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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월호 「유심」(80매)
나의 삶과 문학┃ 송수권
원환적(源還的) 그늘과 곡선의 삶
1. 그늘
판소리는 근대적 산물이 아니라 원래 토속적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솟아난 독특한 문학양식이다. 그 가락은 일차적으로 ‘서사 무가’의 주술적인 해한(解恨)으로 민중의 허튼기법과 산조(散調)인 시나위 가락에서 나왔고, 민요, 민속, 민담, 야담, 육담, 막말, 등 민간화법(民間話法)과도 접목되어 있다. 국어의 표준말은 서울말이지만 판소리의 표준말은 전라도 말이다.
소리꾼들이 ‘적벽가’를 부르기 꺼려한 까닭도 유식한 한자 투의 용어가 많이 섞여 있어 전라도의 입말로 옮겨 부르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이 토속공간에서 솟아난 입말로 쓰는 버릇이 있다. 그러므로 내 시 속에 흐르는 아우라는 전통의 표본적 가락인 토속정서이며 그 내용은 주로 판소리 민요, 농악, 춤, 무가, 육자배기를 비롯한 잡가 등에 접속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발견한 것이 유장한 곡선의 가락이며, 그 곡선에서 흘러나오는 그늘과 느림으로 이루어진 소리의 상법(想法)이다. 쉽게 말해서 노자가 말하는 곡즉전(曲則全 곡선은완전하다)의 삶을 살며(slow-life)시에서도 느림의 미학을 구축한다. 기교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함께 머무는 선조주의(線造主義)공법이다. 그러므로 내 언어의 상징기호는 곡선과 소리의 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곡선의 가락은 저 산의 능선이라든가, 강물의 흐름, 또는 징소리나 범종소리, 비포장 시골길, 저녁연기 등 원형적 숨결에 닿는 이미지들이다. 따라서 이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인 인식체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가운데 음식과 풍류가 있고 역사가 있으며 판소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곡선에서 흘러나오는「한국의 아름다운 소리・53」을 모아《소리가락을 품다. 열음사 .2007》를 출간했고, 동학서사인《새야새야 파랑새야. 나남, 1987》의 후속 작업으로 상상력을 몰아 여순사건에서 본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인《달궁아리랑. 지혜사랑 2010》을 출간했다.
우리 시문학을 돌아볼 때 서사시집이 몇 안 되는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서정시에 역사의식이 빠지면 역동적인 부활의지와 추동력이 없어 퇴영적인 시가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은 까닭이다. 또한《남도 풍류의 맥을 찾아서》라는 역사 속에 매몰된 현장기행을 연재하고 있는데 여기서 끌어낸 것이 ‘남도정서 남도정신’으로서의 개땅쇠(개+ㅅ +땅 +쇠) 의 이야기다. 또 나약한 전통서정시의 서정을 극복하기 위해 음식문화 기행으로 일찍이 《남도의 맛과 멋. 창공사》,《송수권풍류맛기행. 고요아침(주간동아 2년연재)》을 썼고 ‘음식詩’를 쓴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개미가 쏠쏠하다’라는 말은 남도 사람이 음식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이 개미란 말이 판소리로 가면 ‘시김새’로 변해서 ‘그늘’이란 말이 된다. 즉 ‘그늘 있는 소리’라고 하면 판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늘이 있는 음식’이라고 하면 ‘개미가 있어 특별한 맛이 난다’ 는 뜻이다.
‘시김새’는 ‘삭다’에서 온 말로 삭임 또는 삭힘으로 발효(숙성)가 잘 되어 ‘곰삭다’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개미’와 그늘은 동격의 언어다. 사람도 곰삭으면 ‘그늘 있는 사람’ 이 되고 소리도 곰삭으면 소리꾼이 최상으로 치는 ‘수리성’이 된다. 시도 그 언어가 곰삭으면 ‘그늘 있는 시’가 되고 품새가 넉넉하면 최상의 서정시가 된다. 언어의 그늘이 없는 시는 깨벗은 목이 되어 뼛다귀만 남는다. 따라서 시김새가 붙느냐 붙지 않으냐에 따라서 소리꾼의 목도 판가름 난다. 해맑은 양성이나 타고난 천구성도 수리성이 끼지 않으면 청중을 후려칠 수가 없다. 즉 부러진 목, 캄캄한 떡목, 건넘은 목은 ‘째진 목’또는 ‘갈린 목’ 이라 해서 귀명창 반열에도 못 오른다. 절이 잘 삭은 동동주와 같은 맛을 낼 때 명인 명창도 되고 국창도 된다.《토박이 말 쓰임 사전》(동광 출판사)에서 살펴보면 ‘개미’와 ‘그늘’은 다음과 같이 정리 되어 있다. (필자가 처음 올린 말)
개미 : 남도 음식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맛.
그늘 : 넉넉하게 안으로 끌어안은 여유나 여백 또는 그 아량과 힘.
그렇다면 이 곰삭은 소리 즉 시김새가 붙은 소릿결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걸 시로 증명해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캄캄한 대숲 오래된 부뚜막엔 언제나 앵병이 놓여있습지요, 왱병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가전비법으로 전해져 오는 식초 눈이 살아 있어 들척지근* 혀끝이 오그라붙기도 하지요, 남도 사람들은 이 맛을 두고 왱병이 운다고 합니다. 봄바람 불어 한 번, 가을바람 불어 또 한 번, 그래서 앵병을 아예 왱병이라고 부르는데 그 병모가지만 보아도 눈이 절로 감겨 오고, 황새목처럼 목이 찔룩거려 옵니다. //봄은 쭈꾸미 철이고 가을은 전어 철입지요. 부뚜막 왱병이 한 자리 얌전히 있지 못하고, 오도방정 떠는 통에 잠자리 구들장 들썩거려, 빙초산 초파리들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어집니다. 앞대 개포, 쭈꾸미 배 들었나 전어 배 들었나 한겨울 밤에도 허리가 쑤시고 아린 가슴 늙은이는 잠 못듭니다. 죽을 때도 허공에 깍지 손 얹고, 왱병 모가지 잡는 시늉하며 손 무덤 짓습니다. // 그래서 남도 사람 소리는 시어진 초맛이 배어 해맑은 목소리도 되고 수리성도 됩니다. //또 이것을 시김새 소리라고도 합지요, 시김새붙은 소리는 왱병 속에서 왔기에 소리 중에서도 땅을 밟는 뱃소리, 하다못해 한바탕 바가지로 설움을 떠내는 큰 소리꾼도 되고 명창도 되는 것입지요.
―「왱병」, 전문
시는 개인적인 한을 드러내는 언어지만 시가 역사의식 추동력 곧 민중의 한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는 민족시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시는 원천적으로 사유재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공유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시의 기능 중 예언적 기능을 담당하는 언어를 주술적 언어라 함도 이 때문이다. 이 기능은 한 시대의 바람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려주는 바람닭과 같은 존재고, 날이 어떻게 새는가를 알려주는 새벽닭과 같다.
그늘이란 말 아세요?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 소리마당 /한의 때깔을 벗고 나면 /그늘을 친다고 하네요 /개미란 말 아세요? /좋은 일 궂은 일 모래알로 다 씻기고 /오늘은 남도 잔칫마당 모두들 소반에 둘러 앉아 맛을 즐기며 /개미가 쏠쏠하다고 하네요 / 순채*란 말 아세요? /물속에 띠를 늘이고 사는 환상의 풀, 모세혈관의 피를 맑게 거르는∙∙∙// 솔찮이란 말 아세요? /마음 외로운 날 들로 산으로 바장이며 /나물 바구니에 솔찮이 쌓이던 나숭개 봄나물들∙∙∙∙∙∙∙ / 그러고도 쑥국과 냉이 진달래 보릿닢 홍어앳국∙∙∙∙∙∙∙ /벌천**이란 말 아세요? /시집온 지 사흘 벌써부터 기러기 고기를 먹고 왔는지 /깜박깜박 그릇을 깨기만 하는 이웃집 새댁.... /사는 재미도 오밀조밀 맛도 아기자기 /산 굽굽, 물 굽굽 휘어지는 남도 칠백 리 /다 우리 씀씀이 넉넉한 품새에서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에요.
―「그늘」, 전문
*순채: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수초水草,
**벌천: 주의 깊지 못하고 대충대충. 설렁설렁 넘어감
2.한과 해학
오동나무골(桐里) 소리선생 신재효의 소리꾼 규정에 따르면 ‘판’에서는 1)인물치레 2)사설치레 3)득음(수리성) 4)너름새(발림), 소리에서는 1)고수 2)창으로 나온다. 이른바 이것이 판소리다. 판소리는 그 판을 짜는 캐릭터에서 보면 고수와 소리꾼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오페라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사설치레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긴장 관계를 끌어 올려서 끌어내리는 서사무가처럼 맺고 풀림의 극적인 요소로 입말인 육담이나 막말을 널어놓는다. 청중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하고 보상을 제공하는 해학과 골계미의 장치라 할 것이다. 다음은 춘향가의 대단원인 ‘춘향모와 어사의 상봉’ 장면이다. 춘향이 늙어 월매 된다고 했던가. 춘향모 동문 밖에서 막걸리 몇잔 걸치고 그 상봉장면에 끼어드는 자지바때한 한풀이 장면을 보자
‘춘향을 뉘가 낳당가 말도 마소 내가 낳네 ... 장비야 배 다칠라, 열녀 춘향이 난 배다, 네 이 놈들............. 사령아, 대한문 잡아라, 어사 장모 행차하신다.’ 뒷짐 지고 배를 내밀고 오리걸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동헌 마당으로 들어가는 춘향모 행차만 생각해도 가관이다. 어떤 소리꾼은 이 입말인 ‘네 이놈’들에다 ‘네미랄 모가지를 뽑아 똥장군 통마개로 쑤셔박을 놈들’ 이라고 육담에다 막말을 섞어 끌어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판소리가락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마당‘이 어떻게 때깔을 벗고 나의 시에 수용되는지 알아보자.
그래서 근동에서는 씨종에다 씨문서를 가진 벙어리 쌍것들로 구메혼인*에도 가마에 흰 띠를 못 얹혔다지만, 그래도 귀 떨어진 엽전 하나는 꼭꼭 때워 쓰는 착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읍내 장텃거리 그 쇠전머리 윷판막의 말뚝을 뛰어올라 반벙어리 장쇠아범이 혀를 집게로 뽑혀도 쌍놈의 말은 쌍놈의 씨로 남는 법이여, 그라믄 쓰간디 그래도 우리 동학장이들이 바구미같이 바글바글 끓던 그때 그 장날이 멋이었당깨. 이러고서는 한참 외장을 놓더라는 것이다. // 아 동헌 마루를 우지끈 부수고 일상투를 끌어내어 수염을 꼬시르고 깨를 벗긴 채 볼기를 쳐 三門 밖으로 내 쫓았더니 그래도 양반 때는 알았던지 옴팡진 씨암탉처럼 두 손으로 쇠불알을 끄슥드랑깨 활텃거리에서 작것, 죽창 끝에 안 걸렸드랑가. 뚝소리 내고 떨어졌당깨. 옴마 **그란디 한 여편네가 엎어지드니만 옴마, 이 작것. 이 작것. 우리 딸내미 잡아먹은 갓끈 달린 이 작것 하드니만 치마폭에다 싸들고 줄행랑을 쳤드랑깨. 혀는 뽑혀도 말은 바로 하지만 말이여. 내가 그 달딴 녀석 아닌가 말이여. 알긋써. 이러더니란다.
―「줄포마을 사람들」 부분
*구메혼인: 약식결혼 (구메밥: 옥문의 구멍으로 넣는 밥)
**옴마 : 오매(감탄사).전라도 방언
중중모리에서 휘모리 가락으로 몰아치는 장면이다. 입말인 육담에서 막말로 까부수는 욕설은 고을원님(군수, 조병갑)에게 딸 잡아먹힌 한풀이로 춘향모의 거드름 피우는 장면과 비슷하다. 안핵사에게 쇠집게로 혀를 뽑혀 반벙어리가 된 장쇠아범이 외장을 놓는 너름새는 ‘춘향을 뉘가 낳당가 말도 마소 내가 낳네’ 하고 거드름 피는 장면과 같다. 판소리에서는 전라도 토속어 특히 너름새의 태반은 육담과 막말로 이루어진다. 너름새가 없는 판소리는 비극적 텐션(tension)만으로 이루어져 안꼬 없는 찐빵과 같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그 표준말이 전라도 말이며 너름새의 태반은 전라도 욕설이다. 이 욕설이라는 것도 이면에 겹침이 없으면 공염불이어서 만담이나 말놀이(pun)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3.원환적(源還的) 그늘과 한의 극복
앞산머리 자줏빛구름 옥색빛이 섞갈려 휘돌더니 /그 빛 연한 솔잎마다 그늘지는 소리 /산봉우리들도 수런수런 잔기침을 놓아 /보기 좋은 달하나 해산解産하고 /몸을 푼다 //
선한 눈, 코, 입, 짙은 숱 눈썹 /처음 눈 맞춘 죄로 /옥사장 큰칼을 쓰고 창틀을 /넘어다볼 줄이야! // 진개내 앞 냇가에 개가 짖어 /한밤 내 개가 짖어 /은장도 날을 갈아 /눈물에 띄운 /달하 귀기 서린 앞산 그리메 /밤부엉이 울어 쌌는데// 구리 동전 녹슨 상평통보 /몇 바리쯤 동헌 마루에 져다 부려야 /이 몸 하나 평안하겠느냐? 평안하겠느냐? ―「춘향이 생각」,전문
제 1연은 국토 산수정신인 곡선의 상법에서 끌어낸 소리 이미지로 산봉우리에 달이 뜨는 장면이다. 다시 말하면 서사극에서 볼 수 있는 영웅탄생 설화와 같다. 여기서의 달은 바로 이 도령의 얼굴을 의미하고 제 2연은 춘향이 옥중에서 쑥대가 되어 그 달 (이도령)을 보고 처음 ‘눈 맞춤’의 사랑으로 큰칼을 뒤집어 쓴 ‘사랑도 죄가 된다’ 는 연결고리를 갖는다. 그 달이야말로 2, 3, 4, 연에서 감옥의 음산한 분위기를 묘사하면서 ‘절개'를 상징하는 ’은장도‘ 날을 갈아 눈물에 띄운 달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그 첫사랑의 절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으로서 마지막 결구연에 있는 의미전도에 있다. 즉 ‘돈만 있으면 귀신도 사귄다’ 는 현실 비판이면서 탐관오리의 수탈에 그 주제가 놓인다. 고전을 수용할 때는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만일 이 작품에 춘향모의 너름새를 끼워 넣는다면 ‘에끼 빌어먹을 년, 네 ×엔 금테라도 둘렀더냐’ 하면 비극미에 골계미를 덧뵈기로 하여 끌어내리기 위한 기법으로 전환 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듯 판소리에서 골계미는 신바람(흥) 을 일으키는 힘이 된다. ‘아나, 춘향이 엉덩짝 날아간다’고 못짐을 지고 온 농부가 못단을 무논에 내어 던지면 모심는 사람들은 한바탕 꺄르륵 웃고 그 신바람에 고된 줄도 모른 채 모를 심는다. 이것이 과거의 나약은 민족 서정시에 보이는 민족의 恨을 역동적인 부활의 힘으로 끌어올리는 장치가 된다. 역사의 추동으로 극복의 대안이 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 작품은 이 추동력의 극복 의지로서 써 본「땡볕」이라는 시다.
삼한 적 하늘이었는가 고려 적 하늘이었는가 / 하여튼 그 자즈러지는 하늘 밑에서 / ‘확 콩꽃이 일어야 풍년이라는디, /원체 가물어놔서 올해도 콩꽃 일기는 /다 글렀능갑다’//두런두런거리며 밭을 매는 두 아낙 / 늙은 아낙은 시어머니, 시집온 아낙은 새댁, /그 새를 못 참아 엉금엉금 기어나기는 것은 / 샛푸른 샛푸른 새댁, /내친 김에 밭둑 너머 그 짓도 한 번 //“어무니, 나 거기 콩잎 몇장만 따 줄라요?” / (오실할 년, 콩꽃은 안 일어 죽겠는디 콩잎은 무슨 콩잎?) / 옛다, 받아라 밑씻개 콩잎 /멋모르고 닦다보니 항문에서 불가시가 이는데 /호박잎같이 까끌까끌한 게 영아니라 /‘이거이 무슨 밑씻개?’/ 맞받아치는 앙칼진 목소리. /“며느리밑씻개” /어찌나 우습던지요 //그 바람에 까무러친 민들레 홑씨 /하늘 가득 자욱하니 흩어져 날았어요 /깔깔거리며 날았어요 /대명천지, 그 웃음소리 또 멋도 모르고 /덩달아 콩꽃은 확 일었어요.
4.토착정서- 황토, 대(竹), 뻘
위의 시는 남도의 토속정서 즉 ‘남도의 표본정서와 말가락’을 널어 본 작품이다. 이는 내 시의 코드인 ‘남도 정신 남도 정서’에서 ① 황토의 정신 ② 대(竹)의 정신③ 뻘의 정신 중 황토정신의 보기가 된다. 역시 육담과 막말이 섞여 있고 토속어가 그 톤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방언시라고 규정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이 점을 경계하고 있다. 비속어는 벤야민이 말한 고급 정서로서의 아우라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이 시의 아우라는 자연과 인사가 어우러진 마지막 결구연에 있다.
시가 비속어에 눌릴 때 천격으로 떨어진다. 그동안 페미니즘에서 나타난 혐오스러운 시는 이 심원한 정서를 터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 심원한 정서야말로 서정시의 마지막 진수다. 지금도 서정시가 있느냐고 묻지만 유전자(단백질) 나 야생 또는 유목이나 우주적 상상력을 타고 새로움의 시라고 우기려면, 이 정서의 결핍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위의 시에서 육담이나 막말을 그대로 사용해서 결구연에 나오는 심원한 정서를 터주지 못했다면 그건 막말로 이루어진 뼛다귀 詩밖에는 안 될 것이다.「육담」이란 무엇인가? ①품격이 낮은 말 ② 야비한 이야기 ③ 음담패설을 내용으로 하는 말가락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여성성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음은 한국시의 약점이고, 이 약점을 극복하는 최근 몇 년간에 쓰여진 시들로는 오탁번의 남성성을 들 수 있다. ‘굴비’‘폭설’ ‘엘레지’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육담이나 막말 (패설)은 땅에 쓰는 글씨다.
다음 작품은 농악에서 흘러나온 땅을 메다치는 메치기 소리로서 나의 시쓰기 중 뻘의 정신인 ‘뻘물’이란 시다. 순천대학에 오기 전 남도 3대정신 중 마지막 뻘의 정신을 캐기 위해 쓴 제9시집《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시와시학사, 1998》에 실려 있다. 변산시대를 마감하며 쓴 마지막 작품이다. 뻘물이 배지 않은 삶은 싱거워서 남도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엥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구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소리가 좋아// 하늘로는 가지마........ /하늘로는 가지마 ......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 울음 /그 징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페로몬 pheromone: 암꽃이나 암벌이 수컷을 부를 때 내뿜는 분비물 .또는 그 냄새. **쏘내기 : 소나기
위의 시는 뻘물이 튀지 않은 삶은 얼마나 싱거운 삶인가를 예시한다. 알다시피 농악은 열 두마당으로 판을 짠다. 따라서 농악은 하늘을 아우르며 땅을 밟는 소리다. ‘음률은 하늘에서 나와 땅에 깃들고 사람에 의해서 그 품격이 완성된다’는 공자의 예기(禮記)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우도 농악이 검약과 절제미로 마디가 끊긴다면, 좌도 농악은 그보다 세류청청 휘늘어진 가락이다 어쨌든 사물놀이에서 북과 꽹과리가 가락을 흩는다면 징은 일원상으로 그 허튼가락을 둥글게 모아 땅에다 메치는 소리다. 마치 ‘밤중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다. 즉 일원상의 소리로 거듭나는 소리다. 이는 내 시의 상징기호인 ‘곡선과 소리의 상법(想法)’에서 흘러나오는 ‘원환적이고도 주술적인 샤머니즘의 뿌리를 흔드는 가락’이 될 것이다. 그러한 공간 (spazio) 속에만 나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곡선이 아니면 이런 공간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상징은 한 시대의 정신을 찌르고, 작은 상징 하나는 삶을 바꾸어 놓은 時針과 같다. 그러므로 큰 상징은 종교와 철학에 있고, 작은 상징은 詩의 언어 속에 있다. 그건 가을날의 느릿한 괘종 소리와 같이 언어의 오묘한 그늘 속에서만 들린다. 그늘을 갖지 못한 詩. 그늘을 갖지 못한 삶. 그늘을 갖지 못한 사랑은 푸석거리는 먼지와 같다. 박새가 나무 그늘 속에 집을 짓듯 내 영혼 속에 아늑한 집을 친다
―「작은 상징」, 부분
위의 시에서 보듯 이 원환적인 이미지는 ‘가을날의 느릿한 괘종소리와 같이’ 언어의 오묘한 그늘에서 찾지 못하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느림이란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피에르 쌍소는「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에서 느림을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 이라고 쓰고 있다.
5. 대(竹)의 정신
나는 위에서 내 시의 ‘상징기호와 원형적 이미지’를 말했다. 그러나 내 시쓰기의 내용을 이루는 국토 3대정신 중, ‘대(竹)의 정서와 가락을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소월이나 백석의 시에서는 대숲의 정서가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서북 정서를 타고 났기에 그렇다. (백석의 시<남행시초>에 나타난 ’청대놀이‘는 통영에 살고 있는 애인을 찾아 갔기에 나온 시다) 대와 난초는 충청도 이북으로 가면 희귀해진다. 특히 대(竹)의 남방한계선은 강릉까지가 된다. 다음 작품은 대숲의 정서로 동학정신을 밝혀본 시다.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그을음 내, 몽당 빗자루도 개 터럭도 /보리 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댓이파리의 맑은 숨소리.
―「대숲 바람소리」, 전문
댓이파리의 맑은 숨소리는 청명하고 소쇄하기 이를데 없다. 그 대신 1품계인 소나무의 솔바람 소리는 은일 장중하다. 송화가루가 날리는 윤사월의 솔바람은 산골짜기 하나를 들었다 놓는다. 위의 시에서 육담이나 막말을 널어놓은 너름새는 빠져 있지만 두두물물이 ‘소리’와 어울려 심원한 정서를 불러온다. 시각 이미지에 선행되는 것이 소리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영혼 속에 장착된 유전자로 소인(素因)된 원형적 이미지가 바로 소리나 냄새 맛이다. 시각은 후천적 학습으로 길들여지지만 청각이나 후각은 선험적으로 타고난 감각이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새가 소리와 후각만으로 어미를 인식하는 능력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소리의 그늘 속에 바로 남도의 역사와 정서가 숨어 있다.
대(竹)는 난세에는 죽창으로 빛나고 태평성대엔 3죽(대금, 중금, 소금)의 피리소리로 뜬다. 아마 늦가을 밤에 무형문화재 이생강의 대금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간장이 저며 올 것이다. 남도를 기질적으로 ‘광대들의 고향’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향이니 의향이니 하는 것도 결코 우연하게 생긴 말은 아닐터이다. ‘문안에 들면 대밭이 있고 방 안에 들어가면 난초가 있다.’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철따라 갯바람이 불면 부뚜막의 ‘왱병’이 운다는 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싱거운 것은 남도 음식이 아니다. 시 또한 ‘개미’가 있어야 격렬한 자극성이 나온다. 품바타령(무안 일로 천사마을) 보존회나 민3현6각(나주) 연구회가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은 모두 남도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6. 소리의 상법과 울림
소리의 가락 연구로는 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지리산 뻐꾹새」에 오면 보다 정확한 서사적 구조를 읽어 낼 수가 있다.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 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 알았다.// 지리산 중 /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이 시는 한(恨)의 설움인 뻐꾹새의 울음이 울음으로 끝나지 않고 순차적인 서사구조 속에서 그 울음이 어떻게 확산되어 생산적 부활의 힘으로 표출되는가를 보여준 시다. 1연에서 화자가 뻐꾹새 울음의 비밀을 제대로 알기까지는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시간과 공간 이동을 드러낸다. 즉 한 마리의 뻐꾹새 울음이 삭힘의 시간(오래 남은 추스름 끝)을 거쳐 집단적인 한 (여러 마리의 울음)으로 보편화 되거나 세상을 두루 울릴 수 있는 힘을 구현한다. 이것이 곡선에서 나온 울음(소리의 상법)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시 판소리 가락으로 가져가 본다면 1연에서는 완만한 진양조로 시작한 뻐꾹새 울음이 2연의 중반부에서 여러 산봉우리를 받아 넘김으로써 중모리 또는 중중모리로 확산되고 3연에서 오래 추스르며 숨을 고른 뒤, 4연에서 다시 섬진강의 힘쎈 물줄기가 되어 자진모리로 흐르다가, 5연에서 세석꽃밭을 다 태우는 휘몰이로 절정을 이루는 가락이 그것이다. 지속적인 공간 속에서 ‘토해냄’ ‘받아넘김’ ‘추스림’ ‘열림’ ‘밀어올림’ ‘태움’의 과정으로 순차적인 공간 이동, 즉 지리산하-지리산중-섬진강-남해군도-세석철쭉꽃밭으로 ‘상승-하강-상승’ 구조를 이루면서 스케일이 큰 장중한 남성적 가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판소리로 보면 서편제 보다는 동편제에 훨씬 가깝다. 그러고 보면 시에 나오는 지명자체가 동편제의 태생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동사 어군(語群) 으로 조직된 곡선의 가락으로 이 시가 힘을 얻고 있다면 나의 시 쓰기 방법론으로서 밑그림이 되는 다음 작품을 예로 들어도 좋을 듯하다.
7. 곡선의 상법과 어리버리한 삶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 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시골길 또는 술통」, 전문
「시골길 또는 술통」은 ‘지리산 뻐꾹새’의 소리의 울림과는 달리 완전한 시각이미지로 짜여있다. 그 원형 이미지로 보면 신화비평으로 연계될 수 있다. 결구연의 ‘주모가 나와 섰다 /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 길이 치마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라는 그 치마속의 길이 바로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주모의 자궁은 다름 아닌 술의 여신 또는 포도를 생산하는 디오니소스(박카스)와 같은 여신을 암시하고 있다. 또는 노자의 5천언에서 보이는 곡신불사(谷神不死)에서 보이는 곡신의 이름은 현빈(玄牝)마마와 같다. 술은 인간에게 기쁨을 제공하고 그 기쁨은 춤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시골길 또는 술통」은 춤추는 길이 된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직선은 악마가 만든 선이고 곡선은 천사가 만든 선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미친 속도가 달려오고 있다라는 광고문도 말한 적이 있다. 또 직선(고속도로) 속에는 망각된 시간과 무지각의 정지된 속도만 있어 죽음으로 가는 길, 다시 말하면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도시로 가는 길이라고 썼고, 곡선이야말로 추억이 있고 희망이 있고 생체리듬이 있어 생동하는 길이라고 썼다. 36만km를 달리는 동맥과 정맥의 핏줄만 보아도 곡선으로 얼크러진 인체 조직의 선이다. 이 선조주의(線造主義) 공법이 여백과 여유를 만드는 한국 예술이며 이 중에서도 남도예술과 가락은 그 기질과 함께 유별난 데가 있다.
따뜻하다 /저 무덤들 /벌초가 잘 된 추석 무렵의 ∙∙∙∙∙∙∙//우리가 죽어 묻힐 무덤까지 / 제 가락 제 멋에 취하게 /하여두고는 //버선코 같다든가 /기와집 추녀 끝 같다든가 /풀어 흘린 치맛말 같다든가 /처갓집 안방에 둘러 안 가는 데 없이 가는 /대님 푸는 소리 같다든가 / 蘭을 치고 앉은 여인의 둥근 어깨 같다든가 // 하여튼 우리나라 산들의 능선은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 멩아리를 놓으면 /안 울리는 데 없이 /그렇게 항아리처럼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영원이란 이승과 저승의 / 물이라도 비워내듯이∙∙∙∙
―능선, 전문
나는 이 시를 쓰면서 난을 치고 앉은 여인의 둥근 어깨와 저 산의 능선이 몹시 닮아 있음을 알았다. 항아리와 무덤, 무덤들과 밥그릇들(혼자 먹는 밥), 처갓집 안방에서 들려오는 치맛말과 대님 푸는 소리, 이 소리와 곡선은 직선과는 달리 여유의 공간이며 시간이다. 여기에 현대인의 멋과 가락인 삶의 지혜가 있다. 밥그릇을 씻어 엎으면 무덤이 되고 뒤집으면 삶이 되는 이치와 같다. 죽음과 삶의 이 원환적인 가락을 타고 나 또한 언젠가는 저 산자락의「능선」어딘가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그 원환적인 눈부신 길 위에서 나는 지금도 황혼의 범종소리를 듣고 있다. 길을 가다 저물 무렵 범종소리가 들려오면 발을 멈추고 서서 그 범종소리가 능선을 돌아 멀리 감감해질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범종소리에는 내 시의 상징기호가 있고 내 기질적인 삶의 행적이 ‘어리버리한 바보녀석’으로 투사되어 있어 반갑다. 따라서 나는 사람도 요요하거나 위압저인 사람보다는 어리버리한 좀 부족한 매력을 지닌 사람을 좋아한다. 완벽한 사람에게서는 ‘그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상을 쓸어 잠재우는 황혼의 범종소리....// 한 능선을 넘어 어리버리 잠깐을 서서 /에라, 모르겠다 /허리 한 번 펴고 /또 한 산의 능선을 뒷짐 지고 서서보니 /한 산의 능선이 또 한 산의 능선을 가리고 섰다// 어쩌랴, 내친걸음 /또 한 산의 능선을 휘감아 돌아가서 /강물도 저만큼 흐르고 한눈파는 사이// 가응- 가응- //천년 후에도 어리버리 기어서 /하품하고 /종소리, /너 혼자 울어라
-「종소리」, 전문(현대문학 2007,5)
한국의 종소리는 그렁그렁 운다고 했던가? 저 소리결의 맥놀림은 어디까지 가려 하는가? 우리 종소리는 마음에서 울리고 서양의 종 소리는 귀를 울린다고 했던가? 자연은 애를 써서 곡선을 만들고 가는데 인간이 만든 망치는 애를 써서 직선을 만들고 간다. 저 산비탈에 어제 있던 마을이 자고나니 아침엔 빈 터만 남았다. 망치가 지나간 자리, 가슴에 맨발을 묻고 가는 게 아니라 맨발이 발통을 굴리고 간다. 내 사는 마을 대숲머리를 돌아가는 저 저녁 연기 좀 보아라. 저 감추어진 곡선 속에 내 삶이 있고 어리버리한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