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4> 서장 (書狀)
장제형에 대한 답서
알음알이의 길 끊어지면 모두가 진리
“사대부들은 도(道)를 배우더라도 대개 진실한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입으로 도를 논하고 마음으로 도를 생각하는 것을 없애버리면 곧 망연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이곳이 바로 좋은 곳임을 믿지 못하고, 다만 마음 속에서 꽉 붙잡고 생각으로 헤아려 도달하려 하며 말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누어 보려고 할 뿐, 그것이 잘못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과거와 미래를 끊어버릴 수 있다면, 마음 속 알음알이의 길은 저절로 끊어집니다. 만약 마음 속 알음알이의 길이 끊어지면, 어떤 일을 말하더라도 모두가 진리이며 대해탈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리지만 않으면 매 순간 매 순간 접하는 모든 경계가 도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매 순간 매 순간 도와 하나 되어 있으면서도, 생각으로 상(相)을 만들어 그 상에 머물기 때문에 도와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공부의 핵심은 도를 깨닫는 것이지만, 이것은 곧 생각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식인은 생각으로 헤아려서 생각을 그럴듯하게 구성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지식인이 도 공부에서 부딪히는 장벽은 당연히 생각이라는 장벽이다. 물론 지식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 같이 생각이라는 장벽에 부딪히지만, 지식인에게 그 장벽은 특히 높다. 생각하는 일이 바로 지식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지식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모두 생각을 통하여 해석하고, 생각 속에서 관념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고 말로써 따질 수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지식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자신이 딛고 있던 발판과 잡고 있던 손잡이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평소에 의지하고 있던 발판과 손잡이를 버려서 곧 의지할 곳 없는 골짜기로 굴러떨어질 듯이 불안한 이 상황이, 사실은 도(道)에 들어가는 문 앞에 당도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발판과 손잡이를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고 죽기를 무릅쓰고 허공 속으로 뛰어들어야 비로소 도의 문을 들어서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만약 여기서 용기가 없어서 다시 과거의 발판과 손잡이를 찾아 의지한다면, 영원히 도의 문을 들어설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지식인은 행동하기 전에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 헤아려 보아서 안심이 되어야 비로소 행동하도록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대부분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여기서 되돌아 물러서 버리고 만다. 이것이 지식인이 도를 깨닫기 어려운 이유이며, 또한 지식의 비극이다.
아직 도를 모르는 범부에게 도의 세계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이다. 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과거에 붙잡고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소유물들을 포기해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천국의 문이 열려 있다든가, 한번 죽어서 부활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과거에 의지하고 있던 소유물을 포기하는 것은 곧 미래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발판삼아 미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여 머물며 미래를 욕망한다. 이처럼 과거에의 집착과 미래에의 희망은 모든 범부들이 의지하는 손잡이요 발판이다.
그러나 도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이런 손잡이와 발판은 버려야 한다. 즉 도의 세계에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의 존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함에는 어떤 종류의 해석이나 관념적 구성물도 필요하지 않다.
바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글을 읽는데 무엇이 모자라는가? 지금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데,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있는가?
보고 듣고 인식하는 상(相)을 따라 분별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의 존재에 아무 부족함도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부족함이 없으니 의지하고 기대할 것이 없고, 의지하고 기대할 것이 없으니 바로 대자유의 해탈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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