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그림에는 요렇게 좀 군대다보니까 적어놨는데, 제가 이렇게 보니까 많은 분들을 만나보니까 재미난 것을 좀 발견했는데요, 이를테면 이렇더라고요. 군대로 따지면 중위라든가 중사라든가 20대 초급간부들, 또 회사로 치면 사원들 대리. 20대나 요런 간부들. 이런 평사원들 10대 때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20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요, 지금은 좀 희생되는 시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서 지금은 다소 힘들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내가 좀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30대 40대 50대 됐을 때 빛나게 성공하는 그 시기를 위한 준비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좀 힘들어도 괜찮다. 지금은 내가 조금 고통스러워도 괜찮다. 나중에 가서 성공하면 다 보상되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20대 들은 성공한 사람들, 40대 50대 60대. 이렇게 성공해서 뭔가 딱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신 그런 사람들을 한 없이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그냥 지금 좀 힘들더라도 상관없이 그냥 일단 나는 하여간 성공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30대 40대 50대를 부러워하면서 달려가요. 그러고 또 30대가 되면 신기하게도 20대들을 보면서 야~ 저 때가 좋았는데. 내가 20대만 해도 몸도 참 좋고. 야, 20대라는 뭔가 참 그 젊은 패기가 있었고, 뭔가 힘도 더 있었던 거 같고, 무엇을 해도 괜찮았고. 지금 tv를 봐도 학생들을 봐도 20대 친구들은 몸은 정말로 어려보이고 정말 동안이고 너무 예뻐 보이는데 나는 이거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는 거 같구나.
그래 생각하면서 20대를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40 50대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서 야, 나도 저 정도까지 성공하려면 아직 멀었구나. 내가 이제 이 정도밖에 안돼서 앞으로 내가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면서 40대 50대 안정적인 분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런데 40~ 50대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시는 분들은 거꾸로 야, 내가 20대 때 정말 돌도 씹어 먹을 나이였는데 30대만 해도 그래도 정말 그때만 해도 내 인생에 빛나는 시기였는데. 40대만 해도 참 괜찮다. 그런데 50 넘어가고 나니까 이게 뭘 해도 기력이 빠지고. 뭐 그러더라고요. 술을 한잔 마셔도 옛날에는 밤새 마셔도 그 다음날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하룻밤만 밤을 새면 며칠 동안 그냥 힘들고, 축구 한 게임을 뛰어도 며칠 동안 힘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어떤 생각을 하시냐하면, 서서히 은퇴에 대한 준비를 하시고 그러면서.
“야, 정말 이 회사에 나는 이제 좀 있으면 갈 사람이고, 이 회사를 정말 이끌어 갈 사람은 젊은 사람들 아니냐? 너희들이 주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더란 말이죠. “난 이제 곧 은퇴할 사람이니까 이제 너희들이 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해요. 가만히 보니까 돈을 버시는 분들이 은퇴 후 노후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거든요. 노후를 공부하다보니까 기대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놓고 안정적인 노후를 꿈꾼단 말이죠. 언뜻 생각해보면 “야, 이 많은 분들의 꿈이 노후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노후를 향해서 달려가는 모습이라는 거죠. 그런데 저마다 자기의 그 시기가 가장 정말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누구나 놓치고 살더란 말이죠. 최상의 시기는 내 인생의 최상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인 줄 모르고 언제나 다음순간을 향해 쫓아가거나 지난 과거에 빛나던 때를 생각하면서 그때를 부러워하면서 우리는 한평생을 보낸다는 거죠.
그래서 그 순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 조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공간,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절정의 순간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최상의 절정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에 절정은 오지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평생 곁가지만 돌다가 삶의 주변으로만 맴돌다가 생생한 삶을 살아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20대 때 왜 20대를 희생시켜서 30 40대 성공을 위해서 20대를 희생시켜야 될까요? 그렇지 않죠. 20대는 최대한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이게 가장 뭐랄까 요즘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은 어떤 것이냐 하면, 회사를 위해서 무조건 맹목적으로 온몸 다바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는.
자기의 삶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회사에서 더욱더 능률이 오르고 일만 계속 하는 사람이 능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쉴 줄 아는 사람, 주말에 제대로 놀 줄 알고, 쉴 줄 알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죠. 많은 사라들이 그러거든요. 내가 그때는 일밖에 모르고 일만 해서 돈 벌어다 주면 자식들 아내한테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애들이 중학생 고등학생만 되도 아빠하고 놀아주려고 안하고, 아들과 단둘이 있는 것이 그렇게 서먹할 수가 없고, 그러면서 한생을 살아서 뒤늦게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지금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60대가 됐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만약에 지난 과거를 나도 그렇게 살았다는 거 같아. 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고 쳤을 때, 그 사람 후회할 필요는 사실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다 잘못 사셨으니까 지금부터 잘 사십시오. 하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시기도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거죠. 다소 미래를 향해서 희생되는 것 같은 일에만 빠져있는 뭔가 지금 이 순간을 최절정으로 살지 못하는 그런 의식으로 사는 인생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살아보는 사람만이 “아, 그것이 아니었구나.” 매 순간이 최고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공부의 과정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허망했던 삶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좀 때로는 내가 후회되는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후회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후회한다는 것은 벌써 과거에 얽매이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내려놓게 되면 참회하고 지금 이 순간을 새로운 절정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 법계를 법계라고 하는 이유. 법계. 다르마의 세계거든요. 진리의 세계인 이유. 이거는 누구에겐 진리인데 나에겐 진리가 아닌 세계가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진리인 세계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저마다 자기의 업이 다르고 인연이 다르고 자기가 깨닫는 방식이 다른 거예요. 똑같은 방식으로 얘기했을 때 다 깨닫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도 어떤 사람에게 법문을 했을 땐 그 사람이 깨닫는데. 어떤 사람에게 법문을 했을 땐 아무리 근기에 맞춰서 설법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죠.
저마다 근기가 다릅니다. 자신이 깨달은 삶의 방향이 달라요. 그러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이 가야 될 삶의 방향이 다릅니다. 남들처럼 똑같이 닮아가서는요, 결코 삶의 진리에 있어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다 돈 잘 벌고 부자가 됐다고 나도 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와서는 그 사람 뒷다리만 캘 수 있지 자기의 성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성공은 자기다움을 인정했을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거죠. 나의 좀 못난 외모, 좀 떨어지는 능력, 좀 남들보다 못한 운동신경,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오케이. 알았다. 받아들이겠다. 허용하겠다. 그러고 나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 이것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것. 그랬을 때 그 사람다운 그 사람의 가장 걸 맞는 깨달음이 옵니다. 1038/////
왜냐하면 이 우주법계는 부처님께서 경전에 금강경에 다 알고 다 본다. 이런 단 말이죠. 중생의 모든 근기와 마음을 다 알고 다 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법계는 정확히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경계를 그 순간 보내주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의 시공은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이 지금 여기라는 이 시공은 나에게 이 우주에서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만이 나에게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최상의 절정인 시간과 공간만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을 거부하게 되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나의 삶 자체를 거부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도달 할 수 있는 유일한 종착지는 결코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존재하고자 했을 때, 행복을 느끼고 누리고자 했을 때 내가 느끼고 누리는 행복이 나에게 올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벽암록에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의 절정에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오,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다음에 올 것을 바라죠. 다음 순간이 올 것은 무언가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맹숭맹숭하거든요. 다음 순간은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법회 가는 날이다. 하고 빨리 법회가야지 하고 막 서둘러 준비하잖아요. 준비할 때는 준비하는 그 순간에 없습니다. 마음이 어디가 있냐하면 빨리 법당가야지 하는데 있어요.
그러니까 준비하면서는 법당에 벌써 마음 가 있습니다. 준비하는 그 순간에 마음이 존재하지를 못하죠. 차를 딱 탔을 때 목적은 뭐냐 하면 차를 타고 있는 그 자체가 목적인데 빨리 도착하는 게 목적입니다. 법당에. 법당에 도착하는 게 목적이라서 빨리 가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요. 그런데 더 재미난 건요, 그 목적이 법당에 도착해서 법회에 참석하는 거거든요. 그거로 인해서 여러분이 여기 오셨단 말이죠. 그런데 법회에 참석해서 예불하다보면 빨리 예불 끝나고 법문 들어야지. 이 생각이 듭니다. 법문을 딱 시작하고 나면 한 10분 20분 듣고 나면 아이고 빨리 좀 끝나야 되는데. 그래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란단 말이에요. 법문 끝나기를 바랍니다. 끝날 때 쯤 되면 빨리 가서 밥 먹기를 바라고, 밥 먹을 때 되면 온전히 밥을 못 먹고 밥 빨리 먹고 빨리 집에 갈 생각을 해요.
그래서 빨리 집에 가야 되는데 이 생각을 합니다. 집에 가려고 출발하면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고 막상 집에 도착했어요. 집에 도착하면 목적이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제 또 뭘 하지? 빨리 설거지해야지. 설거지하면서 빨리 끝내놓고 청소 끝난 깨끗한 상태를 바래요. 깨끗해지면 끝인가? 아닙니다. 또 빨리 뭐 애들 뭐도 해야지. 뭐도 해야지. 끊임없이 다음 순간만을 바라며 살아요. 여기 교수님들 많으시니까 학생들 그렇잖아요. 수업시작하면 수업 끝날 때를 바래요. 또 주중에는 주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빨리 주중 빨리 가라. 주말만 되면 좋겠다. 그 주말에는 주중 주말이 이렇게 반복되는 시기에는 방학을 바랍니다. 빨리 방학만 와라. 그리고 좀 더 크게 보면 “야, 이거 빨리 졸업만 했으면 좋겠다.” 이걸 바래요.
졸업하고 나면 “야, 빨리 결혼이나 좀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바래요. 그 결혼을 행해서 막 열심히 결혼을 목적지로 달려갑니다. 결혼하고 나면 빨리 애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 애 낳고 나면 애가 지 혼자 걸을 때만 됐으면 좋겠다. 이래서 자기혼자 걷고 나면 말길을 좀 알아들을 때만 됐으면 좋겠다. 그때쯤 되면 얘가 초등학교만 가면 좋겠다. 내 손 좀 안타는 중학교 때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이 생각 한단 말이죠. 그때 되면 고등학교 빨리 가고 대학교 빨리 가서 빨리 졸업만 시켜서 출가 좀 시켰으면 좋겠다. 빨리 시집장가 좀 시켰으면 좋겠다 하는 사이에 또 남편이 요다음 진급을 빨리 했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그 다음 것만을 바래요. 그 다음 것만을. 그렇게 언제까지 가느냐하면, 정신을 딱 차리고 나면 끊임없이 다음 순간을 바라고 미래를 바라다가 정신을 딱 차리고 나면 죽을 때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미래가 이제는 죽는 거 밖에 안남은 순간이 온단 말이죠. 그나마도 그때라도 깨달은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거죠. 그래서 실제 그렇습니다. 정년퇴임을 딱 하시고 나서 그 일에만 목숨을 걸고 있던 분들 같은 경우 옛날에 많이 그러잖아요. 일에만 목숨 걸든 분들 같은 경우 정말 그거 다 끝나고 나면 너무 공허해가지고 이 공허감에 어쩔 줄을 몰라서 당황하고, 그것도 심지어는 정년퇴직하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시는 분들도 예전에 많이 계셨어요. 이제는 지혜가 전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지혜가 올라가다보니까 그거에 그렇게 목매지 않고 내가 또 다른 내 삶을 찾고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 더욱더 삶이 이제 깊이가 있어진다고 그러더라고요.
실제로 저도 뵈면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은 막 성공성공 이렇게 달려갔다면 이제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죠. 그러다보니까 제가 보살님들 만나 뵈면 그렇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 줄 이 사람 정년퇴직하고 나서 알았다고. 참 이렇게 이렇게 매력 있고 괜찮은 남자였는지 이제 알았다고. 이제 남편에게 마음 열린다. 이런 분도 제가 봤어요. 그런데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다음 순간만을 바라고 미래만을 바라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름휴가 때 어디 예를 들어 외국에 해외여행 가고자 계획을 품고 있어요. 그럼 마음속에 엄청난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야, 여름휴가만 대봐라. 그때가 엄청난 환상일거다. 이렇게 생각해요.
저도 인도가기 전에 “야, 인도만 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기로 결정되고 나서 몇 달 동안 가슴이 설레는 거예요. 그런데 인도 가는 비행기를 딱 타니까 빨리 도착하고 싶고, 도착해서 인도에서 그 걸망을 무거운 걸 짊어지고 걷는데요, 온도가 40도가 웃도는데, 거기서 보러 다니는데 너무 더워주겠는 겁니다. “이게 야, 이거 환상이었구나.” 여행지라는 것이 아, 그거 있지 않습니까? 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환상이구나. 그러나 여행이 끝날 쯤 되니까. 두 달쯤 되니까. 그 전에는 “야, 3개월 너무 짧다. 6개월 1년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한 2달쯤 지나서 갈 때가 되니까 이게 서서히 한국이 그리워지고, “야, 이거 한국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막상 한국에 와보니까 또 여행지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것처럼 이게 왜 그럴까요? 여행지가 정말 환상적인 걸까요? 한국이 정말 환상적인 걸까요?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환상적인 거란 것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환상적인 삶은 없습니다. 어디 있느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더라는 거죠.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면 제가 히말라야에서 봤던 그 장쾌한 어떤 장엄한 풍광들. 그 풍광을 보고 너무 감동을 했는데 히말라야 갔다 와서 강원도 고성에 배치를 받았는데 강원도 고성에 갔더니요, 내가 히말라야를 왜 같지 싶은 겁니다. 히말라야보다 더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져 있고요, 그냥 오히려 히말라야 갔다 와서 제가 느낀 것이 뭐였냐 하면 늘상 보던 꽃 한 송이 풀한 포기가 놀랍게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말라야에 가야지만 그 광대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히말라야가 우리 앞에 있고, 광대한 어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었던 거예요. 다만 우리가 가슴을 열고 마음을 열어서 그것을 초대하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에 대한 환상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잡으려고만 애썼던 겁니다. 환영과도 같은 것을. 여러분 전역하면 환상적인 삶이 펼쳐질 거 같죠? 전역하고 5년 10년 있던 우리 군 장병들이나 친구들 저한테 전화 와서 그럽니다. 전역만 하면 인생 끝내줄 주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인생을 돌아보니까 군 생활할 때가 제일 편했다고 그래요. 군 생활 때가 제일 속편했다고.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해야 되니까 스트레스였고, 군에 있을 때는 먹으라면 먹고, 하라면 하고,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편안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대하고 낫더니 이거 공부해가지고 이거 합격은 해야 되겠고, 합격이 안 되니까 또 취직해야 되겠고. 취직 안 되니까 골치고. 취직하고 나니까 또 진급해야 되겠고. 또 결혼해야 되겠고 마누라랑 싸워야 되고, 자식 키워야 되고.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군 생활할 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다. 그런데 군 생활 하는 사람은 그게 진짜 행복한지를 알겠습니까? 모르죠. 사실은 군 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삶이 문제가 아니고, 진급의 문제가 아니고, 돈이 문제가 아니고 자식 대학교 좋은데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하느냐? 지금 이 순간에는 충분히 내가 즐거워 할 것이 있습니다. 행복을 누릴 것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릴 수 있는 그 행복을 지금 이 순간에 걷어차는 사람은 미래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행복을 걷어차면서 미래에 올 환상적인 행복만을 쫓는 사람은 그 생각의 관념에 빠져서 그 여행이라는 미래라는 환상적인 관념에만 언제나 빠져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미래만을 추구하다 끝나는 거죠. 인생이. 아무리 좋은 때도 그 순간이 딱 되면 덜 좋습니다. 항상 하는 얘기가 병장들이 항상 하는 얘기가 병장 제대하는 친구가 항상 하는 얘기가 제대 하루 앞두고 물어보면 100이면 100 다 뭐라고 그러냐하면, 이 날만을 손꼽아 1년 동안 기다렸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냐? 그러면 이상하게 그렇게 기뿐 줄 모르겠다. 좋긴 좋지만, 이게 뭔가 막 확 와 닿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그 어떤 행복도 올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뭔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오는 행복은 사실은 근원적이지 못하죠.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데서 오는 행복.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어요. 이미 우리의 삶은 언제나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이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돈도 원하는 데로 다 있고, 자식도 원하는 거 다 이루었고, 뭐든지 다 이루는 그 겉껍데기에서 드러나는 완성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진정한 완성이 아니죠.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더 큰 경계가 될 수 있죠.
돈 때문에 더 괴로움에 빠진 사람도 있지 않아요? 진정한 완성은 뭐냐 하면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 속에 있을 때가 완성입니다. 돈 많았을 때가 완성이 아니라. 그런데 이 삶은 언제나 자기에게 최적화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조전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순간을 받아들였을 때 그 순간이 완성된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 제가 전에 그 말씀 드렸죠? 일 년째 쉬엄쉬엄 오두막을 짓는 스님에게 “스님, 이 집은 언제쯤 완성됩니까?” 젊은 스님이 이래 왔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일 년 전에 처음 시작할 때도 완성이었고, 한 달 전에도 완성이었고 지금도 이 자체로 완성이다.” 나는 이걸 다 완성된 다음에 여기 안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수행하면 그대까지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애초부터 벽돌 하나하나 쌓는 그 자체로서 완성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체로서 만족하면서 벽돌을 쌓았을 뿐이다. 집을 짓고 나야 그때 가서 완성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인거죠. 뭔가 완벽하게 집을 짓고 완벽하게 내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이룬 다음에도 결코 완성을 맛보지 못합니다. 10억을 원하는 사람이 10억을 얻고 나서 완성이라고 생각하겠어요? 20억 30억 50억 100억을 추구하죠. 100억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억을 추구하고, 천억을 추구하는 사람은 1조 이상을 추구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추구하고 또 추구하게 밖에 못하는 거죠. 그것을 완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만 내려놓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완성되어있는 겁니다. 지금 삶 이 자체로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완전하고 완성된 순간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것을 깨닫는데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가 완성의 순간이구나. 지금 이 자리를 내가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됐을 때 지금 이순간이 내 인생에 펼쳐지도록 허용하고 그 순간과 접촉할 때, 마땅히 마주해 주는 겁니다. 거부하지 않고 허용해 주는 거예요. 매 순간을 내 삶에 초대하는 겁니다. 우린 매 삶을 거부하거든요. 그 다음 순간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에. 그것만 하지 않고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놀랍게 진해집니다. 뭐랄까요? 삶을 느끼고 삶을 누리는 그 가슴이요, 더욱 더 이렇게 찐해집니다. 풀 한포기를 감상하면서도 놀라움을 느낄 수가 있어요. 우리 법당에 호국사 법당이 요즘에 숲이 초록이 우거지고 나니까요.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햇볕 비추는 날은 햇볕 비추는 날 대로요. 마치 제가 미얀마의 어디죠?
고요하고 한적한 위빠사나 하는 도량에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이런 도량에 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것처럼, 문뜩 문뜩 이렇게 바라보면요, 제가 문뜩 바라본다는 것은 일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날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보든 관념을 내려놓고요, 내려놓고 낯선 시선으로 문뜩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게 되면요, 놀랍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여러분 집안에 있는 화분하나가 집안 베란다에 있는 그 작은 풍경하나조차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있어요. 그럼 동일한 사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놀라운 감동과 감사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느끼는 사람은 느낌으로서 더 많은 행복을 내 삶으로 초대하고 있는, 삶을 창조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순간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 허용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행복을 우리 삶으로 초대하는 행복의 최상의 어떤 방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매순간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 왜 받아들여야 될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돕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가장 성숙해 지는 방법으로. 가장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방법으로 돕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도와준다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깨닫지 못하니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때때로 그 사람에게 과보를 보여줌으로서 힘든 일을 감당하게 함으로서 그 사람을 깨닫게 할 수도 있겠죠.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아야 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여러분 이 말의 진의미를 파악하신다면 여러분들 삶이 놀랍게 행복해 집니다. 제가 그랬었으니까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사실은 없다는 거죠. 이 삶의 이치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그럼 오죽했으면 그 진리. 두려워해야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 진리를 많은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이야 말로 법시_부처님 가르침을 보시하거나, 재시_물질로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보시다. 무외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 이게 위대한 3가지 보시가운데 하나가 무외시인 이유가 그겁니다.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은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설사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또 다른 여행길에 불과한 것이다. 결코 우린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지혜로 이끌어주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자비로움으로서 우리는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가르침은 오직 사랑이고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나쁜 일, 고통은 사실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는 거죠. 우리가 괴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괴로운 상황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는 상황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나아질 수 있는 겁니다.
아이유가 이런 얘기를 했데요. (...) 참 얼마나 지혜로운 이야기에요? 나에게 날 못생겼다고 많은 사람들이 악플을 달고 욕을 한다. 그래 이 세상 많은 사람가운데 이 60억 인구가운데 나를 못생겼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나를 다 좋다고 보겠습니까? 부처님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예수님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뭐 당연한 거죠. 그것은. 나를 욕하는 누군가가 나를 욕하는 거는 문제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상황인겁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거죠. 인정해버리면 괴로운 게 아닌 게 되죠.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말이 뭐에요? 인정하면 된다. 못생겼으면 인정하면 된다. 그래 나 못생겼다. 그러나 나름대로 매력 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래 모든 사람이 나를 다 아름답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나다운 매력이 있다. 자기다운 매력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맹해 보이는 사람도 맹해 보이는 매력이 있거든요? 나름대로 매력이 누구나 있습니다. 그 매력.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요. 그래서 우리가 부정적인 내 성격이나 많은 점에 부정적인 점이 있다 할지라도 부정적인데 자꾸 집중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에 자꾸 집중을 하면 그 부분이 더 계발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요,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자꾸 없애가지고 성공하려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내버려두고, 긍정적인 것을 더 확대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랬을 때 성공이 더 쉬워졌어요.
그때는 남들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오히려 그 사람의 장기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더 확대를 시키면 좋겠죠. 이와 같이 모든 경험은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우연은 없어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나고 우리를 자비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날 뿐인 겁니다. 언제나 이 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 가수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 아, 전 이 얘기 탁 들을 때요,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야, 전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얘기 들으면서 누구든 음악이 되었든 미술이 되었든 예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기 삶의, 자기가 집중하는 부분에 깊이 몰두하고 매진하게 되면 그 자기가 집중했던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도에 가까워지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에도 음악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면 거기서 삼매에 빠지게 되거든요. 이 얘기 보세요. 내가 살아왔던 길은 험난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도 다 하나하나 저마다 이유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이유 없는 삶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일깨워주고 깨닫게 하기 위한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친해지십시오. 라고 하잖아요. 나 자신과 친해진다는 게 뭐냐 하면 나 자신과 자꾸 접촉하는 겁니다. 우린 나 자신과 친해지는, 자신과 접촉하는 시간을 거부해버려요. 멀어지려고 하는 겁니다. 내 바깥만 보고 살잖아요. 바깥사람, 바깥에 돈, 뭐가 쉬는 시간 되도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명상을 하지 않고, 조금의 여유시간만 있으면 핸드폰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무어라도 해야 되잖아요.
그게 무언가 할, 내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구하고 다니는 거거든요. 자기 자신과 친해지지 못하는 겁니다. 내면과 마주하게 되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과 직면하고 마주하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고요한 텅 빈 자기 자신과 그저 함께 하는 시간,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핸드폰 귀에 꽂지 않고, 누구와 함께가 아닌 홀로, 산길을 걷거나 홀로 산책을 하거나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것들이 그대로 명상과 연결되어 있구요, 삶의 지혜를 저절로 가져다줍니다. 저저로 삶의 지혜를 가져다 줘요. 그래서 저는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와서 상담을 할 때 수행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을 때 주로 산책을, 시간을 정해놓고 홀로 생각을 많이 하지 말고 산책을 하라고 얘기를 많이 해주거든요.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는 시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나쁜 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났다고 했죠? 나쁜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나쁜 일이라고 해석한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감기가 왔다. 감기는 우리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늘 나타납니다. 병원에서 그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에게 만약에 감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안 좋은 어떤 에너지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한방에 터져서 갑자기 죽을병이 온다거나 이럴 거랍니다. 그런데 감기가 자주 옴으로써 혼탁한 에너지, 아주 안 좋은 기운들이 몸에 쌓이면 감기로써 툴툴 털어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감기가. 그래서 감기가 자주 옴으로써 한 번씩 옴으로써 내 안에 오는 것들이 탁탁 털어져 나가야 더 말끔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자정작용, 내 몸을 돕기 위한 자정작용인 감기가 왔을 때 감기를 거부하고 병원 가서 약타먹어서 빨리 감기가 낫기를 바라죠. 이 절집 안 에서는요, 이렇게 된통 감기가 오거나 이러면요, 우리가 입맛이 없잖아요. 입맛이 없어지잖아요. 그것은 우주 법계가 먹지 말라고 하는 신호라 그래요. 감기를 낫게 하기 위해서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그래요. 그래서 절에서 스님들이 아프면요, 그냥 가만히 방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일부러 안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싫으니까 그냥 안 먹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리되면 내 몸 안에 있던 안 좋은 에너지 안 좋은 것들을 다 소모시키게 되는 거예요. 소화시키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안 좋고 탁한 기운들을 빠져 내보내는데 소모시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을 더 많이 내게 되요. 열이 더 많이 나게 되고, 그러므로서 탁탁 털고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조금만 감기가 오면, 조금만 병이 있으면 약 먹는 거 가지고 꽉꽉 내리누르면 몸은 좀 편하겠지만, 모처럼 안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려고 왔는데 약으로 탁탁 막아놓으니까 건강해 지기가 어려운거죠. 그리고 자연치유력은 자꾸 땅을 치게 되겠죠. 자연치유력이 자꾸 낮아지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아무리 약을 먹어도 잘 안 낫는 몸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거죠. 이처럼 감기 몸살도 몸에 병이 오는 것도 사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는 거거든요. 태풍우 폭풍우가 오는 기상이변이 오는 것도 그렇다고 그래요. 이 바닷물이 아주 오염되어 있을 때 기상이, 푹풍우가 한번 치고 나면 바다가 정화가 되고 이 세계가 정화가 된다 그럽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 타나나는 모든 상황들은 괴로운 것 또한 우리를 사실은 돕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난 겁니다. 요걸 마지막으로 이야기, 요 얘기만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효리가 자신이 한번 표절시비 때문에 아주 충격적으로 괴로웠었는데 그 이후에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 아, 그, 참 너무 정말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요? 본인은 그 표절 시비 때문에 아주 너무 충격적으로 괴로워했었고 괴로움 속에 허덕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괴로운 일이 안생기고 계속 승승장구만 했다면 이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계속 해서 성공 성공만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갔을 겁니다. 그런데 충격적으로 괴로워하고 몇날며칠을 집에서도 안 나고, 때로는 술도 퍼 먹어보고 하면서 고통을 받다가 다 내려놓고 어느 순간, 그걸 탁 내려놓고 보니까. 아, 그것이 아니구나. 이 고통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운 고통이에요. 나중엔 그래요. 표절 시비를 처음에 재계했던 사람에게 가서 절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때는 정말 너무 미워서 정말 너무너무 미웠지만, 지금은 너무 고맙다. 왜? 나를 바꾸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좀 이렇게 내려놓다 보니까 이렇게 겉껍데기가 나인거로 착각하고 사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화려할 때는. 그러니까 좋은 차가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인 거처럼 느껴지고. 좋은 옷을 입고 명품 백을 매면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끼고, 보통 남자는 차, 여자는 백으로 이렇게 자신을 과시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아상을 드러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것을 해야지만, 내가 대단한 것처럼 그런데 정말 내적으로 꽉 찬 사람은 바깥의 것을 그렇게 크게 신경을 안 쓰더라고요. 왜 그러냐하면, 스스로가 당당한 겁니다.
바깥에 것을 크게 하지 않아도 남들이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때는. 그러다보니까 야, 이거 내가 이런 것을 절실히 깨달은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차도 처분하고 비싼 차 좋은 집 처분하고, 그러고 일상적인 자꾸 소박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꽃피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겉의 치장하고자하는 마음, 아상을 확장시키려고 하면서 돈과 명예와 권력과 내 겉을 치장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 남들이 날 어떻게 볼지, 관심 가지면서 뭔가 나를 채워나가려고. 이런 마음들이 탁 내려놔지니까 탁 내려놔지니까 남들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지고 나를 과시할 필요도 없어지는 겁니다. 마음이 비워지게 된다. 아상이 내려놔지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비워지게 되니까 어때요? 비워진, 마음이 텅 비워지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작은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본연의 행복의 것들이 본연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꽃 한 송이 피는 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자연의 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는 거예요. 밤하늘의 별, 별 생각 없이 봤는데, 별 하나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빗소리가 옛날에 비만 오면 짜증나는데, 이제는 빗소리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어주고 너무나도 감사소리로 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좌판 깔고 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도 눈에 들어오고 내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면서 이웃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효리가 나중에 동물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물도 이렇게 보게 되고, 주변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깨달음을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얻을 수도 있지만, 수행하는 목적은 뭐냐 하면 마음공부하고 불교 공부하는 목적은 뭐냐 하면 지혜롭게, 지혜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이 우주법계에서 깨닫게 만들어요. 강제로. 고통을 탁 주무로써. 그런데 꼭 고통이 와야지만, 깨닫는 사람에게는 그게 오겠죠. 그런데 불교의 목적은 뭐냐 하면, 꼭 고통을 받고 나서 그걸 깨달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지금 이 순간 미리 깨닫고 나면, 미리 깨달아서 미리 마음을 비우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내면과 친구가 되고나면, 이미 깨달았으니까 그 고통을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그 고통이 오는 이유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깨닫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깨닫고 나면 그 고통이 오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절에 다니고 법문 듣고 마음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 놀랍도록 중요하고 필요한 겁니다. 이것만을 하게 되더라도 저절로 마음의 의식이 바뀌게 되고요, 이 의식이 바뀌면 나에게 올 여러분이 한 달 뒤에 와야 될, 1년 뒤에 와야 될 교통사고가 안 올수도 있고요. 3년 뒤에 와야 될 부도가 한 20년 뒤로 늦춰질 수도 있고요. 어디 병이 나야 되는데 그 병이 안날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끝날 수도 있고요. 이와 같이 마음공부 수행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직접적인 것이고,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이 나에게 주는 깨달음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행복은 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고통이 아닌 시기에는 나에게 주어져있는 이미 주어져있는 행복의 마음을 집중함으로서 긍정적인 부분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서 아까 이효리가 얼마나 잘하는 게 많아요. 그런데 항상 노래를 못하는 거, 라이브가 안 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았다 하잖아요. 그 많은 장점가운데 그 못하는 단점에만 우리는 더 마음을 집중하고 살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와 같이 우리가 매 주어진 삶의 충실해서 나 자신과 친구가 되고, 그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마음을 비우는 행복을 누리고 추구하고 지금 이 순간과 접촉하는 최상의 방법이 뭘까요? 그게 바로 명상이고 수행이고 기도인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까지 제가 이제 행복을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행복과 원하는 것을 내려놨을 때 오는 이 두 가지 행복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을 마치도록 하고 다음 주부터는 또 다른 주제로 그 주, 그 주 다른 내용으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좋은글잘읽었습니다
부처님법만나게되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좋은글 법문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유법우님. 사랑합니다. _()_
법우님 노고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법우님, 그동안 이렇게 녹취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 어려운 일인데 마음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우님을 위해 축원 올리옵니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감사합니다합니다
행복합니다. 러브합니다.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행복합니다. 사랑과 풍요를 주십니다. 사랑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