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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옥첨주[海屋添籌]옛날 세 노인이 함께 만난 자리에 어떤 자가 나이를 묻자, 모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를 놓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하나씩 놓은 산가지가 열칸 집에 이미 가득찼다.” 하였다 한다. 《東坡志林 卷二》
♣ 해옥첨주[海屋添籌]장수(長壽)를 축하하는 말. 해옥은 선인(仙人)이 산다는 해상 선옥(海上仙屋)을 이르는데, 선학(仙鶴)이 해마다 산가지 하나씩을 물어온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 해온풍[解慍風]남풍(南風)을 말한다.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남풍이 솔솔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풀 수 있겠도다. 남풍이 때맞추어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산을 늘릴 수 있겠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하였다. 《孔子家語 辨樂解》
♣ 해옹호구[海翁好鷗]바다 노인이 갈매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사람에게 야심(野心)이 있으면 새도 그것을 알고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해우[解牛]소를 잡다.
♣ 해우[薤盂]염교와 물주발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때 방삼(龐參)은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그 고을의 처사 임당(任堂)을 맨 먼저 방문하였다. 임당은 말 대신, 문 앞에 큰 염교 한 뿌리와 물 한 주발을 내다 놓은 다음, 어린 손자를 안고 그 옆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물은 자기에게 청백하라는 뜻이요 큰 염교 뿌리는 자기에게 강성한 종친을 제거해 달라는 뜻이요, 손자를 안은 것은 불쌍한 백성을 돌봐 주라는 뜻임을 알고 깊은 감명을 받아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룩하였다. 《後漢書 龐參傳》
♣ 해우[解雨]해우는 주역(周易) 해괘(解卦)에 “천지가 해산하매 뇌우가 일어나고, 뇌우가 일어나매 백과와 초목이 모두 싹이 터 나온다.[天地解而雷雨作 雷雨作而百果草木皆甲折]” 한 데 대하여,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뇌우가 일어난 것이 해산이니, 군자가 여기에 의거하여 죄과를 사유한다.[雷雨作解 君子以 赦過宥罪]” 한 데서 온 말이다.
♣ 해우오혜[解牛悟惠]백정이 소를 잡아 뼈를 가르는 기술을 도(道)에 비유하여 문혜군(文惠君)에게 양생(養生)의 도를 깨닫게 하였다. 장자(莊子)
♣ 해우음나조[廨宇蔭蘿蔦]친지와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규변(頍弁)에 “새삼덩굴과 더부살이, 소나무 잣나무에 뻗어 있네[蔦與女蘿 施于松柏]”라고 하였는데, 집전(集傳)에서 “이는 형제와 친척들이 이에 의지하여 화목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해운[海雲]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 해운삼천[海運三千]바다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면[海運], 대붕(大鵬)이 남명(南冥), 즉 천지(天池)를 향해 날아가는데, 이때 물결을 격동시키는 것이 삼천리에 달하고[水擊三千里],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구만 리 위로 날아오른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첫머리에 나온다.
♣ 해운선적[海雲仙蹟]호를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運)이라고 했던 신라(新羅)의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伽倻山) 입산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지금의 동백섬 동쪽 벼랑 넓은 바위 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썼다는 글씨를 말한다.
♣ 해원[解元]과거의 향시(鄕試)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을 말하는데, 본래 향시를 해시(解試)라 하였다. 주기수(珠璣藪)에 “향시에 첫째로 합격한 것을 해원이라고 하며, 또는 해수(解首), 영해(領解), 발해(拔解), 발해(發解)라고도 한다.” 하였다.
♣ 해월[海月]반달처럼 생긴 조개류라는 해석과 해파리라는 설이 있다.
♣ 해위[奚爲]전대(專對)는 나라의 전권대표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해위는 쓸모없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子路에 공자가 이르기를 “시(詩) 3백 편을 외우고도 사방에 사명을 받들어 행함에 능히 나라를 대표[專對]하지 못하면 또한 무엇에 쓰겠느냐.[亦奚以爲]"고 한 것을 인용한 것임.
♣ 해율[嶰律]해(嶰)는 골짜기 이름인데, 곤륜산(崑崙山)의 북쪽에 있다.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을 시켜 해곡(嶰谷)의 대를 베어 두 마디 사이를 잘라서 그것을 불어 황종(黃鐘)의 궁(宮)을 삼았다 한다.
♣ 해은[偕隱]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개자추(介子推)가 세상이 무도함을 비관하고 은거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나도 너와 함께 숨어살리라.” 하고, 마침내 함께 숨어살다 죽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僖公 二十四年》
♣ 해의반박[解衣盤礡]송원군(宋元君)이 그림을 그리려고 여러 화사(畵史)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모두 붓을 빨고 먹을 찍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인사도 없이 사관(舍館)으로 가므로 송원군이 사람을 시켜 엿보니, 그는 옷을 벗고 자유롭게 앉았으므로, 송원군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림 그릴 사람이로다.” 하였다.
♣ 해인[海印]해인삼매(海印三昧)는 부처의 깨달아 얻은 삼매인데, 큰 바다 가운데 모든 물상(物象)이 비치는 것처럼 부처의 지혜 바다[智海] 가운데 일체(一切)가 나타나는 것이다.
♣ 해자괴[諧者怪]해자(諧者)의 괴담(怪談)이라는 것은 장자(莊子) 소요위(逍遙遊)에" 제해(齊諧)란 괴이한 말들을 적은 책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해장[海藏]복잡한 시중(市中)에 은거하는 것을 이름. 소식(蘇軾)의 시에 “바다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 한 몸이 숨는다[萬人如海一身藏]”하였다.
♣ 해점[薤簟]해점은 해엽점(薤葉簟)의 준말로, 마치 부추 잎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푸른 대자리를 이른 말이다.
♣ 해정오두[解酲五斗]진(晉) 나라 유령(劉伶)이 한 번 술을 마시면 한 섬이요 해장할 땐 다섯 말의 술을 마셨다는 “五斗解酲”의 고사가 전해 온다. 《世說新語 任誕》
♣ 해제참[解齊驂]춘추 시대 제 나라의 현자(賢者)인 월석보(越石父)가 남에게 매인 몸이 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재상 안영(晏嬰)이 나갔다가 길에서 그를 만나, 왼쪽 참마(驂馬)를 풀어서 속(贖) 바치고 그를 빼내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晏嬰傳》
♣ 해제천규[海帝穿竅]쓸데없는 억지 짓을 말함. 남해(南海)의 제(帝)는 숙(鯈)이고, 북해(北海)의 제는 홀(忽)이며, 중앙의 제는 혼돈(渾沌)인데, 숙과 홀은 언제나 혼돈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아왔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에 감격하여 그에게 보답할 꾀를 내기를,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 구멍을 통하여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으니 구멍이나 뚫어주자.” 하고 하루에 구멍 하나씩을 팠더니 7일 만에 혼돈은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莊子 應帝王》
♣ 해조[海棗]무루자(無漏子)라는 과실의 별명. 그 나무가 곁가지 하나 없이 곧 바로 삼사십 길을 커 올라가 맨 꼭대기에 가서야 여남은 가지가 돋고 5년 만에 과실 하나가 여는데 아주 크고 달다고 함.
♣ 해조[解絛]속박을 벗어나는 것을 이름.
♣ 해조[解嘲]양웅(揚雄)이 쓴 글의 편명(篇名).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초하고 있으면서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누가 조롱하자, 양웅이 그 조롱에 대해 해명을 한 것이란 뜻으로 만들어진 이름임. 《文選 揚雄 解嘲序》
♣ 해조문[解嘲文]세상의 조롱을 스스로 해명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자들이 그의 담박한 생활 태도를 비웃자, 이를 해명하는 글을 지어 “해조(解嘲)”라고 명명하였다. 《漢書 揚雄傳下》
♣ 해조수[海鳥愁]노(魯) 나라에 원거(爰居)라는 바다새가 동문(東門)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 새에게 좋은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니 그 새는 받아먹지 못하고 근심만 하였다 한다.
♣ 해조음[海潮音]부처가 설법(說法)하는 음성을 해조음이라 한다.
♣ 해조함석[海鳥銜石]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서 정위(精衛)라는 새가 되었는데, 그는 항상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 날라서 동해를 메꾼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 해주[海籌]장수하는 것을 말한다. 통속편(通俗編) 축송(祝誦)에 “세 노인이 만나서 나이를 물으니 한 노인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桑田]으로 변할 때마다 내가 산가지[籌] 하나씩 놓는데, 이제 10개가 되었다.’ 했다.” 하였다.
♣ 해중[奚仲]태고 시절 수레를 처음 만든 사람. 그 넋이 하늘로 올라 역시 별이 되었다고 함.
♣ 해촉사[獬觸邪]법관의 올바른 법 집행을 뜻함. 해(獬)라는 신수(神獸)는 부정한 사람을 만나면 뿔로 받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그래서 또한 법관들이 해의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쓴다고 한다.
♣ 해촉자천원[駭矚玆川原]자안(子安)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산원은 광활하여 시야에 가득차고, 천택은 눈이 떡벌어져라 보는 눈을 놀라게 하도다.[山原曠其盈視 川澤盱其駭矚]” 한 데서 온 말이다.
♣ 해추[海鰌]바다의 미꾸리라고도 하는데 그 크기가 고래의 몇 10배나 된다고 옛 사람들은 믿었다.
♣ 해추[海鰌]병선(兵船)의 이름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동쪽에서 온 고래 같은 해적들이 병선을 몰아내는데, 바다 귀신은 머리 아홉 거북이는 눈이 여섯[長鯨東來驅海鰌 天吳九首龜六眸]”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50 送馮判官之昌國》
♣ 해치[獬豸]짐승의 이름. 성질이 곧아서 사람의 말을 듣고 부정한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함. 옛날에는 사법관(司法官)이 그 가죽으로 관을 만들어 썼음.
♣ 해치[獬豸]해치(獬廌)와 같은데, 뿔이 하나인 양(羊)이다. 이 짐승은 천성이 사람의 죄 있음을 잘 알므로 고요(皐陶)가 옥(獄)을 다스릴 적에 그 죄가 의심되는 것은 이 양으로 하여금 받아 보게 했다 한다.
♣ 해치관[獬豸冠]해치관은 옛날 법관(法官)들이 쓰던 관으로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이 되었음을 뜻한다.
♣ 해타[咳唾]뛰어난 시문(詩文)을 뜻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의 “그대는 기침하며 내뱉는 저 침을 보지 못하는가. 큰 것은 주옥처럼 작은 것은 안개처럼 뿜어 나오곤 한다.[子不見夫唾者乎 噴則大者如珠 小者如霧]”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해타명주[咳唾明珠]말을 뱉으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는 탁월한 재능을 형용한 말. 후한(後漢) 강엄(江淹)이 곽공(郭鞏)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침을 뱉으면 그대로 구슬과 옥이 되니, 녹록한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後漢書 文苑傳 趙壹》
♣ 해탈[解脫]석가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입멸(入滅) 즉 해탈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를 설법하였다. 《阿含經》
♣ 해탑[解榻]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특별히 탑상 하나를 마련해 놓고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만 반갑게 맞으면서 내려 놓았다가 그가 돌아가면 다시 올려놓고 아무에게도 내려 주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徐穉傳, 陳蕃傳》
♣ 해패[解佩]당(唐) 나라 때 하감(賀監)이 장안에서 이백(李白)을 만나자,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풀어 술을 샀다 함. 금귀는 당 나라 때에 관리들이 차던 장식물. 한편, 정교보(鄭交甫)란 자가 강한(江漢) 기슭에서 두 강물의 여신을 만나 그 여인들이 차고 있는 패물을 갖고 싶어하자, 그를 좋아한 두 여신은 곧장 패물을 풀어서 주었다고 한다.
♣ 해폐편[解蔽篇]순자(荀子)의 해폐편. 해폐편은 인성(人性)이 물욕(物欲)에 가리워진 것을 주로 다루었음.
♣ 해포[解袍]당 목종(唐穆宗)이 매우 추운 날 한림원(翰林院)에 거둥했다가, 한림 학사 위수(韋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옷을 벗어 덮어 주고 갔던 고사가 전한다. 《淵鑑類函 卷54 用賢 二》
♣ 해하[解夏]중이 7월 15일 또는 8월 15일에 여름 동안 안거(安居)했던 제도를 풀고 출유기(出遊期)에 들어감을 말한다.
♣ 해하[垓下]해하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 동남쪽에 있는 곳으로 옛날 한 패공(漢沛公)이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와 격전을 벌인 곳으로 항우가 한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망한 땅이다.
♣ 해하음릉도[垓下陰陵道]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를 뚫고 탈출하여 가다가,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 곤경을 당하였다.
♣ 해학비[海鶴悲]두보의 기상징군(寄常徵君)이란 시에 “초비(楚妃)가 당 위에서 빼어난 미색을 자랑하듯 지조를 지키더니, 해학(海鶴)이 섬돌 아래에서 사람을 향해 우는구나.” 하여, 자연 속에 은거해 살다가 관직에 나간 것에 비유하였다.
♣ 해해[偕偕]굳세고 씩씩한 모양
♣ 해해[咍咍]기뻐서 웃는 모양
♣ 해후사두쌍소병[邂逅沙頭雙素甁]두보(杜甫)의 시에 “백사장 언덕에서 술 두 병 말끔히 비웠나니, 손님은 다 취하고 나만 홀로 말똥말똥.[酒盡沙頭雙玉甁 衆賓皆醉我獨醒]”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醉歌行》
♣ 해흥[海興]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했던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가리킨다.
♣ 행[幸]바라다, 희망하다.
♣ 행[行]행은 시체(詩體)의 하나이다.
♣ 행가[行歌]걸어가면서 노래하다.
♣ 행가고녕우[行歌叩寗牛]춘추 시대제(齊) 나라의 영척이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하여 세상에 쓰이기를 요구했는데, 과연 제 환공(齊桓公)이 그 노래 소리를 듣고 그를 등용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尊賢》
♣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
♣ 행단[杏壇]단(壇)의 이름.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址)로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성묘(聖廟) 앞에 있다.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공자는 행단 위에 앉고 제자들은 그 곁에서 글을 읽었다.[孔子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하였다.
♣ 행단사자[杏壇四子]행단은 살구나무가 있는 단으로 공자(孔子)가 일찍이 강학한 곳인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大成殿) 앞이라 한다. 네 분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ㆍ증점(曾點)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를 이르는바, 공자가 일찍이 이들에게 각자의 포부와 경륜을 물은 적이 있다. 《論語 先進》
♣ 행당맥락[杏餳麥酪]당(唐) 나라 때 음식의 한 가지.
♣ 행대[行臺]서장관(書狀官)의 별칭이다.
♣ 행등[行縢]베의 천으로 퇴육(腿肉)을 감는 각반(脚盤)을 말함.
♣ 행등[行燈]속에 등잔을 넣고 손으로 들고 다니게 된 등롱(燈籠)이다.
♣ 행락수급시[行樂須及時]좋은 시절이 가기 전에 즐겨 놀아야 한다는 뜻으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 “행락을 즐김은 마땅히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니, 어찌 앞날을 기다릴 수 있으랴.”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 행로[行露]행로는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篇名)인데, 여인들이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노래한 시이다.
♣ 행로난[行路難]악부잡곡(樂府雜曲) 가사 이름. 백거이(白居易)ㆍ이백(李白) 등이 노래한 행로난이 있는데, 악부해제(樂府解題)에 이르기를, “행로난은 주로 험난한 세상길 또는 이별의 쓰라림을 노래한 것으로 대부분 첫머리를 군불견(君不見)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였음. 《樂府詩集 雜曲歌辭 行路難》
♣ 행료지수감읍주[行潦之水堪挹注]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자족(自足)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형작(泂酌)에 “저 멀리 길 바닥에 고인 물을 퍼다가 저기에 붓고 여기에 쏟아도 선밥 술밥을 지을 수 있도다.[泂酌彼行潦 挹彼注玆 可以▣饎]”라고 하였다.
♣ 행리[行李]행리는 사자(使者)ㆍ행인(行人) 또는 출행자(出行者)가 휴대하는 행장을 일컫기도 한다.
♣ 행림[杏林]살구나무 숲. 진정한 의술(醫術)의 도(道). 옛날 중국 오(吳)나라에 동봉(董奉)이란 의사(醫師)가 살았다. 동봉은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대신에 자기 뜰에다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중병자는 다섯 그루, 가벼운 병세의 환자는 한 그루씩 심게 하니 몇 년 안 되어 십만 그루가 넘는 엄청난 살구나무 숲을 이루었다. 그는 여기서 나오는 살구나무 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까지 했다 한다. 그래서 행림이라 하면 거룩한 의사의 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의사를 아름답게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 행마[行馬]귀인(貴人)의 집이나 관서(官署)의 문 밖에 설치하는 말을 매어두는 제구.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데도 세웠음.
♣ 행명실기[行名失己]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겉으로 드러나는 명성만 좇을 뿐 자신의 신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선비라고 할 수가 없다.[行名失己 非士也]”라는 말이 나온다.
♣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 半九十]백 리 길을 가려면, 구십 리를 가도 오십 리도 못 간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 행부[行部]자사(刺史)가 자기 관내를 순행하는 것. 한(漢)나라 때 행하던 제도로서 언제나 팔월이면 자사가 자기 관내를 순행하면서 죄수를 살피고 전최(殿最)를 매겼는데, 그를 일러 행부라고 하였음. 《後漢書 蘇章傳》
♣ 행불유경[行不由徑]지름길이나 뒤안길을 가지 않고 큰 길을 걷는다는 말로, 정정당당히 일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행서[行書]해서를 실용적인 데에서 더욱 빨리 쓰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글자의 발달 순서는 행서 → 초서 순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초서는 한대에 유행하였는데 빠르게 쓸 수는 있었으나 남이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초서와 느린 해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해서보다는 조금 획을 흘려서 쓰며, 초서보다는 덜 간략한 글자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행서는 생활서로서뿐만 아니라 획의 변화무쌍함 때문에 예술서로서도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 행성[行省]정동성(征東省)과 같음.
♣ 행수단[杏樹壇]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는 곳, 즉 서원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나라는 행수(杏樹)를 은행나무로 여기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로 간주하고 있다.
♣ 행수화[行水火]수화는 사람의 정신과 같은 말로, 도가(道家)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법의 하나임. 금단대요(金丹大要)에 “호흡으로써 신기(神氣)를 운용하고 신기로써 수화(水火)를 취하고 수화로써 태식(胎息)을 단련한다.” 하였다.
♣ 행시주육[行尸走肉]송장의 움직임과 같이 형태만 있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 무식한 사람을 멸시하는 말로 쓰인다.
♣ 행신가호[行身賈胡]장사하는 되놈[賈胡]이 보배 구슬을 감추기 위하여 제 배를 가르고 그 속에 넣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재물을 탐하여 제 몸이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 행약[行藥]약을 마신 뒤에 약이 내려가라고 거니는 것을 말함. 두보의 시에 “行藥病涔涔"의 글귀가 있음.
♣ 행영[行營]외지에 나가 주둔해 있는 군영(軍營)을 말한다.
♣ 행우[行雨]행우 조운(行雨朝雲)의 준말로, 옛날 송 양왕(宋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와 정사(情事)를 가졌는데, 그가 떠나면서 “저는 아침에는 조운(朝雲)이 되고 저녁에는 행우(行雨)가 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미인을 비유한 것이다.
♣ 행운유수[行雲流水]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일의 처리에 막힘이 없거나 마음씨가 시원시원함.
♣ 행원[杏園]당대(唐代)에 진사(進士)에 합격된 선비에게 잔치를 내리던 곳. 그 모임을 탐화연(探花宴)이라 하고 준소(俊少)한 선비 세 사람을 뽑아 탐화사(探花使)라 한 다음, 이름있는 원(園)들을 두루 찾아 꽃을 꺾어 오도록 하여, 늦은 두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놀이도 가졌다.
♣ 행위[行違]출처(出處)를 시국에 따라서 하였음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스러우면 떠나간다[樂則行之 憂則違之].” 한 데서 온 말이다. 《周易 乾卦 文言》
♣ 행유부득반구제기[行有不得反求諸己]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
♣ 행음택반[行吟澤畔]전국 시대 초(楚)의 문호(文豪)이자 충신인 굴원(屈原)이 간신의 참소로 쫓겨나 곤궁한 처지에 있었음.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못가에서 한편 거닐며 한편 읊조린다.[行吟澤畔]" 하였음.
♣ 행인[行人]사신(使臣)과 같음. 조근(朝覲)ㆍ빙문(聘問)의 일을 관장하는 벼슬 이름. 주례(周禮) 주관(周官)에 대행인(大行人) 소관인(小官人)이 있는데, 추관(秋官)에 속한다.
♣ 행인안검간[行人按劒看]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신이 듣건대 명월(明月)의 구슬과 야광(夜光)의 벽(璧)을 길에 있는 사람에게 던져 주면 칼자루를 잡고 흘겨보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 행장[行藏]행장은 용사행장(用舍行藏)의 준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몸이 쓰여지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나 간직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에서 나온 것으로, 출처(出處)나 행지(行止)를 가리킨다. 즉 진퇴(進退)를 말한다.
♣ 행장[行裝]여행할 때 휴대하는 의류 등 물품으로 곧 조정에 나가 벼슬하거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뜻함.
♣ 행조은후정[行調殷后鼎]은후의 국에 간을 맞추다. 정승으로 임금을 잘 보필한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국을 끓이거든 그대는 염매(鹽梅)가 되어다오.” 한 데서 온 말이다.
♣ 행주[行廚]거둥 때 어선(御膳)을 맡는 임시 주방(廚房). 길을 가는 도중에 임시로 음식을 만드는 곳. 본디 도시락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야외(野外)의 연회(宴會)를 뜻한다.
♣ 행주[行酒]술을 따르다. 술을 권하다.
♣ 행주[行籌]한 애제(漢哀帝) 때에 관동(關東) 백성의 전하는 말에 “서왕모의 산가지를 시행한다.[行西王母籌]”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서왕모는 곧 원후(元后)가 장수할 조짐을 상징한 것이요, 행주(行籌)는 바로 국가의 주책(籌策)을 천하에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행지부창천[行止付蒼天]군자가 나라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물러나는 것을 하늘의 자연에 맡긴다는 것임. 맹자(孟子) 梁惠王下에 “대도가 행해지게 되면 암암리에 그것을 추진하는 자가 있고 정지하게 되면 그 역시 암암리에 저해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천명(天命)에 있으므로 행해지고 정지하는 일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음.
♣ 행진[行塵]행진은 길에서 묻은 먼지를 말한다.
♣ 행채[荇菜]노랑어리연꽃. 조름나물과에 속하는 다년생 수초(水草).
♣ 행천만국병[行穿萬國兵]오랑캐를 한창 토벌 중인 전장(戰場) 가운데를 지나가리라는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삼 년 동안 피리 소리 관산월 곡조, 천하 위한 군사 작전 바람에 초목이 쓸리도다.[三年笛裡關山月 萬國兵前草木風]”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洗兵行》
♣ 행춘[行春]행춘은 지방관이 자기가 관할하는 고을을 봄철에 순회(巡回)하는 것을 말한다.
♣ 행행[悻悻]발끈 성내어 원망하는 모양, 성미가 급하고 마음이 좁은 모양
♣ 행화우[杏花雨]살구꽃이 필 무렵, 즉 청명절(淸明節)에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 행화천[杏花韉]예전 과거 볼 때에는 대개 살구꽃 필 때여서 전부터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행화는 관계가 깊다.
♣ 행화풍[杏花風]청명절(淸明節) 전후 살구꽃이 활짝 필 무렵에 부는 바람으로, 청명절 무렵에 부는 봄바람의 대명사이다.
♣ 향 일 화[向 日 花]해바라기.
♣ 향갑[鄕甲]면임(面任)을 말함.
♣ 향강[香姜]와연(瓦硯)의 일종. 양산집(楊愼集)에 “조조(曹操)의 동작대(銅雀臺) 기와는 이미 얻을 수 없게 되고 송 나라 사람이 수장한 것은 바로 고환(古歡)의 피서궁(避暑宮)ㆍ빙정대(氷井臺)ㆍ향강각(香姜閣) 기와이다.”라 하였음.
♣ 향거[香車]향거는 귀인(貴人)의 타는 칠향거(七香車)이다.
♣ 향공[鄕貢]향공은 당 나라 때 선비를 선발하는 제도의 하나로, 지방 고을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한 자를 말하는데, 곧 진사를 뜻한다.
♣ 향니[香泥]향기나는 진흙으로 여기서는 불상이나 법당의 주위에 쓰여진 흙을 말한다.
♣ 향등[香燈]제사를 지낼 때 쓰는 등불과 규문(閨門) 안, 곧 내실(內室)의 등불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 향렵전[餉獵錢]호랑이 사냥을 명분으로 민간에서 거두는 경비를 말한다.
♣ 향로봉[香爐峯]여산(盧山)에 있으며, 백락천이 그 곳에 있었다.
♣ 향미[鄕味]새로 상번(上番)하여 올라온 군졸에게 고참자들이 상면(相面)한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빼앗아 먹던 퇴폐적인 준례였다.
♣ 향벽견성[向壁見性]불교에서 면벽 참선(面壁參禪)을 하여 성을 보아 부처 된다[見性成佛]고 한 것을 말한다.
♣ 향사[香社]당(唐)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함께 결성한 모임인 즉 향화사(香火社)의 준말이다.
♣ 향사[鄕射]옛날에 마을에서 활을 쏘면서 술을 마시던 의례(儀禮)이다.
♣ 향사[鄕使]향사는 고향에 보내는 심부름꾼을 이른 말이다.
♣ 향산[香山]당(唐)의 백거이(白居易)를 말함. 거이(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향산(香山)에 들어가 자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하였음. 《唐書 卷一百一十九》
♣ 향산[香山]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는 산 이름.
♣ 향산결사[香山結社]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이 만년(晩年)에 향산(香山)에서 아홉 노인과 결사(結社)하였다고 한다.
♣ 향산구로[香山九老]향산은 중국 하남(河南) 낙양(洛陽) 용문산(龍門山)의 동쪽에 있는 산. 당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로 있다가 그만두고 호고(胡杲)ㆍ길교(吉皎)ㆍ유진(劉眞)ㆍ정거(鄭據)ㆍ노정(盧貞)ㆍ장혼(張渾)ㆍ이원상(李元爽)ㆍ여만(如滿)등 나이 70이 넘은 노인들과 구로상치지회(九老尙齒之會)를 맺고 자기의 향산 별장에서 시를 지으며 놀았다. 《新唐書 卷一百十九 白居易傳》
♣ 향산로[香山老]향산(香山)은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를 가리킨다.
♣ 향산사[香山社]뜻이 맞는 일을 일생 동안 함께 하기로 맹약을 맺은 일을 말한다.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등과 함께 향화(香火)의 결사를 맺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통 향화사(香火社)라고 한다.
♣ 향산지각[響山池閣]향산은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 아래 완계(宛溪)가 있는데, 왕 노공(王路公)이 여기에 정(亭)을 지었다. 지각(池閣)은 물가의 정자.
♣ 향상[香象]몸에서 향기가 나며 깊은 강이나 바다로 건너갈 수 있다는 상상(想像)의 코끼리.
♣ 향서절영매[鄕書折嶺梅]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강남(江南)의 매화와 함께 시를 보냈던 고사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970》
♣ 향성[香省]중앙 정부 기관의 숙직실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문하성(門下省)에서 습유(拾遺)가 숙직할 때, 여시사(女侍史)가 숙직자의 의복을 향로에 쐬여 향기가 나게 했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향소[香蘇]오난설의 재호(齋號)인 향소산관(香蘇山館)을 말함.
♣ 향안[香案]향로를 올려두는 탁자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 말이다.
♣ 향안리[香案吏]임금 곁에 시종(侍從)하는 문사(文士)를 뜻함. 당(唐) 나라 원진(元稹)의 시에 “내 본디 옥황상제의 향안 받들던 아전이라, 쫓겨나서도 봉래산 가까이 살게 되었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近蓬萊]” 한 데서 온 말이다.
♣ 향엄동자[香嚴童子]자기 몸을 불살라 남을 공양한다는 뜻으로, 향을 해학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부처와 보살들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 향엄(香嚴)이라 불리는 천자(天子)들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내고서 부처와 보살들을 공양(供養)하였다.”고 하였다.
♣ 향우인[向隅人]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된 처지를 말한다. 한서(漢書) 형법지(刑法志)에 “집안에서 모두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한 사람이 벽을 향해서 슬피 울면, 즐겁던 분위기가 깨어지게 마련이다.” 하였다.
♣ 향우지탄[向隅之歎]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나 자기만은 구석을 향하여 한탄한다.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한탄하는 말.
♣ 향원덕지적[鄕愿德之賊]향원은 신조와 주견 없이 그때그때 세태에 따라 맞추어서 주위로부터 진실하다는 칭송을 받는 사람을 말함. 그의 사이비한 행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일러, 덕의 적이라고 하였음. 《論語 陽貨》
♣ 향음주례[鄕飮酒禮]상고 때에 시골 학교에서 3년 동안 가르쳐 학업이 성취되면 덕성(德性)과 문예를 시험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를 조정에 천거하는데, 그때 향대부(鄕大夫)가 주인이 되어 그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 전송하면서 빈례(賓禮)로 대하여 술을 주고받을 때 일정한 의식이 있었음. 곧 시골 선비들의 순후한 풍속을 말함. 《儀禮 鄕飮酒禮》
♣ 향의[香蟻]술거품, 또는 술을 말한다.
♣ 향자손익[向子損益]상자(向子)는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상장(向長)을 가리키는데, 그의 자(字)인 자평(子平)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노장(老莊)과 역(易)에 정통하였는데, 어느 날 주역(周易)의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읽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부귀는 빈천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죽음이 삶보다 어떻다는 것만은 모르겠다.[吾已知富不如貧 貴不如賤 但未知死何如生耳]”라고 하였다 한다.《後漢書 逸民傳 向長》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仲尼甘旅人 向子識損益”이라는 구절이 있다.《杜少陵詩集 卷8 兩當縣吳十侍御江上宅》
♣ 향자식손익[向子識損益]상자(向子)는 동한(東漢)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으로, 자(字)는 자평(子平)이다.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다가 손괘(損卦)와 익괘(益卦)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부귀가 빈천(貧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만, 죽음과 삶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逸民傳 向長》
♣ 향자평[向子平]자평(子平)은 상장(向長)의 자(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녀의 혼사(婚事)를 다 끝내자 오악 명산(五嶽名山)을 유람, 그칠 줄 몰랐다고 함.
♣ 향적[香積]부처의 이름.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중향(衆香), 부처의 이름은 향적(香積)인데, 그 나라의 법의 향기가 십방 무량 세계에 주류(周流)한다.”《維摩經 香積品》
♣ 향적[香積]사찰(寺刹)의 승주(僧廚)를 말한다. 향적주(香積廚)의 준말인데 승가(僧家)의 식주(食廚)로서 대개 향적불국(香積佛國)의 향반(香飯)의 뜻을 취한 것임.
♣ 향적반[香積飯]향적반에 대해서는 유마경(維摩經) 향적품(香積品)에 “향적여래(香積如來)가 중향발(衆香鉢)에다 만향반(滿香飯)을 담아서 화보살(化菩薩)을 주었다.”는 말이다.
♣ 향적주[香積廚]절의 부엌을 이름.
♣ 향전[香篆]전문(篆文) 모양으로 만든 향인데 이를 태워 시각(時刻)을 잰다. 향보(香譜)에 “향전을 만들 적에 그 길이를 12신(辰)에 기준하여 1백 각(刻)으로 분등하는데, 타는 시간은 24시간이다.” 하였다.
♣ 향조[香祖]청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자(字)인데, 난공(蘭公)이라 하기도 한다.
♣ 향진[香塵]야유회를 나온 사녀(士女)들의 분 내음과 합쳐진 봄날 번화한 길거리의 화사한 분위기를 표현한 시어이다.
♣ 향평물관[向平勿關]상평은 자(字)가 자평(子平)인 한(漢) 나라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을 가리킨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나서 집안일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勿復相關]고 분부하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오악(五岳) 등을 유람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高士傳ㆍ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 향표칠서위선장[香飄七瑞圍仙仗]진 시황이 바다를 건너가서 해뜨는 곳을 보고자 하여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서 바다로 내려보냈는데, 이때 돌이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신인이 매양 돌에 채찍질을 하여 강제로 몰아 내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향혼[香魂]미인의 죽은 영혼이라는 뜻의 시어(詩語)이다.
♣ 향화사[香火社]향불과 등화(燈火)는 다 함께 불전(佛前)에 공양하는 물건으로서, 서로 마음이 계합(契合)되는 불교도의 결사(結社)를 말하는데, 당(唐) 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향화사를 결성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주역(周易) 수괘(隨卦) 상사(象辭)에, “군자는 하늘이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편안히 쉰다.” 하였다.
♣ 허[墟]마을
♣ 허격[許格]이안눌(李安訥)의 문인. 자는 춘장(春長), 호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또는 창해(蒼海). 시문(詩文)에 능했음.
♣ 허공언[許功彦]공언은 허성(許筬)의 자이다.
♣ 허곽품인[許郭品人]후한(後漢) 명사(名士) 허소(許劭)와 곽태(郭泰)가 인물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하였다.
♣ 허기[虛器]허기는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 허령[虛靈]명덕(明德)을 말함. 대학(大學) 명덕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를 수응하는 것이다.” 하였음.
♣ 허령불매[虛靈不昧]마음에 찌꺼기나 가린 것이 없어 사물을 환하게 비춰보는 것. 사람의 마음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그 기능은 거울처럼 맑고 환함을 이른다. 대학(大學) 경일장(經一章) 명덕(明德)의 주석에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뭇 이치[衆理]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 허례허식[虛禮虛飾]예절, 법식 등을 겉으로만 꾸며 번드레하게 하는 일
♣ 허뢰[虛籟]공산(空山)에서 바람 없이 일어나는 소리를 이름.
♣ 허무[虛無]허무(虛無)는 강물을 가리킨다.
♣ 허무맹랑[虛無孟浪]말이나 행동이 터무니없이 허황되고 전혀 실상이 없음
♣ 허문정공[許文正公]문정은 원(元) 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시호. 자는 중평(仲平)이며, 호는 노재(魯齋). 세조(世祖) 때 국자 좨주(國子祭酒)가 되어 훌륭한 교육을 시행했으며 정주학(程朱學)에 밝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 《元史 許衡傳》
♣ 허미수[許眉叟]미수는 조선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허목(許穆)의 호.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篆書)에는 동방의 제1인자로 칭해진다. 저서에는 미수기언(眉叟記言)ㆍ경설(經說)ㆍ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등이 있음.
♣ 허미숙[許美叔]미숙은 허봉(許篈)의 자(字)이다.
♣ 허백[虛白]허실생백(虛室生白)의 약어(略語)로 빈집이 훤한 것을 들어 물욕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가리킨다. 청정무욕(淸淨無慾).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의 “텅 빈 방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 나온다.[虛室生白]”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허백유실[虛白幽室]빈 방이 훤히 빛나는데 길상(吉祥)이 머무른다. 마음이 비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 허비경[許飛瓊]신선인 서왕모(西王母)가 한 무제(漢武帝)와 연회를 함께 할 때 시녀(侍女)인 허비경에게 진령(震靈)의 피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한다.《漢武帝內傳》 또 당(唐) 나라 사람 허혼(許渾)이 꿈에 요대(瑤臺)에 올라가 선녀 3백 인과 노닐 적에 허비경의 부탁을 받고 “새벽의 요대에 이슬 기운 청랑한데, 좌석에 오직 허비경만 보이더라. 아직 속진(俗塵) 남아 속세의 인연 못 벗은 몸, 하산하는 십 리 길 달빛만 환하더라.[曉入瑤臺露氣淸 坐中唯有許飛瓊 塵心未盡俗緣在 十里下山空月明]”라는 시를 지었는데, 허비경이 자기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여 ‘坐中唯有許飛瓊’이라는 구절을 ‘天風飛下步虛聲’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太平御覽 卷70 引用註》
♣ 허빈[虛牝]노자(老子)에서 나온 말인데, 여기서는 물이 낮은 데로 흘러 모이는 구렁이나 바다를 말한 것이다.
♣ 허빈척[虛牝擲]허빈은 텅 빈 계곡으로, 쓸모없는 땅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시에 “가련타 쓸데없이 정신만 허비할 뿐, 황금이 허빈에 던져진 듯했소그려.[可憐無益費精神 有似黃金擲虛牝]”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4 贈崔立之評事》
♣ 허사[許汜]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유비(劉備)와 당시의 호사(豪士) 진등(陳登)을 평할 적에 “내가 난리통에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그를 찾았을 적에, 손님을 대접할 줄 몰라 자기는 높은 평상, 손님은 낮은 평상에 눕게 했었다.” 하자, 유비가 “그대는 고사(高士)라면서 나라에 충성할 마음은 갖지 않고 농토나 구하고 집터나 묻기 때문에 그처럼 박대한 것이다.” 하였다. 《三國志 魏志 陳登傳》
♣ 허사[許史]허사(許史)는 한 선제(漢宣帝)의 장인인 허백(許伯)과 선제의 외가(外家)가 되는 사고(史高)의 집안을 가리킨다. 권문 귀척(權門貴戚)을 일컬을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漢書 卷77 蓋寬饒傳 註》
♣ 허사김장[許史金張]허는 한 선제(漢宣帝) 허 황후(許皇后)의 부친인 허광한(許廣漢), 사는 선제의 조모인 사양제(史良娣)의 오빠 사공(史恭)과 그의 아들 사고(史高)로, 허사라고 하면 보통 귀척(貴戚)을 가리킨다. 김장의 김은 김일제(金日磾), 장은 장안세(張安世)로, 두 가문이 모두 한 나라 때 7대에 걸쳐 황제의 은총을 받고 현달(顯達)하였으므로, 보통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뜻으로 쓰인다.
♣ 허사지호귀[許史之豪貴]허씨는 선제(宣帝)의 처가요, 사씨(史氏)는 그의 외가이다.
♣ 허산전[許山前]산전은 허성(許筬)의 호이다.
♣ 허순[許詢]진(晋) 명사(名士) 자는 현도(玄度). 진 나라 사람으로 지둔과 동시대였다. 그는 산수간(山水間)에 놀기를 놓아하여서 여러 번 지둔을 찾았다.
♣ 허신직설[許身稷契]직설(稷契)은 순 임금의 명신(名臣)이었던 후직(后稷)과 설(契)을 이르는데,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 시에 “두릉에 한 선비가 있으니, 늙을수록 뜻은 더욱 졸렬하여라. 자신 허여함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고, 그윽이 후직과 설에 비한다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穮與契]"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四》
♣ 허실광생백[虛室光生白]진리(眞理)에 도달함을 비유한 말. 텅 빈 방에는 햇빛이 들어와 밝다는 뜻으로, 즉 사람의 마음도 텅 비워서 물욕을 없애면 도를 깨닫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人間世》
♣ 허실생백[虛室生白]허실은 물욕이 전혀 없는 텅빈 마음을 비유한 것이고, 흰 빛이란 곧 도(道)를 비유한 것으로, 즉 마음을 텅비워 물욕을 없앰으로써 도가 생기어 길한 징조가 와서 머물게 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저 빈 틈을 보아라. 텅 빈 방에서 광채가 뿜어 나오지 않느냐. 길상은 부동(不動) 속에 자리하느니라.[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라는 말이 있다.
♣ 허실자생명[虛室自生明]사람이 상념(想念)을 끊으면 절로 진리(眞理)에 도달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 허실자요[虛室自曜]실중(室中)을 활짝 개방(開放)해 놓으면 절로 밝은 광선(光線)이 들어온다는 데서 온 말로, 즉 사람의 마음이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면 절로 진리(眞理)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이른 말이다. 《莊子 人間世》
♣ 허심[虛心]대[竹]가 속이 비었기 때문에 허심(虛心)이라 한다.
♣ 허심탄회[虛心坦懷]마음을 비워 너그럽고 편안하게 함. 마음속에 사념(邪念)이 없는 너그럽고 편안한 마음. 비우고 마음속에 아무런 선입견이나 거리낌없이 솔직한 태도로 품은 생각을 터놓고 말함.
♣ 허약허[許若虛]약허(若虛)는 허실(許實)의 자(字)이다.
♣ 허옥여[許沃余]옥여는 허계(許啓)의 자(字)이다.
♣ 허위류전[許魏留鐫]중국의 사신인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가리킨다. 이들은 명종(明宗) 22년에 사신으로 나왔다.
♣ 허유[許由]중국 상고(上古) 시대의 고사(高士)로서 요(堯)가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요 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니, 허유는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천하는 이미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계승한다면 나는 장차 명예를 위하라는 말입니까? 뱁새가 깊은 숲에 서식(棲息)하여도 한 개의 나뭇가지에 의지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십시오.’ 하고 사양했다.” 하였다.
♣ 허유기표[許由棄瓢]당요(唐堯) 시절의 고상한 은사였던 허유(許由)가 기산(箕山)에 숨어살며 물을 떠 마실 그릇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늘 움켜 마셨는데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이 바가지 한 짝을 그에게 주었다. 허유는 그 바가지로 물을 퍼 마시고는 나뭇가지에다 걸어 두었더니 바람이 불면 딸그락 딸그락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허유는 그것이 번거롭다 하여 바가지를 버리고 다시 손으로 움켜 마셨다고 함. 《琴操》
♣ 허자[許子]초당(草堂) 허엽(許曄)
♣ 허장성세[虛張聲勢]명성과 위세를 헛되이 펼쳐 놓음. 거짓으로 위세를 꾸미고 헛된 소리로 사람을 위협함. 실력은 없으면서 허세만 부림.
♣ 허정[虛靜]텅 빈 마음으로 만물을 모두 받아들이고, 스스로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물의 실상을 가감없이 그대로 비쳐 주는 것을 말한다.
♣ 허정[許靖]후한(後漢) 말엽에 동탁(董卓)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 촉한(蜀漢)에 들어가서 태부(太傅)가 되었는데, 인재를 아끼고 후진을 이끌어 주며 청담(淸談)을 즐겼다. 일찍이 “영재(英才) 위사(偉士)로서 대사를 도모할 만한 지략(智略)을 지녔으며, 항상 남을 먼저 위하고 자신을 뒤로 돌렸다.[先人後己]”는 평판을 얻었는데, 승상 제갈량(諸葛亮) 역시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절을 하곤 하였다 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葛洪尸定解 許靖力難任”이라는 구절이 있다.
♣ 허정라면[虛庭羅麪]속석(束晳)의 면부(麪賦)에 “가는 밀가루가 눈[雪]처럼 날린다.” 한 말을 인용하였다. 문견후록(聞見後錄)에는 “그의 집에서 밀가루를 가공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하였다.
♣ 허제[虛祭]허위(虛位)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
♣ 허주[虛舟]사공 없이 떠도는 배처럼 의탁할 곳이 없는 처지를 말한다.
♣ 허주[虛舟]세상일에 대해 담박한 마음으로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적에 만약 빈 배[虛舟]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배 위에 있다면 곧 소리쳐서 저리 가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 허주[許州]함양(咸陽)의 고호임.
♣ 허중위이[虛中爲离]이괘(离卦)는 “☲이므로 가운데의 획이 비었다[離虛中].” 한다.
♣ 허지[許支]허씨는 진(晉) 나라 때 명사(名士)였던 허순(許詢)으로 선비를 가리키고, 지씨는 진 나라 때 고승이던 지도림(支道林)으로 승(僧)을 가리키는데, 이들 둘은 서로 교유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었다. 《世說新語 文學》
♣ 허창[許昌]중국 하남성(河南省) 중부에 있는 도시. 서주(西周)와 춘추(春秋)시대에는 허국(許國)의 땅이었으며, 진(秦)나라 때에는 허현(許縣)이라고 불렀고, 동한(東漢) 말기에는 수도(首都)가 되었다. 1913년에 허창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47년 시(市)로 승격하였다. 현재 29개의 민족이 거주한다.
♣ 허창해[許滄海]창해는 조선 인조(仁祖) 때 사람 허격(許格)의 호. 그는 병자호란에 우리나라가 청 나라에 굴복하자, 유시(遺詩)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 허필[許佖]호는 연객(煙客), 자는 여정(汝正),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였다. 영조 때 시서화(詩書畫)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이름났었다.
♣ 허행원수맹일전[許行願受氓一廛]맹자(孟子)에 있는 말인데, 등(藤)이라는 나라에서 맹자의 권고를 듣고 정전법(井田法)을 실시하였는데, 신농씨(神農氏)를 말하는 허행(許行)이 등 나라에 와서 토지 한 구역을 얻어서 농사지었다고 하였다.
♣ 허허남화생[栩栩南華生]남화생은 곧 남화진인(南華眞人)에 추증된 장자(莊子)를 말하는데, 이 말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옛날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기뻐하며 훨훨 날으는 나비가 분명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허혼[許渾]당(唐) 나라 사람. 자는 중회(仲晦)ㆍ목주(睦州)ㆍ영주(郢州)의 자사(刺吏)를 역임하였고 시(詩)에 능하였으며, 저서에는 정묘집(丁卯集)이 있음.
♣ 허흡[噓吸]허흡은 마치 사람의 호흡처럼 대기(大氣)가 동탕(動蕩)한다는 뜻으로 바람을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風起北方 …… 孰噓吸是”라는 표현이 있다.
♣ 허희[歔欷]흐느껴 울다.
♣ 헌가체부[獻可替否]시행해야 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시행하면 안 될 것을 폐지하도록 강력히 진언(進言)하는 것을 말한다.
♣ 헌각[軒閣]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누각으로, 성군의 궁전을 뜻한다.
♣ 헌거[軒擧]높이 솟는 기상으로 의기가 당당함을 말한다.
♣ 헌공롱[獻空籠]전국(戰國) 시대 제왕(齊王)은 변사(辯士) 순우곤(淳于髡)을 시켜 초왕(楚王)에게 학(鶴)을 바치게 하였는데, 순우곤은 도중에서 학은 놓아주고 초 나라에 이르러 빈 새장만을 바치면서 “신(臣)이 제왕의 사신이 되어 학을 가져왔는데 도중에 학에게 물을 먹이다가 그만 놓쳐버렸습니다. 신은 즉시 죽어 사람들의 시비를 끊고 싶었습니다만 신이 만일 죽는다면 우리 임금에게 선비를 죽게 했다는 누명을 끼쳐 드릴까 염려되옵고, 단 딴 학을 사서 대신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은 신(信)이 아니므로 왕을 속이는 것이며, 딴 나라로 가버리려고 하였으나 이렇게 되면 우리 제초(齊楚)의 두 왕의 사신이 불통할까 두려워하여 이대로 와서 죄를 청합니다.” 하였더니 초왕은 도리어 기뻐하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事文類聚 後集 卷四十二 羽虫部》
♣ 헌근[獻芹]옛적에 들에 사는 한 백성이 미나리 나물을 먹다가 맛이 좋다 하여 임금에게 바치려 하였다.
♣ 헌금[軒禽]헌금은 수레를 타는 새로, 위의공(衛懿公)이 학을 좋아하여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헌길[獻吉]헌길은 명(明) 나라 학자 이몽양(李夢陽)의 자이다.
♣ 헌납[獻納]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富弼)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獻) 자와 납(納)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부필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 거란의 임금이 세폐(歲幣)를 더 바치기를 요구하면서 부필에게 말하기를, “남조(南朝)에서 나에게 세폐를 보내면서는 마땅히 올려 바친다는 ‘헌(獻)’ 자를 써야 하고, 아니면 바친다는 ‘납(納)’ 자라도 써야 한다.” 하자, 부필이 이 두 글자를 쓸 수 없다고 다투었다. 그러자 거란의 임금이 “남조에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 두 글자를 쓰지 못할 일이 뭐가 있는가. 만약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쳐들어간다면 후회가 없겠는가?”하니, 부필이 말하기를, “만약 부득이 군사를 출동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곡직(曲直)을 가지고 승부를 결정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거란측에서 부필의 뜻을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송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결정하게 하였다. 부필이 조정에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거절하여 저들의 기세가 꺾였으니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마침내 ‘납’ 자를 써서 거란의 사신에게 주었다. 《宋史 卷三百十三 富弼列傅》
♣ 헌납[獻納]헌납(獻納)은 좋은 계책을 임금에게 바침이다.
♣ 헌릉[獻陵]당 고조의 능.
♣ 헌말[獻襪]옛날에 장지(長至; 동지)를 밟는다는 뜻에서 동지일(冬至日)이면 시부모에게 버선을 지어 올리는 풍속이 있었던 데서 온 말인데, 조식(曹植)의 하동지표(賀冬至表)에 의하면 “버선 일곱 켤레를 바치며 아울러 말송을 드린다.[獻襪七緉 幷爲襪頌]”하였다.
♣ 헌말송[獻襪頌]위(魏) 나라 때 조식(曹植)의 하동지표(賀冬至表)에 “버선 일곱 켤레를 바치며 아울러 말송을 올립니다.[獻襪七緉 幷爲襪頌]”하였다.
♣ 헌면[軒冕]옛날에 대부(大夫) 이상의 고관이 타던 수레와 입던 옷으로, 현달하여 고관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헌부재명조질군[獻賦才名早軼群]한 무제(漢武帝)가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대궐에 불러들이자, 상여가 그 사부(詞賦)는 제후의 일을 노래한 것이라며 다시 천자의 수렵을 소재로 하여 상림부(上林賦)를 지어서 바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헌상[軒裳]고관이 타는 수레와 관복
♣ 헌수[獻酬]헌수는 서로 술을 주고받는 것으로 주객(主客) 간의 예의를 뜻한다.
♣ 헌신저힐[軒臣沮頡]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신하 저송(沮誦)과 창힐(蒼頡). 이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음.
♣ 헌양[헌陽]언양(彦陽)의 고호임.
♣ 헌옥재월[獻玉再刖]솥의 발이 두 개가 부러졌으므로 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초(楚) 나라 화씨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었다. 이를 여왕(厲王)에게 바쳤는데, 옥공(玉工)에게 감정하게 하였던 바 돌이라 하므로 화씨의 왼쪽 발을 잘랐다.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또 바쳤는데, 감정시킨 결과 또 돌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오른쪽 발을 잘랐다.” 하였다.
♣ 헌우[軒虞]황제(黃帝)와 순(舜) 임금이다.
♣ 헌우초[軒芋艸]물가에 나는 냄새가 나는 풀.
♣ 헌원[軒轅]중국 상고 때 신농씨(神農氏)다음의 천자인 황제(黃帝)를 가리킨다.
♣ 헌원대[軒轅臺]황제(黃帝)가 살았었다는 헌원구(軒轅丘)에 쌓았던 대(臺)인데, 지금 하남성신정현(新鄭縣) 서북에 있다.
♣ 헌원성[軒轅星]왕후를 상징한다고 믿어진 별 이름이다.
♣ 헌원탁록[軒轅涿鹿]헌원씨(軒轅氏)가 탁록의 들에서 치우(蚩尤)와 크게 싸웠다 한다.
♣ 헌저[軒翥]높이 오르다.
♣ 헌전[軒躔]헌원성(軒轅星) 별자리로, 옛날에 여주(女主)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헌지추우[軒墀簉羽]헌지는 조정의 수레와 섬돌을 말하는데, 옛날 춘추 시대 위 의공(衛懿公)이 학을 기르기를 좋아한 나머지 대부(大夫)의 수레에 학을 태우고 돌아다녔던 고사가 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수레와 섬돌에 올랐던 학처럼 총애받고, 사냥 나간 문왕(文王)이 태공망(太公望) 얻은 듯하였다네.[軒墀曾寵鶴 畋獵舊非熊]”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投贈哥舒開府翰》
♣ 헌체[獻替]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 헌체는 시행할 만한 것은 진언하고 시행하지 못할 것은 폐기해 버린다는 뜻으로, 국사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가리킨다. 곧 간쟁한다는 뜻임. 《春秋左傳 昭公 二十年》
♣ 헌폭헌[獻曝軒]송(宋) 나라의 농부가 추운 겨울을 간신히 넘긴 뒤 봄철의 따뜻한 햇볕을 쪼이고는 임금에게 이 햇볕을 바쳐 중상(重賞)을 받고 싶다고 한 ‘야인헌폭(野人獻曝)’의 고사를 인용하여 명명한 것이다.
♣ 헌학[軒鶴]춘추시대 위의공(衛懿公)이 학을 매우 좋아하여 학에게 벼슬을 내리고 수레에 태워 함께 다녔다는 데서 나온 말로, 아무런 능력도 없이 벼슬자리에 앉아 국록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 《左傳 閔公 二年條》
♣ 헌헌[憲憲]성하게 일어나는 모양, 기뻐하는 모양
♣ 헌호[軒昊]중국 태고의 제왕인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와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의 합칭으로, 순박하던 태고시대를 가리킨다.
♣ 헌황제율순탄금[軒皇制律舜彈琴]헌황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로, 그의 치세에 천지의 기운이 조화되어 풍기(風氣)가 정대하였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영륜(伶倫)으로 하여금 12율려(律呂)를 만들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21 律曆志》 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남풍(南風)의 시를 노래하자 천하가 다스려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禮記 樂記》 참고로 난세(亂世)를 비유한 표현으로 두보(杜甫)의 “헌원은 율 만들기를 그만두었고, 순 임금은 비파 타기를 멈추었네.[軒轅休製律 虞舜罷彈琴]”라는 시구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風疾舟中伏枕書懷》
♣ 헌훤[獻喧]남에게 크게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을 바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헌희[軒羲]상고 시대 성왕(聖王)인 헌원씨(軒轅氏)와 복희씨(伏羲氏)를 합칭한 말로, 태평 성대를 의미한다.
♣ 헐후[歇後]헐후체(歇後體)를 말함. 즉 어떤 성어(成語)의 뒷말을 약하고 그 윗부분만으로 전체의 뜻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어(隱語). 예를 들면,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의, “이궐자손(貽厥子孫)”에서, 이궐만을 따서 자손을 나타내고, 동 군진(君陳) 편의 “우우형제(友于兄弟)”에서 우우만을 따서 형제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임. 신당서(新唐書) 정경전(鄭綮傳)에. “정경(鄭綮)이 시를 잘하여 그 말에 배해(俳諧)가 많으므로 세상이 모두 정오(鄭五)의 헐후체라 일렀다.”라고 보인다.
♣ 헐후체[歇後體]뒷말을 약한 시체.
♣ 험윤[玁狁]험윤은 북방의 오랑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 편 주자(朱子)의 주(註)에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이미 별세하자 주(周) 나라 왕실이 점점 쇠미하였다. 그리고 팔세(八世)를 지나 여왕(厲王)이 포학하자 주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축출하여 체(彘) 땅에 거주하게 하니, 이에 험윤이 침략하여 경읍(京邑)에 이르렀다. 여왕이 죽고 아들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윤길보(尹吉甫)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하였다.
♣ 험희[險巇]질투하는 마음이 음험하다.
♣ 혁노[赫怒]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의 “王赫斯怒”에서 나온 말로, 황제가 크게 한 번 성내어 오랑캐에게 위엄을 보여 준다는 말이다.
♣ 혁면[革面]허물을 고침. 주역(周易) 혁(革)괘 상륙(上六)에, “君子豹變 小人革面”이라고 보임.
♣ 혁부호변[革孚虎變]“큰 사람이 범처럼 변한다.[大人虎變]”는 말이 주역(周易) 혁(革)괘에 있는데, 해석하되, “제도를 손익(損益)하고 창제하여 문장의 미가 찬연히 볼 만하여 범처럼 변함과 같음이 있다.”는 것이다.
♣ 혁장[鬩墻]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형제끼리 집안에서는 다투지만, 밖에서는 서로 감싸주네[兄弟鬩于墻 外禦其務]”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어렸을 때를 가리킨 말이다.
♣ 혁지홍곡[奕志鴻鵠]학문에 전념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천하의 고수인 혁추(奕秋)에게 바둑을 배우면서 한 사람은 전념으로 배우고 한 사람은 ‘기러기가 오면 잡아야지’ 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배우면 재주는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고 한 말을 지칭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 혁혁[奕奕]사물이 큰 모양, 아름다운 모양, 빛이 번쩍하는 모양, 왕성한 모양, 가는 모양, 춤추는 모양, 근심하는 모양, 연속되는 모양
♣ 혁혁[嚇嚇]하하 웃는 웃음소리
♣ 혁화[革華]혁화는 가죽신을 가리킨 말이다.
♣ 현가[絃歌]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것으로, 전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뜻한다.
♣ 현가[絃歌]현악(絃樂)에 맞추어 노래 부른다는 뜻으로, 정사를 함에 있어서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 때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가하였다고 한다. 《論語 陽貨》
♣ 현가락[絃歌樂]어려움 속에서도 예악(禮樂)을 견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에 “외부와 두절된 상태에서 이레나 양식이 떨어지고 채소국도 충분히 먹지 못해 종자(從者)들이 모두 괴로워했는데도 공자만은 더욱 강개하여 강송하며 현가(絃歌)를 끊이지 않았다.” 하였다.
♣ 현가무성[絃歌武城]조그마한 고을 수령의 어진 정사를 말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갔더니, 고을에 현가(絃歌)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하여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농담을 한 고사가 있다.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을 시키는 데 예와 악[禮樂]을 가르치므로 줄을 퉁기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 현가지[弦歌志]세상을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려는 뜻을 이름. 일찍이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그곳을 가니 현가의 소리가 들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 현가지호성[絃歌至虎城]현가는 거문고나 비파 등으로 시나 노래를 읊는 것이며 호성(虎城)은 무성(武城)으로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을 휘(諱)한 것임.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의 원이 되었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가자, 곳곳에서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자는 자유가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린다 하여 매우 기뻐한 일이 있었다. 《論語 先進》
♣ 현감[玄鑑]깊은 견해, 임금.
♣ 현개경[玄介卿]거북 또는 귀갑(龜甲)을 지칭하는 말로, 장수(長壽)를 뜻한다.
♣ 현거[懸車]현거속마(懸車束馬)의 준말로, 험난한 역정(歷程)을 뜻한다.
♣ 현거[懸車]수레를 달아매고 다시 출세하지 않을 뜻을 보인다는 말. 후한서(後漢書)에 “진식(陳寔)이 여러 번 부름을 입고도 나서지 않음과 동시에 문을 닫고 수레를 매달았다[陳寔屢徵不起閉門懸車].” 하였다.
♣ 현거[懸車]재상이 늙어 퇴직한 뒤에는 수레를 달아매 놓고 다시 출입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연로(年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나온 뒤 천자가 하사한 안거(安車)를 매달아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영광으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 곧 치사(致仕)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漢書 卷七十一 薛廣德傳》
♣ 현검[懸劍]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의 고사.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뜻함. 계찰이 상국(上國)으로 사신가는 길에 서(徐) 나라 임금을 잠깐 찾아보았는데, 서 나라 임금이 계찰의 보검(寶劍)을 보고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하였다. 그러자 계찰은 마음속으로 그 칼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떠났었는데, 그후 계찰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곳에 들르니 서 나라 임금이 이미 죽었으므로, 계찰이 “내가 처음에 마음속으로 이미 허락한 것이니, 그 사람이 죽었다 해서 내 마음을 변할 수 없다.” 하고, 그 칼을 그의 묘수(墓樹)에 걸어두고 떠났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三十一 吳太伯世家》
♣ 현경[玄經]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가리킨다. 양웅이 좋아하는 술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중에 가끔씩 문자를 물으러 오는 자들이 주효(酒肴)를 싸 들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下》
♣ 현경실[懸磬室]아무것도 없는 집을 가리킨다.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노(魯)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서 마치 틀에 매달려 있는 경쇠와 같다.”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 현경자[玄卿子]먹의 이칭.
♣ 현경초[玄經草]양웅(揚雄)은 은거(隱居)하면서 태현경(太玄經) 초고(草稿)를 만들었다.
♣ 현경취후종조백[玄經就後從嘲白]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에 벼락감투를 쓴 자들이 “완전히 검지 못하고 아직도 하얗다.[玄尙白]”고 조롱들을 하였는데, 여기에 기인하여 후대에 공명(功名)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揚雄傳下》
♣ 현곡[玄谷]정백창(鄭百昌)의 호이다.
♣ 현곤[玄袞]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예복이다.
♣ 현공[玄公]호가 현옹(玄翁)인 신흠(申欽)을 말한다.
♣ 현관[玄關]불가(佛家)의 말. 입도(入道)의 관문을 말함.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는 입구를 가리킨 말로, 곧 선사(禪寺)의 궁(宮殿)에 들어가는 문이다. 《運步色葉集 玄關》
♣ 현관[玄關]현묘(玄妙)한 도(道)와 관문. 보등록(寶燈錄)에, “현관을 크게 열고 바른 눈을 유통케 한다[玄關大啓 正眼流通].” 하였다. 또 도를 닦는 집의 문을 지칭하기도 한다. 당시(唐詩)에, “수풀 밑에 현관(玄關)을 닫았네.” 하였는데 이는 절[寺]을 말한 것이다.
♣ 현관[賢關]현자(賢者)의 경지에 통하는 관문이란 뜻으로, 전하여 학문과 덕행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또는 태학(太學)의 뜻으로도 쓰인다.
♣ 현관동규벽[賢關動奎壁]문운(文運)이 열리었음을 뜻함. 규성(奎星)은 문장(文章)을 주관하고, 벽성(壁星)은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하므로 이른 말이다.
♣ 현관폐자운[玄關閉子雲]현관은 집의 문을 말하고, 자운(子雲)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자이다. 그가 애제(哀帝) 때에 두문불출하고 집에 꼭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 揚雄傳》
♣ 현괘[礥卦]양기(陽氣)가 아주 약해서 뚫고 나오려고 해도 나오지 못하는 괘상. 《太玄經 礥》
♣ 현구[玄駒]개미의 별칭. 깜깜한 땅속을 치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현구[玄龜]수경(水經) 낙수(洛水) 주(注)에 “황제(黃帝)가 동으로 하수(河水)를 순행하여 낙수를 지나면서 단(壇)을 갖추고서 벽(璧)을 물에 넣고, 하수에서 용도(龍圖)와 낙수에서는 구서(龜筮)를 받았는데 적문(赤文) 전자(篆字)였다.” 하였음.
♣ 현국[顯國]장신(張紳)의 자(字)이다.
♣ 현궁[玄宮]제왕의 분묘(墳墓)를 뜻하는 말이다. 임금이나 왕후의 재궁(梓宮)을 묻는 광중(壙中)을 말한다.
♣ 현규[玄圭]검은 옥으로 만든 규벽(圭璧). 우(禹)가 치수를 끝내고 그 성공을 순(舜)에게 고하면서 예물로 올린 규벽. 《書經 禹貢》
♣ 현규[玄圭]우 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 바친 검은 색 홀[圭].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우임금은 현규를 바치고 성공을 고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하였다.
♣ 현기[蠉蚑]꿈틀거리는 벌레의 모양으로 고전(古篆)의 자획(字畫)을 가리킨 것이다.
♣ 현기[玄機]현기는 심오하고 미묘한 기틀을 말한다.
♣ 현기련[蚿夔憐]가까이 지내며 서로 돕는 것을 비유한 말. 현은 발이 백여개나 달린 벌레의 이름이고, 기는 발이 하나만 달린 짐승의 이름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기는 현을 부러워한다.[夔憐蚿]"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녀[玄女]전설에 나오는 천상(天上)의 선녀(仙女)로, 황제(黃帝)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쳐 주어 치우(蚩尤)를 제압하게 했다 한다. 《史記 五帝本紀》
♣ 현노[賢勞]혼자서만 나랏일에 고생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하게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 현노철련여[賢路輟連茹]군자 한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현재(賢才)가 모여드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 초구(初九)에 “띠풀의 뿌리를 뽑듯 동지들이 모여드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征 吉]”하였다.
♣ 현단[玄壇]천단(天壇)과 같은 말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壇)을 이름.
♣ 현단아양금[絃斷峨洋琴]자신을 알아주던 친구가 죽었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鐘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하였다.
♣ 현담[玄談]심묘(深妙)한 이야기란 뜻으로, 즉 황로(黃老)의 도(道)를 말한다. 이백(李白)의 시에 “청론은 손뼉을 치게 하는데, 현담에 또다시 절도하누나.[淸論旣抵掌 玄談又絶倒]" 하였다.
♣ 현당[玄堂]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문선(文選) 사조(謝眺) 제경황후애책문(齊敬皇后哀策文)에 “푸른 장막을 언덕에 폈으니 현당의 사립문이 열렸구나.” 하였다.
♣ 현대[玄臺]현대는 황천과 같은 말이다.
♣ 현덕[玄德]삼국 시대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의 자. 그는 제갈량(諸葛亮)을 초빙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몸소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를 남겼다.
♣ 현덕[玄德]서경(書經) 순전에, “현(玄)한 덕이 요임금께 들리다[玄德升聞].” 하였음.
♣ 현덕류우환[玄德類虞鰥]우순(虞舜)이 홀아비로 있을 때에 그윽하고 미묘한 덕[玄德]이 요(堯) 임금에게 알려져서 딸을 주고 벼슬을 주었다.
♣ 현덕실저[玄德失箸]현덕은 삼국 시대 촉(蜀) 나라 유비(劉備)의 자이다. 조조(曹操)가 천하 영웅으로는 자신과 유비밖에 없다고 하자, 유비가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그때 마침 천둥이 울리자 유비가 조조에게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해명하였다고 한다. 《蜀志 先主劉備傳》
♣ 현도[玄道]노장학(老莊學)을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1장에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 하였다.
♣ 현도[玄度]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산택(山澤)에서 노닐기를 매우 좋아하고, 청담(淸談)을 즐겼던 동진(東晉)의 명사 허순(許詢)의 자(字)이다.
♣ 현도[玄都]현도는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 현도관[玄都觀]중국 협서성(峽西省) 장안현(長安縣) 숭녕방(崇寧坊)에 있던 수ㆍ당(隋唐)시대 도관(道觀)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문장가 유우석(劉禹錫)이 즐겨 놀았던 곳이라 한다. 유우석이 그곳에서 간화시(看花詩)를 읊었음. 장안지(長安志)에 “수 나라가 장안 옛 성에서 이곳으로 통도관(通道觀)을 옮기고 현도(玄都)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음.
♣ 현도국[懸渡國]나라 이름. 서양잡조(西陽雜俎) 경이(境異)에 “오모산(烏耗山) 서쪽에 현도국이 있는데 길이 험하여 줄을 타야만 넘어갈 수 있다.” 하였다.
♣ 현도단[玄都壇]신선들이 수련(修鍊)하는 단(壇). 현도(玄都)에는 반고진인(盤古眞人)ㆍ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원성모(太元聖母)가 있다 한다. 《枕中記》
♣ 현도도수[玄都桃樹]현도는 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관(觀) 이름인데,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 경사에 돌아와 보니, 현도관에 이전에 없던 복숭아나무를 한 도사(道士)가 새로 많이 심어 놓았으므로, 그 복숭아나무를 당시의 권신(權臣)들에 비유하여 풍자하는 뜻으로 시를 지었는바, 그 시에 “서울 거리 뿌연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 갔다 온다 말하네. 현도관 안에 있는 천 그루 복숭아나무는, 모두가 이 유랑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面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裹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도심지둔[玄度尋支遁]현도는 동진(東晉) 때의 명사였던 허순(許詢)의 자이고, 지둔(支遁)은 역시 동진 때 고승(高僧) 이름이다. 허순은 평소 산택(山澤)에 노닐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특히 고승 지둔과는 서로 친근하게 종유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현도종도춘[玄都種桃春]현도관은 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현도관에는 본디 아무런 꽃도 없었는데, 유우석(劉禹錫)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폄척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나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어느 도사(道士)가 현도관에 선도(仙桃)를 가득 심어 놓아서 꽃의 화려하기가 마치 붉은 놀[紅霞]과 같았으므로, 유우석이 꽃구경한 제군(諸君)에게 준 시에 “장안 거리 붉은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마다 꽃구경하고 돌아온다 하누나. 현도관 안의 복숭아나무 일천 구루는, 모두가 유량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동[玄同]물아(物我)의 차이가 없음을 이름. 노자(老子) 현덕(玄德)에 “자신의 빛을 부드럽게 하고 세속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현동이라 한다[和其光同其塵 謂之玄同].”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서로 의기가 투합함을 이른 말이다.
♣ 현동[玄童]이른 나이에 죽은 영특한 소년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동오(童烏)가 아홉 살 때에 태현경(太玄經)의 저술을 도울 정도로 총명했는데 그만 일찍 죽고 만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法言 問神》
♣ 현두자고[懸頭刺股]머리를 노끈으로 묶어 높이 걸어 잠을 깨우고 또 허벅다리를 찔러 잠을 깨운다. 학업에 매우 힘쓰는 것을 말한다.
♣ 현람[玄覽]형이상학(形而上學)적 탐구를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10장에 “마음을 씻고 현묘하게 관찰하여 하나의 오류도 없게끔 한다.[滌除玄覽 能無疵乎]”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현량[賢良]현량은 관리를 등용하는 하나의 과목이다.
♣ 현량책[賢良策]한 문제(漢文帝)가 조서(詔書)하여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문학(文學)ㆍ재력(材力)의 4과(科)를 두고, 재주 있는 선비를 들어서 차서를 따르지 않고 등용했다. 《漢書 文帝紀》
♣ 현려[縣黎]미옥(美玉)의 이름인데, 사기(史記) 범휴전(范睢傳)에 의하면 “주(周) 나라에는 지액(砥砨)이 있고, 송(宋) 나라에는 결록(結綠)이 있고, 양(梁) 나라에는 현려가 있고, 초(楚) 나라에는 화박(和朴)이 있었는데, 이 네 가지 보배는 천하의 명기(名器)가 되었다.” 하였다.
♣ 현려[懸黎]현려는 아름다운 옥(玉)의 이름.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양(梁) 나라에는 현려가 있고, 초(楚) 나라에는 화벽(和璧)이 있어 천하의 유명한 보물이 되었다.” 하였다.
♣ 현령동음어여회[玄齡同音於如晦]당태종 때에 두 사람이 같이 재상의 자리에 있어 합심하여 임금을 도왔다. 세상에서 어진 정승을 말할 때에는 방두(房杜)라 일컬었다.
♣ 현로[賢勞]혼자서만 나랏일에 고생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하게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 현로[玄老]자가 경숙(敬叔)인 신흠(申欽)의 호가 현옹(玄翁)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 현로탄[賢勞歎]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하늘 아래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땅이요, 그 땅 위에 사는 사람 모두 왕의 신하인데, 그 신하들 공평하게 고루 쓰지 않으시어, 나만 혼자 잘났다고 죽도록 일하누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있는데,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는 이 시가 “막비왕사 아독현로[莫非王事 我獨賢勞]”로 인용되어 있다.
♣ 현륭원[顯隆園]경기도 화성군(華城郡) 안룡면(安龍面) 화산(花山)에 있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이다.
♣ 현릉[玄陵]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이름. 현릉은 그의 능호(陵號).
♣ 현리[玄리]검은 용.
♣ 현매[俔妹]하늘의 누이동생에 비유할 만한 성덕(聖德) 있는 여인이란 뜻으로,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 태사(太姒)를 일러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대방에 자식 있으니 하늘의 누이에 비유하리로다[大邦有子 俔天之妹]”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명[玄冥]동신(冬神). 형살(刑殺)을 담당하는 북방(北方)의 신(神)으로 동장군(冬將軍)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 중동, 계동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보좌하는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수신(水神). 우사(雨師)라고도 한다.
♣ 현명[玄明]약의 이름.
♣ 현모양처[賢母良妻]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면서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
♣ 현무[玄武]별이름. 현무는 북방 현무에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의 일곱 별이다.
♣ 현무구진[玄武鉤陳]현무(玄武)는 북방을 가리키고, 구진(鉤陳)은 자미궁(紫微宮) 밖의 군대를 상징하는 별자리 이름으로, 대궐의 근위병(近衛兵)을 뜻한다.
♣ 현무칠숙[玄武七宿]북방의 일곱 별인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의 통칭 현무(玄武)는 거북으로 나타내며 북방의 태음신(太陰神)을 상징함.
♣ 현묵[玄黙]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몸소 현묵(玄黙)을 닦아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하는데, 현묵(玄黙)이란, 현묘(玄妙)한 도(道)를 묵묵히 생각하여 법령이나 군사를 너무 떠벌리지 않고 백성을 절로 교화되게 하는 것이다.
♣ 현문[玄門]현묘한 문(門)인데, 불가(佛家) 도가(道家)이다.
♣ 현보[縣譜]고을을 다스리는 데 대한 전가(傳家)의 비결을 뜻함. 남제(南齊) 때 부승우(傅僧祐)가 산음령(山陰令)으로 치적의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아들인 부염(傅琰) 또한 송 무제(宋武帝) 때에 무강령(武康令)ㆍ산음령(山陰令)을 지내면서 뛰어난 치적을 올려 백성들에게 부성(傅聖)이란 칭호를 받기까지 하여 부자(父子)가 모두 치적의 명성이 높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씨(傅氏)들에게는 치현보(治縣譜)가 있는데, 자손들이 서로 전하면서 남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七十》
♣ 현비[翾飛]가볍게 나는 모양.
♣ 현빈[玄牝]도가(道家)의 용어로, 새끼를 낳는 암컷, 즉 도(道)를 말한다.
♣ 현빈지신[玄牝之神]만물을 내는 도(道)를 말한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6장에 “골짜기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한다.” 하였다.
♣ 현산[峴山]현산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 남쪽 3리 지점에 있는 산이다.
♣ 현산방공[峴山龐公]후한(後漢) 때 현산 남쪽에 은거하면서 유표(劉表)의 초청을 사절한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 현상[玄霜]신선(仙藥)이 먹는다는 불로장생의 선약.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선가(仙家)의 상약(上藥)에 현상ㆍ강설(絳雪)이 있다.” 하였다.
♣ 현상[玄裳]학(鶴)의 이칭(異稱)인 현상호의(玄裳鎬衣)의 준말. 현상호의는 곧 흑색의 상(裳)과 백색의 상의(上衣)라는 뜻이다.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학이 검은 치마 흰 저고리로 배를 스쳐 지나 갔다.” 하였다.
♣ 현상백[玄尙白]현(玄)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가리키면서 검다는 뜻을 내포하고, 상백(尙白)은 아직도 여전히 희다는 말인데, 양웅을 조롱한 이 말이 후대에는 공명(功名)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잘못 비평할 때 종종 쓰이게 되었다. 《漢書 揚雄傳下》
♣ 현상우객[玄裳羽客]학(鶴)의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 현석[玄石]천일주(千日酒)를 마시고 잠이 들어 삼년상까지 치룬 후에야 깨어났다는 사람.
♣ 현석천년환부성[玄石千年喚不醒]중산(中山) 사람 적희(狄希)가 한 번 마시면 천 일 동안 깨지 않는 술을 만들었는데, 유현석(劉玄石)이 이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나머지 가족들에 의해 무덤 속에 매장까지 되었다가 천 일 만에 깨어났던 고사가 전한다. 《博物志, 搜神記》
♣ 현선야당부[玄蟬惹螗斧]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뒤에 올 재화(災禍)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매미는 이슬에만 정신이 팔려 사마귀가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그 사마귀 역시 황작(黃雀)이 노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螳螂捕蟬 黃雀在後”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莊子 山木ㆍ說苑 正諫》
♣ 현섬호[玄纖縞]현(玄)은 검은 비단이며, 섬(纖)은 세로는 검은 실로 가로는 흰 실로 짠 비단이며, 호(縞)는 흰 비단이다.
♣ 현성[玄成]현성은 당 태종(唐太宗)의 명신(名臣) 위징(魏徵)의 자이다.
♣ 현성작경[玄成作鏡]현성은 당(唐) 나라 위징(魏徵)의 자(字). 위징이 죽자 당 태종(唐太宗)이 탄식하기를 “동(銅)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衣冠)을 바룰 수 있고, 옛것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興亡)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得失)을 밝힐 수 있다. 짐이 항상 이 세 거울을 보화로 하여 과실을 방지하였는데 지금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졌다.” 하였다. 《唐書 魏徵傳》
♣ 현송[絃誦]현송은 금슬(琴瑟)을 탄주(彈奏)하면서 낭송하는 것으로 학업의 일종이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봄에는 시를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탄다.” 하였다.
♣ 현수[絃手]양민(良民)이나 천민(賤民)중에서 음악을 아는 여자를 통칭하는 말.
♣ 현수[峴首]양양(襄陽)의 별칭이다. 타루비(墮淚碑)로 유명한 진(晉) 나라 양호(羊祜)의 현산비(峴山碑)가 양양현(襄陽縣) 남쪽의 현수산(峴首山)에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현수갈[峴首碣]양양(襄陽)의 현산(峴山). 양호(羊祜)를 추모하여 세운 비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며 양호의 덕을 추모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므로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 현수공조고[峴首空弔古]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현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 비감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우주가 있고부터 이 산이 있었을 터이고 지금 우리처럼 이 산에 오른 이 가운데 현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인몰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이를 생각함에 비감이 든다.” 하였다. 《太平御覽 荊州圖記》
♣ 현수교[賢首敎]불교의 한 종파(宗派)로 화엄종을 말한다. 중국의 중 현수(643~712)에 의하여 크게 이루어진 종파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 현수금릉[玄叟金陵]현수는 상촌의 별호가 현옹(玄翁)이므로 상촌을 가리키고, 금릉은 경기 김포(金浦)의 옛 이름이다. 곧 상촌이 계축옥사로 삭탈관작되어 김포의 선영 밑으로 돌아와 계부(季父) 광서(光緖)의 두 칸짜리 농가에서 하루암(何陋菴)이라 편액을 걸고 거처하였던 것을 이른다.
♣ 현수단갈[峴首短碣]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었을 때의 정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백성들이 현수산(峴首山)에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는데, 그 비석을 바라보고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羊祜傳》
♣ 현수비[峴首碑]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을 다스릴 적에 현수산에 올라가 노닐면서 “우리처럼 이곳에 와서 노닐던 걸출한 인물들이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면 슬퍼지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을 하며 감개를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뒤에 백성들이 양호를 사모하여 이곳에 세운 비석을 보고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는 별칭이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羊祜傳》
♣ 현수풍류[峴首風流]지금 호북성양양현(襄陽縣) 남쪽에 있는 산인데, 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오(吳) 나라의 접경인 양양을 진수(鎭守)할 때 이 산에 올라 놀았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이 그 자리에 비를 세우니 보는 자가 모두 슬프게 울어 타루비(墮淚碑)라 하였다.
♣ 현순[懸鶉]메추리는 꼬리 부분에 유독 털이 없어 마치 옷이 짧거나 갈갈이 찢어진 것과 같으므로, 무릇 해진 옷을 현순이라 한다.
♣ 현안[玄晏]현안은 진(晋) 나라 때의 은사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인데, 그는 조정의 소명(召命)이 수없이 내렸으나 한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일생 동안 풍비(風痺)로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집이 가난하므로 항상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 글만 읽어 백가서(百家書)에 다 통했다고 한다. 일찍이 좌사(左思)를 위해 삼도부(三都賦)의 서문(序文)을 지어 주자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뛰어올랐다는 고사가 전한다. 《晋書 卷五十一》
♣ 현안간서연유병[玄晏看書緣有病]현안은 진(晉) 나라 때 은사(隱士)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인데, 그는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뒤에는 풍질(風疾)까지 얻어 신음하면서도 끝내 책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晉書 卷五十一》
♣ 현안병[玄晏病]남이 부탁해 오는 비평이나 시문을 써 주며 저술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자호(自號)이다. 일찍이 좌사(左思)의 삼도부(三都賦) 서문을 써 주자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급등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1》
♣ 현안선생[玄晏先生]현안은 진(晉) 나라 황보밀(黃甫謐)의 호.
♣ 현안일생장와병[玄晏一生長臥病]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황보밀이 풍비(風痺)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으면서도 침식(寢食)을 잊고 독서하여 서음(書淫)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51》
♣ 현안자[玄晏子]진(晉) 나라의 은자(隱者)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고상한 뜻을 지니고 학문에 종사하였는데, 무제(武帝) 때 여러 번이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주경야독하며 백가(百家)의 전적에 통효하였고, 침정과욕(沈靜寡欲)한 성품으로 고상한 뜻을 지녔었다 한다. 《晉書 卷51》
♣ 현안저문[玄晏著文]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임. 저술에 뜻을 두어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고 글만 지었으며, 만년에 풍병을 앓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의 저술은 제왕세기(帝王世紀)ㆍ열녀전(列女傳)ㆍ고사전(高士傳)ㆍ갑을경(甲乙經)등이 있다. 《晉書 卷五十一 皇甫謐傳》
♣ 현안포질[玄晏抱疾]현안은 진(晉) 나라 조나(朝那) 사람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평생 동안 저술에만 종사하여 제왕세기(帝王世紀)ㆍ열녀전(列女傳)ㆍ고사전(高士傳)ㆍ갑을경(甲乙經) 등을 지었는데, 만년에 풍병을 앓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五十一 皇甫謐傳》
♣ 현애석[懸艾夕]5월 5일 밤. 옛날 초(楚) 나라 풍속에 5월 5일이 되면 모두 어울려 백초(白草)를 밟고 쑥을 캐서 사람처럼 만들어 문 위에다 매달고는 그것으로 독기(毒氣)가 침범 못하도록 액막이를 삼았음. 《荊楚歲時記》
♣ 현어[懸魚]생선을 달아매는 것, 곧 청백한 관리를 가리키는 말. 후한(後漢)의 양속(羊續)이 태수(太守)로 있을 때 어떤 이가 생선을 바쳤는데, 양속이 이를 먹지 않고 달아 두면서 관리들을 경계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이다. 《後漢書 羊續傳》
♣ 현언[玄言]현언은 현묘한 말이란 뜻으로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말을 일컫는다.
♣ 현영[玄英]겨울의 별칭.
♣ 현영[顯榮]입신하여 번영함, 이름을 날리다.
♣ 현옹[玄翁]신흠(申欽)의 호이다.
♣ 현옹[玄翁]현옹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이다. 영조 때의 문신으로 그림에도 능한 조선 후기 문인화(文人畵)의 대표자이다.
♣ 현요[炫曜]밝게 비침. 빛나다.
♣ 현운[玄雲]검은 구름.
♣ 현원[玄元]현원황제(玄元皇帝)의 준말로, 당(唐) 나라 때에 노자(老子)에게 올린 존호(尊號)로서 즉 노자를 가리킨다. 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에, “開元二十年正月己丑 詔兩京及諸州各置玄元皇帝廟一所…… 天寶二年正月丙辰 加玄元皇帝 尊號大聖祖三字”라고 보임.
♣ 현원궁[玄元宮]당대(唐代)에 도교(道敎)를 중히 여긴 나머지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받들고 각처에 사당을 세웠는데, 서울의 사당은 현원궁(玄元宮)이라 하고 각 지방의 사당은 자극궁이라고 불렀다.
♣ 현원성조[玄元聖祖]당(唐) 나라는 노자(老子)를 숭봉(崇奉)하여 시조(始祖)로 삼고 높여서 현원황제라 하였음.
♣ 현원태상군[玄元太上君]노자(老子)를 높인 말이다.
♣ 현위[弦韋]현은 활시위이고 위는 다룬 가죽인데 활시위는 팽팽하고 다룬 가죽은 느슨한 것이므로,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서문표(西門豹)는 본디 성미가 급한 때문에 느슨한 가죽을 몸에 찼고,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동안우(董安于)는 본디 성미가 느슨한 때문에 팽팽한 활시위를 몸에 차고서 각각 자신을 반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 《韓非子 觀行》
♣ 현의[玄衣]제사를 지낼 때 입는 검은색 옷인데, 여기서는 검은 학을 뜻한다.
♣ 현익돈장[玄黓敦牂]고갑자(古甲子)에 현익은 임(壬), 돈장은 오(午)에 해당되어 임오년을 뜻한다.
♣ 현인[眩人]현인은 요술쟁이이다.
♣ 현인주[賢人酒]맑은 술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한 술을 ‘현인(賢人)’이라 하는데, 위(魏) 나라 때에 금주령이 내려 주객(酒客)들이 쓴 은어(隱語).
♣ 현재[玄宰]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였던 명(明)의 동기창(董其昌)의 자(字).
♣ 현재[玄齋]영조(英祖) 때의 화가(畫家)인 화가인 심사정(沈師正)을 가리킨다.
♣ 현재[玄宰]진재(眞宰)와 같은 말임.
♣ 현전추옥급[玄筌抽玉笈]도가의 서적을 읽는다는 것임. 현전은 현묘한 말을 적은 책으로 도가서를 말하고, 옥급은 옥으로 장식한 책상자로 진기한 책을 담아 놓은 상자에 대한 미칭임.
♣ 현절릉[顯節陵]후한 명제(後漢明帝)의 능호임.
♣ 현절사[顯節祠]병자호란 때 척화(斥和)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등 삼학사(三學士)를 제향하는 사우임. 광주(廣州)에 있음.
♣ 현정[懸旌]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심신(心神)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을 현정(懸旌)이라 한다.
♣ 현정[玄亭]현정은 초현정(草玄亭)의 준말로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칩거하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한 곳이다. 양웅이 술을 좋아하면서도 집이 가난하여 마시지를 못했는데, 가끔 호사자(好事者)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글자를 묻곤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漢書 卷87下 揚雄傳》
♣ 현정[玄亭]호가 현헌(玄軒)인 신흠을 가리킴.
♣ 현제[玄帝]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신(冬神)인 현명(玄冥)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 현제우의[玄帝羽儀]겨울 귀신의 위엄스러운 덕(德)을 말한다. 현제(玄帝)는 북방을 주관하는 귀신으로 전욱(顓頊)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전욱이 도를 얻어 현궁(玄宮)에 거처하고 있다.” 하였다.
♣ 현종[玄蹤]현종은 심오한 자취를 이름.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이로(二老)의 현종을 밟아오르도다[躡二老之玄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주[玄珠]검은 구슬이란 뜻으로, 즉 도(道)의 본체(本體)를 일컫는 말인데, 옛날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의 북쪽에서 유람하다가 현주를 잃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현주[玄酒]고대(古代) 제사에 사용하던 청수(淸水)를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의 “현주는 실에 있고 예잔은 호에 있다.[玄酒在室 醴醆在戶]”는 대목에 대한 공영달(孔潁達)의 소(疏)에 “현주(玄酒)는 물이다. 빛이 검기 때문에 현(玄)이라 하는데, 태곳적에는 술이 없어 물로 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현주라 한다.” 하였다.
♣ 현주[玄洲]북해(北海) 가운데 있다는 섬 이름인데, 여기에는 신선이 살고 금지옥초(金芝玉草)가 많이 있다고 한다.
♣ 현주[玄酒]소옹(邵雍)의 동지시(冬至詩)에 “……현주는 맛이 바야흐로 담담하고 대음은 소리가 정히 드물어라……[玄酒味方淡 大音聲正希]" 한 데서 보이는데 현주는 곧 찬물[冷水]을 말한다.
♣ 현주[玄洲]조찬한(趙纘韓)의 호이다.
♣ 현진[玄津]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의 바다를 말한다.
♣ 현진자[玄眞子]당(唐) 나라 장지화(張志和)가 남포위(南浦尉)로 좌천되어 있다가 다시 소환되었으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강호에서 낚시와 술을 즐기면서 자칭 연파주도(煙波酒徒)라 하는 한편, 현진자(玄眞子)라는 책을 짓고 자호를 이에 따라 현진자라 하였다. 청약립녹사의(靑蒻笠綠簑衣)라는 사(詞)를 지었다.
♣ 현책[玄冊]성균관(成均館)의 정록청(正錄廳)에 당직(當直)한 관원이 당시의 정사(政事) 중에서 중요한 사항을 기록하여 두는 책.
♣ 현천장[玄川丈]현천은 원중거(元重擧)의 호이며 장(丈)은 높임말이다.
♣ 현철유차액사신[賢哲猶嗟厄巳辰]후한(後漢) 정현(鄭玄)의 꿈속에 공자가 나타나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辰年)이요, 내년은 사년(巳年)이다.”라고 알려 주었는데, 정현이 꿈을 깨고 나서 “진(辰)은 용(龍)이요 사(巳)는 뱀[蛇]이니, 용사(龍蛇)의 해에는 현인이 탄식한다고 하였다.” 하고는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그해 6월에 죽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傳》
♣ 현초[玄草]한(漢) 나라 학자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한 것을 말한다.
♣ 현친[顯親]효경(孝經)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하라.” 하였다.
♣ 현탑[懸榻]한(漢) 나라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객(客)을 접하지 않고 한 탑(榻)을 만들어서 오직 높은 선비인 서치(徐穉)가 오면 그 탑을 내리어 앉게 하였다가 서치가 돌아가고 나면 다시 그 탑을 달아 두었다 한다. 《後漢書 徐穉傳》
♣ 현택[玄宅]현택은 묘지의 별칭이다.
♣ 현토[玄兎]한사군(漢四郡)의 하나였던 현도군(玄兎郡)을 말한다.
♣ 현포[懸圃]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다는 신선의 거소(居所)이다.
♣ 현포[玄圃]곤륜산(崑崙山) 정상의 신선이 사는 곳으로, 다섯 군데의 금대(金臺)와 12개의 옥루(玉樓)가 있는데,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해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 현포[懸匏]현포는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는 뒤웅박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박이더냐. 어찌 한 곳에 매달려 있어 음식도 먹지 못하겠느냐.[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이라는 말이 있다.
♣ 현포원[玄圃園]곤륜산에 있다는 선경(仙境)을 말하는데, 태자의 처소를 말하기도 한다.
♣ 현풍[玄風]심원(深遠)한 도(道). 도가의 청허사상(淸虛思想)을 말함.
♣ 현하[懸河]말이나 문장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현하는 하수(河水)를 달아 놓았다는 뜻으로 입에서 말이 줄줄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일컫는다. 진(晉)의 왕연(王衍)은 매양 말하기를 “곽상(郭象)의 말을 들으면 하수를 달아 놓고 물을 쏟듯하여 끊기지 않는다.” 하였다. 《晉書 卷五十 郭象傳》
♣ 현하구변[懸河口辯]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말. 현하웅변(懸河雄辯)
♣ 현하지변[懸河之辨]강물이 쏟아져 흐르는 듯 한 말솜씨. 거침없이 말을 잘함
♣ 현학[玄鶴]진(晉)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조수(鳥獸)에 “학이 1천 년 지나면 푸른 색이 되고 2천 년 지나면 검은 색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이른바 현학(玄鶴)이다.” 하였다.
♣ 현학략주회[玄鶴掠舟回]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마침 외로운 학이 강을 가로질러 동으로 오는데, 날개는 수레바퀴 같고 검은 치마에 흰 비단 옷차림으로 길게 울며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날아가네.” 하였다.
♣ 현행[顯行]밝게 떠가다. 운행하다.
♣ 현헌[玄軒]신흠(申欽)의 호이다.
♣ 현헌자[玄軒子]현헌은 상촌 신흠의 당호(堂號)로 상촌을 뜻함.
♣ 현현[泫泫]눈물이 흐르는 모양, 이슬이 맺히는 모양
♣ 현현[俔俔]두려워하는 모양
♣ 현현[嬛嬛]정숙한 모양.
♣ 현현형우거[鞙鞙珩瑀琚]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값싼 모과를 나에게 주기에 값진 태옥으로 보답하노라[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서로의 우호(友好)를 나타낸 말이다.
♣ 현호[懸弧]생일을 말한다. 옛날에 무(武)를 숭상하여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왼쪽에 활을 매달아 놓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禮記 內則》
♣ 현호사방심[懸弧四方心]호는 뽕나무로 만든 활인데, 옛날 사내아이를 낳으면 뽕나무 활 여섯과 쑥대 화살 여섯으로 천지 사방에 하나씩을 쏘아서, 그 아이가 장래에 천지 사방에 공업(功業)을 세우기를 기원했던 데서 온 말이다. 또 활을 문 위에 걸어놓는 것은 아이가 장래에 반드시 활을 쓸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 현호수적[懸瓠樹績]당 헌종(唐憲宗) 때 이소(李愬)가 눈 오는 밤에 오원제(吳元濟)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唐書 卷154》
♣ 현호일[懸弧日]남자의 생일을 뜻함. 고대의 풍속에 집안에 남자가 태어나면 문 왼편에 활 하나를 걸어두었다 한다.
♣ 현화[玄花]대부(大夫)가 허리에 띠는 잡대(雜帶)의 이름이다.
♣ 현화[玄花]현화는 눈[目]을 말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시(貞觀吟詩)에 “화살에 눈이 빠질 줄 어떻게 뜻했으랴[那知玄花落白羽]" 하였는데, 이것은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칠 때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백우전(白羽箭)을 맞고 눈이 빠진 것을 말한다. 《東人詩話》
♣ 현화낙백우[玄花落白羽]당 태종이 친히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갔는데, 당서(唐書)엔 숨겨 기록이 없으나, 우리 나라에서 전하는 말로는, “안시성주 양만춘([梁]楊萬春)이 쏜 화살이 태종의 눈을 맞혔다.” 하였는데, 현화(玄花)는 눈이고, 흰 깃[白羽]은 백우전(白羽箭) 곧 살[矢].
♣ 현화백우[玄花白羽]화살에 맞아 눈이 빠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시(貞觀吟詩)에 ‘주머니 속에 한 물건 뿐이라 하니, 눈이 화살에 떨어진 줄을 어찌 알겠나?[自謂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였다.
♣ 현화사[玄化寺]황해도 우봉현(牛峰縣[靈鷲山])에 있음.
♣ 현황[玄黃]채색 비단 등의 예물을 가리킨다. 《書經 武成》
♣ 현효[玄枵]이아(爾雅) 석천(釋天)에, “玄枵虛也”라 한 그 주에, ‘정북방에 있는 별의 이름이다.’고 했음. 즉 허성(虛星)의 별칭.
♣ 현훤[懸貆]시경(詩經) 위풍(魏風) 벌단(伐檀)에 “애써 뛰고 달려 사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네 집 뜰에 오소리가 매어 달릴꼬.[不狩不獵 胡瞻爾庭有懸貆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저자 자신이 사냥을 않고도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 현휘[玄暉]현휘는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脁)의 자(字)이다.
♣ 혈[穴]삼(蔘)을 사들일 수 있도록 허가하는 문서임.
♣ 혈구[穴口]강화(江華)의 고호.
♣ 혈구[絜矩]혈구지도(絜矩之道)의 준말. 혈구는 표준으로 잰다는 뜻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법.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덕상의 법도를 말한다. 대학(大學)에 “윗사람에게 내가 싫었던 것이면 나의 마음을 미루어 아랫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이면 나의 마음을 미루어 윗사람에게 베풀지 않아야 하니 이것을 혈구의 도(道)라 한다.” 하였는데, 구(矩)란 네모꼴의 표준인바 사람의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 혈구지도[絜矩之道]나의 척도로 남을 생각하여 바른 길로 이끄는 도덕 규범을 말한다. 《大學 治國平天下章》
♣ 혈규주중도[穴竅珠中度]공자(孔子)가 구곡보주(九曲寶珠)를 얻어서 실을 꿰려고 하나 꿸 수가 없었는데 상간(桑間)의 여인이 구멍에 꿀을 발라 개미로 하여금 꿰게 하라고 가르쳤다.
♣ 혈사[血射]은(殷) 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서 나무에 걸어 두고 활로 쏘아 터뜨리고는, “내가 하늘과 싸워서 이겼다.” 한 일이 있다.
♣ 혈의탁정괴[穴蟻託庭槐]인생이 도시 꿈속의 일이라는 뜻이다. 당(唐) 나라 순우분(淳于棼)이 괴목(槐木)의 남쪽 가지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꿈을 깨어 괴목 아래를 보니 큰 개미굴이 있었더라는 이른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異聞集》
♣ 혈지승[穴紙蠅]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선을 공부하는 사람을 마치 광명(光明)을 찾는 파리가 창문을 바른 종이 한 장을 뚫으려고 애쓰는 데에 비유하였다.
♣ 혈혈[泬泬]공허한 모양
♣ 혈혈[孑孑]장구벌레, 모기의 유충, 짧음, 작음
♣ 혈혈단신[孑孑單身]혈혈(孑孑)은 고단하게 외로이 서 있는 모양을 가리킴. 그러므로 혈혈단신이라 하면 의지할 곳 없는 홀몸을 말함.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홀홀단신으로 틀리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 혐로[嫌老]늙은 것을 혐오함.
♣ 혐중육[嫌重肉]한 무제(漢武帝) 때의 재상이던 공손홍은 자봉(自奉)에 검소하여 조석 때마다 고기를 한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史記 平津侯主父列傳》
♣ 혐체[嫌遞]벼슬아치가 상관과 선대(先代) 때의 혐의가 있음으로 해서 체직되는 일.
♣ 협[脅]협록(脅鹿). 우사(雨師)로서 팔족양두(八足兩頭)인 사슴의 형체를 지님.
♣ 협가[鋏歌]칼자루를 치면서 부르는 노래로, 재주를 가지고서도 등용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노래이다. 제(齊) 사람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이 되었으나 중용되지 못하였다. 이에 풍환이 세 번이나 자기의 칼자루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첫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밥상에 고기가 없구나.” 하고, 두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외출함에 수레가 없구나.” 하고, 세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살 집이 없구나.” 하였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 협객행[俠客行]협객에 대해 지은 행(行)은 행. 시체(詩軆)의 하나.
♣ 협견첨소[脅肩諂笑]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어깨를 옹크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에 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脅肩諂笑 病于夏畦]”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 협광[挾纊]윗사람이 보살펴 주고 격려하므로 추운 것을 잊는다는 말이다. 좌전(左傳) 선공12(宣公十二)에 “초자(楚子)가 소(蕭)를 치는데, 신공 무신(申公巫臣)이 말하기를 ‘군사들이 매우 춥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삼군(三軍)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격려니, 군사들이 모두 솜을 낀 듯하였다.” 한다.
♣ 협굴[俠窟]협객의 소굴.
♣ 협류[峽纍]산골짜기에 갇힌 사람이란 뜻이다.
♣ 협률랑[協律郞]협률랑은 음률(音律)을 조협(調協)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다.
♣ 협리서호[篋裏西湖]협리는 협중집(篋中集), 서호는 서호백영(西湖百詠)을 말하는데, 협중집은 당(唐) 나라 원결(元結)이 찬한 것이고, 서호백영은 송(宋) 나라 동사고(董嗣杲)가 찬한 칠언(七言) 시집(詩集)이다. 심천운(沈千運)ㆍ왕계우(王季友)ㆍ간적(干逖)ㆍ맹운경(孟雲卿)ㆍ장표(張彪)ㆍ조미명(趙微明)ㆍ원이(元李)의 시를 수록하였다. 《唐書 元結傳》
♣ 협마[夾馬]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송 태조 조광윤이 태어난 곳이다.
♣ 협비선[挾飛仙]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날으는 신선을 끼고 놀았으면[挾飛仙而遨遊].”라는 말이 있다.
♣ 협사행[狹邪行]악부(樂府)의 이름. 세로(世路)가 험협(險狹)하고 사벽(邪僻)하여 정직한 선비가 용납되지 못함을 노래한 것이다.
♣ 협상모[頰上毛]문장이나 그림에 손을 한 번 대어 정신이 번쩍 들게 잘 됨을 말한다. 진서(晉書) 고개지전(顧愷之傳)에 “일찍이 배해(裵楷)의 초상을 그리고 뺨 위에 털 세 개를 더 그리니 보는 사람들이 자못 신명하게 된 것을 느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협시사한월[挾矢射漢月]흉노족이 침입해 오는 것을 말한다. 흉노족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이 차고 지는 데에 따라서 하는데, 달이 찰 때면 나와서 싸우고 달이 이지러질 때면 군사를 물린다.
♣ 협신[浹辰]자일(子日)에서 해일(亥日)까지라는 말로, 12일을 뜻한다.
♣ 협안[夾岸]강가 언덕을 끼고.
♣ 협액의초북해장[挾腋疑超北海長]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다.” 하였다.
♣ 협야[俠斜]진달래라는 말이다.
♣ 협야[夾野]협야는 인황의 시조인 신무 천황(神武天皇)으로, 이때에 이르러서 대화주(大和州)에 들어가서 중적(衆賊)을 소탕한 뒤 천황이라 일컫고 국도를 정하였다.
♣ 협원[峽猿]죽은 자식에 대한 정으로 인해 애가 끊어질 듯 슬프다는 뜻이다. 협원(峽猿)은 무협(巫峽)의 원숭이로,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에, “환공(桓公)이 삼협(三峽)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부오(部伍)의 군사 가운데 새끼 원숭이를 잡은 자가 있었는데, 어미 원숭이가 강가를 따라오면서 백 리를 가도록 떠나지 않고 따라오다가 드디어 배 위로 뛰어 올라왔는데, 배에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죽었다. 이에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환공이 이 말을 듣고는 노하여서 그 군사를 내쫓았다.” 하였다.
♣ 협제씨[夾漈氏]협제는 산 이름인데, 송(宋) 나라 정초(鄭樵)가 여기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협제선생이라 칭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六》
♣ 협제중화[協帝重華]순(舜) 임금을 찬미하는 말인데, 소(疏)엔, “순(舜)이 요(堯)를 이어 그 문덕(文德)을 거듭 빛낸다.” 했다.
♣ 협주[挾鑄]관청에 소속되어 관전(官錢)을 주조(鑄造)하는 장인(匠人)들이 관청의 허락을 받아 별도로 돈을 주조하는 것을 말함. 대개 관(관)에서 용광로 10개를 설치하고서 5일 동안은 관전을 주조하고, 하루는 그 장인들로 하여금 물력(物力)을 준비하여 자체적으로 돈을 주조하도록 허락하고 있는데, 이것을 협주(挾鑄)라고 한다.
♣ 협진궁[挾秦弓]진나라에서 활을 만들다.
♣ 협탄[鋏彈]전국(戰國) 때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 풍환(馮驩)이 제 빈궁한 신세를 탄식하며, 검(劍)의 손잡이[鋏]를 타면서 노래하기를, “긴 칼아, 돌아갈지로다. 밥먹을 제 생선도 없네.”라고 하였다.
♣ 협파개[愜爬疥]한유(韓愈)의 시에, “번거로움을 덞이 종기를 째는 것 같아라. 옴 오른 데를 긁듯이 정말 기분이 시원하다네.[祛煩類決癰 愜興劇爬疥]”하였다.
♣ 협협[悏悏]두려워서 숨을 죽이는 모양
♣ 협협[浹浹]축축하게 젖는 모양
♣ 협협[歙歙]두려워하는 모양
♣ 협협균박새[挾筴均博塞]장(臧)과 곡(穀) 두 사람이 양을 먹이다가 둘 다 양을 잃었는데, 장은 책을 들고 독서에 여념이 없었고, 곡은 도박을 즐기고 놀았음. 《莊子 騈拇》
♣ 형[兄]시인(詩人)들이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쓰는데, 이것은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 시(詩)에, “산번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다[山礬是弟 梅是兄].”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형[荊]우공구주(禹貢九州)의 하나. 지금의 호남(湖南)의 땅. 전(轉)하여 초(楚)나라의 땅.
♣ 형[衡]형은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서 천문 관측 기구이다. 《書經 虞書 舜典》
♣ 형가[亨嘉]역(易) 건괘(乾卦)의 “형은 훌륭한 사람들의 모임이다.[亨者 嘉之會也]"에서 나온 말로서 우수한 인물들이 일시에 성대하게 모이는 것을 비유한 것임.
♣ 형가[荊軻]형가는 전국 때 제(齊) 나라 사람. 연 태자(燕太子) 단(丹)을 위하여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음. 연태자가 진시황을 죽이려고 자객(刺客) 형가를 보내며, 신물(信物)로 독항(督亢) 땅을 바치겠다고 지도(地圖)를 함에 넣어 보내었는데, 형가가 지도 밑에 감추었던 비수(匕首)로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실패하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연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 형강[荊江]형강은 금강(錦江)의 별칭이다.
♣ 형갱[鉶羹]형갱은 경건하게 차린 제사 음식을 뜻한다.
♣ 형경[荊卿]형경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 형가(荊軻)의 존칭인데, 진시황(秦始皇)의 녹로검(鹿盧劍)에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 도연명집(陶淵明集) 4권에 ‘영형가(詠荊軻)’라는 오언시(五言詩)가 전한다.
♣ 형경분월계[衡鏡分月桂]형경(衡鏡)은 과거에서 인재를 뽑기를 저울과 거울처럼 평(平)하고 밝게 한다는 것이며, 월계는 과거에 오르는 것을 달 가운데 계수꽃을 꺾는 데 비한다.
♣ 형경전[荊卿傳]형경은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말하며, 그의 전은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보인다.
♣ 형고[滎皐]형양(滎陽)과 성고(成皐). 모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크게 싸우던 곳.
♣ 형공[荊公]형공은 송(宋) 나라 때의 재상으로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진 왕안석(王安石)을 말한다.
♣ 형군문[邢軍門]임진란 때 우리나라에 왔던 명 나라 장수 형개(刑玠)이다.
♣ 형극[荊棘]가시덩굴로, 소인들에 비유한 말.
♣ 형극동타영[荊棘銅駝影]나라가 망한 것을 탄식한 말이다. 동타(銅駝)는 동(銅)으로 만든 낙타(駱駝)를 말하는데, 동진(東晉) 때 색정(索靖)이 매우 선견지명이 있어 천하가 곧 어지러워질 것을 예측하고는 낙양 궁문(洛陽宮門) 앞에 서 있는 동타를 가리키면서 “얼마 후에는 가시숲 속에 섰을 너를 보겠구나.” 하며 탄식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索靖傳》
♣ 형극매동타[荊棘埋銅駝]세상이 난세라는 말. 진(晉)의 색정(索靖)이 선견지명이 있었는데, 앞으로 난세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낙양(洛陽)의 궁문 앞에 세워진 구리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네가 가시밭 속에 있게 되는 꼴을 보겠구나.” 하였다는 것임. 《晉書 索靖傳》
♣ 형낭독서자[螢囊讀書子]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사에 나오는 차윤(車胤)을 가리킨다.
♣ 형담창화[荊潭唱和]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제4권 중의 형담창화시서(荊潭唱和詩序)에 의하면, 형남(荊南)의 복야(僕射) 배도(裴度)와 호남(湖南)의 양공(揚公)이 주고받은 시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라 하였다.
♣ 형둔[亨屯]형통과 곤액(困厄).
♣ 형등[螢燈]진서(晉書)에, “차윤(車胤)이 박학(博學)하였는데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구할 수 없어 여름철에는 반딧불을 잡아 사낭(紗囊)에 담고 밤새도록 글을 읽었다.”라고 보임.
♣ 형림[蘅林]산에 나는 두형(杜蘅)이라는 향초(香草)의 숲을 뜻한다.
♣ 형만[荊蠻]중국 남방의 오랑캐 이름이다.
♣ 형망환이극[形忘歡已極]장자(莊子) 양왕(讓王)의 “뜻을 기르는 자는 형체를 잊는다[養志者忘形].”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형체 등 겉치레를 잊고 상대방과 마음을 주고받아 한없이 기쁘다는 것이다.
♣ 형모[衡茅]형문(衡門)과 모옥(茅屋)을 줄인 말로, 보잘것없는 누추한 집을 말한다.
♣ 형문[衡門]나무막대기를 가로질러서 대문을 만든 것으로, 오두막집의 초라한 사립짝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 깃들 만하도다.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주림을 잊겠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泌之洋洋 可以樂飢]" 하였다.
♣ 형문[荊門]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장강(長江) 가에 있는데, 형세가 몹시 험고하여 옛날부터 파촉(巴蜀)과 형오(荊吳) 사이의 요새였다.
♣ 형박[荊璞]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얻은 박옥(璞玉)으로, 전하여 현량(賢良)한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 형박삼헌[荊璞三獻]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드리니 왕이 속인다 하여 그 왼발을 잘랐다.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또 드리니 또 속인다 하여 그 오른발을 잘랐다. 문왕(文王)이 서자, 이에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서 울거늘 왕이 사람을 시켜 물으니, 그가 말하되, “신(臣)이 발 잘린 것을 서러워함이 아니오라, 보옥을 돌이라 일컫고 곧은 선비를 속임꾼이라 하니, 그래서 서러워하노이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박옥을 쪼개니 과연 그 속에 옥이 있었다.
♣ 형범숙존[荊凡孰存]초왕(楚王)이 범군(凡君)과 같이 앉았는데, 초왕의 좌우(左右)에서 범(凡)이 망하였다고 세 번 외쳤더니, 범군이 “범(凡)이 망했다는 것이 나의 존(存)한 바를 상실(喪失)시키지 못하며, 초(楚)의 존(存)한 것도 왕의 존한 바를 존하게 하지 못한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범이 망한 것도 아니고 초가 존한 것도 아니다.” 하였다. 장자(莊子)
♣ 형벽수주[荊璧隋珠]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형벽은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의 화씨벽(和氏璧)을 말하고, 수주는 뱀이 수후(隋侯)에게 보은(報恩)했다는 명월주(明月珠)를 말한다.
♣ 형벽유장박[荊璧猶藏璞]아름다운 자질을 비유하는 말. 형산에서는 좋은 옥이 많이 나는데, 갈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 형봉[衡峯]형봉(衡峯)은 중국 형산(衡山) 남쪽에 있는 회안봉(回雁峯)을 가리키는데, 이 봉우리가 매우 높으므로 기러기가 가을이면 이곳에 와서 이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그냥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형부나함택[荊府羅含宅]진(晉) 나라 나함(羅含)이 환온(桓溫)의 별가(別駕)로 있을 때, 형주(荊州)의 강릉(江陵) 서쪽 소주(小洲) 위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羅含傳》 두보(杜甫)의 시에 “유신과 나함 모두 강릉에 집이 있었건만, 봄 오고 가을 가며 누구의 집이 되었는고.[庾信羅含俱有宅 春來秋去作誰家]”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1 舍弟觀赴籃田取妻子到江陵喜寄》
♣ 형산[荊山]형산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으로 옥(玉)이 나는 명산이다.
♣ 형산[衡山]형주(衡州)에 있는 남악(南岳)으로, 일찍이 한유(韓愈)가 산양(山陽)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을 경유하면서 시를 지었다.
♣ 형산운자제[衡山雲自霽]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말. 한유(韓愈)가 일찍이 형악묘(衡嶽廟)에 알현(謁見)하였을 적에, 때마침 가을 장마가 들어 음산한 기운이 잔뜩 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를 드렸더니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말끔히 갰다고 한다. 《古文眞寶 潮州韓文公碑 註》
♣ 형산읍옥[衡山泣玉]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형산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치자, 옥이 아닌 돌로 왕을 기만했다 하여 그의 왼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 후에 다시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역시 옥이 아니라 하여 또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래서 변화가 그 옥박을 안고 형산 아래에서 통곡하였다 한다.
♣ 형상[荊桑]뽕나무의 일종으로 오디가 많이 열린다 한다.
♣ 형석[衡石]형석의 형은 저울이고, 석은 1백 20근을 말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매일 반드시 1백 20근의 각종 서류를 재결(裁決)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秦始皇紀》
♣ 형설[螢雪]동진(東晉)의 차윤(車胤)이 집이 가난하여 반딧불이를 주머니에 많이 잡아넣어 그 불빛으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雪]빛에 의지해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 형설지공[螢雪之功]반딧불이와 눈으로 쌓은 공.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면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苦學]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것을 비유한다. 중국 동진(東晋) 때의 차윤(車胤)은 가난한 시절 얇은 비단 주머니에 넣은 반딧불이의 빛으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은 눈(雪) 빛에 책을 비추어 글을 읽었다는 고사가 있다.
♣ 형수[荊樹]가시나무 숲으로, 형제간에 함께 살아온 곳이란 뜻이다. 옛날에 어떤 형제가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는데, 문밖에 가시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무들도 오히려 함께 모여서 즐겁게 사는데, 하물며 우리가 갈라서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다시 화목하게 지냈다고 한다. 《孝子傳》
♣ 형수[荊樹]형수는 가시나무로, 옛날 형제 세 사람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오직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이를 3분으로 쪼개서 나누어 갖자고 서로 의논하였는데, 그 다음날 이 나무가 불에 탄 듯이 절로 말라죽었다. 그러자 그 형이 크게 놀라고 슬퍼하여 나무를 쪼개지 않으니, 그 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꽃이 피므로, 형제들이 서로 감동하여 분가하지 않고 아주 우애 있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齊諧記》
♣ 형수화[荊樹花]형수(荊樹)는 마편초과의 낙엽 활엽 관목인 작살나무를 말한다. 잎은 길둥근 모양으로 마주 나고 여름에 자줏빛의 잔꽃이 피어 정원의 관상수로도 쓰인다. 한(漢) 나라 때 조성(朝城) 사람 전진(田眞)이 두 아우인 경(慶)ㆍ광(廣)과 함께 부모의 재산을 나누어 갖기로 의논하여 전부 고르게 배분한 뒤에 집앞에 있는 작살나무만 남았는데, 그것마저 베어 세 동강으로 잘라 갖기로 합의하고 이튿날 나가 보니 불에 타버린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전진은 깜짝 놀라 말하기를 “나무는 본디 한 뿌리인데 동강낸다는 말을 듣고 말라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나무보다 못한 것이다.” 하자, 나무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에 감동한 형제들은 재산을 도로 합치고 효도하는 가문이 되었다 한다. 곧 형제가 함께 사는 정겨운 고향집에 비유한다. 당 나라 허혼(許渾)의 정묘시집(丁卯詩集) 제최처사산거(題崔處士山居)에 “형수에는 꽃이 있어 형제들 즐거워하고 유자 숲에 열매 없어 자손들이 바쁘다네 [荊樹有花兄弟樂 橘林無實子孫忙]”하였다.
♣ 형승지지[形勝之地]지세(地勢)가 험고(險固)한 요해지(要害地)를 가리킨다.
♣ 형신홀개합[形神忽開闔]닫기는 것은 자는 것이요, 열리는 것은 깨는 것이다.
♣ 형악[衡岳]중국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큰 산 이름.
♣ 형애제공[兄愛弟恭]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해야한다는 뜻.
♣ 형액월제감구내[衡扼月題堪區耐]장자(莊子)에, “말이 굴레도 고삐도 없이 마음대로 풀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본성인데 백락이 나와서 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매니 말은 본성을 잃고 말았다.” 하였다.
♣ 형양[桁楊]형양은 죄인의 수족에 채우는 형구(刑具)를 말한다.
♣ 형양[滎陽]정홍명을 가리킨다. 형양이 중국 하남성(河南省) 정현(鄭縣)인 까닭에 정씨(鄭氏)를 보통 형양으로 일컫고 있다.
♣ 형양[衡陽]중국 형산(衡山) 남쪽 즉 형양(衡陽)에 회안봉(回雁峯)이 있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기러기들이 남북으로 왕래하며 이동한다고 한다. 참고로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기러기의 군진이 추위에 놀라, 형양 물굽이에 소리가 끊어졌네.[雁陣驚寒 聲斷衡陽之浦]”라는 표현이 있다.
♣ 형양금[荊楊金]형주(荊州)와 양주(楊州)에서 나는 금으로, 품질이 좋은 금을 말한다.
♣ 형양묵흔[滎陽墨痕]형양(滎陽)은 시(詩), 서(書), 화(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던 당(唐) 나라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집이 가난해 종이를 구할 수 없자 감나무 잎에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新唐書 卷202》
♣ 형양안[衡陽雁]무슨 일을 아주 단절하지 못하고 늘 도로 되풀이하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형양(衡陽)에 회안봉(回鴈峯)이 있는데, 기러기가 언제나 이 산봉우리에 이르러서는 봉우리가 너무 높아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 형여[荊廬]형산(荊山)과 여산(廬山). 형산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으로 옥(玉)이 나는 명산이고, 여산은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명산이다.
♣ 형역[形役]마음이 육체적 생활의 노예가 되어 사역(使役) 당하는 것을 말한다. 즉 외물(外物)로 인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구속됨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스스로 마음을 가지고 형체의 역사 삼았으니 어찌 실의에 빠져 슬퍼만 하리오.[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하였음.
♣ 형옥[荊玉]형옥은 형산(荊山)에서 나오는 옥으로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의 박옥(璞玉)을 얻어서 세 차례에 걸쳐 초 문왕(楚文王)에게 올린 일이 있었음. 바로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 형원[荊猿]몹시 슬프게 우는 원숭이를 뜻한다.
♣ 형이상하[形而上下]형이상은 형기(形氣)가 나타나기 전으로 바로 이치를 말하고 형이하는 형기가 나타난 후로 바로 기운을 뜻함.
♣ 형인[衡人]형인은 주례(周禮)의 관명으로 특히 산림을 관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 형인양월[荊人兩刖]유명한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임. 초 나라 사람 변화가 옥돌을 얻어서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으나 속임수를 쓴다고 여겨져 왼쪽 발이 잘렸는데, 무왕(武王) 때 또 바쳤다가 같은 이유로 오른쪽 발마저 잘리자 원통한 심정으로 옥돌을 안고 울었다고 함. 《韓非子 和氏》
♣ 형제이난[兄弟二難]형제가 서로 우열이 없이 덕행이 똑같이 뛰어남을 이름.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의 여섯 아들 가운데 기(紀)와 심(諶) 두 아들이 가장 덕행이 뛰어났는데, 진식이 그들을 평하기를 “원방(元方)은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은 아우 되기가 어렵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二》
♣ 형제혁장[兄弟鬩墻]형제가 담장 안에서 싸운다. 동족상쟁(同族相爭)을 말한다.
♣ 형주[荊州]형주는 당 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낸 한조종(韓朝宗)인데, 평소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길 좋아하여 최종지(崔宗之)ㆍ엄무(嚴武)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평생에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기보다는 한형주가 한번 알아주기를 원할 뿐이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고 하였다.
♣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
♣ 형주고사[荊州古事]형주(荊州)의 고사란 곧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위(魏) 나라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아 쫓겨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가 의지하고 있었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三國志 卷三十二》
♣ 형주면[荊州面]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살아서 만호후 봉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한 형주를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古文眞寶 卷二 與韓荊州書》
♣ 형주하행득신조[荊州何幸得身遭]당(唐) 나라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장사(荊州長史)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어 사인(士人)의 추앙를 받았는데,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이 세상에 태어나 만호후가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한형주를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生不用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 형창[螢窓]형창은 진(晉) 나라 때 차윤(車胤)이 밤에 개똥불을 모아서 그 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으며 고학(苦學)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서재를 말하기도 한다.
♣ 형창설안[螢窓雪案]중국 진(晉)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갖은 고생을 하며 꾸준히 학문을 닦은 공을 이름.
♣ 형처[荊妻]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일컫는 말.
♣ 형초[荊楚]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 형피수돈[形疲瘦頓]몸이 피곤하고, 마르고 초췌하다.
♣ 형해구이망[形骸久已忘]우정(友情)이 매우 친밀하여 자기의 형체도 잊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형해득실[形骸得失]형해를 벗어나는 것은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의 진리를, 득실을 하나로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도(道)의 본체에서 보면 하나같이 같다는 노장(老莊)의 설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 형해자소혜중산[形骸自笑嵇中散]육신에 대한 집착을 멀리 떠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혜 중산은 진(晉) 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던 혜강(嵇康)으로, 일찍이 양생론(養生論)을 지었으며 직접 연단(鍊丹)을 하기도 하였다. 《晉書 卷49》
♣ 형형[泂泂]물이 맑고 깊은 모양
♣ 형혹[熒惑]화성(火星)의 별칭. 하늘의 법성(法星)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재화와 병란(兵亂)이 뒤따른다 한다. 춘추위(春秋緯)에 “적제(赤帝)의 신(神)이 형혹이 되어 남방에 위치한다.” 하였다. 화신(火神).
♣ 형화[荊花]형제를 비유한 말이다. 옛날 전진(田眞)의 형제 3인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나니, 오직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이것을 셋으로 쪼개서 나누자고 의논하고서 다음 날 그 나무를 베러 가보니, 나무가 이미 말라 버렸다. 그래서 전진이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의 뿌리가 하나인지라, 장차 쪼개 나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마른 것이니, 우리는 나무만도 못하다.” 하고는, 나누었던 재산을 다시 합하여 형제간에 아주 화목하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續齊諧記 紫荊樹》
♣ 혜[蕙]난의 일종
♣ 혜가[慧可]선종(禪宗)의 제2조(祖) 혜가(慧可). 그는 40세 때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후위(後魏)의 고승(高僧)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찾아가 눈[雪] 속에 앉아 가르침을 청하여 도를 닦고 의발(衣鉢)을 전수받아 선종(禪宗)의 법통(法統)을 이어 제이조(第二祖)가 되었다.
♣ 혜가단비[惠可斷臂]후위(後魏) 때 고승으로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그는 달마에게 도를 받을 때 그의 왼팔을 잘라서 자기의 굳은 뜻을 보였다.
♣ 혜각[慧覺]불교 용어로, 선각자(先覺者)의 큰 지혜를 스스로 깨우쳐 아는 것을 말한다.
♣ 혜감[慧鑑]중[僧] 만항(萬恒)의 시호(諡號). 속성은 박(朴)이다.
♣ 혜강[嵇康]진(晉)의 명사(名士) 자는 숙야(叔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성미가 괴이하여 큰 버드나무 아래서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들기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양생(養生)을 잘하면 팽조(彭祖)의 수명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또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나, 참소를 당해 나이 40에 죽었다. 《晉書 嵇康傳》
♣ 혜강라[嵇康懶]혜강(嵇康)의 글에, “나는 게을러서 머리에 빗질도 아니한다.” 하였다.
♣ 혜강라작서[嵇康懶作書]진(晉) 나라 때 혜강이 자기에게 벼슬하기를 권유한 친구 산도(山濤)에게 보낸 절교서(絶交書)에서 일곱 가지 감당할 수 없는[七不堪] 조건들을 죽 열거했는데, 그중 네 번째의 조건 속에 “나는 본디 글을 잘 짓지 못하거니와 또한 글짓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嵇中散集 卷二》
♣ 혜강양생[嵆康養生]진(晋)나라 혜강이 양생론(養生論)을 지었으나 뒤에 남의 모함을 입어 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혜강이 상수(尙秀)와 연단(鍊鍛)하고 있을 때 종회(鍾會)가 찾아왔는데, 혜강이 무정하게 대하자 이에 유감을 품고 종회가 문제(文帝)에게 모함을 한 결과 해를 당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 혜계[醯鷄]견문이 좁음을 뜻한다. 열자(列子) 천단(天端)에, “공구(孔丘)는 도에 대해서 마치 혜계와 같다.” 하였다.
♣ 혜계[醯鷄]혜계는 술단지에 생기는 작은 벌레로서, 선생의 가르침으로 학문이 성취됐다는 비유이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공자(孔子)는 도(道)에 있어 혜계를 열어준 사람과 같다. 그분이 술단지의 뚜껑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지의 위대한 참모습을 모를 뻔하였구나.” 하였다.
♣ 혜계천[醯鷄天]혜계는 초파리인데, 범위가 좁음을 말한다.
♣ 혜고[蟪蛄]매미의 일종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하루살이 버섯은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라는 내용이 있다.
♣ 혜고비[蟪蛄悲]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말한다. 장자 소요유에 “조균(朝菌)은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매미[蟪蛄]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 혜공상[惠公喪]춘추 시대 때 노(魯) 나라 혜공이 죽었을 때 마침 송(宋) 나라와의 전쟁이 있었고, 태자인 환공(桓公)이 어려서 장례의 의식이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이에 다시 개장(改葬)을 하였는데, 이때도 혜공의 뒤를 이은 은공(隱公)이 태자인 환공이 있다는 이유로 상주(喪主)가 되기를 사양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春秋左傳 隱公 1年》
♣ 혜기[惠氣]여간한 기운. 지기. 신인.
♣ 혜능[惠能]남종(南宗)을 이룩한 육조(六祖) 혜능(惠能)대사. 속성(俗姓) 노(盧)씨. 그가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 인가(印可)되어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남해(南海)에 가서 조계(曹溪)에 살며 남종을 창시했다.
♣ 혜련[惠連]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시인인 사영운(謝靈運)의 동생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키는데, 10세에 시작을 잘하였고, 형인 사영운은 그를 사랑하여 더불어 시를 지으면 좋은 구가 얻어졌다고 한다. 후대에는 시문 가운데에서 흔히 동생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 혜문[惠文]혜문은 주후혜문(柱後惠文)의 준말로, 법관(法官)과 무관(武官)이 쓰는 모자이다. 장창의 동생 장무(張武)가 양국(梁國)의 상(相)으로 나가면서 “양국은 대도(大都)로서 이민(吏民)이 조폐(凋敝)한 상태이니, 마땅히 주후혜문(柱後惠文)으로 탄치(彈治)해야 한다.”고 말하자, 장창이 이를 듣고서 웃으며 안심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張敞傳》
♣ 혜문관[惠文冠]주후혜문관(柱後惠文冠)의 준말로, 법관(法官)이 쓰는 관을 말한다. 전국 시대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호복(胡服)을 본떠 초미(貂尾)로 치장해서 쓰던 관(冠)인데, 진(秦)이 조(趙)를 멸망시킨 뒤에 이를 근신(近臣)에게 주었다. 무변대관(武弁大冠) 또는 번관(繁冠)이라고도 한다. 《後漢書 輿服志》
♣ 혜보[惠甫]조선 정조 때의 사가(四家)의 하나인 유득공(柳得恭)의 자이다.
♣ 혜보[徯父]혜보는 한치응(韓致應)의 자이다.
♣ 혜산수[惠山水]혜산천(惠山泉)을 가리킨다. 혜산은 혜산(慧山)으로 쓰기도 한다. 이 샘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서쪽인 혜산에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 혜산천[惠山泉]혜산(惠山)은 중국에 있는 산. 그 산 밑에 세 못[池]이 있는데, 맑고 맛이 좋다 한다. 부근의 주민들이 그 샘물로 술을 빚어 혜천주(慧泉酒)라 이르는데, 맛이 청렬(淸冽)하다고 하며, 또 그 물로 차를 달이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 혜생[嵇生]삼국시대 위(魏) 나라 초군(譙郡) 사람인 혜강(嵆康)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기풍이 출중하고 박식하였으며 노장(老莊)을 숭상하였다.
♣ 혜생재위루[嵇生才爲累]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악인을 원수처럼 미워하다가 마침내는 종회(鍾會)의 참소를 받고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당하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옛날 선인(仙人) 손등(孫登)이 “그대는 재주는 많으나 식견이 부족하여 오늘날 세상에서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부디 많은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今子才多識寡 難乎免于今之世矣 子無多求]”고 한 충고를 떠올리고는, “옛날에 부끄럽게 충고를 받았나니, 지금 손등을 볼 면목이 없구나.[昔慙下惠 今愧孫登]”라는 내용의 시 ‘유분(幽憤)’을 지어 자책(自責)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9 嵇康傳ㆍ世說新語 棲逸》
♣ 혜성하[蹊成下]문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비유한 말. 한서(漢書) 이장군전(李將軍傳)에 “도리(桃李) 밑에 오솔길이 생겼다.” 하였는데, 그 주에 “도리는 본래 말을 못하지만 꽃과 열매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도리 밑으로 가 자연히 오솔길이 생기게 된다. 이는 이 장군이 말을 안 해도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된 것이 있어 믿고 추종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혜소[嵇紹]몽구 중(蒙求中) 嵇紹不孤(혜소불고)에 “진(晉) 나라 혜소의 자(字)는 연조(延祖)이다. 그의 아버지 강(康)이 산도(山濤)와 친하였는데, 강이 사형을 당할 무렵에 아들 소에게 ‘산도가 생존해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후에 과연 산도가 소를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이 되었다.” 하였다.
♣ 혜숙야[嵇叔夜]혜숙야는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말함. 숙야는 그의 자. 혜강은 방외(方外)의 선비로서 세속을 초탈하여 산택(山澤)에 노닐면서 약(藥)이나 캐며 지냈는데, 갑자기 억울한 누명을 입고 동시(東市)에서 처형되었다. 《晉書 卷四十九》
♣ 혜시오거[惠施五車]장자(莊子) 천하(天下)에 “혜시(惠施)는 방술이 많으니 그 책도 다섯 수레가 된다.”는 말이 있다.
♣ 혜심환질[蕙心紈質]마음이 순결하고 성정(性情)이 고아(高雅)한 것을 말한다.
♣ 혜안[慧眼]불가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서 즉 진리(眞理)를 통찰(洞察)하는 안식을 말한다.
♣ 혜약[蕙若]매우 향기로운 난초.
♣ 혜양[蕙纕]혜양은 향초를 허리에 띠는 것을 말하는데 즉 충직함을 비유한 것이다. 《楚辭 離騷》
♣ 혜완[嵇阮]혜완은 진(晉)의 명인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으로 죽림(竹林)에 은거하여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杜甫)의 정건(鄭虔)을 행각하며 지은 유회태주정십팔사호(有懷台州鄭十八司戶) 시에 “당신은 진정 혜완의 부류, 그나마 또다시 세상의 혹평을 받았구려.[夫子嵇阮流 更被時俗惡]”라는 구절이 있다.
♣ 혜요[彗妖]혜성은 전란(戰亂)을 상징하는 불길한 별로 인식되었다.
♣ 혜원[慧遠]원공(遠公)이라고도 한다.
♣ 혜원법사[慧遠法師]중국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세우고 수도하였다.
♣ 혜원불금도령음[惠遠不禁陶令飮]혜원은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인 혜원 법사(惠遠法師)를 말하고, 도령(陶令)은 일찍이 팽택 령(彭澤令)을 지낸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혜원 법사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社)에서 혜영(慧永)ㆍ혜지(慧持)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고사(高士)들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는 도잠을 부르자, 도잠이 “만일 나에게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즉시 가겠다.” 하니, 혜원 법사가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 혜원유[惠遠遊]혜원(惠遠)은 중국 정토종(淨土宗)의 초조(初祖)로 숭봉되는 진대(晉代)의 고승(高僧)이다. 여산(廬山) 기슭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18인의 현인과 서로 노닐었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그야말로 여산의 길목에 들어서서, 혜원 따라 노니는 듯싶기만 하오그려.[似得廬山路 眞隨惠遠遊]”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1 題玄武禪師屋壁》
♣ 혜위모[蕙爲茅]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에 “전혜(荃蕙)가 변하여 띠풀이 되었다.” 한 데서 온 말로,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한 것을 비유한 말인데, 여기서는 유능한 사람이 무용지물로 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 혜자[惠子]이름은 시(施). 전국 시대 송(宋) 나라 사람. 양(梁) 나라의 재상을 지내고 변론(辯論)에 능했으며, 장주(莊周)와 친절하였음.
♣ 혜자기지어[惠子豈知魚]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 위에서 놀 때 물고기가 나와 뛰놀자, 장자가 이르기를 “저 물고기가 즐거워서 저렇게 노는 것이다.” 하니, 혜자가 대꾸하기를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莊子 秋水》
♣ 혜장[蕙帳]향초(香草)로 만든 휘장.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혜장이 비어 있으니 밤에 학은 집 떠난 주인을 원망하네.[蕙帳空兮夜鶴怨]" 하였다.
♣ 혜전탈우[蹊田奪牛]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혜주[惠州]중국 광동성 혜양현(惠陽縣) 서쪽에 위치한 고을. 송(宋)의 소식(蘇軾)이 귀양살이하던 곳임.
♣ 혜주반[惠州飯]혜주밥은 동파가 혜주로 귀양갔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임. 황정견의 시에 “飽喫惠州飯 細和淵明詩"라 한 구가 있음.
♣ 혜중산[嵇中散]혜중산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말하는데, 중산(中散)은 곧 혜강이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그는 시대가 좋지 아니함을 알고 고의로 게으름을 부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었다.
♣ 혜초[蕙草]혜초는 향초(香草)로, 곧 현자(賢者)의 높은 지조를 표시한다. 주자집주(朱子集註)에, “蕙 草名 本草云薰草也 陳藏器云卽零陵香也”라 했음.
♣ 혜함상[嵇含狀]진(晉)의 혜함이 지은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을 가리킨다.
♣ 혜혜[嘒嘒]매미의 울음소리, 소리가 부드럽고 가락에 맞는 모양
♣ 혜홍[惠洪]송(宋) 나라 각범선사(覺範禪師)의 이름. 그는 선(禪)에 깊고 또 시를 잘 하였다.
♣ 혜화[蕙華]혜초(蕙草), 좋은 향내가 나는 난초에 속하는 풀.
♣ 혜화문[惠化門]혜화는 서울의 동북편 문 이름.
♣ 호[號]본 이름이나 자(字)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 호[乎]於 와 뜻이 같음.
♣ 호가[壺歌]진(晉) 나라 왕돈(王敦)이 대장군(大將軍)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만년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술을 마실 때마다 조조(曹操)가 지은 “늙은 천리마 구유에 누웠어도 뜻은 언제나 천 리 밖이요, 열사의 나이 비록 늙었어도 장한 그 마음 변함이 없네.[老驥伏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타호(唾壺)를 두드려 타호가 모두 깨지곤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豪爽》
♣ 호가[浩歌]호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 호가[胡笳]호인(胡人)들이 갈대의 잎을 말아서 만든 피리를 말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원(哀怨)의 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서 들여왔다 한다.
♣ 호가박[胡笳拍]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의 딸 문희(文姬)가 지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말하는데 가락이 매우 애처롭다 한다.
♣ 호가행[浩歌行]당 나라 이하(李賀)가 지은 칠언 고시의 제목으로, 봄날에 교외에서 벗들과 술자리를 벌여 놀면서 자신의 불우함을 큰소리로 노래한 것이다. 《李賀詩集 卷一 浩歌》
♣ 호가호위[狐假虎威]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림. 자신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권세를 믿고 위세를 부림. 강한 자의 위세를 빌어 약한 자에게 군림함.
♣ 호각[弧角]구면상(球面上)의 양대원(兩大圓)이 서로 교착하여 이루어진 각(角)을 이름.
♣ 호각지세[互角之勢]호각(互角)은 쇠뿔의 양쪽이 서로 길이나 크기가 같다는 데서 나온 말, 서로 겨루는 형세.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아주 팽팽하고 대등한 상황을 뜻함.
♣ 호경[呼庚]군량미가 떨어진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3년 조(條)에, “오(吳)의 신숙의(申叔儀)가 공손유산씨(公孫有山氏)에게 군량미를 요청하자, 대답하기를, ‘만약 수산(首山)에 올라가서 경계호(庚癸乎)라고 외치면 보내주겠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두예(杜預)의 주(注)에, “경(庚)은 서방으로 곡식을 주관하고, 계(癸)는 북방으로 물을 주관한다.” 하였다.
♣ 호계[壺界]신선 세계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어떤 노인을 따라 술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계[虎溪]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서남쪽에 있는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시내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살면서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넌 적이 없었는데 하루는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진진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만 호계를 건너자 호랑이가 울었으므로 한바탕 크게 웃고 헤어졌다. 본시 호계를 건너면 호랑이가 울곤 하였다 한다. 《蓮社高賢傳》
♣ 호계별[虎溪別]호계는 계곡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하루는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 두 고사(高士)를 전송하면서 3인이 서로 도의(道義)가 부합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쳐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계삼소[虎溪三笑]혜원대사는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어떤 귀한 손님이 왔다가 가더라도 산문 밖에 있는 호계(虎溪)까지 밖에 전송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도연명과 사령운이 왔다 가는데, 그들을 전송하며 이야기하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시내를 건너 얼마를 더 갔었다. 그제야 깨닫고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다. 그래서 그것을 호계삼소(虎溪三笑)라 한다.
♣ 호계평류[瓠繫萍流]매달려 있는 뒤웅박처럼 계속 머물러 있게 되거나 물에 떠내려가는 부평초마냥 길을 떠나게 되거나 실의에 차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호공[壺公]정두원의 호가 호정(壺亭)이다.
♣ 호공[胡公]호공은 후한(後漢)의 호광(胡廣)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 44 胡廣傳》
♣ 호공능축지[壺公能縮地]옛날에 호장공(胡長公)이라는 사람은 축지법을 잘했다고 한다.
♣ 호관[壺關]중국 호구산(壺口山)을 말함.
♣ 호관[虎觀]진사시(進士試)를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른 데서 나온 말로, 나라에서 과거를 치르는 장소를 말한다.
♣ 호관친림[虎觀親臨]한(漢) 나라 장제(章帝)가 백호관(白虎觀)에 모든 선비들을 모아 경의(經義)를 토론하게 하고 친히 결재하였다. 그 논의(論議)를 기록한 것이 백호통(白虎通)이란 책이다.
♣ 호광[毫光]호광은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털[毫]에서 나온다는 빛을 말한다.
♣ 호구[狐丘]고향을 잊지 아니함. 여우가 죽을 때는 제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죽는다고 함. 호사수구(狐死首丘)
♣ 호구[虎丘]중국 오현(吳縣)에 있는 산 이름. 오 나라 임금 합려(闔廬)를 장사지낸 지 3일 만에 범이 묘 위에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구(虎丘)라 하였다 한다. 호구 동서에 절이 있는데 동의 것은 동사(東寺), 서의 것은 서사(西寺)라고 이른다. 《越絶書》
♣ 호구지계[狐丘之戒]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의 고사성어.
♣ 호구지책[糊口之策]입에 풀칠이나 하는 방책. 겨우 끼니를 이어가기 위한 방책. 먹고 살 방법을 이름
♣ 호군련세시수처[縞裙練帨是誰妻]소식(蘇軾)의 매화시(梅花詩)에, “흰 치마 보얀 수건이 옥천 가의 집이라네.” 했는데 냇가의 매화꽃을 가리킨 말이며, 한유(韓愈)의 오얏꽃을 읊은 시에 “흰 치마 보얀 수건과 다름이 없네.” 한 것은 오얏꽃이 매화꽃과 다르지 않다는 말. 임포(林逋)는 매화와 학을 사랑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았다 한다.
♣ 호권[虎圈]범을 기르는 곳을 이름. 전하여 범 기르는 곳을 관장하는 소신(小臣), 즉 호권색부(虎圈嗇夫)의 준말로, 낮은 벼슬을 비유하기도 한다.
♣ 호기[呼旗]4월 8일 아이들이 장대에 종이를 오려붙여 이것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미포(米布)를 요구하여 놀이 비용으로 삼았는데 그 장대를 말함.
♣ 호기[灝氣]천지의 정대(正大)하고 강직(剛直)한 기운을 말한다.
♣ 호기진등[豪氣陳登]아무리 유명 인사라 하더라도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진등이 국사(國士)의 명성을 갖고 있는 허사(許汜)가 찾아왔을 때, 손님 대접도 하지 않고서 자기는 큰 침상 위에 누워서 자고 허사는 그 밑에서 자게 했던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7》
♣ 호노[楛砮]호시석노(楛矢石砮)의 약칭으로 탱자나무 비슷한 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이라는 뜻인데, 주 나라 때 동방 민족인 숙신국(肅愼國)에서 공물로 바치던 것이다. 《國語 魯下》
♣ 호당[湖堂]문신들에게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던 곳.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독서당(讀書堂)을 말한다. 조선 세종 8년에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왕명에 따라 시작하였고 병자호란 후 폐지되었다.
♣ 호당독서[湖堂讀書]문관(文官) 가운데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말미를 주어 오로지 학업을 닦게 하던 일. 사가독서(賜暇讀書).
♣ 호대[縞帶]멀리 흘러가는 강물이 마치 하얀 띠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다.
♣ 호도격주[號咷擊柱]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는 진(秦) 나라의 의법(儀法)을 모두 버리고 간소화시키자, 뭇 신하들이 술을 마시며 공(功)을 다투고, 취한 자는 혹 망녕되이 부르짖으면서 칼을 뽑아 기둥을 치기도 했던 일을 가리킨 말이다. 《漢書 叔孫通傳》
♣ 호두[虎頭]진(晉)나라 때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그의 소자(小字)가 호두(虎頭)이므로 세칭 고호두라 한다. 세상에서 재(才), 서(書), 치(癡)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 호두[鄠杜]한(漢) 나라 때 서도(西都) 근방 부풍(扶風)에 있는 호현(鄠縣)ㆍ두양현(杜陽縣)을 말한다.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에 “여름에는 어숙현(篽宿縣)ㆍ호현ㆍ두양현의 사이에서 노닌다.” 하였다.
♣ 호두수부[虎頭水府]서주(徐州)의 성동(城東)에 석담(石潭)이 있어 사수(泗水)와 통하는데, 날이 가물 때에는 그 석담 가운데 범의 머리를 넣어주면 구름이 있고 비가 내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六 起伏龍行序》
♣ 호두연타청모장[壺頭鳶墮靑茅瘴]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공격하며 호두산에 이르렀을 때 혹독한 무더위를 만나 역사(疫死)하는 사졸들이 늘어나고 자신도 병에 걸리자 “찌는 듯 치솟아 올라오는 독기에 솔개도 물속에 툭툭 떨어지나니, 고향에서 편히 살자던 소싯적의 그 말을 누워서 떠올린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毒氣熏蒸 仰視鳥鳶跕跕墮水中 臥念少游平生時語 何可得也]”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있다.《東觀漢記 馬援傳》 청모(靑茅)는 향기가 독한 남방의 띠풀이다.
♣ 호두전신[虎頭傳神]호두는 동진(東晉) 때의 문인화가(文人畫家)인 고개지(顧愷之)의 자. 고개지는 매양 사람을 그릴 때마다 수년 동안 눈을 그리지 않으므로 누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초상을 그려서 정신(精神)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 눈동자에 달려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량[濠梁]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에 있는 호수(濠水)의 가교(架橋). 옛날 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에서 노닐면서 물고기의 낙(樂)에 대하여 서로 얘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로, 즉 친구들끼리 물가에서 노닒을 비유한 것이다. 《莊子 秋水》
♣ 호량변[濠梁辨]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장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의 강 위에서 어락(魚樂)에 대해 서로 논쟁한 것.
♣ 호량유[濠梁游]친한 벗끼리 둘이 만나 노닒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며 노닐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 호려[虎旅]호분(虎賁)과 여분(旅賁)으로, 즉 위사(衛士)를 가리킨다.
♣ 호련[瑚璉]호(瑚)와 연(璉)은 모두 고대에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던 소중한 제기(祭器)로서, 그 귀중함으로 인해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재능을 소유한 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공이 묻기를 ‘저는 어떠한 그릇입니까?’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너는 호련이다.’고 하였다.” 하였음.
♣ 호련기[瑚璉器]훌륭한 인재를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공(子貢)이 ‘저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자가 ‘너는 그릇이다.’ 하였다.’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호련이다’ 했다.[子貢問曰 賜何如 子曰 汝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하였다.
♣ 호령[狐嶺]남태령의 별칭이다.
♣ 호로[葫蘆]약초의 이름인 호로파(葫蘆巴)의 준말인데, 본초(本草)에 의하면 이 약초를 의가(醫家)에서 장부(臟腑)의 허냉증(虛冷症)에 쓴다고 되어 있다.
♣ 호로[葫蘆]호로는 당 나라 등산거(鄧山居)가 독약을 화살에 발라 짐승을 쏘았는데 그 자리에서 넘어지므로 모호로(毛葫蘆)라 하였다.
♣ 호로[葫蘆]호로는 의양화호로(依樣畫葫蘆)의 준말로, 곧 옛사람을 본뜨기만 하고 새로운 생각을 창안해 내지 못함을 이름. 송(宋) 나라 도곡(陶穀)의 시에 “가소롭다 한림 도 학사는 해마다 모양따라 호로병을 그리누나.[堪笑翰林陶學士 年年依樣葫蘆]" 하였다.
♣ 호룡도[虎龍韜]병법(兵法)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周) 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 속에 용도(龍韜)와 호도(虎韜)의 편명이 들어 있다.
♣ 호리[蒿里]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 옛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여기에 머문다고 하므로, 전하여 묘지를 뜻한다.
♣ 호리[毫釐]호리는 극히 미세한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경해(經解)에 “호리에서 잘못되면 천 리까지 틀려진다.[差若毫釐 繆以千里]" 하였다.
♣ 호리건곤[壺裏乾坤]호리병 속에 펼쳐져 있다고 하는 신선 세계를 가리킨다.
♣ 호리곡[蒿里曲]사람이 죽어 상여가 나갈 때에 부르는 노래. 즉 만가(輓歌)를 말한다. 해로가(薤露歌)는 왕공(王公)ㆍ귀인(貴人)에 대한 것에 반해, 호리는 사대부와 서인(庶人)에 대한 것이다.
♣ 호리별유천[壺裏別有天]후한(後漢) 때 한 노인이 시장에서 약(藥)을 팔았는데, 자기 점포 머리에 병 하나를 걸어 놓고 있다가 시장을 파하고 나서는 매양 그 병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때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는데, 다만 비장방(費長房)이 그것을 알고 그 노인에게 가서 재배(再拜)하고 인하여 노인을 따라서 그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술을 실컷 마시고 나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리애만[蒿里哀挽]죽은 이를 애도하여 짓는 장송가(葬送歌)를 말하는데, 왕공(王公) 귀인(貴人)들에 대해서는 보통 해로곡(薤露曲)이라 하고, 사대부와 서인에 대해서는 호리곡(蒿里曲)이라 한다. 《史記 田儋傳 注》
♣ 호리옥경[壺裏玉京]술단지 속은 신선 세계를 말하고, 옥경(玉京)은 신선들이 사는 천상의 나라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노인이 술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리유천[壺裏有天]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다가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는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마[胡麻]호마는 참깨임.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서 약을 캐다가 두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들이 집으로 데리고 가서 호마밥을 지어주었다 한다. 《續齊諧記》
♣ 호마연북풍[胡馬戀北風]호마는 북쪽 오랑캐의 말이고, 월조(越鳥)는 남쪽 월(越) 나라의 새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고시(古詩)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에 “북쪽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월(越) 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트네.” 하였다.
♣ 호마호우[呼馬呼牛]훼예(毁譽)를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름을 말함. 장자(莊子) 천도편(天道篇)에 보임.
♣ 호모경[胡母敬]진(秦) 나라 태사령(太史令)을 지냈음. 사주(史籒)의 대전(大篆)을 간소화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었음.
♣ 호모부가[毫毛斧柯]수목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화(禍)는 미세할 때에 예방해야 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호묘[湖泖]호묘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삼묘호(三泖湖)를 가리킨 것으로, 예찬(倪瓚)이 평소에 삼묘호를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한다.
♣ 호문[互文]이리저리 연결되는 문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평생에 백우선도 영락했고 평생에 교룡갑도 영락했다.”는 식으로, 윗구의 평생이 아랫구에도 내려가고, 아랫구의 영락이 윗구에도 올라와서 전체의 뜻을 보완해 준다.
♣ 호미[狐媚]음사한 방법을 써서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석늑재기 하(石勒載記下)에, “대장부가 행하는 일은 정정당당하여 일월처럼 환해야 하는 법이니, 끝내 조맹덕(曹孟德)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 부자(父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여 여우처럼 미혹시켜서 천하를 차지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 호박가[胡拍笳]채양(蔡襄)이 호가 십팔박(十八拍)을 썼는데, 안방 여인의 자태가 있었다.
♣ 호배[虎拜]천자를 배알하여 절하는 것을 말한다. 호(虎)는 주 선왕(周宣王)때의 어진 신하 소목공(召穆公)의 이름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소호는 엎드려 머리 조아리고 임금님 은덕을 사례했네[虎拜稽首 對揚王休]"에서 나온 말로, 대장이 임금께 절하는 것을 뜻한다.
♣ 호백구[狐白裘]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을 여러 장 모아 이어서 만든 갖옷. 귀족‧고관 대작(高官大爵)만이 입을 수 있었던 데서 귀족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고 함. 호구(狐裘)라고도 일컬음.
♣ 호복기사[胡服騎射]어떤 일에 착수할 만전의 태세를 갖추다란 뜻의 고사성어.
♣ 호복림중석[虎伏林中石]한(漢)나라 이광(李廣)이 사냥 나갔다가 풀 속의 돌을 보고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살이 박히기에 가서 보니 돌이었다. 《漢書 李廣傳》
♣ 호복의[濠濮意]호량(濠梁)은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곳이고, 복수(濮水)는 장자가 초(楚) 나라 왕의 초빙도 거절한 채 낚시를 하던 곳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곳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간문제(簡文帝)가 화림원(華林園)에 들어가서는 좌우를 돌아보며 “마음에 맞는 곳을 찾으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이 수목 사이에 들어서니, 호량과 복수 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會心處不必在遠 峠然林木 便自有濠濮間想也]”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 호부견자[虎父犬子]아버지는 잘났는데 아들은 못나고 어리석음.
♣ 호분[胡紛]기름과 분을 섞어 죽과 같이 만든 도료. 석명(釋名) 석수식(釋修飾)에 “胡紛, 胡, 餬也. 脂和以塗面也.”라 하였다.
♣ 호분[虎賁]범이 짐승을 때려잡듯 하는 용사(勇士)를 말한다. 한(漢) 나라의 벼슬 이름인데, 용력 있는 장사를 여기에 편입시켜 호사(虎士) 8백 인을 거느리고 왕이 출입할 때에 앞뒤에서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국책(國策)에, “진(秦)은 호분(虎賁)의 군사가 백여 만이다.” 하였음.
♣ 호사다마[好事多魔]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 좋은 일이 있을 땐 이상하게도 이를 방해하는 궂은 일이 많이 생김. 또는 좋은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 만큼 노력과 고충이 뒤따른다는 말
♣ 호사무인송주전[好事無人送酒錢]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가난해서 좋아하는 술도 못 먹고 있었는데, 호사자(好事者)들이 가끔씩 술과 안주를 가지고 찾아와서 배우며 노닐었다 한다. 《漢書 揚雄傳下》
♣ 호사수구[狐死首丘]고향을 잊지 않음. 여우가 죽을 때면 제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함. 《淮南子 說林訓》
♣ 호사유피[虎死留皮]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김과 같이 사람도 죽은 뒤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
♣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호사인[好事人]물으러 오는 사람. 한 나라 양웅(揚雄)은 술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집이 가난해 마시지를 못했는데, 호사자(好事者)가 술과 안주를 싸들고 와서[載酒肴] 종유(從游)하며 배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揚雄傳 贊》
♣ 호사자[好事者]술병을 들고 찾아와서 글을 묻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좋아하는 술도 못 먹을 정도로 집이 가난하였는데, 인적이 드문 그 집에 이따금씩 호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와 글을 배웠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7 下 揚雄傳贊》
♣ 호사필수구[狐死必首丘]여우는 죽을 때 반드시 머리를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
♣ 호사휴호지[好事携壺至]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집안이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호사자들이 술과 안주를 싸들고 와서 종유(從游)하였다고 한다. 《漢書 揚雄傳》
♣ 호산[壺山]여산(礪山)의 옛 이름이다.
♣ 호상[滈翔]높이 날다.
♣ 호상[湖湘]호상은 동정호(洞庭湖)와 상강(湘江)을 말한다.
♣ 호상락[濠上樂]장자와 혜시(惠施)가 징검다리 위[濠梁之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토론을 벌인 이야기가 장자(莊子) 추수(秋水) 말미에 나온다.
♣ 호상원지[濠上遠志]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만나 호량(濠梁)위에서, 뛰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문답하던 시속을 초월한 뜻. 《莊子 秋水》
♣ 호생[好生]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好生之德 洽于民心"의 대문이 있음.
♣ 호성홀혜패[胡星忽彗孛]안녹산(安祿山)이 반기(叛旗)를 들고 일어난 것을 말함인데, 안녹산은 원래 흉노(匈奴) 족속이었다.
♣ 호소[縞素]흰색의 상복(喪服)을 말한다.
♣ 호손입낭[胡孫入囊]호손은 원숭이의 별칭이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끝내 관직 하나를 얻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당서(唐書)를 개수(改修)하라는 조칙을 받자, 자기 아내에게 “내가 실록을 개수하게 되다니, 얻기 힘든 호손이 자루 속에 절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吾之修書 可謂胡孫入布袋矣]”고 했다는 일화가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 2권(卷)에 수록되어 있다.
♣ 호수[狐首]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인지상정을 말한다. 여우가 죽을 때에 옛날 살던 곳으로 머리를 둔다는 “狐死首丘”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禮記 檀弓上》
♣ 호수[湖叟]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정세아(鄭世雅), 그의 호가 호수(湖叟)이고 자는 화숙(和叔), 본관은 연일(延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