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42년 전 인 1982년은 내 평생 제일 많은 공부를 한 잊지 못할 해일듯 하다.
결혼을 하고 분가(分家)를 하여 경기도로 이사를 했을 때였다.
당시에는 형님이 책을 많이 가지고 계셔서 같이 살 때는 책에 대해서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떨어져 살고보니 "사전"이라도 찾아 보려면 서울의 본가를 찾아야 했다.
그 해 봄.
평소 가지고 싶었던 학원 출판사의 "백과 사전"의 판매 광고가 신문에 나왔다.
당시에는 내노라하는 "백과 사전"은 이곳에서 나온 책밖에 규모있는 사전은 없었다.
주머니 형편으로는 조금 고가(高價)의 책이지만 할부라는 매력에 주저없이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하고 계약금을 낸지 며칠 후 집으로 "백과 사전"이 배달되어왔다.
그런데 포장되어 온 책뭉치를 드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너무 가벼운 것이다.
"어? 책이 일부만 배달됐나?" 하는 의구심으로 포장을 뜯어보고 아차 싶었다.
백과 사전 자체는 너무 가볍고, 백과 사전의 카바는 너무 조악했다.
책을 펼치니 종이도 질이 아주 나쁜 종이로 제작되었고 인쇄상태도 불량했다.
결코 내가 원하던 사전도 아니였고, 형님이 가지고 계신 그 "백과 사전"도 아니였다.
한번 보고 말 잡지라면 몰라도 두고 두고 보아야 할 "백과 사전"인데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책 회사로 전화를 하여 계약금은 포기할 테니 구입을 취소하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책을 판매한 회사의 반응은 친절했던 판매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다.
한마디로 "웃기지 말아라!" 하는 것이다.
며칠 후 책 대금을 일시에 납부하라는 내용증명(內容證明)이 왔다.
아니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계약을 위반할 시는 일시불(一時拂)로 모두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확인도 안하고, 할부 계약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게 큰 실책이였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서울 지방법원"에서 "출두 통지서"가 날아 왔다.
책을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출판사에서 소송을 한 것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서도 안 가 본 나에게 생전 처음 법원이라는 곳에서 "출두 통지서"가 오니
겁도 나고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주위의 도움으로 "YWCA"에 있는 "소비자 불만센타"에 연락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답은 생각 밖으로 아주 간단했다.
다른 물건은 몰라도 책은 교환은 될지언정 결정적인 "하자"(瑕疵)가 없는 한 반품이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책은 결정적인 "하자"(瑕疵)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사람한테서 질의가 들어 왔지만 해결이 불가능하단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서가 모든 것을 판매자들이 유리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소비자 보호원"의 전화번호를 찾아 문의를 했다.
답은 "YWCA"와 대동소이했다.
책은 특별한 하자(瑕疵)가 없는 한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파본(破本)은 바꿔 주지만 환불(還拂)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책을 만지작거려야 뾰족한 대책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아침 신문에 "동아출판사"의 30권짜리 "원색대백과사전" 광고가 났다.
광고 내용을 읽으며 나는 신중하지 못한 나 자신을 얼마나 책망했는지,,,,,
"아! 내가 가지고 싶던 백과사전은 바로 이런건데,,,,!"
법원 출두 3일을 남겨놓고 특단의 묘안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 형님네 들려서 학원사의 백과사전 1권을 가지고 왔다.
"세상에 하자(瑕疵)없는 물건이 어디 있겠어?
더구나 이렇게 얇은 책이라면 뭔가 있을거야."
반드시 찾아 내리라 하는 마음으로,,,,
형님네서 가져 온 "학원사 백과사전"과 내가 산 "학원사 백과사전"을 펼쳐 놓고 비교 공부를 시작했다.
밤을 새려고 작정했지만 의외로 너무 일찍 이 조악(粗惡)한 제품의 중대한 "하자"(瑕疵)를 발견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내가 두 권의 백과사전을 비교하던 중
문제의 백과사전에는 "갯"의 항목이 통채로 없는 것을 찾아 낸 것이였다.
새로 산 "학원사 백과 사전"은 드문 드문 항목을 빼 먹고 인쇄를 한 것이다.
이렇게 인쇄를 해서 책의 권수 만 늘렸기 때문에 책의 두께가 얇았던 것이다.
나는 비로서 자신을 가지고 법원에 가서 답변할 내용을 대충 정리를 했다.
드디어 법원에 출두하는 날 아침.
일찍 회사에 가서 낮에 잠시 외출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중에 책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어찌할 거냐고,,,,,"
법원에 가서 보자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더니 사장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바꾼다.
"무슨 뱃장으로 그러느냐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말했다.
"사장님 혹시 바다낚시 좋아하십니까?"
"네?,,,,아,,네~."
사장이라는 사람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듯 시쿤둥하게 대답했다.
"그럼 바다낚시에 주로 쓰는 미끼가 무엇인지 아시겠네요."
",,,,,,,,,?". 사장이라는 사람은 대답이 없다.
"사장님 그 회사 백과사전 지금 가지고 계시지요?"
"네"
"바다낚시 미끼로 쓰이는 "갯지렁이"를 한번 찾아 봐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잠시 후 ,,,,,,,
책을 반품 받겠으니 법원에 나오지 말란다.
혹시 반품 받겠다고 하며 법원 출두를 안하게 하여 나를 불리하게 하지 않을까 의심을 했다.
나는 그렇다면 법원 출두시간 전에 와서 반품을 해 가면 그리 하겠노라고 말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백과사전은 "학원사"의 이름을 도용한 이른바 짝퉁이라고 한다.
백과사전은 반품되고 나는 이 사실을 "소비자보호원"과 "YWCA"에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엉터리 백과사전을 반품하고 30권짜리 "동아 원색 대백과 사전"을 구입하게 됐다.
그당시 책값이 60여만원이라는 거금이였지만 어떻게해서 라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백과 사전은 계약 당시 아직 인쇄가 모두 안 된 상태라 한 달에 한 두 권씩 배송이 된다고 했다.
그해 가을 드디어 1권과 2권. 두 권의 백과사전이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들어봤다. 생각보다 굉장히 무거웠다.
포장을 뜯고 책을 펼치니 두터운 종이에서 나오는 잉크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책은 한 달 간격으로 한권, 또는 두 권씩 배달이 됐다.
덕분에 일찍 귀가하여 백과사전을 차례로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다 되지만
그 때만해도 저녁마다 백과사전과 씨름을 하는 것이 큰 재미였다.
마지막 32권째인 "보유편"(補遺篇)이 오기까지는 대략 8년이 걸렸다.
그후로는 책뿐 아니라 모든 것의 할부, 또는 월부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반응이 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할부의 허점과 위험을 알은 것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에 걸쳐 백과사전 30여 권을 전부 읽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니 그런 행운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백과 사전을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않아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원하는 것은 컴퓨터로 찾아보지만
그래도 가끔은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나만의 세상을 섭렵하는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첫댓글 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곤 했는데 뿌리가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