억은 전에 그가 그 시를 암송할 때 일어난 독특한 그리고 일정한 날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상기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억은 진정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 습관을 문제시 하지 않는다. (442) [신체적 기억과 의식적 기억, 후자가 인격성의 총체이다. 프로이트는 후자 중에서 고착된 추억만을 떠올리는 환자들에 대해 상담을 한 것이며, 이런 임상의 기록을 정신분석학이라 한다. (50VLG)] .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기억되지만, 대체로 유용한 것만 의식에 떠오른다. 표면상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베르그송의 주장에 따르면, 정신에 있어서 기억 부분의 실수가 아니라, 단지 기억을 활동에 옮기기 위한 메커니즘의 실수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두뇌 생리학과 건망증[기억상실증]의 논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여기서는 진정한 기억은 두뇌의 작용 아니라고 주장하고 주장한다. 과거는 물질에 의해 활동으로 옮겨지며 정신에 의해 상상되는 것이다. 기억은 물질의 분출물[분비물]이 아니다. (443)
“기억은 원칙적으로 물질에서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힘이라야 한다. 만일 정신이 하나의 실체라면, 우리가 그 정신과 경험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것은 기억 현상에서 이다.” (443)
베르그송은 순수기억의 정반대쪽 끝에 순수지각을 갖다 놓는다. .. 그는 “우리는 순수지각에서 실제로 우리 자신의 외부에 놓이게 되며, 직접적인 직관에서 대상의 실재에 접하는 것이다.” .. / “순수지각은 정신이 가장 낮은 단계 – 기억 밖의 정신 – 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의 일부이다” (443)
“신체는 언제나 행동으로 나간다. 그러나 행동을 제한하는 본질적인 기능으로서의 정신생활도 갖고 있다.” 그것[신체]은 실제로 선택의 도구이다. (443-444)
그가 자기 견해를 설명하는데 장기(長技)가 있다. 특히 유추(類推)와 직유(直喩)는 그가 독자에게 설득하는 모든 과정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직유의 횟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시(詩)에 표현된 횟수보다 더 많다. / 그에 의하면 생명은 마치 폭발과 같다고 한다. 이 폭탄이 폭발하여 파편들이 되면, 그것들이 다시 폭탄으로 되는 것이다[EC 3장], 생명은 또한 한 묶음(sheet)[다발(une gerbe)]과 같다. .. [에너지의 저장소는] “힘찬 증기를 끊임없이 내뿜어야 하고, 그 내뿜는 증기들 하나하나가 각각 하나의 세계이다.” .. “생명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의 큰 물결[난바다, Ocean]과 같다. 한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퍼져 나가 그 주위 전체에 이르러 더는 퍼져 나가지 못하고 멈추어질 때 진동으로 변한다. 이 경우에 그 장애물이 한 점에서나마 제거되면, 그 진동은 자유롭게 그 점을 통과한다.” (444)
“모든 유기물은 가장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처음 창조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하나의 단순한 충동[충력]을, 물질의 운동의 역행(逆行)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 모든 생물은 단결하여 이 동일한 큰 추진력을 행하고 있다. 동물은 그의 지위를 식위 위에 차지하고, 인간은 동물성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나 옆에서, 앞에서나 위에 달리고 있는 군대이다. 모든 저항과 무수한 장애물들을 – 아마도 죽음까지도 – 물리칠 수 있는 강한 공격을 가하고 있는 수많은 군대이다.”(444-445)
베르그송의 저술 속에는 수학과 과학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주의한 독자는 그의 철학이 상당히 견실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과학 특히 생리학과 생물학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수학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 고의로 이미 80년 전부터 수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는 현대의 견해보다 오히려 전통적인 오류를 택하고 있다. (446) [러셀이 보기에 미적분과 수에 관한 벩송의 논의에 오류가 있다는 것인데, 벩송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적이고 다양체 토대 위에 있다. 벩송은 또한 수에 관해서 러셀의 집합론과 달리 위상적이고 군론에 닮을 수 있다.]
베르그송의 “지속론”은 그의 “기억이론”과 결합되어 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사물들은 기억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사물들 속에 침투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현재는 서로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의식의 통일 속에 혼합된다. 그가 말하기를 활동[운동]은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447)
“과거는 이미 활동하지 않는 것” ... / 현재란 “활동하고 있는 것” (447) - [러셀의 설명은 분석적이다. 벩송은 종합적이고 선험성을 포함하는데, 움직이고 있는 실재성의 첨점이 현재이다. 현실에 부딪힌 첨점은 단면이나 조각이 아니라, 아무리 최소화하더라도 지속이 있다. 이 최소화의 극한의 점을 불가분의 점으로 인정한 것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이며, 최소 미분인 셈이다. 벩송은 이 점은 과거를 뒤에 달고 미래를 예상참여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흐름이며 외관상 한 점(다양체, 단위)이라는 것이 나의 신체인 셈이다. 그 신체는 의식의 이미지(l’image)이다. 이미지의 활동이 상상(l’imagnation)이다.]
“우리의 순수 지각을 구성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신체의] 동작이다. .. 우리 지각의 현실성(actuality)은 우리 지각의 활동성(activity)에 보다 큰 강도 속에서가 아니라, 지각을 연장하는 운동 속에 있다. 과거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현재는 관념의 움직임(idea-motor)이다.” (447-448)
베르그송은 지속과 시간에 대한 학설에서 “상기(想起)”라는 현재의 사실과 상기된 과거의 사실을 근본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 배르그송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지각”과 “상기” - 이 양자가 현재의 사실이라는 것인데, 그는 이것으로 현재와 과거를 설명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혼동은 분명히 밝혀질 때, 그는 시간을 제외해 버리고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448)
베르그송 철학의 대부분은 – 아마도 그의 철학이 유명하게 되는데 필요한 부분은 – 논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논증에 의해 뒤집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448) [벩송 철학은 실증이며, 반복하는 실험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는 “생명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와 같다”고 말하고, 셸리(Shelley, 1792-1822)는 “생명은 여러 가지 색깔의 유리로 된 돔과 같다”고 말하였으며, 베르그송은 “여러 조각으로 폭발하여 그 조각들이 다시 폭탄이 되는 그러한 폭탄”이라고 한다. (449) [러셀은 벩송을 시인의 반열에 넣고 싶어 하며, 철학자가 아니라는 투다.]
베르그송이 세계가 실현(實現)되기를 원하는 선(善)은 행동을 위한 행동이다. 그는 모든 순수한 사색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무리한 형용사 – 그는 정적(靜的), 플라톤적, 수학적, 논리적, 이지적(理智的)[주지주의적] 등등을 나열하여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449) [러셀은 주지주의적 입장에 서있는 것은 분명하다.]
[총평] 목적이 없는 활동을 만족스러운 선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베르그송의 저서를 우주에 대한 흥미 있는 그림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행동에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보다 고통과 불의(不義)와 싸움이 적은 세계에 대한 어떤 상상적인 예정에 의해 행동이 고무되어야 하는 사람들, 요컨대 행동이 관조 위에 서야한다는 사람들은 이 철학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449)
(7:13, 50VMB)(7:22, 50VMC)
#*******************참조
벩송(Henri Louis Bergson, 1859-1941) 관련 연대표
베르그송 가계
Sonnenberg(Ber)할배 - Gabriel 맏 (1790-1844) [베르(곰)는 저항의 의미라 한다]
+ Tamerl 할매 . . . . - Jakob 둘째 베를린 정착
. . . . . . . . . . . . . . - Michael 세째 (1818-1898) -- Henri Bergson(1859-1941)
. . . . . . . . . . . . . . - Leopold 넷째
[맏이와 나이 차이(28살)가 너무 많이 나니깐?]
***,
Michael 부 : 미셀 벩송(Michel Bergson)[1818-1898]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
+ Kaete(Käte) 모 : 카트린 레빈선(Cathrine Levinson)[1830-1928] 영국의 던캐스트 출생
. . . - Julliette (1858-?) 자식이 없다.
. . . - Henri (1859-1941) -- 딸 Jeanne Bergson(1893-1967)
. . . . + Louise Neuburger (1871-1946)
. . . - Moïra (comtesse MacGregor [théosophe] - (영국)심령과학연구회, 자식이 없다.
. . . - Renée(Ray)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폴그스톤(Folkestone)에서 살았다.
. . . - Joseph 상인
. . . - Philip 배우, 문학비평가.
. . . - John(ou Jack) 은행가. 남아공화국, 두 아들이 있다.
** ** 생애
1859년 10월 18일, 베르그송은 빠리, 라마르틴느 거리(18, rue Lamartine)에서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며 작곡가인 아버지 미카엘 베르그송과 아일랜드계 유태인으로 영국인 어머니 캐서린 레빈슨 사이에 4남 3녀 중에 둘째이자 아들로서는 맏이로 태어났다. 앙리-루이 베르그송이다.
1863(4세) 이 가족은 스위스로 이주하다. 처음에는 쟁쟁(Gingin)에서 거주하다가 나중에는 제네바(Genève)로 갔다. 여기 살 때 주소는 Boulevard des Philosophes(철학자들의 거리)이다.
1866(7세) 다시 파리로 이사 오다. (154, Boulevard Magenta)
1868(9세) 보나빠르트 고등학교 (후에 꽁도르세(Condorcet, 1870년 10월 22일) -> 퐁탄(Fontane, 1874년 5월 1일) -> 꽁도르세(1883년 1월 27일) 고등학교로 개칭되기도 한다.) 7학년으로 입학하다. 그는 프랑스 국비 장학생이자, 유태계 슈프링어 기숙사에서 기숙사의 장학생이 된다. [이 당시는 아직 교육 제도가 완비되지 못하여 명칭이 고등학교(lycée)이지만 초등학교를 겸하는 것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대랍비인 베르트하이머(Joseph Wertheimer, 1833-1908)의 추천으로 이스라엘 기숙사의 장학생이 되었다. ]
기숙사 주인 아들(Maurice Springer, s.d.)와 친하게 지냈다.
1869(10) 앙리만 파리에 남기고, 가족 모두 영국의 런던(Shirland Road 21)으로 이주하였다. 파리에서 영국으로 보낸 편지 속에, 그가 얼마나 어머니의 영향을 입었는지 알 수 있다. [앙리는 일요일마다 편지를 쓰고 수요일마다 어머니의 답장을 받았다.]
1873 [아버지가 폴락(M. Paulhac, s.d.)에게 보낸 편지(1874년 3월)] 중등학교 2년차까지 매년 1등 했다고 자랑한다. [중등학교 내내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1875(16) 그는 전국 학력 경시대회 라틴어 작문 1위, 영어 1위, 우주 형상과 기하학 2위, 그리스어 작문 4위를 차지한다. [퐁딴(Fontanes) 고등학교 시절이다]
1876(17) 전국학력 경시대회 불어 작문 1위, 수학 1위, 역사 4위를 차지하다.
1877(18) 전국 학력 경시대회 수학 1위를 차지하다. 이때 제시된 문제에 대한 베르그송의 해법은 수학연보(Nouvelles annales mathématiques, II, XVII, 1878)에 실렸으며, 그의 스승 데보브(Adolphe Desboves, 1818-1888)는 자신의 책 빠스칼과 현대기하학자들에 대한 연구(Etude sur Pascal et les géomètres contemporiains, Delagraves, 1878)에 파스칼이 제시한 “세 개의 원”에 관한 베르그송의 해법도 한 방식이라고 소개한다. [10년째 리쎄(lycée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하기보다, 초등에서 고등까지 겸한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정비는 1880-1881년 쥘 페리(Jules Francois Camille Ferry, 1832-1893)에 와서야 정비된다고 한다.]
1878(19)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꼴 노르말 쉬페리외르 Ecole normale supérieure, ENS)에 3등으로 입학하다. 이때 공교육에 10년 이상 복무할 것을 서약하다. [이 때 2등을 차지한 죠레스(Jeans Jaurès, 1859 Castre, Tarn-1914 Paris)는 프랑스 사회당(1919년 성립)의 선구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당」이 「프랑스 공산당」보다 먼저 성립하기도 하고, 또한 전통적인 쟈꼬방 좌파의 형태를 띠고 있다.]
1879 여름 방학 부모가 있는 영국에서 보내다.
1880(21) 11월 15일 파리 5구 구청에서 프랑스를 국적으로 선택한다고 선언하고 정식으로 프랑스 인민이 된다. 이것은 귀화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이 성인이 되었을 때 본인의 선택에 따라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당시의 법률에 따른 것이다.
1881(22) 철학교수 자격시험(Agrégation)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9월 20일 생 브리윅(Saint Brieuc) 고등학교 교수로 발령났으나 거부하였다.
10월 5일 앙제(Angers) 고등학교 교수로 임명되다.
1882(23)
4월 4일 앙제(Anger) 여자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수를 겸임하다.
8월 3일 앙제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전문성(spécialité)」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다.
1883(24) 셜리(James Sully, 1842–1923)[영국 심리학자]의 감각과 정신의 착각들(Les illusions des sens et de l'esprit, Bailliere et Cie, 1883, 원판----)을 번역하고, 라틴어 강의를 위하여 작성하여 사용했던 노트를 루크레티우스 초록(Extraits de Lucrèce, Delagrave, 1883)으로 출판하였다. 까르까손느(Carcassone) 고등학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였다.
9월 28일 프랑스 중부의 산악도시인 끌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고등학교에 교수로 가다. 이 1883학기에 엘레아학파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시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잡기 시작했다.
1884(25)
2월 14일 끌레르몽 페랑 대학교에서도 강의를 맡다(Charge de cours)
2월 18일 「웃음(Le rire)」에 대한 대중강연을 행하다.
1885(26)
8월 15일 끌레르 몽 페랑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정중함(La politesse)」란 제목의 강연.
1886(27)
9월 첫 논문 「최면 상태에서 무의식적 허위조작에 대하여(De la simulation inconsciente dans l'état d'hypnotisme)」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인식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잡지이다.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는 제명 그대로 형이상학과 인간에 관한 잡지이다.]
1888(29)
9월 11일 파리에 있는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 고등학교와 앙리 4세(Henri IV) 고등학교 보충교수(professeur suppléant)로 지내다.
1889(30)
8월 24일 롤랑(Rollin) 중학교 [현재 쟉끄 드꾸르(Jacques Decour)고등학교] 교수로 부임하다.
12월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주 논문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DI)과 부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론(Quid Aristoteles de loco senserit, 1889)을 발표하고, 주 논문(DI)은 알칸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1890(31)
10월 14일 앙리 4세 고등학교 교수로 임용되다 (8년간 근무했다).
1891-1892 학기 쟈리(Alfred Jarry, 1873-1907), 그의 학생이었다.
1892(33)
1월 7일 루이즈 뇌뷔르제(Louise Neuburger, 1873[1871?]-1946)(당시, 19세)와 결혼. [술레즈, 전기, 100] 재종이종인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가 나이[같은] 많은 화동(garçon d'honneur)이었다.
7월 30일 앙리 4세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정중함(La politesse)」이란 제목의 강연(1885년 강연을 수정 첨가)을 하다.
1893(34)
3월 16일 딸 쟌느(Jeanne Bergson 1893-)가 태어나다.
1894(35) 소르본느 대학에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후보명단에 고대철학사 전공인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와 칸트에 영향을 입은 프랑스 철학사가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2)가 있었다. 브로샤르가 뽑혔다.]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1906) 1894년 9월 ].
보르도 대학 전임강사로 지명되었으나 거부하였다.
1895(36)
7월 30일 전국 학력 경시대회 시상식에서 「양식과 고전 연구(Le bon sens et les études classique)」란 제목의 강연을 하다.
1896(37)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 1896)(MM) 이 알깡(Alcan) 출판사에서 나오다.
1897(38)
11월 꼴레즈-드-프랑스(College de France)에서 와병중인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을 대신하여 강의를 하다.
1898(39)
2월 24일 모교 고등 사범학교(ENS)에서 전임강사(maître de conférence)가 되다. 「플로티노스 강의」(1898-1899)를 강의 했고, 강의록이 남아있다.
소르본느 대학에 두 번째로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2), 칸트의 영향을 입은 예술에서 천재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génie dans l'art, 1883)(부트루 성향과 맞다), 철학사: 문제들과 학파들(Histoire de la philosophie. Les problèmes et les écoles, 1887(avec Paul Janet). 세아이유가 뽑혔다]
9월 9일 런던에서 아버지(Michael Bergson, 1818-1897) 사망하다.
웃음에 관한 글을 한 잡지(파리잡지(Revue de Paris))에 세 차례 발표하다.
1900(41)
5월 17일 레벡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에서 그리스-라틴 철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다.
8월 3일 “국제 철학자 대회” 섹션: 철학일반과 형이상학, 이 분과는 9시에 열렸는데 벩송이 주제했다. 발표자들 중에 브링슈비끄, 르 르화가 있다.
8월 4일 파리에서 국제 철학자 대회(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우리가 원인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a la loi de causalite)」발표
이해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RI)을 알깡(츨판사)에서 출판하다.
1901(42)
3월 26일 심리학 일반 연구소(Institut général psychologique)에서 「꿈(Le rêve, 1901)」을 강연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1900년에 나왔다]
5월 2일 “프랑스철학회”(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에서 「심신 평행론과 실증형이상학(Le parallélisme psycho-physique et la métaphysique positive, 1901)」의 발표와 토론(Me 463-502)이 있었고, 중단되었던 토론을 이어서 1901년 5월 23일에 「Discussion à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Me 502-507)으로 수록해 놓았다.
12월 14일 정치-도덕과학 학술원(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회원으로 선출되다.
1902(43)
1월 논문 「지적 노력(L'effort intellectuel, 1902)」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7월 22일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의 5등 훈장(Chevalier)을 받았다.
7월 31일 볼테르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지성에 대하여(De l'intelligence)」를 강연하다.
12월 14일 미국 철학자 제임스(W. James, 1842-1910)의 편지를 받다?
1903(44)
1월 긴 논문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03)」을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RMM)에 발표하다.
1904(45)
2월 20일과 27일 정치-도덕과학 학술원에서 「라베송에 관한 간략한 소개(Notice sur Ravaisson, 1904)」를 낭독하였다.
9월 제네바의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심리, 생리학적 오류추리(paralogisme psycho physiologique, 1904)」를 발표하였다.
11월 19일 가브리엘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의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의 현대 철학 담당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05(46) 5월 28일 빠리에서 윌리엄 제임스와 처음으로 만나다.
1906 「무의 관념(L'idée de néant, 1906)」, Revue philosophique(LXII, 1906, pp. 449-466).
1907(48) 레지옹 되뇌르 4등 훈장(Officier)을 받다.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1907)(EC) 알깡 출판사에서 출판하다.
1908(49)
1월, 보렐에 논문 「기하학적 지성의 진화(L'évolution de l'intelligence géométrique, 1907)」에 대한 보고서(RMM)(Me 753-758). (창조적진화에 대해 보렐의 오해를 지적한 것이다)
12월 논문 「현재의 추억과 거짓 재인식(Le souvenir du présent et la fausse reconnaissance, 1908)」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1911(52)
4월 10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철학자대회(Congrès de philosophie)에서 「철학적 직관(l'intuition philosophique, 1911)」(PM)을 발표하였다.
이해에는 영국을 여행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변화의 지각(La perception du changement, 1911)」(PM) 그리고 버밍엄 대학에서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을 강연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 제임스의 실용주의의 프랑스어 판 번역을 위하여, 서문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관하여(Sur le pragmatisme de William James, 1911)」(PM)를 쓰다.
1912(53) 신앙과 생활(Foi et vie)이라는 학회에서 논문 「영혼과 신체(L'âme et le corps, 1912)」를 발표 하였다.
1913(54) 미국을 방문하였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5월 28일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런던에 들러 기꺼이 회장을 수락한 심리탐구학회(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에서 「생명있는 것들의 환영(Fantômes des vivants, 1913)」(ES)을 강연하다.
꼴레즈-드-프랑스에서 의학자 베르나르(C. Bernard, 1813-1878)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 1913)」을 발표하다.
1914(55)
1월 10일 도덕정치과학 학술원 원장(임기 1년)에 취임하다.
2월 12일 프랑스학술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으로 선출되다. [라 고르스(Pierre de La Gorce, 1846-1934) 까쀠(Alfred Capus, 1857-1922), 벩송 3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1918년에 정식으로 취임하다)
4월 21일, 그리고 5월 22일 다시 영국을 방문하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좌에서 「인격의 문제(The problem of personality)」를 강연하였다.
6월 1일 웃음(1900)을 제외하고 그의 저작은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들어간다. [이 목록은 1968년 인종편견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더 이상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1968년까지 그의 저작들은 금서 목록에 죽 올라있었다.] / [쟈끄 마리땅이 쓴 벩송의 철학: 비판적 연구(La Philosophie bergsonienne: études critiques 1913)의 심한 비판으로 근거를 삼았을 것이다. / 이에 대해 뻬기가 강하게 반대하였다. 뻬기는 벩송과 벩송철학에 관한 노트(Note sur M. Bergson et la philosophie bergsonienne, 1914)를 썼다. (48RMJ)]
6월 16일 꼴레즈 드 프랑스 강의를 에뒤아르 르 화(Eduard Le Roy, 1870-1954)가 대신하게 된다.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8월 2일 세계 충돌[1차대전]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Me 1101)
11월 4일 프랑스 학술원 회원 자격으로 이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해 「낡아 가는 힘과 낡지 않는 힘(La force qui s'use et celle qui ne s'use pas, 1914)」을 발표하였고 공화국 군대 회보(Bulletin des armées de la République)(42호, 1914)에 실려있다.
12월 12일 도덕 정치과학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공식 회기 연설을 하다.
1915(56)
5월 15일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française)」을 파리잡지(Revue de Paris)에 발표
1916(57)
4-5월 첫째 임무: 프랑스에 대한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려는 임무를 띠고 여러 학술원 회원들과 함께 사절단으로 스페인에 파견된다. 그곳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하다.
1917(58)
2-5월 둘째 임무: 외무부 장관인 브리앙(Aristide Briand, 1862-1932)의 추천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위해 당시의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을 설득하러 미국에 파견되다.
1918(59)
1월 24일 프랑스 학술원 회원에 정식으로 취임하다. 그는 관례대로 그의 좌석의 전임자 올리비에(Emile Ollivier, 1825-1913) 장군에 대한 평가와 찬사의 연설을 하다. 르네 두믹(René Doumic, 1860-1937)이 답사를 하다.
6-9월 미국으로 두 번째 파견을 가다.
1919(60)
3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3등급(Commendeur)을 받다.
11월 28일 공교육 고등 협의회(Conseil supérieur de l'Istruction publique)에 위원으로 선임되다.
정신적 에너지(L'énergie spirituelle, 1919)(ES)을 출판하다.
1920(61)
9월 24일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회 개회사로서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Le possible et le réel, 1920)」을 발표하다. [이 강연에 예고된 제목은 「예견과 새로움(prévsion et la nouveauté, 1920)」이었다] - 이 논문은 1930년 11월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발표할 때 개작한다.
1921(62)
1921년 7월 9일 지이유앙(René Gillouin, 1881-1971)의 새로운 근대프랑스 역사철학(Une nouvelle philosophie de l'histoire moderne et française, 1921)에 대한 보고서 (Me 1333-1336).
12월 19일 꼴레즈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퇴임하다. (나중에 후임자는 르 르와이다)
1922(63)
1월 4일 국제연합에서 유네스코(UNESCO)에 해당하는 기구인 국제연맹의 국제 지식 협력 위원회(CICI, Commision internationale de coopération intellectuelle)의 회원이 되었고,
4월 6일 프랑스 철학회에서 아인슈타인과 토론을 벌이고, 그 결과로 지속과 동시성(Durée et Simultanéité, 1922)(DS)을 출판하다.
8월 1-6일 제네바 첫 회의에서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다.
정치과학 학술원에서 「고전 연구와 교육개혁(Les études classiques et la réforme de l'enseignement)」을 제출하다.
1923(64)
8월 9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2등급(Grand officier)을 수여 받다.
8월 18일 레지옹 도뇌르의 심사 위원회(Conseil de l'Ordre) 위원이 되다.
1924 벩송이 제임스에 대한 번역 책에 서문을 쓰다. 「서문(Préface)」(Préface a "W. James, Extraits de sa correspondance", shoisis et traduits, par Fl. Delattre et M. Le Breton) (Me 1470-1474)
1925(66)
9월 9일 건강상의 이유로 국제 지식 협력 위원회(CICI)에서 물러나다.
1928(6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다.
1930(71)
3월 29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1등급(Grand croix)을 수여 받다.
1932(73)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MR)을 출판하다.
- 스피노자 탄생 300주년기념 학술대회에 프랑스 철학회 회장 자격으로 편지 보내다.
1933(74) 10월 9일 레지옹 도뇌르의 심사 위원회 위원직을 사직하다.
1934(75)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PM)를 출판하다.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 정신」에 대하여 라디오 방송을 하다.
1936(77)
8월 「나의 임무들(Mes missions)」.
1937(일흔여덟) 데까르트 학술회의(Congrès Descartes)
1940(81)
7월 투르 시와 인접한 작은 도시 생 시르 쉬르 르와르(Saint-Cyr-sur-Loire)에서 여름을 지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정령하자, 피점령지인 보르도 부근의 랑드(Landes)지역의 도시 닥스(Dax)로 피난 갔다가,
11월 빠리로, 보세주르 대로(Bd. Beauséjour) 47번지 아파트(1929년 이래로 거주)로 오다.
1941(82) 1월 3일 빠리에서, 전시의 석탄 배급의 부족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다가 폐렴(congéstion pulmonaire, 폐충혈)으로 사망하다. 전시 중에 랍비가 없어서 카톨릭 신부를 불렀으나 신부가 도착하기 전에 벩송이 운명했다고 벩송의 부인이 증언했다. 즉 벩송은 카톨릭교도인 적이 없다.
1월 6일 전쟁 중이며,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학술원 장례로 치르지 못하고, 조촐한 가족장으로 파리 교외 가르슈(Garches)묘지에 묻히다. - 이 보고는 프랑스 아카데미 간사였던 시인 뽈 발레리가 전했다.
- 1946 뇌뷔르제(Louise Neuburger, 1871-1946) 사망
- 1967년 프랑스 만신전(Pantheon)의 표석명단에 올랐다.
1967 이 해 딸(Jeanne Bergson, 1893-1967)은 벩송의 소장품들을 기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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