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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봄
2014년 04월 05일(일)
(히12:1~2)
0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0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절 앞부분만 같이 따라 합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성경구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어차피 갈아엎어야 된다. 갈아엎은 밭을 그냥 두면 도로 잡초가 안다. 그러니까 밭을 갈고 나면 새로운 씨를 뿌려야 한다. 이 새로운 씨가 뭔가?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씨인데,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많이 있다. 여러 가지 많은 것들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 세상에 유명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분들도 많으니까 그분들에게 없는 것만 보면 광야에서 마귀를 물리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예수의 유일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다른 분들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씨가 어떤 씨인가를 알려면 이 두 사건을 통해서 보는 것이 가장 완전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벗어나면 어떤 사람은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벳세다 광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중에 일생을 바쳐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사는데 그냥 벳세다 광야에서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고 사마리아에 가다가 머무르는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세상에서는 인정을 많이 받기 때문에 예수가 그런 분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오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새로운 씨이기 때문에 새생명이기 때문이다.
옛생명을 끝냈으면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한다. 그런데 끝내기만 하고 그냥 두면 도로 마찬가지가 된다. 귀신들린 집에 귀신을 말끔히 쫓아내서 청소해 놓았더니 다음에서 와서 보니까 일곱귀신이 들어와 있더라는 비유가 있다. 이것은 밭을 갈아놓고 그냥 두면 잡초가 더 많이 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밭을 간 이야기만 많이 하고 있다. 예를들면 욕심을 벌려가 뭘 버려라 버려라 이렇게 계속 해서 평생을 밭을 가는데 왜 그것이 새로워지지 않는가 하면 갈아놓으면 도로 그 풀이 나오고 아무리 갈아도 그 풀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씨, 새로운 씨가 없으니까 그렇다.
여기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갈아엎는 것 까지는 되는데 새로운 씨가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개혁을 하고 아무리 새롭게 하더라도 아무리 사람을 깨끗하게 닦아놔도 도로 마찬가지다. 할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씨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씨가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그 종자 도로 심고 그 종자 도로 심고 그러는 것이다. 똑 같으니까 개선될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반만년 동안 가난에 시달렸다. 지금쯤이면 보릿고개가 시작되고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그랬다. 얼굴이 누렇게 떠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었다. 이것이 불과 한 5~60십년 전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씨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해마다 그 벼를 심어야 했었고 해마다 그 보리를 갈아야 했었다. 씨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통일배가 나오면서 4배의 수확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식량문제가 해결되었다. 통일벼를 연구해서 우리나라에 도입해온 사람은 우리나라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큰 일을 한 분이다. 아마 미국같았으면 그분은 우리 국회의사당 맨 앞에 동상으로 서있었을 것이다. 미국에 가니까 국회의사당에 동상이 쭉~ 있었다. 유명한 대통령들과 유명한 분들이 있었는데, 맨 앞에 있는 분이 TV를 발명한 사람이었다. 작업복 차림으로 동상을 세웠다. 실제적인 일이어서 정말 감동스러웠다. 어느 대통령보다 더 큰 일을 했다. 물론 일본 사람들에게 뺏겨서 돈 벌이를 못했지만 우리도 반만년의 굶주림을 해결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통일벼를 연구해서 내놓은 분이다. 지금은 배부르니까 잊어서 모른다. 사실은 그렇다. 그러니까 씨가 얼마나 중요한지. 땅은 그대로인데 씨가 바꿔지니까 소출이 4배나 나왔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갈아엎은 사람도 많고 잡초를 제거한 사람도 많지만 새로운 씨가 없었기 때문에 역사는 그것을 계속 되풀이 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이 반드시 세상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배부르니까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확실히 봤다. 어떻게 춘궁기를 넘어갔고 어떻게 우리 민족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대대에 전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런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먹고 오히려 무시하고 모함을 해버리니까 누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하다가도 못한다. 해놓고 나면 누가 욕할지 모르니까. 이런 풍토가 계속 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번영을 했다는 것은 정말 애국가를 잘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못된 꼬라지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적을 이루었는가를 생각하면 애국가를 잘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애국가를 지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지난 시간까지 씨를 이야기 했다. 어떻게 마귀를 물리쳤나. 우리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상 상식으로 생각하니까 그렇다.
우리가 북한을 제압하려면 몇 배의 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첨단 무기를 몇 개 가지고 있어도 수적으로 보면 북한에 훨씬 뒤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늘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큰 힘만이 이길 수 있다는 이것이 인간의 상식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친 것은 전혀 그것과 다르다. 우리가 다 무시하고 멸시했던 그 인격, 볼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것이 없어서 우리가 다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던 그것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큰 힘을 가지고 이기는 것도 놀랍지만 아무나 그런 큰 힘을 가지겠냐는 것이다. 미국이 압도적인 힘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항복시켰지만 아무 나라나 그렇게 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일본에 그렇게 침략을 당했다면 그것은 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저력이 컸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은 드문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격으로 마귀를 제압하신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복음이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누구나 승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을 해결해 주긴 했어도 또 다른 무력을 만들어내야 하고 또 다른 무력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것이다. 그때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몇 십 배가 되는 원자 폭탄이 지금 개발되어 있다. 그러니까 만일 이것이 터지게 되면 그 피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높은 생각을 하고 놀라운 생각을 해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게 우리가 멸시했던 것을 가지고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군비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국방비 예산이 엄청나게 들어간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북한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기습을 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군사시설을 전부 지하 벙크에 넣어 놓았다. 평양에 있는 지하철이 지하 150m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 대피소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군사시설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그것을 폭파하려면 위에서 아무리 퍼 부어도 안 된다. 그런데 그 지하 벙크에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무기가 있다고 한다. 그게 독일제로 독일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데 폭탄 하나가 수십 억짜리라고 한다. 아니 수십 억도 더 된다고 한다.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데 듣고 내가 놀랐다. ‘이렇게 비싼 폭탄도 있는가?’ 이 폭탄은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지하 벙크를 폭파할 수 있는 그런 무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엄청난 군사비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다 그러고 있다. 서로 무기로 이겨 보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전혀 무기경쟁을 할 수가 없는 완전한 무기를 이미 주셨다. 존재 자체를 무기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존재자체로 살려면 왜 피곤하겠는가? 그런데 존재로 살지 아니하고 소유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다. 인생고라는 것이 전부 소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냐, 소유냐다. 하나님께서는 존재를 이미 주셨다. 주신 존재를 우리가 활용하면 될 것인데 그 존재를 무시하고 소유만 찾았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경쟁을 해야 되는 그런 시대가 왔고 지금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글로벌 시대라는 것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약한 놈은 제거되고 큰 놈만 살아남는 이런 판국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인격이냐 능력이냐 여기서 인간들은 능력을 선택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 인격, 그것을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면 이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은 이렇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은 무기를 가지고 경쟁을 해야 이긴다고 생각한다. 무기 없이 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가? 어린 양이 어떻게 호랑이를 이기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바로를 제압하고 나올 수가 있는가?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이 왜 생겼는가 하면 그래서 생긴 것이다. 안 그러면 믿음이 생기겠는가? 호랑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어린 양이 호랑이를 제압했다는 이것 때문에 우리는 처음에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것이 믿음의 창시자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라는 말이다. 어떤 믿음인가? 어린 양으로 호랑이를 이겼다는 믿음의 창시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이것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산을 오르기 때문에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자들처럼 기둥에 올라 앉아 인생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예수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에 가야 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호랑이를 이긴다는 이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쉽고, 하나님을 믿기만 한다면 너무너무 쉬운 일이고, 하나님을 못 믿으면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다. 분명하게 갈라지는 그런 일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믿음은 호랑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는 데서 시작한다. 나도 어려서 예수를 믿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시는 해방 이후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분위기였다. 미군이 점령을 했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조금 의심이 생기더라도 ‘이승만 대통령도 예배당에 온다더라.’ 이런 생각을 하면 그냥 뿌듯해지는 것이다. 그분은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래서 ‘야~ 이승만 같은 분도... ’ 그때는 내각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어려서 생각은 ‘야~ 예수를 믿은 것은 굉장한 것이구나.’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고 전혀 반대로 존재냐 소유냐 하는 문제가 나오고 어린 양이 호랑이를 이겼다. 이게 나온다. 여기서 넘어지면 오다가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회해서 딴 길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부터 이삭으로 많은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면에서 혹은 저런 면에서 믿음을 가지고 승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12장에 와서 그것을 이어서 이 말이 나온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 많은 믿음의 최종적인 완성으로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 모세의 믿음... 많이 있을 게 아닌가? 그 많은 믿음의 최종적인 완성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하면 ‘어린 양이 호랑이를 승리한다.’ 이 말이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호랑이가 어린 양을 이긴다는 것은 어지간하면 다 믿을 수 있다. 눈 감고도 믿을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최종 완성을 보니까 정 반대로 사람의 생각과는 정 반대가 되더란 말이다.
왜 이렇게 정 반대의 믿음이 나올 수가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바로를 물리치고 나오겠는가? 절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자기들의 민족사이기 때문에 신화가 아니다.
환웅인가 내려와서 어찌 했다든가, 호랑이와 곰이 쑥 먹기 내기를 했다든가 하는 이런 신화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어느 정도 표현을 과장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 믿음, 이렇게 놀라운 믿음,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믿음을 예수께서 주신 것이다.
나도 홍해를 가르는 믿음을 가지라면 못 가지겠다. 그것은 가질 수 없다. 옛날에 그 시도를 좀 해 봤는데 도저히 나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손만 얹으면 그냥 열이 팍 내려가고 이런 것, 이런 것은 주변에서 많이 보는 데 그것만 있으면 금방 교회가 인산인해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다. 해 보니까 근처에도 못 간다.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면 그게 되는 데 나는 안 된단 말이다. 그래서 절망적이었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구나...’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종적인 자리에 오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주었다. 그러니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어떤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처음에 만든 제품과 마지막에 만든 제품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많다. 자동차 발전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가 보니까 처음에는 달구지였다.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2기통짜리로 통통통 하는 그런 엔진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발달해서 현재의 자동차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비행기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랬다. 처음에 있었던 것도 자동차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탈 수 없는 자동차이고 또 속력을 그대로 낼 수 없는 자동차였다.
그런데 점점 발전해서 지금 자동차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쉬운 기계는 없다. 나도 운전하기 전에는 저것을 어떻게 운전하고 다니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그랬다. 두 발로 가는 자전거보다 훨씬 쉽다고 했다. 왜냐하면 네 발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렇다. 자전거는 두 발이니까 자꾸 넘어진다. 그런데 자동차는 네 발이니까 넘어질 일이 없다. 그리고 직접 해 보니까 자동차가 자전거보다 훨씬 쉽다. 나는 자전거를 몇 년 탔다. 충주에 있을 때부터 탔는데 지금도 가면서 올라타는 것은 못한다. 일단은 올라앉아서 밀어야 한다. 내가 운동 신경이 좀 둔한가 보다. 그런데 자동차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운전 기술만 좀 배우고 나면 앉으면 넘어지기를 하는가, 자빠지기를 하는가? 가만히 있다. 조금씩 움직이기만 하면 저절로 가니까 너무너무 쉬운 기계다. 자동차는 달구지의 최종완성이다. 최종완성을 받으니까 너무 쉬워졌다. 아무나 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운전이 겁나서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돈만 조금 주면 다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도 왜 운전할 용기가 났느냐하면 우리교회의 연약한 자매가 운전을 하는 것을 보고 “저런 자매가 운전을 하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은근히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다. 운전은 몸이 불편한 사람도 할 수 있다. 발을 못 쓰는 사람은 자전거를 탈 수는 없지만 운전은 손만 가지고도 할 수 있다. 발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더 쉽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믿음을 주셨다. 모세의 믿음은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다. 여호수아의 믿음은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아무나 가능하다. 누구나 사람이기만 하면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라고 했다. 그것을 어디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가? 내가 사마리아에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뱃세다 광야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면 놀라운 일이고 기적이고 신기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분을 신이라고 받들고 마니까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을 보면 종교가 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예수를 숭배할 일이 없다. 나와 똑같은 자리에서 어쩌면 나보다 못한 자리에서 승리를 하는데 어떻게 숭배를 하겠는가? 숭배를 하지 않는 데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와 내가 하나가 된다. 숭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 된 것이 중요하다. 숭배는 하면 할수록 멀어진다. 여기서는 더 가까워지고 더 하나가 된다. 이런 믿음이 더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보다 더 쉬운 믿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늘 하던 것인데 그냥 가지고 나오지 가지고 나와서 뚱땅거리면서 맞추어보는 시간동안 서있는 것이 민망하다. 악기의 음을 맞춰가지고 나오면 되는 데 그것이 안 되는 모양이다. 어제도 그런 생각이 났다. 하나님이 주신 목구멍으로 하면 쉬울 텐데 좋은 악기를 놔두고 저런 것을 하려고 하니 힘들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가장 쉬운 것은 입으로 하는 노래다. 들고 다니고 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쉽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존재를 줬다. 노래를 할 수 있는 존재를 주었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존재를 줬다.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를 줬는데 우리가 멸시했던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무시했다. 왜 무시했는가? 소유 때문이다. 왜 무시했는가? 능력 때문이다. 오늘 날도 우리가 소유와 능력이 아니면 어떤 사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소유와 능력 때문에 어떤 사람은 90점, 어떤 사람은 80점, 어떤 사람은 60점하고 내려간다. 교회 안에 들어올 때 소유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소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도 소유고 지식도 다 소유다. 존재 이외의 모든 것은 소유다. 내 옷만 내 소유가 아니고 내 옷 이외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자기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교회가 되지 않는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서 교회가 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할 때 “우리 교회는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라고 말한다. 평안한 것은 이유가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100%이지는 않지만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를 오는 모든 사람들이 평안한 것이다. 얼굴을 찡그릴 필요가 없다. 경쟁의식이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평화의 동산이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예수께서 존재의 영광, 그 인격의 영광을 보여줘서 우리가 멸시했던 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우리가 버렸던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정도만 알아도 평안한데 완전하게 더 알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평화로운 사회가 되겠는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는가?
모든 불협화음과 여러 가지 잡음,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모두 소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성질, 꼬라지,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존재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만들어 놓으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대로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데 다른 것이 들어와서 그것으로 사람이 만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능력으로 만나면 능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 그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로 알고 나면 못 견디는 일이 없고 못 견디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해도 내 존재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피해가 전혀 안 온다. 전에는 그것이 피해가 온다. 능력의 세계에 내가 머물러 있을 때는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오면 나는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어떤 마음 약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하고는 놀지도 않으려고 한다. 여러분 주변에 자세히 봐 보라. 그 사람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 사실은 약한 사람이다. 자기보다 조금 나으면 같이 안 논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항상 논다. 왜 거기가면 자기가 피해를 받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항상 밑에만 보니까 발전이 없다. 조금 위를 쳐다봐야 발전이 생기는데 맨날 나보다 못한 아이들만 데리고 다니면 발전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오래 한 사람을 보면 ‘알았어? 알았어?’ 하니까 항상 어린아이 같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를 알면 우리 인격의 영광을 알면 남이 소유를 가지고 있던지 안가지고 있던지 당연히 내 소유보다 저사람 소유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당연히 내 머리보다 저 사람 머리가 좋을 수도 있고 나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똑 같으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똑같이 만들어 놓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기하고 질투할 일도 없다. 높이고 숭배할 일도 없다. 그렇게만 되도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세상이 조용해진다. 세상이 조용해지기 전에 내 속이 조용해진다. 어디 가서 남몰래 벌벌 떨던 것도 없어지고 원망하는 것도 없어지고 다 없어진다. 약한 사람들은 속으로 원망하고 강한 사람들은 겉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이 다 없어진다. 왜? 내게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을 볼 때 동물원의 존재를 보듯이 봤다. 아이들이 구경하려고 졸졸 따라다닌다. 그런데 만약 우리 한국 사람이, 여기 있는 어떤 사람이 구경하듯이 졸졸 따라다니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이들이 졸졸 쫒아 다니고 양코배기라고 놀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분도 연세대학교 병원에 있는데 그분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선교사로 와서 순천에 살던 분인데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한국에 선교하기를 원하는 분이니까 한국화 되기를 원하고 그 아이들을 학교도 한국 학교를 보내고 한국인들과 살게 하려고 하는데 학교를 가면 원숭이 보듯이 쫒아 다니니까 학교를 못 간다. 그러니까 도저히 못해서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왔다. 그래도 살기를 도로 한국에 산다. 한국을 워낙 좋아하고 우리나라 말을 유창하게 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같으면 기분 나빠서 다시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다. 왜? 자기들이 훨씬 우월한 민족이니까 그렇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인격의 우월함을, 존재의 우월함을 알게 되면 누가 뭐래도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고 기분 나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완전한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 건드릴 수가 없다. 이러면 내 속이 편안해진다. 어디를 가도 편안해진다. 배 밭에 가도 편안해지고 어디를 가도 편안해진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듣고 여러분이 확실하게 명심하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것이다. 인생을 이렇게 쉽게 사는 것이 어디가 있는가? 인생을 이렇게 쉽게 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 할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다 한다. 내 분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대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의 주요’ 이 믿음을 창시해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은 전에는 없었다. 모세에게도 없었고 다윗에게도 없었던 믿음인데 예수께서 이 믿음을 창조해줬다는 말이다. ‘믿음의 창시자여, 또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니 이 구절이 얼마나 중요한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일생동안 이 예수를 바라보면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게 된다. 인격에 대해서 새 생명에 대해서, 부활하신 생명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 부활생명이라는 것은 이것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존재가 온전해지는 것이고 인격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을 하는 것이 부활생명이다. 그러니까 온전케 하신, 믿음의 최종완성자로서의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그것을 못해도 상관이 없다. 나는 방언을 못해서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것은 못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 사람도 내가 멸시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나는 그렇게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목회하는 사람이니까 병 고치는 것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병을 못 고쳐도 아무 상관이 없다.
병자가 찾아와 기도해달라고 해도 나는 잘 못해요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옛날 같으면 그 말을 못한다. 그래서 이것이 안 될 것이 뻔한데, 안 될지라도 해줘야한다. 이것이 믿음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렇게 된다. 자기도 못 믿고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두 번 믿고 하지만 해보면 안 되니까 고민이 많이 된다. 전도사가 애기가 아프다고 데리고 오면 이것이 참 난감하다. 해도 분명히 안 될텐데, 그러면 속으로는 ‘믿음이 있어야 할텐데, 믿음이 왜 이렇게 없을까?’ 하고 자책이 온다. 그 믿음을 가져보려고 내 나름대로는 상당히 노력을 해봤다. 그런데 안 된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병고칠사람 병고치고, 방언할 사람 방언하고, 별짓을 다해도 상관이 없다.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로 날라 다닌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저 사람은 예수 믿더니 하늘로 날라 다닌다고 해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큰 구원을 받았는지.
충주에 가니 CCC에 가면 그런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거기도 그런 것이 많다. 왜냐하면 선교를 하려니까 그런 사람이 움직이면 바람이 난다. 그러니까 그것이 부럽더라. 그랬는데 아무렇지 않다. 잘할 사람 잘해도 좋고 내가 시기가 나지 않으니까 박수쳐 주고 환영하고 만세 불러주고 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따로 있으니까 내것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존재냐 소유냐를 썼는데 안 읽어봤지만 이만큼 썼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렇게 못 썼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겠죠? 독서를 하지 않아서 책 제목만 겨우 안다. 인격이냐 능력이냐 같은 문제이다.
그러면 소유와 능력이 없어도 되느냐 이런 질문이 오면 아니다. 세상 살 때 필요하다. 자기 나름대로 능력을 개발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야 한다. 왜? 그것은 필요한 것이니까, 국민교육 헌장에 있는 대로 우리는 각자 타고난 그것을 개발해서 나라와 민족 앞에 봉사하고 이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존재와 소유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격과 능력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없으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능력이 없으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 능력이 없으면 꼴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일등 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세상에는 다 필요하다.
그러면 존재밖에 없고 인격밖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고 할 것인데 나도 의심을 여러 번 해봤다. ‘그러면 어떻게 사냐?’ 존재만 있고 인격만 있으면 아무 것도 없어도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니다. 소유도 있고 능력도 있어야 되는데 다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 부터의 공급을 받아서 그래서 소유도 가지게 되고 어떤 능력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내가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급을 받아서 한 것이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아무리 산을 옮겼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공급을 받아서 한 것이니까 그렇다.
이것은 차원(次元)이 다른 문제다. 내가 한 것과 내가 공급을 받아서 한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한 사람은 자기가 죽자살자 해서 만들어 낸 것은 자기가 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구라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침해를 한다든지 무시한다든지 하면 금방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안 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내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세상이 얼마나 살기가 좋고 완전해지겠냐는 것이다.
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봄
그러므로 예수는 새 생명에 대한 믿음을 주는 주님(창지자)이시오, 또 잠깐 동안 온전하지 못함으로 멸시 받던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구원자(예수)시다. 아담은 생명공급을 소홀히 여기고 지식을 취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명공급을 귀히 여기고 끝까지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 하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는 새생명에 대한 믿음을 주신 분이다. 이 새생명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체 하나라도 다 알지 못하고 수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처럼 새생명 안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들어있다. 새생명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축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좋은 씨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농사에 대박을 얻듯이, 새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새생명의 대박을 얻는다.
옛날에 국광사과와 홍옥사과가 있었다. 홍옥사과나무 한 그루를 가지면 아이 하나 대학을 보낸다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새로운 종자가 들어왔다. 새종자를 심을 때 처음 심는 사람은 굉장한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사과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아이 한 명을 대학을 보낼 수 있는데, 이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운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보통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던 사람들은 대박을 쳤다. 그래서 국광사과는 다 없어졌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없다. 그 맛이 그립다. 왜냐하면 그 맛이 지금 사과들보다 신선했었다. 어디서 누가 사과를 가지고 왔는데 그런 사과를 가지고 왔다. 달지는 않는데 맛이 신선했다. 지금은 사먹을 수가 없다. 농부들이 수지가 맞지 않으니까 심지를 않는다. 그런데 처음 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심었는데 대박을 쳤다. 그때는 그 사과 한 개가 굉장히 비쌌다. 국광 사과에 비해서 크기도할 뿐아니라 달기도 하니까. 그런데 맨 뒤에 오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나. 그 사람은 죽도록 농사를 지었겠지만 먹을 것은 별로 없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생명의 경주다. 농부같으면 새로운 씨에 대한 도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살아봐야 안다. 씨는 심어봐야 알지 그냥 보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른다. 그 씨를 놓고 어떤 씨인지를 알겠냐는 것이다. 모른다. 심어봐야 알 수 있다. 안 심어보고 이론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 아니다. 심어봐야 된다.
우리 나라에 닭도 그렇다. Red horn같은 닭들이 5.16후에 들어왔다. Red horn은 알을 많이 낳는 닭이다. 우리나라 토종닭은 1년에 두 번 정도 계란을 10개정도 낳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번식을 하려고 낳는 것이니까 그렇다. Red horn은 365일 매일 낳는다. 그러니까 양계하는 사람은 Red horn을 키웠다. 이놈은 자손 번식할 생각이 없이 알만 계속 낳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생명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새것을 받아들이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것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이단 아닌가!”하면서 이단이라는 말만 들으면 다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에게 이단을 만나면 발의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나와라는 식으로 가르쳐놓았다.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완전히 장님 만들어 놓고 귀머거리 만들어 놓았다. 새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도전의식이 있어야 한다. 남이 먼저 하기 전에, 남이 먼저 가기 전에 해야 대박이 나지 다 하고 난 다음에 가면 그래도 좋기는 하지만 많이 남는 장사가 안 된다.
새생명에 대한 믿음의 주요 잠깐 동안 온전치 못해서 멸시를 받던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구원자이시다. 잠깐 동안 분명히 천사보다 못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를 버렸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찾아서 잠깐 동안 온전치 못했지만 부활생명을 통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은 그런 이야기다.
아담은 생명공급을 소홀히 여기고 지식을 취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생명공급을 중요하게 여기고 끝까지 하나님을 부름으로 영원하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새생명에 대한 도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남이 다 하고 난 다음에 가는 것은 얻어먹는 거지밖에 안 된다. 우리가 먼저 먹는 사람이 되어야 남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복음을 내가 먼저 받아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것도 중요하다.
아담은 새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사는 삶을 믿지 못함으로 스스로 살려고 지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사는 부활 생명을 이끌고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영생임을 보고 알고 취하면 된다.
아담은 믿음이 없었다. 새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사는 삶을 믿지 못했다. 이것은 스스로 살려고 지식을 택한 것이다. 수도국에서 물을 다 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믿고 땅을 파고 있는 사람과 똑 같은 것이다. 우리 집 이웃에 목조주택을 짓고 있는데 보니까 지하수를 얻어 보려고 땅을 파고 있다. 우리 때문에 거기까지 수도가 다 들어오니까 원관에 연결만 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파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거기는 파보나 마나 지하 갱도에서 썩은 물이 나온다. 말해주고 싶은데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말도 못해준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세 군데나 있다. 세 번 다 팠다가 실패를 한 것이다. 우리가 처음 가서 그 물이 무슨 물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다행히 희동 형제가 정수를 해줬기에 먹었지 그냥 먹었더라면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다. 뒤로 알고 보니 땅 밑의 구덩이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 지하수 인줄 알고 그것을 먹었더라면 큰 일 날뻔 했다.
그러니까 아담이 꼭 그런 짝이다.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사는 것을 무시하고 자기가 지하수를 뚫겠다는 것과 똑 같다. 바로 우리 동네에서 하던 짓과 똑 같은 것이다. 수도를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에 가서 보니 동네 사람들도 아예 생각이 없고 수도국에서도 아예 해 줄 생각도 없고, 외딴 동네이기에 돈도 안 되고 하니까 전혀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만 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도 어찌 할 수 없이 그것을 뚫었지만, 면에서도 뚫고 군에서도 뚫고 하여 돈은 많이 들었지만 결국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조금씩 받아서 먹고 살았다.
아담은 결국 생명 공급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지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생명 공급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지식을 택하게 된다. 교리를 택하게 되고 종교를 택하게 되고, 그렇게 하면 천당에 가는 줄 알고, 정통 교리를 믿으면 천당에 가는 줄 알고 그래서 따라가는 것이다. 천당에 무슨 정통 교리가 있겠는가? 그렇치 않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사는 부활 생명을 이끌고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오셨다. 새로운 생명, 생명 공급을 받아서 사는 그 부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수돗물을 가지고 온 것이다. 우리는 수도 때문에 하도 고생을 해서 수도로 생각하면 제일 쉽다. 수도 파이프가 우리 집 앞으로 탁! 설치되는 날! 우리는 만세를 부른 날이었다. 별일을 다 했다. mbc에서 나오고 매일 신문에서도 나오고 해도 안되었다. 꿈쩍도 안하는 것이었다. 해줄 생각도 안하고 뭐 몇 년도에 가서 보자 이러고 앉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받으면 우리는 대박이 난다. 이 믿음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받으면 보좌우편까지 간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공급이 영생임을 보고 그것을 취하면 된다. 우리 때문에 수도가 들어 왔지만 이웃집 사람들은 연결만 하면 다 물이 들어온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연결만 하면 다 물이 들어온다. 영생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 공급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그 지하 갱도에 있는 썩은 물을 먹고 사는 것이 지옥(멸망)이라면 수도관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먹고 사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생명 공급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또한 천사보다 못하다고 한탄하던 인생이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면 인생의 위치에 대한 자존감을 얻게 된다. 육체이기 때문에 천사로부터 그의 앞에서 멸시를 받을지라도 인생의 위치가 천사보다 귀중함을 알게 된다.
천사보다 못하다고 한탄 했었다. 인간은 항상 속에 그런 것이 있다. 천사는 이런데 왜 사람은 이럴까? 천사를 본 일은 없는데 이상하게 사람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안 돼. 사람은 약해. 연약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생이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면 인생의 위치에 대한 자존감을 얻게 된다.
분명히 천사보다 못하다. 예수님도 우리가 볼 때 분명히 천사보다 못했다. 그런 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십자가에 달릴 때 천사 같으면 달렸겠는가 안 달린다. 매달아 놓아도 날아가 버리면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니까 너무나 처량하고 비참하다. 그것을 보고 아담생각이 났을 것이다. ‘아~ 아담도 저 것을 보고 선악과를 먹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 됐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 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기 어려웠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고 ‘아 저래서 저 것이 보이니까 선악과를 먹었구나!’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우리도 똑 같다. 육체이기 때문에 천사로부터 그 앞에서 멸시를 받았다. 인생의 위치가 천사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지금 잠시 동안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천사보다 못 한 것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공급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쓸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인생이지만, 날아다닐 수 없지만, 귀신처럼 벽을 뚫고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그런 자존심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 믿음을 우리에게 줬다. 얼마나 할지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 나도 늘 말하는 것이지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표현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또 믿어야 된다. 안 믿으면 멸망이다. 안 믿으면 비참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어도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비참한 길을 택한 것이다. 후회할 것도 남을 원망할 것도 없다. 자기 스스로 비참한 길을 택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비참한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나는 그렇게 비참하게 되고 싶지 않다.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고 살고 싶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표현할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이렇게 가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비참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참해 지기 싫다.
나는 어려서 비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병이 들었을 때 내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비참하기 싫다. 그런 길이 싫다. 그래서 병원에 문병 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 한다. 어쩔 수 없이 가지만 가면 좋은게 없다. 그래서 싫어한다. 왜냐하면 어려서 받은 충격이 있어서 그런지 자우지간 비참한 것이 싫다. 내 것이 아닐 지라도 기쁘고 즐겁고 이런 것이 좋다. 남의 잔치라도 찬치 보는 것이 좋지 초상집 가는 것이 싫다. 본능적으로 그런 것 같다. 아마 사람이 다 누구든지 안 그렇겠는가. 성경에는 잔칫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 그랬는데 틀린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초상집 보다 잔치집이 좋다. 왜 잔치집이 좋은가 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분이 좋다는 것이다. 지랄 발광하는 것 보니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잔치라고 해 봐야 가면 그것 밖에 없는데 그 것이 특별히 좋아서 간다는 말이 아니고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 이 찬치보다 큰 잔치가 없다.
교회를 왜오는가 이 찬치를 보려고 온다. 교회를 와서 이 잔치를 봐야 된다. 그래야 오늘 교회에 온 보람이 있고 오늘처럼 이렇게 화창하고 좋은 봄날에 순모임방에 앉아서 이 것 뭐하는 짓이냐! 이렇게 나오면 이것을 못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고 우리의 자존감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인격을 무시하고 능력을 자랑하는 천사의 송사를 무시하고 새 생명을 위한 믿음의 창시자요 또 인생을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새 생명의 길이요 삶이며 새 생명의 씨를 받을 사람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지식이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인격을 무시하고 고 능력을 자랑하는 천사의 송사를 무시하고, 이것은 무시해야 된다. 그것을 인정하려고 가서 기웃거리고 이러면 안 된다. 이것은 무시해야 된다. 왜냐하면 무시해야 되는 것이 원칙이니까 잘 몰라도 무시해야 된다. 여러분들이 내 말을 듣고 부정적인 것이나 천사의 송사를 무시해 보라. 일부러 무시하면 밝은 세상이 열린다. 일부러 기웃거려 가면서 냄새 맡아 보려고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냄새가 스며들어와서 근묵자흑이라고 먹을 가깝게 하면 검어진다는 것이다. 연탄장사 가까이 하다보면 검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일부러 가서 연탄장사 사정 좀 알아본다고 가면 안 된다. 이러면 실패한다.
그러니까 이런 송사를 무시해야 된다. “너는 안 된다. 너는 불행하다.” 이런 송사는 다 무시해야 된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 인정해야 한다.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의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은 다 무시해야 한다. 인격 외에 어떤 것도 존귀한 것이 없다고 우리는 매일같이 확인해야 한다. 만일에 확인이 잘 안되거든, 매일 구호를 외쳐서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런데 집에 가면 도로 마찬가지고, 요즘은 말씀 듣고 순모임하고, 되새기고 되새기니까 집에 가도 일주일은 가겠지. 주일 와서 반짝 듣고 가버리면 월요일까지는 괜찮은데 화요일부터는.., 그러니까 매일같이 무시해야 되고 일부러라도 무시해야한다. 좋지 않는 것, 불행한 것, 이런 것들은 무시해야 한다.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찾아야 한다.
믿음의 창시자여! 인생을 온전케 한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비참하려면 예수만큼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겠나.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까 우리가 희망이 생긴다. 이것이 새 생명의 길이고 삶이고, 새 생명의 씨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니까 새 생명의 씨를 받은 사람은 어찌하든지 그것만 키워야 한다.
잣나무를 심어나도 5년 동안은 잡초가 무지 난다. 나가지고 나무를 덮는다. 잡초 좋다고 놔뒀다가는 잣나무 다 죽는다. 무자비하게 잡초를 없애야 한다. 5년 동안 계속 깎아 주고 없애고 뽑아주고 해야 한다. 5년이 되면 이 나무는 커서 자생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잡초를 사랑하면 안 된다. 그것은 없애야 한다. 그것을 가까이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동정해도 안 되고 무자비하게 없애야 한다.
북한말로 하면 무자비하게 보복을 할 것이다. 말을 어떻게 그렇게 세게 하는지 섬뜩 섬뜩한 말을 한다. 어투도 그런데다가 억양도 그렇고 단어도 그렇고 오직 그런 것만 선택해서 말하는지 무섭다. 그 사람들은 그것이 보통인 모양이다. 늘 하다보면 보통이 된다. 우리는 들으면 섬찟 섬찟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에 대한 새 생명의 창시자요, 또 인생을 온전케 하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믿음도 이런 믿음 저런 믿음 많다. 그렇지만 그 믿음도 다 무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최종완성으로서의 믿음이 왔기 때문이다. 최종완성으로서의 자동차가 나왔으니까, 달구지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연연한지 않아도 된다. 달구지시대에 달구지를 못 사가지고 내가 딴사람 타고 다니는데 못타고 다녔다는 식의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때는 달구지가 못살 형편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자동차를 탈 수 있으면 되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나도 어렸을 때 못 해 본거 많다. 다시 돌아가서 다 해보겠냐는 것이다. 그때 못해봤다고 다시 되풀이 하겠나.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최종완성에 와 있으니까 최종완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의 믿음, 기독교 안에도 아직도 옛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주 많다. 그렇지만 뭔지 모르고 그냥 가지고 있다.
성경이 있으니까 다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참 많다. 성경이 있다고 다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자동차가 나왔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자동차가 나왔다. 나는 자동차를 운전해보면서 사람들이 참 많은 과정들을 거쳤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어떤 경우에 이것은 왜 이렇게 만들어놨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뒤에 해보면 꼭 이렇게 만들어야 되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까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해서 쓰다가 불편하면 또 고치고 쓰다보면 불편해서 또 바꾸고 늘 이렇게 했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자동차가 되었다.
옛날에는 키를 가지고 시동을 걸었는데 요즘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된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된 것이다. 옛날 자동차는 트럭 앞에서 손으로 돌렸다. GMC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는데-GMC는 트럭의 대명사가 되었다. 박카스처럼-그 앞에는 돌리는 구멍이 있다. 그것을 돌려야 엔진에 시동이 걸린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된다. 너무너무 조용해서 시동이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잘 모를 정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대에 와서 또 돌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차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다 고생해서 얻은 것이다.
예수님도 하루아침에 했겠는가?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거쳐서 온 과정을 모두 거쳐서 최종완성으로서의 이 믿음을 우리에게 줬다. 존재냐? 소유냐? 존재다! 인격이냐? 능력이냐? 인격이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줬다. 그런데 우리가 또 뒤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개가 병을 고치더라 하는 것으로 또 돌아가면 안 된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리로 돌아갈 일이 없다. 하나도 부럽지 않다. 못해도 쭐리지도 않는다. 구경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니까 칭찬해줘도 아무렇지도 않다. 가끔 내가 못 고치는 병을 누가 와서 고쳐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우리교회에 혹시 그런 영이 밝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못하는 것 좀 해주면 좋겠다. 해주면 고맙게 생각하겠다. 전혀 나한테 피해가 안 오니까. 나는 내대로의 자존감을 갖고 있으니까.
인격에 대한 믿음. 영생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을 창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우리가 허망한 것을 쫓아갔더라면 가면 갈수록 허망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더 허망해지고 결과가 더 허망해진다. 그런데 확실한 분을 우리가 찾아왔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더 확실해진다. 나는 예수를 추구해서 온 이 인생 속에서 갈수록 더 확실해진다. 그 분의 인격이 더 확실해지고 내가 모르던 분이 자꾸 자꾸 알아지고 점점 더 새로워진다. 육신은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한 것처럼 이상하게 자꾸자꾸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우리 한번 영원히 살아봅시다. 가지 말고 영원히~~(ㅎㅎ)
<기도>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도 모르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엉뚱한 것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최종적인 믿음을 완성하셔서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누구나 살 수 있도록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 자신이 복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했던 모든 것을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끌어내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에 있는 보화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