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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경황제(애신각라 재첨) | |||||||
생몰 |
1871~1908 |
재위 |
1874~1908 | ||||
연호 |
광서 |
능호 |
숭릉 | ||||
시호 |
동천숭원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 ||||||
아버지 |
순현친왕 혁현 |
어머니 |
복진 엽혁나랍씨 | ||||
효정경황후 엽협나랍씨(엽혁나랍 정분) | |||||||
생몰 |
1868~1914 |
별칭 |
황후→황태후 | ||||
시호 |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 | ||||||
아버지 |
도통 계상 |
비고 |
서태후의 질녀/광서제와 사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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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경황후의 성은 엽혁나랍이고, 이름은 정분이다. 서태후의 아우인 도통 계상의 딸이다. 광서 14년, 서태후가 혼인을 결정했고, 다음 해에 황후가 되었으며, 혼인 후에는 동6궁의 하나인 종수궁에 기거했다. 그녀와 광서제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으나, 그녀는 서태후가 선택한 황후였고, 서태후는 자신의 질녀와의 사이를 늘 감시했기 때문에, 광서제는 그녀를 잘 대해줘야 했다. 몸은 황후였지만, 그녀는 총애를 얻지 못했고, 궁중에서 고모 서태후의 환심을 사지도 않아, 평소에 여러 명부 왕비들을 대하면서도 크게 위신을 세울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 곤궁하여서 궁중에서의 생활은 극히 비참했다. 광서 27년, 8국연군이 북경을 공격했을 때, 황후는 서태후를 모시고 광서제와 더불어 서안으로 도주했다. 28년, 자금성으로 돌아왔으며, 진비가 죽은 후에도 총애받지 못했다. 광서 말에, 광서제는 병으로 서거했는데, 서태후의 유지로 선통제를 즉위시켰으며, 선통제는 그녀를 융유태후(隆裕太后)라고 존숭했다. 선통제는 겨우 세 살이었기 때문에 태후는 선통제를 기름과 동시에 관행에 따라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선통제의 생부인 섭정왕 재풍과 함께 흔들리는 청왕조를 다스렸다. 그러나 선통 3년 12월, 태후의 이름으로 선통제의 퇴위조서가 반포되었다. 민국 2년 1월 17일, 융유태후는 서6궁 중 하나인 태화전에서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46세였다. 시호는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孝定隆裕寬惠愼哲協天保聖景皇后)이며, 광서제와 함께 숭릉에 안장되었다. | ||||||
온정황귀비 타타납씨(타타납 영형) | |||||||
생몰 |
1874~1924 |
한족이름 |
당계 | ||||
별칭 |
근빈→근비→근귀인→근비→황고근귀비→단강황귀태비 | ||||||
아버지 |
장서 |
비고 |
각순황귀비의 언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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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강황귀비 타타랍씨는 예부상서 장서(長敍)의 딸이며, 청나라 말기 광서제의 비이며, 그 여동생은 그 유명한 진비이다. 자매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달랐는데, 가족 중에는 단강황귀비가 넷째, 진비가 다섯째였다. 광서 14년, 광서제는 타타랍씨와 그 여동생을 동시에 간택하여서 후궁으로 삼았다. 타타랍씨와 여동생은 각각 근빈(瑾嬪)과 진빈에 봉해졌다. 입궁한 후, 근빈은 동6궁의 영화궁에서 지냈고, 진빈은 동6궁의 경인궁에서 지냈다. 근빈은 궁에 들어온 후 여동생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는 엽혁나랍 황후처럼 총애받지 못했다. 6년후, 자매는 근비(瑾妃)와 진비에 각각 책봉되었다. 광서 20년, 진비는 서태후에 의해 죄를 받았고, 언니 근비도 역시 귀인으로 강등되었으나, 진비는 감금되었고 근비는 영화궁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광서 26년 7월에 8국연군이 북경을 공격하자, 서태후는 자금성에서 도주했는데, 근비도 함께 따라갔다. 선통제 등극 후, 근비는 영화궁에 머물면서, 황고근귀비(皇考瑾貴妃)가 되었다. 곧 그녀는 단강황태비(端康皇太妃)가 되었고, 선통제는 그녀를 황아낭(皇阿娘,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선통제가 퇴위한 다음 해에 융유태후가 붕어했고, 근비는 4대태비로서 지위가 높았다. 그녀는 4대태비 중 가장 연령이 어려서, 사상이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민국 11년, 근비는 완용을 선통제의 황후로 지지한다. 영화궁에서 근비는 상당히 품미가 있는 생활을 보냈다. 후에 영화궁에서는 많은 양의 분경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미식가였다고 한다. 민국 13년, 근비는 감기에 걸렸는데 그것이 악화되어서 영화궁에서 서거하니 향년 52세였다. 그녀는 단강황귀비의 신분으로 숭릉비원침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온정황귀비(溫靖皇貴妃)이다. | ||||||
각순황귀비 타타납씨(타타납 서설) | |||||||
생몰 |
1876~1900 |
시호 |
진귀비→각순황귀비 | ||||
별칭 |
진빈→진비→진귀인→진비 | ||||||
아버지 |
장서 |
비고 |
온정황귀비의 동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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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순황귀비 타타랍씨는 만주 양홍기 사람이다. 청나라 광서제의 진비(珍妃)이며, 가장 총애받았던 비이나, 후에 서태후에 의해 우물에 빠져 죽었다. 진비의 조부 유태와 아버지 장서는 호부의 좌시랑을 맡고 있었고, 백부인 장선은 광주장군이었다. 진비와 그 언니 근비는 어릴 때 장선을 따라 광주에서 자랐다. 진비가 10세가 되던 무렵, 자매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1889년, 진비 자매는 입궁하게 되는데 13세의 그녀는 진빈(珍嬪)에 봉해졌고, 15세의 언니는 근빈이 되었다. 광서 20년에, 서태후의 육순 때 빈을 비로 올렸을 때 진비가 되었다. 광서제의 대혼 후, 융유황후는 총애를 잃었고 근비와 광서제의 사이도 막막했다. 오직 진비만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주었고, 바둑을 두는 등 황제를 곁에서 모시며, 광서제와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지냈다. 광서 20년 10월, 서태후는 근비와 진비를 귀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녀는 부족한 용채를 뇌물을 받아 매관매직함으로서 충당했는데, 이를 서태후에게 들켜서 고문당했다. 진비는 냉궁에 유폐되었고, 광서제와는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 광서 26년 7월 20일, 8국연군이 북경을 공격했다. 서태후는 광서제 등을 데리고 서안으로 도주했다. 그 때 서태후는 갇혀 있던 진비에게 자진을 명했으나 진비는 불응했다. 그리하여 태감이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어 죽였다. 이 명을 시행한 태감은 최옥귀(崔玉貴)였다. 민간에서는 진비가 광서제가 진행중인 무술변법을 지지하여 서태후의 분노를 샀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진비는 몇 차례 궁궐의 금기를 위반하였고,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했으며, 광서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서태후의 질녀인 융유황후가 실총했기 때문에, 살해됐다고 한다. 1901년 봄, 서태후와 광서제는 자녕궁으로 돌아왔다. 서태후는 우물에서 진비의 시신을 꺼내어 궁녀묘지에 묻었으나, 세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녀를 진귀비(珍貴妃)에 추봉했다. 이후에 각순황귀비에 추봉하여 숭릉비원침에 안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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