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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원문보기 글쓴이: 맑은생명수교회
특정인을 지칭하여 역사적 인물인 '마리 앙투아네뜨'를 패러디한 '말이 안통하네뜨'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불통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국가에 사는 국민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래 글을 올린지도 어언 3년이 다 되가는군요. 세월이 참 유수같습니다. 다시 차분히 읽어보면서 때로는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나중에 주님과 소통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오순절날 성령을 받으면서, 그리고 사역을 통해 주님과 소통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자들에게 풀어전하는 목사들은 과연 하나님과 바르고 바람직하게 소통하고 있을까요? 요즘 언론을 통해 접하는 큰 교회 큰 목사님(?)들은 별로 그런 것같지가 않아서 씁쓸하네요.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자마다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물론 대화입니다. 그러나 진심이 없는 대화는 소통이 아닌 그저 대화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씀(복음선포)과 기도 그리고 사역(섬김)을 통해 믿지 않는 세상 불신자들과도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새해엔 우리 모두 소통의 아이콘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는 은혜와 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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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복음전도로 온전케 하라
지혜자 ㆍ 2011-02-27 (일) 01:50 ㆍIP: 61.xxx.136 ㆍ조회: 2412
*아래 글은 이 곳 게시판에 몇 번에 걸쳐 나눠올렸던 글을 합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손질(오타 수정등등)해서 다시 올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영(프뉴마)과 진리(참-알레데이아)로 예배해야 한다'는 본문이 속한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신학적 이해를 무시한 채, '예배의 구호'로 써먹는 사례가 빈번하다 못해 도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우물쭈물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열린 예배'가 유행합니다. 심지어 '예배의 성공'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한 상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예배,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현재 우리가 드리는 모임예배 나아가 생활예배를 뛰어넘는 광활한 성경적 개념을 지닌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한구절적용'식의 성경이해는 여러가지 페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그러니까 (구약)제사에 담긴 영과 진리, 그리고 제사가 가리키는 바 영적 의미와 진리이신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 찾아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수가성을 그냥 찾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에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그 찾으심을 이루시기(일하기) 위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거쳐 갈릴리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수가란 이름이 가진 역사성을 외면한 채 성경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처음 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쉐켐은 신약에서 헬라어로 음역되어 쉬칼(수가)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마리아와 요세"란 표현이 나옵니다. (갈릴리역)아람어는 종종 끝글자 받침이 탈락되어 불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암-마리아, 요셉-요세'로 말입니다.
쉬카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쉐켐-쉐케, 쉐케(아람어식 발언)를 헬라어 쉬칼로 번역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유서깊은 역사적 고장으로 각자가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시대로부터 시작되는 지명이지만 그 이전 아벨의 제사로 시작해서 아브라함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단을 쌓음-제사'임을 알게 해 줍니다. 야곱의 세겜,모세가 명한 세겜 땅인 그리삼산과 에발산 사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서 율법을 선포하고 에발산에 단을 쌓음등등,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나오는 쉐켐과 제사(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함를 말함)에 대한 이해의 선행없이 곧장 '따옴표'로서의 예배는 무의미를 넘어 본문의 참된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꺼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만 적어도 세겜(수가)에 대해서만은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동참하실 분들은 예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개역개정)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실 위 본문으로 바로 강해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오는 기록인 1-3장을 바르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전체를 다 강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큰 문단으로 되어 있지요. 성삼위 하나님의 '원 창조(첫 장조)의 구조'를 '새 창조'와 이미지로 유비시켜 글을 구성해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1-2:3절 까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문단격인 서론문단은 1:1에서 2:11절 까지입니다.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의 이미지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개의 작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징 중 하나는 마지막 일곱 째 단락을 생략한 채,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 묻어둔다는 사실이지요. 이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서 마지막 문단인 "안식 후 첫 날"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믿을 때-영접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두번 째 큰 문단인 2:12 이하 "그 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에 어어지는 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 두 번째 문단에 속한 글이 '성전정화 사건',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입니다.-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새 창조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씀인데요,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루아흐-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물이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 창조행위의 과정이요 결과였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아노덴-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로고스)이신 아들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례전적인 물세례(사실상 침례)가 이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례는 하나의 상징이요,표(sign)일 뿐입니다. 본질적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에게 아무리 세례를 준다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하여 세례주어 제자삼기 경쟁을 벌릴 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제자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가르치고자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거쳐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힘에 있지 않습니다. 수와 힘의 논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해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십니다. 위 본문 1-4절을 원문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세례를 주고있는데(미완료)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셨다(과거 시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왕국 건설에 이 적은 무리로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숫자를 불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물도 없는(세례주지 못 하는) 사마리아로 가시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메시야 왕국 건설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제자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입이 튀어나온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셨습니까. 천국((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지 못 하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큰 게 좋은 것이고 교인 수가 많아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저히 수와 힘의 논리로 무장하고 그에 함몰되어 주를 따르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보시고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요?
정신차려야 할 때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고 있습니다. 세상 잠에 세상 영광에 취해 있습니다. 술에 잠긴 자 보다 나을게 조금도 없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찾으심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무엇인지, 왜 물세례주어 숫자 불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지를 몸소 가르치고 친히 교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드디어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수가(쉐켐),야곱,요셉의 이름만 들어도 창세기 족장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처음 독자는 1세기 말경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가까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었고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도 대부분 순교하거나 죽었던 시기였을 것으로 봅니다. 더하여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어 쪽복음과 서신의 형태로 여러 교회들에서 읽혀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을 영감하셔서 이 책(요한복음)을 기록케 하신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끝자락(20장)에 나오는 기록목적을 한 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쉐켐에 대해 예습을 하신 줄로 알고 자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물론 사마리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배경)도 생략합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 풀썩 주저앉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에브라임 산지에는 물이 귀합니다.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식구와 가축이 다 마시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우물이라고 합니다. 이 참에 야곱에 대해서도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무릎에 앉아(형 에서와 함께),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하나님 이야기! 생명주시는 구원자가 오신다는 이야기! 창조기사는 물론이요,타락과 회복의 약속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 이야기,제사 제도와 노아 홍수등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야곱입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형 에서와는 전혀 다른 야곱입니다. 그랬기에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빼앗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어코 내 것으로 삼고야 말겠다는 야곱의 거룩한 욕심(열망)이 족장시대 야곱이야기를 그토록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 야곱의 우물에 아브라함의 후손 곧, 야곱의 허리 아래 씨로 계셨던 생명주시는 그 분이 인자됨을 인하여 피곤하여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계십니다. 요한복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심을 동시에 강조하되 어느 한 쪽도 그러니까, 신성과 인성 어느 한 부분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마실 것 좀 다오(주시오)"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입이 한 발이나 나온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다 동네에 들어가고 한 넘(?)도 예수님 곁에 없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 길러 왔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달라 하나이까"
여자의 말이 젊잖아 보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실로 젊잖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말은 언중유골도 아닌 가시가 돋친 발언입니다. '평소에는 상종조차 않고 개 취급하더니만 목마르니까 유대인이라고 별수없구나'라는 응어리가 묻어나는 말입니다.(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도 공부하셨으리라 믿고 약(略)합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위 말씀을 꼽씹어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니 그냥 곱게 물 좀 달라면 됐지 하나님의 선물 운운하면서 이 우물이 마치 유대인 자기들 것인양 말한단 말인가! 우리 조상 야곱이 분명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리고 이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도 없는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생수를 준다는 말인가!'
그래서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대든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지만 이 여자는 그렇게 하고도남을 인생역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예전에(이십년 가까이 전) 요한복음을 좋은 읽을거리로 여겨 참 재미있게 읽고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가지고 설교도 두어 번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젊잖게 성경을 대합니다. 물론 경외심을 가지고 읽어야겠지만 글맛까지 놓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몸을 가져셨기에 마실 것 좀 다오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도 참말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리만 증거하고 있음이지요.
말귀 알아먹지 못 하는 이 여자는, 아니꼽게 여기고 말꼬리 잡고 대들고 이제는 아예 비아냥댑니다. '아니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딨담! 내가 바본 줄 아나?' 그래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긍정을 통한 강한 반감과 비아냥댐을 표시하고 있음이지요. (상대가 말도 안 되는 말로 고집을 부릴 적에,'그래 니 말 맞다!' 하면서 상대의 말을 인정 안 하려는 우리의 어투도 있습니다)
모든 게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해가 넘칩니다. 무지에서,오해에서 바른 이해(앎)의 자리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여자와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 가능할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으로 진리만 증거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는 없을까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량의사전달체계에 길들여 진 현대인들입니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의사전달이 가져다주는 문제점을 인터넷이 어느 정도는 해소해주는 것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댓글달기가 그에 속합니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는 있으되 소통은 없습니다. 알아먹지 못 하는 자에게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입만 아픕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당장)돌아가라,불러라 네 남편을,그리고 여기 오라"(직역-구둣점은 필자가 임의로 찍음)
우리글 성경은 원문의 글맛을 잘 살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젊잖케 이르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젊잖을 잃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명령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돌아가라 불러라 오라"
여자는 돌아갈 곳도 부를 남편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이 곳에 오라고 해도 올 수 없는 아니,올 이유가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만 기가 죽어 꼬리를 내립니다. 겉은 멀정해도 속은 썩을대로 썩은 자신의 내면을 들킨 기분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어요(나는 남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 대화는 성과가 있습니다. 여자가 비로소 알아먹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주여 제가 인제사(지금) 보니까 선지자시네요"(의역)(여기서 '주'란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쓰는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아까는 제가 몰라봤습니다. 여느 유대인과 바를 바 없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소곳해진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회개란 입에 발린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으로부터 돌이켜야 참 회개입니다. 여자의 진심은,앞서 자기가 한 말-아니꼽게 여기고 말꼬리 잡고 대들고 비아양댄 것-에 대한 잘못을 (비록 표현은 안 했을지라도)알고 돌이켜 상대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몰라서 저지런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입니다. 그러나 무지가 면책사유는 될 수 없습니다. 무지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많이 알고,잘 안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선생이 잘못하면 그 때는 형편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죄많고 한많은 인생을 살아온 이 여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혼을 다섯 번이나 한 여자입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이 여자가 그런 남성편력을 가지고 있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랬을지라도 주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 할 것입니다.
그리고,우리는 섣불리 단정짓기를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반말로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글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생판 처음 보는 여자에게 반말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람어로 말씀하시고 헬라어로 기록된 위 본문이 가리키는 그 현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제 여자는 자신이 평소 가졌던 관심사에 대해 물어봅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만)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위 본문에는 "예배"란 단어가 무려 열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단어는 딱 한 번 나옵니다. '유대인에게서 나오는 구원'이란 말씀이 열 번의 "예배"란 말씀을 견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여인과의 대화에서 "생수(살아 있는 물),"하나님의 선물","내가 누구인지","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등등을 언급하신 이유는,"예배"와 "구원"과 연관지어 미리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구원)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해 주고자 하심인 줄로 믿습니다. 예배(제사)로 얻게 되는 그 선물은 "내가 누구인지"를 계시하심으로써,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앞서 말한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대로 나를 믿으면(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으면) 하나님의 선물(구원-영생))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셈이지요.
다시 세겜으로 여행을 떠나야 할 싯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하여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단을 쌓습니다. 아브람이 세겜에서 비로소(처음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노아의 번제 그리고 조상들이 전해준 대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단을 쌓은 아브람입니다.
그 뒤 야곱이 이 세겜에서 동일하게 단을 쌓습니다. 모세는,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차지하면) 이 세겜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신명기에서 두 번에 걸쳐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기록된 분부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들어 아브라함이 처음 단을 쌓은 곳인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 아래로 가서 그렇게 합니다. 이 때 눈여겨 볼 말씀은 에발산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점입니다. 절반의 지파는 저주를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나머지 절반의 지파는 축복을 위하여 그리심산에 섰었지요. 저주를 위해 선 에발산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는 말은 중간기 시대 혼혈잡족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기록자 요한은 족장시대와 가나안 정복시대 때 선조들이 지낸 그 제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인 제사제도를 살펴봄이 본문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제사는 제사장과 제물로 구성됩니다. 아벨의 제사나 아브라함의 제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오실 구원자(여인의 후손으로서 메시야)는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으로 오실 것임을 이사야는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출에굽기 12장에 '여호와(주)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미 예표되어 있음이 그 이유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나오는 세 번의 유월을 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주(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지 않고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부르고 있습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지들만의 유월절임을 드러내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실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유대인의 유월절"을 '하나님의 유월절'로 되돌려 놓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친히 제물(어린양)로 드릴 것임을 구약 전반에 걸쳐 계시하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유대지파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임이 야곱의 유언(예언)과 다윗언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옛 언약의 성취자로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자손)로 오셨기에 "...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이 죄인으로서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자신과 가족 내지는 백성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제사는 필연적으로 섬김을 수반하게 되지요. 신약시대에,예배란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제사에 근거해서 죄인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 회개로부터 출발하여 그 분의 백성으로서 섬김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섬김이란 단어는 일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에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중 여호수아서 24장 14절로 26절까지를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섬김(아바드-serve)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에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로 시작되는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믿는 것이 곧 제사(예배)란 말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되 제사에 담긴 영적 의미와 진리에 따라 바르게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될 테니까요.
결국 예배(제사)란,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냅니다.요한복음 4장 본문은 이를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과연 여인의 말 대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되 삶과 죽음,부활로써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에 나오는 모든 예언을 따라 그리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기다...(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영생)을 선물로 받아 그 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외연이 확대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만 받고 그 땅(세겜) 한 평 차지하지 못했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씨)이신 우리 주님은 땅(천국-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셨습니다. 이제,그 세겜 땅에서 예배(제사)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차지하신 땅(천국)에 거하는 자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심길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모임 예배는 물론이요 삶으로 드리는 제사,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는 삶이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이상히 여겼다는 말은 놀랐다는 말입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아니? 우리의 호프 랍비께서 사마리아인 그것도 하찮은 여자와 담화를 나누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여자와 담화하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묻고는 싶었지만 아무도(한결같이) 묻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비록 남편은 불러 올 수 없는 처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여인의 행동과 말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떠올리게 합니다.(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아직까지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릅니다. 나중에는 "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부활후에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 사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합니다. 지들은 이미 다 먹고 왔습니다. "잡수소서"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함께 먹어야지그래 음식 싸들고 와 내밀면서 "랍비여 잡수소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영접하고)서는 자기들과 유하시기를 청합니다. 유한다는 말은 함께 먹고 마시고 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했던 사마리아인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교제하십니다. 참으로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유대주의에 물든 제자들과는 얼마나 다르신지요!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만나자마자 물동이도 내팽개친 채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제자들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12명이 밥 1인 분 싸가지고 온 일'이 전부였습니다. 전도(예수님을 전하기)는 커녕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섞지 않았을 넘(?)들입니다. 입 꾹다물고. 그러나 씹어먹기 위해서 상.하악골은 부지런히 움직였겠지요.
이런 제자들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신앙위인들의 전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임을 철저히 드러낼 뿐입니다.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되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실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좀 괜찮은 자가 있는 지를. 그런 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고 나니까 믿음의 용사로 변합니다.
위 본문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제발 전도해라. 너희들의 전도(예수님의 제사-십자가의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찾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전도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한 사람도 안 데려 왔구나!'
이 지점에서, 이들이 정말 주님의 제자가 맞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제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죄많은 그 여인은 먹고마시는 문제 팽개치고(물동이 버려두고) 주님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죄많은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 찾으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메시야를 만난 자들은 입만 살아서 설치지 않습니다. 온 맘과 몸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의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는 자들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죄인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후반부는 하나님이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삶을 통해,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를 찾아나서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자가 없다면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4장의 요지를 따른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메시야를 만났다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삶으로 하든, 입술로 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