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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8.2.3. 구례 舊例
고려조는 과거科擧에서 지공거知貢擧60)를 미리 정하였으므로 붉은 분이 코를 어지럽힌
다는 기롱이 있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서 규칙을 개정하여 모두 원나라 제도를 사용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고시관考試官에 합당한 사람을 그때가 되어 입계하여 낙점을 받
고, 수권관收券官·등록관謄錄官·봉미관封彌官, 사동관査同官과 지동枝同官의 제도를
두었다.61) 또 강경에 서의 과목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이고, 또 자호를 쓰고 제비를 뽑는 제
도이다. 수협관搜挾官62)을 두어 문 밖에 나누어 세워서 의금衣襟을 샅샅이 조사하여, 상
자에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서 순작관巡綽官에 넘겼으며, 장외場外에서
는 일식一式을 정지시키고 장내場內는 이식二式을 정지시켰다.
고려 문종 때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정유언鄭惟彦이 이름을 쪽지로 가리고 선비를 뽑는
방법을 설립하였다. 모든 시험에 나아가는 여러 유생들은 각각 시권의 머리에 성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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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지공거知貢擧: 시관試官이다. 지거知擧라고도 한다.
61) 지동관枝同官과 사동관査同官; 지동관은 과거시험 답안지를 시詩·부賦·표表·책策으로 분류하여 정리하는 관원이며, 사
동관은 응시자의 시험지와 역서易書하다가 잘못 쓰여진 것을 조사하는 관원이다.
62) 수협관搜挾官: 과거 보는 데에서 책을 가진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살피는 임시 벼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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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사조四祖를 쓰고 풀로 봉하여, 시험 수일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고, 과장을 열기 전날
오후에 주문主文63)이 장에 제각題脚을 갖추고 자문紫門에 이르러 나아가 올린다. 상께서
봉한 것을 뜯어서 보고 각 제 위에 낙점하고 봉하며 서압하고 주면, 주문主文이 받아 원에
이른다. 다음날 여명이 트면 봉투를 열어 방제放題한다. 당직當直 승선承宣64)이 금인金印
을 받들어 시원試院에 가서 주문主文과 함께 앉는다. 거자擧子의 시권을 봉한 곳에 일일
이 금인을 찍어 반사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제도를 참고하여 썼다.
모든 과거의 회시會試에서 삼장일三場日마다 예조禮曹가 잔치를 벌인다. 또 특별히 술과
과일을 상이 내리는 일이 있으면 모든 시관들은 기뻐하고 마시며 영광스럽게 여겼고, 제
생에게 담죽과 청주 수십 동이를 차려서 목마름을 풀게 한 뒤에 파하게 하였다.
8.3. 부록_유명한 석학들의 논의 附 名碩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 1590)65)이 지관사知館事66)가 되었을 때, 구례舊例에 따라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제술을 시험 볼 때면 정부政府, 관각당상館閣堂上67)이 모두 모여
의자에 앉아 있고, 성균관의 제생들은 뜰로 들어와 배례를 행하였다. 이때 비로소 공이 참
고대신參考大臣에게 말하기를, “배하拜下는 신하가 임금을 알현할 때의 예의입니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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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주문主文: 대제학의 별칭이다.
64) 승선承宣: 승지를 말한다.
65) 노수신盧守愼: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시호는 문
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改諡했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이연경 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
다. 1543년(중종 38) 문과에 급제했고,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다. 대윤大尹으
로서 인종 즉위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기李芑를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소윤小尹 윤원
형尹元衡이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파직되어, 1547년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이
어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가죄加罪되어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었고,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동안 이
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 주자朱子의 인신도심설人心道心說에도 이설異說을 세워, 이항李恒과 논
쟁하여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고, 사칠론四七論에 대해서도 기대승奇大升과 의견을 교환하는 등 학문에 정진했
으며, 『대학장구大學章句』·『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교리校理로 기용되었
으며, 이어 대사간·부제학副提學·대사헌·이조 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1578년 좌의정·1585년 영의
정에 이르렀다. 1588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과거에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
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書藝에도 능했다.
66) 지관사知館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준말로 정2품 춘추관 지사知事를 말한다.
67) 관각당상館閣堂上: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과 대제학大提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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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首善의 땅68)에서 유자를 대우하는데 이와 같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유생
儒生으로 하여금 읍揖하게 하고, 여러 재상들도 의자에서 내려와 서서 받아서 선비를 우
대한다는 뜻을 보여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좌우左右에서 모두 “옳다.”고 하였다. 성
균관시에서 관정에서 읍하는 의례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과거에서 쓰는 문장의 폐단이 심하다. 사육변려문은 쓸데없이 기니, 줄글과
똑같다. 이른바 줄글이란 또 공사장公事場의 문자인 듯하고, 시와 부에는 입제入題·포
서鋪敍·회제回題 등의 형식이 있으며, 더욱이 문장가文章家와 문체가 합치되지 않았다.
비록 과거에 붙을 수는 있지만 끝내는 문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니, 세상에 어떤
쓸모가 있겠는가? 반드시 근본을 크게 변화시켜야만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글 중에서 사서의四書疑는 체식體式이 전혀 없는데, 일찍이 중조의 서적 가운
데 사서의四書疑 1편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은 곧 호원胡元 때 절강浙江 향시鄕
試에서 지은 것이다. 오늘날 과장에서 지은 것이 같은 책을 보고 베낀 것 같으니, 우리나
라 과문의 폐단은 대개 이로부터 기원한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식년의 급제는 오직 강경講經으로만 뽑으니 그 뜻은 참으로 아름
답다. 다만 강경講經하는 사람들만이 치용致用의 실제가 없고 어떤 이는 글을 지을 수 없
으므로 세속에서는 반드시 그것을 모멸하여 ‘실학급제實學及第’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조종에서 경전 하나만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속담에서는 ‘우리나라의 공도公道는 과거일 뿐이며, 세도가 날로 내려가고
간교함이 점점 불어나서 근래에 더욱 심해졌다. 만일 중조에서 과장을 설치하면 이러한
근심이 없을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공도가 없이 과옥만을 행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송나라 원풍연간元豐年間에 예부禮部 과거 시험장이 불이 나서 거자들이 모두 죽었
고, 황명 천순天順 7년에 회시會試에서 타 죽은 거자擧子들이 천여 명이니 이것도 염려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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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수선首善의 땅: 나라의 가장 좋은 땅, 다른 곳보다 나은 곳으로 대게 서울이나 성균관을 뜻한다. 여기서는 성균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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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崖 류성룡이 옥당에 있을 때에 외읍外邑의 사마소司馬所69)를 혁파할 일에 대해 아
뢰기를, “대개 우리나라 외방인外方人은 생원, 진사가 각각 관문 근처에 사마소를 건설하
고 엄연히 아문 하나를 이루었으니, 이것 때문에 유향소留鄕所를 압도하고 무단을 빙자
하여 수령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으니 양남에서 더욱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崗이 상소하기를, “한나라 때 효렴孝廉·현량賢良·무재茂才·명경明經의 법제
에 대략 의거하여 과명科名으로 삼아, 수재·시종 이상에게 재주 있는 인재를 밝히 현양
하여 경사로 불러 모아 책시策試에 친히 가서 불러 만난다. 묻고 답하고 만일 행할 만한
것이 있으면 출신出身을 주거나 관직官職을 줄지 시험하고, 생원과 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재下齋와 사학四學70)에 들어가게 하고, 외방은 모두 향교에 들어가게 합니다. 처
음 입학할 때 제생諸生들은 10명이지만, 그 뜻과 학문을 추천한 뒤에 시강하고 향교에 들
어갈 것을 허락합니다. 학교에 적이 없는 자는 과거에 나아갈 수 없고, 사학관四學官과
수재守宰, 교관敎官 등이 모두 여러 학생 중에게 학행이 있는 자를 매년 추천하여 태학에
올려 보냅니다. 경과 행적이 뚜렷이 드러난 자를 취해 세초마다 계문啓聞하고, 매년 상
께서 학문을 보고 문형文衡과 중신重臣 및 근신近臣, 경행재經行齋 유생儒生에게 명하
여 경의 어떤 곳이나 펴서 어려운 곳을 물은 뒤에, 경학에 능통하고 지식이 있는 자를 뽑
아 출신出身을 사급하거나, 혹은 책을 내어 선비를 시험 볼 때에도 그 논의가 조리 있는
자를 뽑아서 그 들떠있고 괴벽한 자를 내쫓습니다. 매번 과거 때마다 태학의 장이長貳는
기한에 앞서 명륜당明倫堂에 모여 상재上齋와 하재下齋의 명부를 다 가져다가, 그 행실
에 오점이 없고 학문에 뜻이 있는 자를 택하여 비로소 과거에 나아갈 것을 허락해야 합니
다.”라고 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71)이 상소하기를, “이이李珥는 일찍이 석담서당石潭書
堂에서 과거 글을 위한 초집抄集을 가지고 있는 것을 허락지 않고, 오직 소학小學과 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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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사마소司馬所: 지방에서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들이 조직한 사설 기관으로, 대게 지방의 관아官衙근처에 별도로 건물을 짓고
모여서 지방의 정사를 간섭하였다.
70) 사학四學: 중학中學, 동학東學, 남학南學, 서학西學의 교육 기관으로 담당 지역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71) 조헌趙憲: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며, 성혼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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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近思錄만을 장려하여 가르쳤고, 그런 다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가르쳤습니다. 경학에
만 밝고 문리에 통달되지 않은 사람이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신은 외
람되게도 제독의 임무를 제수 받았으니 과거사목科擧事目을 엄격히 할 것을 청합니다.
우선 실학實學을 돈독히 숭상한 다음에 사서四書와 자子·집集에 이르게 하고자 합니다.
주자朱子는 3일과 8일에 출제하여 4일과 8일에 고시하는 규칙에 의거하여 유학幼學이
사서에 통하지 않고 시부를 짓되, 윤리가 없는 자는 관광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감시監試
에서는 생원과 진사 중에서 『근사록近思錄』72)과 경, 역사에 통하지 않고 문장을 짓되, 이
치가 뛰어나지 않는 자는 동당東堂73)에 감히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고, 또 건주虔州 사
람들로 하여금 감히 개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엽鄭燁이 상소하기를, “순제의 윤차輪次와 절일제의 과시課試 때문에 선비들은 모두
문예의 말단에 힘쓰니, 실제에 힘쓰고 본질을 돈독히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근
래에 조정朝廷의 많은 일에 대해 이러한 규정조차 폐지되었으니, 하물며 그 권면하고 진
작시키는 것을 바라서 그 경에 밝고 행실을 닦는 실질을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저는 따로 규제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2~3점이 1년이면
20~30점이 되니, 원점의 수를 정하여 절일節日·과시課試·전시庭試·전강殿講이 모두
몇 점 이상은 나아오는 것을 허락해야 하며, 대비大比74) 이외에 세상에 드문 큰 경사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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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근사록近思錄: 1175년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頥·정호程顥·정이程頥·장재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
문의 중심 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아 편집하였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
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622조의 항목이 14권으로 분류
되었는데, 각권의 편명은 후대의 학자들이 붙인 것이 굳어진 것으로서,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
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으로 구
성되어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학문하는 사람이 그 단서를 구하고, 힘을 쓰며, 자기 몸을 처신하고, 사람을 다스리며, 이
단을 구분하고, 성현을 보는 일의 큰 줄기를 다 갖추었다고 한다.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함께 신유학의 필수 문헌으로
중시되었고, 채모蔡模의 『근사록집주近思錄集註』 등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한국에는 고려 말에 신유학이 수입될 때 들어와
1370년(공민왕 19) 진주목사 이인민李仁敏이 4책으로 복간한 바 있으며, 그 책은 지금까지 전해져 보물 제262호와 제1077 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세종·문종대의 경연에서도 이 책을 강론하였지만, 일반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조선 전기
훈구파의 사장詞章 중심의 학문을 비판하고 신유학의 요체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한 중종대 사림파 단계에 와서였다. 1519년
(중종 14) 구례현감 안처순安處順에 의해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소학』과 함께 중종대 사림파의 상징적인 서적으로 인식되
어, 기묘사화 후에는 한때 엄격히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단계에 와서는 학자가 『소학』과 사서삼경 및
역사서 등을 읽은 다음에 탐구해야 할 성리서性理書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학자의 필수 문헌으로 인식되
어 수많은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8세기 이익李瀷의 『근사록질서近思錄
疾書』를 비롯한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73) 동당東堂: 과거의 본시험에 대한 별칭으로 조선 시대 식년시式年試·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 등의 문과文科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74) 대비大比: 3년마다 1번씩 관리의 성적을 고사考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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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면 과거를 절대 시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성균관에 근신近臣을 보내거나, 대궐의
뜰에 많은 선비를 불러 모아 제술을 명령하거나 경서를 강하게 하여 장원 1~2명을 뽑아
서 특별히 직부直赴를 허락하십시오. 1년에 이와 같이 서너 차례 시행하여 3년간 대비의
과거에서 모두 은혜로운 영예를 준다면, 그 재주와 학문이 두루 갖추어 지는 것을 바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필시 정밀하게 인재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관과 음관을 막론하고 학행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제독관提督官으로 정하고, 팔도의 큰
고을에 나누어 파견합니다. 그리고 생원과 진사, 학생 중에 예문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 근면하였는지 여부를 고찰하여 성균관에 보고하고, 그들을 성균관에 불러 재주를
시험하고 업을 강하여, 그 중에서 빼어난 사람에게 상을 내립니다. 이후 3년마다 경관京
官을 파견하여 각 도道·목牧·부府에서 모두 모이게 합니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을 고
강하여 그 대의에 순수하게 통하는 자를 뽑아 교유校儒로 교적에 올려, 성균관과 예조에
교적校籍을 나누어 보냅니다. 이름이 이 적에 실려 있지 않는 자가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선비들은 스스로 각자 힘써야 할 바를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75)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이십사순二十四巡
제술의 규칙은 너무나 번쇄하여 사습士習만 무너뜨리고 더럽힐 뿐이니 지금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다만 정자程子가 ‘시험을 고쳐 과로 만든다[改試爲課]’는 뜻에서 사시四
時마다 한차례 학생들을 모아 강송으로 10명을 가려내고, 또 사시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학생을 모아 강송으로 10명을 뽑았습니다. 더하여 제술자製述者 5명을 뽑으니 1년 내내
각 학의 강생講生은 40명이고 제술생製述生은 20명이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관관館官이 학관學官과 태학에서 합좌合坐하여 사학四學에서 뽑힌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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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송준길宋浚吉: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아버지는 영천군수榮
川郡守 이창爾昌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
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
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에 나갔다가 장인 정
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
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
계가 올랐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
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
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
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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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강講으로 다시 16명을 뽑고 제술로 8명을 뽑았습니다. 이로써 생원·진사의 회시會
試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소학小學을 고강考講하여 조흘照訖의 규칙을 거듭
밝히고, 반드시 1달의 기한 내에 개강開講하여 4책 중에서 심지를 뽑아 임강臨講하고, 강
에서 문의文義를 물어 그 해박한 자를 뽑아 생원진사 초시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케 하였
습니다.”라고 하였다.【숙종 10년(1684)에 상께서 윤허하고 따랐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76)이 말하기를, “문예文藝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곧 말세
末世의 폐습이다. 기송사장記誦詞章의 학문은 그 해악이 이단에 못지않다고 옛 사람들이
말씀하셨다. 국조國朝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에 오로지 문사만을 뽑아 오로지 그 길을 통
하게 하고 계속 이어가게 해서, 한주翰注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오르는 것과 같
이 한다. 성현과 호걸이 비록 이때에 태어났더라도 그 사이에서 드러나기가 참으로 어려
웠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록小錄에 기록하기를, “식년式年에 강경講經하는 것은 애초에 그 의리義理를 밝히고자
하는 데 뜻을 두었다. 그런데 요즈음 선비들은 다만 구두를 익히기만 하고 모두 그 의리를
밝히지 못하여, 경장은 많이 기억하기 어려우니 음란하고 문란한 말로 기록하며 성현聖
賢이 훈고한 글 위에 열서하니 참으로 한탄할 만하다”라. 고 하였다.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77)이 말하기를, “전조의 과거에서는 시관試官에 지공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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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식李植: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이다.
좌의정행荇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옥玉의 딸이
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내외의 관직을 경유하였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
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 사대가로 꼽혔다.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
初本』 등을 편찬했다.
77) 성현成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자
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
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
을 지냈다.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
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
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주고받아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
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
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음
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그뿐만 아
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를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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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貢擧78), 동지공거同知貢擧79) 2사람을 명망 있는 문신으로 미리 정하였다. 은문恩門은
문생門生을 자식과 같이 여기고 문생門生은 은문을 부모와 같이 여겼다. 내실로 들어가
일방一榜을 보는 데에 이르면 은문恩門의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문생에게 헌수獻
壽 받기를 친자식 대하듯이 하였다. 우리 왕조에서는 지공거知貢擧의 제도를 없앴지만,
지금까지도 문생좌주라는 이름이 아직 살아남아서, 술자리를 마련하거나 혹은 은문에 상
사가 있으면 집이나 길에서 전을 설치하고 슬피 울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문생과 좌주가
서로를 원수 보듯이 하여 오히려 서로 배척하니, 여기에서 세태가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고 하였다.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1580~1643)80)가 우상右相이었을 때에 감시監試 이소二所에서
거자擧子들이 문란한 짓을 하자, 파장罷場할 것을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에게 곤장을 치고
군역에 충당할 것을 명하는 일이 있었다. 공公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수창首倡하는 사
람을 죄가 있다고 해서 결장決杖하는 것은 선비들을 다스리는 법이 아닙니다. 국가에서
선비를 우대優待한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문斯文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하
였다.【인조조仁祖朝에 상上께서 윤허하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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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지공거知貢擧: 이 명칭은 당唐·송宋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貢은 추천하여 보냄, 거擧는 뽑아서 씀, 지知는 주관하여 본다
는 말로서, 각 지방에서 추천하여 보낸 선비를 뽑는 주임관主任官이라는 뜻이다.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의 건
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신설하면서 둔 것으로, 처음에는 쌍기를 지공거로 임명한 뒤부터는 문관 1명으로 지공거를 삼아 오다
가 일이 번잡해짐에 따라 보좌관으로서 1004년(목종 7)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더 두었다. 얼마 뒤 동지공거는 폐지되었다가
1083년(문종 37) 다시 동지공거 1명을 제도로서 확정시켰다. 광종·경종·성종 3대의 지공거는 주로 쌍기·왕융王融 등 귀
화인歸化人인 한림학사가 임명되었으나, 그 뒤 과거제도가 일반화되면서 고려의 문신들이 이 임무를 맡았다. 1315년(충숙
왕 2) 고시관考試官으로 개칭하였다가 1330년 다시 지공거로 환원하였다. 또 임금이 친시親試할 때에는 시권試券을 읽어드
린다는 뜻에서 독권관讀券官이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지공거를 학사學士라 부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지공거가 거의
한림학사 중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구제舊制에는 과거에 앞서 미리 지공거를 임명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많아, 공
민왕 때에는 과거 하루 전에 임명하여 폐단을 막아보려고 시도한 일도 있다. 한편,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지공거에 대하여 은
문恩門 또는 좌주座主라 하여 문생門生의 예를 지켰다.
79) 동지공거同知貢擧: 고려 시대 과거의 부고시관副考試官으로 지공거를 보좌하던 관직. 성종 23년(1004)에 처음 두었으며, 잠
시 폐지되었다가, 문종 37년(1083) 과거에 동지공거同知貢擧 1명을 두면서 정식 제도로 확립되었다. 충숙왕 2년(1315)에
동지공거를 동고시관同考試官으로 고쳤다가, 동왕 17년(1330)에 다시 동지공거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동지공거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좌주座主와 문생門生 사이의 사적인 관계가 문제로 제기되자 영구히 폐지되었다.
80) 강석기姜碩期: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나, 시세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인조반정 뒤
교리 등을 역임했다. 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을 거쳐서 1636년(인조 14)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640년에는 우의정에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1627년 부승지로 있을 때 딸이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이 되었는데, 그 뒤 강빈姜嬪은 심관瀋館에
서의 영리營利(뇌물 외교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로 인조의 불평과 역위易位(임금의 자리를 바꾸는 것)를 꾀한다
는 의심을 받던 중, 세자가 부왕에 의하여 독살되면서 강빈도 저주 사건의 주모자로 모함되어 사사되었다. 숙종 때 복관復官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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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의 천일록 -- 과거제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