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절대적 인간관
이제까지 우리가 하루 빨리 깨쳐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자성(自性)을 깨치라 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일체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며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菩提樹下에 初成正覺하시고 歎曰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의 皆有如
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忘想而不能證得이로다.(華嚴經)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같이 명백하게 누구든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범아일여(凡我一如)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틀립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다면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 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해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다니지 말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이런 책 저런 책 등을 꽤나 광범위하게 보았지만 내가 볼 때는 영원하고 자유로운 길을 제시한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채근담강의 (菜根談講義)]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자 글자도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 그럴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 안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 없는 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대광명을 비치는 문자 없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찾아본다고 참선을 익히면서 중이 된 지 벌써 삼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그저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 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經),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그렇다면 언어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장자(莊子)]에 있는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서 일을 하는데 임금님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임금에게 물었습니다.
"임금이시여,무슨 책을 보십니까?"
"옛날 현인들이 말씀한 좋은 책이니라."
"지금 그 현인과 철인들이 살아 있습니까?"
"죽고 없지만 그 현인들이 말해놓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라."
"임금이시여,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찌꺼기는 소용 없습니다.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문자라는 것이 옛 사람의 말찌꺼기이지 진리의 묘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우화입니다.
기술도 그렇습니다. [장자]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고 글이 좋다고 하여도 목수 기술, 용접 기술, 수레 바퀴 만드는 기술 등 그 모든 기술의 묘리(妙理)는 절대로 말이나 글로서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오래오래 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지 말로서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만 문자에 대해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다 언어문자의 피해를 경책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워지느니라.
廣學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니라.
달마스님의 말씀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느니라.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써 못할 것이 없느니라.
爲道日損이요 爲學日益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니 無爲而無不爲니라.
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인데 실지로 도에 깊이 들어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 더는 것이니 도를 이룰려면 분별망상을 쉬어 버려야 하고 학문을 배우려면 문자를 하나라도 기억하여 더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바른 믿음(正信)과 삿된 믿음(邪信)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설법인데 다 바른 믿음이지 삿된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느나고 생각할른지 모르지만 방편인 가설(假說)과 실담(實談)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 조사스님들도 마음이 즉 부처(卽心卽佛) 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니고 삿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즉 부처라고 아는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인 줄 바로 알아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 양명학파(陽明學派)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이 많습니다. 이 학파를 주장하는 왕양명(王陽明)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나침반이 있어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이전의 잘못된 소견을 웃노니 가지마다 잎마다 밖으로 찾았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홀로 알때 이것이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 기틀이로다.
자기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 하는구나.
人人이 有箇定盤針하야 萬化根源이 本在心이라
却笑從前顚倒見하노니 技技葉葉外頭尋이로다.....
無聲無臭를 獨知時에 此是乾坤萬有基라
據却自家無盡藏하고 沿門持鉢效貧兒로다.
여기서도 공연히 언어문자에 끄달려 딴 곳을 더듬고 있었음을 경책하였으니 가지마다 일마다 밖을 찾았다고 반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 보물 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 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아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는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밖에는 없겠습니다.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입니다. 그 공통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니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절대무한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서울로 가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은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물건인데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 간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 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다(三界火宅四生苦海)'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즉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마는 것이니 그동안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어떻게 좀 고생을 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가운데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행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모순과 투쟁의 현실세계와 유신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곧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왔습니다.이 현실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設)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 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새로운 땅이 있고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인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할 것입니다.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点)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 년, 예수교는 이천 년, 바라문교는 사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信)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과학 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또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의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揭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력 묘하여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요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