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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문학 세미나/김왕식
문학특강
“사물을 한 뼘 비틀어 보라"
용사(事)에서 신의(意)로,
사무사(思無邪)에서 창의적 시 쓰기까지
2026. 9. 12(E) 14:00-17:00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B1)
대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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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청람의 변/3
I. 여는 말_시는 멀리 있지 않다/ 5
Ⅱ. 시인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질문/ 8
"무엇처럼 보이는가"에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로
III. 창작의 첫 번째 법칙/ 11
-이름을 보지 말고 상태를 보라
IV. 사물을 보는 다섯 개의 눈/ 13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Ⅴ. 이인로의 용사(用)/16
-옛사람의 창고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Ⅵ. 용사는 베끼기가 아니다/ 18
-빌리는 것은 재료이지 문장이 아니다
VII. 21세기의 용사/ 20
-고전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다
VIII. 이규보가 던진 질문/22
-옛것을 질 이는 것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가
IX. 용사와 신의를 한 식탁에 앉혀보자/ 24
-묵은지와 오늘의 불맛-
X. 신의(意)란 무엇인가/ 26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을 찾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일
Memo/29
詩_가을에는_김왕식/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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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한 뼘 비틀어 보라"
■청람의 변
왜 사물을 한 뼘 비틀어 보라고 말하는가!
한동안 글을 읽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써왔다. 많은 시를
만났고 많은 문장을 지나왔다. 좋은 작품 앞에서는 오래 머물
렀고 마음에 닿지 않는 문장 앞에서는 왜 닿지 않는지를 생각
했다.
문학을 공부할수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시는 말의 재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단어를 많이 안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철학을 많이 알고 있다고 깊은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시를 결정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같은 나무를 보고도 누군가는 나무만 본다. 누군가는 그 나무
가 견딘 계절을 본다.
같은 구두를 보고도 누군가는 낡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뒤
축에 닳아 있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본다. 그 차이는 크다. 그
작은 차이가 산문과 시를 가르기도 한다.
강의의 제목을 《사물을 한 뼘 비틀어 보라》라고 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상을 억지로 뒤집어 보라는 뜻이 아니다. 낯설
게 쓰기 위해 괴상한 말을 만들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정확
하게 본 뒤 조금 다른 자리에서 한 번 더 바라보자는 뜻이다.
- 3 -
딱 한 뼘이면 된다. 그 한 뼘은 짧지만, 문학에서는 매우 먼
거리다. 사전에서 시로 가는 거리, 기능에서 운명으로 가는 거
리, 사물에서 사람으로 가는 거리다.
1. 여는 말
-시는 멀리 있지 않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시를 쓰겠다고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 바다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새벽안개를 기다리고, 낙조가 가장 붉어지는 시간을 계산하고, 달빛 좋은 밤이면 일부러 강가로 나간다.
물론 좋은 일이다.
산에도 시가 있고, 바다에도 시가 있으며, 낙조와 달빛은 수 천 년 동안 수많은 시인을 불러낸 훌륭한 문학적 자산이다. 문제는 산까지 갔는데 산만, 보고 오는 데 있다.
달을 보고 와서 "달이 밝았다."라고 적고, 꽃을 보고 와서 "꽃이 아름다웠
다."라고 적는다면, 시인은 수천 년 동안 같은 꽃집을 다시 여는 셈이 된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미 꽃이 알고 있다. 달이 밝다는 사실도 달력에 적혀 있다.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사실을 다시 보고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 뒤에 숨어 있는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일이다. 시가 어려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특별한 대상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너무 익숙한 것을 너무 익숙하게 바라보는 눈에서 아직 벗어
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컵 하나를 보자. 컵은 물을 담는 그릇이다. 사전적으로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누군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 식탁 위에 그 사람이 쓰던 컵 하나가 그대로 놓여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 컵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입술의 자리가 된다. 금이 간 찻잔도 그렇다.
보통 사람은 말한다.
"깨진 찻잔이네"
시인은 조금 다르게 본다.
"물을 담고 있으면서도 제 금 간 자리를 남에게 흘리지 않는
그릇"
그 순간 찻잔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한 인간의 초상이 된다. 빈 컵을 바라보아도 좋다. 빈 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놓고 있는 작은 방일
수 있다. 같은 컵이다. 컵의 모양도 변하지 않았고 색깔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시인의 눈뿐이다. 그런데 눈 하나가 달라지자,
사물의 세계 전체가 달라진다.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시인은 세상을 뜯어고치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 바꾸는 사람이다. 여기서 오늘 강의의 핵심어 하나를 꺼내고 싶다.
"한 뼘 비틀기"
너무 많이 비틀 필요는 없다. 두 뼘을 비틀면 억지가 되고 열뼘을 비틀면 독자가 따라오지 못한다. 딱 한 뼘이면 된다.
사실에서 허구로 도망갈 정도가 아니라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이동할 만큼이면 된다. 그 한 뼘이 중요하다. 산문은 사물을 설명한다. 시는 사물에게 한 번도 없던 두 번째 생을 준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새벽 출근길 버스 안에 손잡이가 줄지어 매달려 있다. 대부분
은 그것을 잡고 간다. 손잡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조금 달리 보면 버스 손잡이는 하루 종일 수백 사람의 체중을 받아준다.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준다. 정작 자
신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그때 이런 문장이 가능해진다.
"수많은 사람을 붙들어 주고도 한 번도 목적지에 내려본 적
없는 것, 버스 손잡이"
손잡이에 없던 의미를 억지로 붙인 것이 아니다. 손잡이가 실
제로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이다.
좋은 비유는 이런 데서 나온다. 시를 잘 쓰려면 먼저 잘 보아야 한다. 잘 본다는 것은 눈을 크게 뜨는 일이 아니다. 사물에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숨어 있음을 알아보는 일이다.
오늘 강의에서 계속 되풀이할 네 문장이 있다.
“자세히 보라.
한 번 더 보라.
한뼘 비틀어 보라.
마지막에는 사람에게 돌아오라."
시의 대부분은 이 네 과정 안에서 태어난다.
Ⅱ. 시인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질문
-"무엇처럼 보이는가"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로-
사과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아 보자. 처음 바라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빨갛다, 둥글다, 탐스럽다."
조금 문학적으로 쓰려고 하면,
"가을 햇살에 붉게 익은 사과" 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쁘지 않다. 문제는 너무 익숙하다는 데 있다. 수많은 사람
이 이미 같은 사과를 보았고 비슷한 표현을 썼다.
여기서 시인은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사과는 무엇처럼 생겼는가?"
여기까지도 아직 표면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사과가 사람이라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사과는 지금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나무와 사과의 관계를 사람의 관계로 옮기면 무엇이 되는
가?"
질문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진다. 가지 끝의 사과를 바라보
자. 사과는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도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
모습을 한 뼘 비틀어 보면,
"나무가 끝내 놓지 못한 붉은 심장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문장이 성립하는 이유가 있다.
사과의 붉음과 심장의 붉음이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과가 나무와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받는 관계와 심장이 몸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관계가 겹치기 때문이다.
좋은 은유에는 외형의 닮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처지의 닮음이 있다.
이번에는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보자. 사과는 더 이상 나무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무에게서 퇴직한 가을의 붉은 직원"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약간의 유머가 있으면서 '낙과'라는 자연현상과 '퇴직'이라는
인간의 사건이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벌레 먹은 사과'는 어떨까.
흠집이 생겼다고 버리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잘라 먹어보면
여전히 달다. 여기서 한 사람의 생애가 보일 수 있다.
"세상에 한쪽을 내어주고도
단맛까지 포기하지 않은 생"
이때 벌레 먹은 자리는 '결함'이 아니라 살아온 '흔적'이 된다.
이것이 시인의 시선이다. 시인은 예쁜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
다.
상처의 기능까지 보는 사람이다. 사과를 쓸 때 가장 쉬운 길은 색깔을 쓰는 것이다. 조금 더 어려운 길은 사과의 처지를 쓰는 것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은
그 처지 안에서 인간의 생애를 발견하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 세 번째 길로 들어가야 한다.
Ⅲ. 창작의 첫 번째 법칙
-이름을 보지 말고 상태를 보라-
사람에게 이름표를 붙이면 편하다.
“의자, 나무, 우산, 신발, 밥그릇...
이름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자세히 보지 않는다.
'의자'라고 아는 순간, "앉는 물건"이라는 결론에 도착한다.
문제는 시가 그 결론 이후에 시작된다는 데 있다. 잠시 의자
라는 이름을 지워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다리가 넷이다. 등받이가 있다.
사람이 올라앉는다. 무거운 사람도 앉고, 지친 사람도 앉고, 화난 사람도 앉는다.
사람들은 쉬었다가 떠난다."
의자는 남는다.
하루 종일 사람을 쉬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앉아보
지 못한다.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의자의 주민등록증이 바뀐다.
“평생 남을 쉬게 하고
한 번도 쉬어보지 못한 것
의자"
그 순간 의자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평생 가족의 짐을 받아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부모'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의지의 처지가 인간의 꿈을 대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도 그렇다. 나무를 보며
'푸르다 크다. 잎이 많다"라고 쓰는 것은 관찰이다.
그런데 나무가 발생한 장소에서
'봄도 받고 여름도 받고 폭우도 받고 거울도 받아내고 있
다.'라는 사실을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무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없다.
철새는 떠날 수 있다. 사람은 이사할 수 있다. 나무는 뿌리를 들고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나무는
"떠나지 못해서 강해진 생'으로 읽힐 수도 있다.
또는
"세상 모든 계절의 주소를 한자리에서 받아낸 사람'이 될 수
도 있다.
시인은 이름을 지운 뒤, 그 존재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명사는 사전을 만들고 상태는 시를 만든다.
IⅣ. 사물을 보는 다섯 개의 눈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막연히 "깊게 보십시오"라고
말하면 창작자는 난감하다. 따라서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겉을 본다
“색, 모양, 크기, 냄새, 소리, 촉감...
이것은 기본 관찰이다.
가령 우산.
“검다, 접힌다. 살대가 있다. 비를 맞으면 젖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볼 수 있다.
2. 하는 일을 본다
"우산은 비를 막는다, 열쇠는 문을 연다.
신발은 발을 보호한다. 지우개는 글씨를 지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물의 기능을 안다.
3. 당하는 일을 본다
여기서부터 시가 시작될 가능성이 커진다.
우산은 비를 막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젖는다.
신발은 사람을 보호하지만, 대신 흙과 돌과 아스팔트에 먼저
닿는다.
문은 사람을 들이고 내보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 밀리고
당겨진다.
숟가락은 남의 입에 밥을 넣어주지만, 자신은 한 번도 배부른 적이 없다.
사물의 '기능'이 아니라 사물이 치르는 '대가'를 보기 시작하면 비로소 삶의 냄새가 난다.
4. 사라지는 방식을 본다
연필은 쓸수록 짧아진다. 초는 밝힐수록 줄어든다.
비누는 남을 씻길수록 작아진다. 지우개는 남의 흔적을 지울
수록 사라진다.
이런 사물에는 이미 서사가 들어 있다.
가령 비누를 보자.
"사람들은 깨끗해졌는데 비누만 점점 작아졌다."
여기에는 '헌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독자는 현신'을 생깡하게 되고 느낀다. 이것이 중요하다. 추상어를 쓰지
않고도 추상적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의 힘이다.
5. 인간에게 돌려준다.
마지막 단계다.
연필에서 부모를 본다. 초에서 스승을 본다.
비누에서 간병하는 사람을 본다. 우산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
을 내어준 사람을 본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무조건,
"이것은 어머니 같다."라고 붙이면 안 된다. 사물의 실제 성질과 인간의 삶이 맞아야 한다.
"이를테면 돌멩이를 보며 돌멩이는 희생하는 어머니 같다."
라고 한다면 연결 근거가 약하다.
반면에,
돌계단을 오래 밟아 가운데가 움푹 닳은 모습을 보고, "사람을 위로 올려보내느라 제 가운데부터 낮아진 돌" 이라고 한다면 설득력이 생긴다.
좋은 비유는 감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실에서 시작하여
감정으로 간다.
V. 이인로의 용사(用事)
-옛사람의 창고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이제 조금 더 깊은 문학사 안으로 들어가 보자.
고려문인 이인로(李仁老)의 시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 용사(用事)다.
쉽게 말하면, 옛 문헌이나 역사적 사실, 고사와 선행 작품에 축적된 문화적 기억을 현재의 작품 속으로 불러오는 방법이다.
용사를 낡은 고전 인용쯤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잘 쓰인 용사는 한 단어 뒤에 수백 년의 이야기를 붙여준다.
예를 들어,
'역발산기개세'라는 말을 작품 속에 적절히 사용한다면 항우의 역사와 비극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토사구팽'이라는 말 하나에는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권력의
냉혹함이 들어 있다.
'새옹지마'에는 좋고 나쁨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인생의 역
설이 들어 있다.
한자 네 글자가 단순한 네 글자가 아니다. 그 뒤에 하나의 거
대한 이야기가 서 있다. 이것이 전고의 힘이다.
용사를 음식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오래 숙성된 장을 가져오는 일이다. 오늘 담근 간장과 수십 년 묵힌 장맛은 다르다.
고전 역시 언어의 숙성고다. 그렇다고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장을 어느 음식에 넣느냐가 중요하다.
가령 가을날 이별을 쓰면서 뜬금없이 '와신상담'을 넣는다면
맛이 맞지 않는다. 반대로 긴 기다림 끝에 명예를 되찾는 인물을 쓰며 적절한 고사를 활용한다면 단 몇 글자로 시간의 깊이가 생긴다.
용사의 핵심은 많이 아는 데 있지 않다. 알고 있는 것을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쓰는 데 있다. 현대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쓰며 "아버지의 저녁에는 늘 시시포스
의 돌 하나가 남아 있었다."라고 한다면, 그리스 신화의 형벌
과 반복 노동이 아버지의 삶에 겹쳐진다.
한 단어가 서사를 확장한다. 좋은 용사는 설명을 줄여준다. 고전
을 끌어온 만큼, 시가 더 가벼워져야 한다. 고전을 끌어왔는데 오
히려 설명이 늘어나면 용사가 아니라 강의가 되어버린다.
Ⅵ. 용사는 베끼기가 아니다
-빌리는 것은 재료이지 문장이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용사는 모방과 어떻게 다른가. 옛 표현을 가져왔다고 모두 문학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좋은 요리사가 오래된 조리법을 공부한다고 해
서 옛 요리를 그대로 복제하지는 않는다. 맛의 원리를 배운다.
“불의 세기, 재료의 조합, 숙성의 시간, 간을 맞추는 법'을 배운다.
시도 같다. 고전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은 표현의 껍질이 아니
라 사유의 깊이다.
가령 두보의 시를 읽었다고 하자. 두보가 전쟁 속 백성의 고
통을 바라본 방식은 배울 수 있다. 그런데 두보의 이미지를 그
대로 옮기거나 번역된 문장을 조금 바꾸어 쓰는 순간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모방에 가까워진다.
옛 시인이 달을 보았으면 그 달을 빌려오지 말라. 달을 바라
보는 태도를 배우라. 옛 시인이 어머니를 썼으면 그 어머니의
문장을 가져오지 말라.
자신의 밥상과 자신의 부엌과 자신의 저녁 안에서 자기 어머
니를 다시 찾아야 한다.
또 하나 경계할 것이 있다. 지식 과시다. 한 편의 시 안에
“공자, 노자, 장자....
니체, 하이데거, 카프카, 카뮈..."가 줄줄이 나타난다면 깊은
시가 아니라 이름이 많은 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시 속의 지식은 소금과 같다. 소금이 보이면 요리가 실패한
것이다. 맛으로만 느껴져야 한다. 용사도 그렇다.
독자가,
"이 시인은 고전을 많이 아는군"이라고 감탄하기보다
“이 문장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군." 이라고 느끼는 쪽
이 더 좋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여기에도 맞 는다. 전고는 시를
받치는 주춧돌이어야 한다.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자랑해서는 안
된다.
- 19 -
VII. 21세기의 용사
-고전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다-
용사를 한문 고전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의 시인은 훨씬 넓은 문화 기억 속에서 산다.
"신화, 성경, 불경...
역사, 영화, 회화, 음악, 미술..
세계문학, 현대문학, 고전문학...”
모두 현대적 용사의 자원이 될 수 있다.
가령 다음 문장을 보자.
"마음 한쪽에는 아직 돌아가지 못한 이타카가 있다.”
이타카를 아는 독자는 오디세우스의 긴 항해와 귀환을 떠올
린다.
“전쟁, 유혹, 난파, 방황, 고향, 아내 페넬로페..."
그 거대한 이야기가 '이타카' 한 단어 뒤에서 움직인다. 이것
이 문화적 기억의 힘이다.
또 이런 예도 가능하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시시포스의 돌을 밀고 나갔다."
"저녁이면 월급봉투보다 먼저 돌이 다시 산 아래 내려와 있었다.”
단순히,
“아버지는 힘들게 일했다.”라고 쓰는 것보다 반복 노동의 비
극성이 확장된다.
현대 영화나 미술도 가능하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병실 창가의 해바라기 한 송이가 귀를 잃은 화가의 노란 침묵처럼 서 있었다."라고 쓴다면 고흐의 생애와 색채의 이미지가 현재의 병실과 겹친다.
다만 중요한 원칙이 있다. 이름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용사
가 되지 않는다.
"오늘 마음이 힘들다
카뮈가 생각난다"
이것은 아직 작품이 아니다. 카뮈가 왜 필요한지, 그의 부조
리의 세계와 지금의 장면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가 드러나
야 한다. 고전의 심장과 현재의 심장이 실제로 뛰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명한 이름은 장식물이 된다.
VIII. 이규보가 던진 질문
-옛것을 잘 아는 것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가-
이제 이규보(李奎報)에게 가보자.
이규보의 문학론을 말할 때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가 신의(新意)다.
새로운 뜻. 새로운 생각, 새로운 발견.
여기서 흔히 생기는 오해가 있다. 이인로는 옛것을 중시했고,
이규보는 새것만 중시했다는 식의 단순한 구분이다. 그렇게 보
면 두 사람을 너무 평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규보도 고전을 잘 알았다. 전고를 활용할 줄 알았다. 문제는 고전을 아는 일이 자기 창작의 눈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데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옛말도 자신의 발견이 없으면 살아 있
는 문장이 되기 어렵다.
이를 오늘의 창작 현장으로 옮겨보자. 가을 낙엽을 쓴다고 하자.
'인생무상'이라고 쓰면 틀린 것은 아니다. 수많은 문학이 이미 그렇게 읽어왔다. 이때 신의(意)의 눈은 한 번 더 본다.
낙엽을 자세히 보니 나무에서 떨어진 뒤에도 바람에 계속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무에게서 퇴직한 뒤에도 바람이 자꾸, 출근을 시켰다."라
는 전혀 다른 문장이 나올 수 있다.
낙엽이라는 오래된 소재가 현대인의 노동과 퇴직이라는 경험
을 만나 새로워졌다.
이것이 신의다. 신의는 기괴함이 아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이상한 말'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사실 속에서
아직 불리지 않은 관계 하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IX. 용사와 신의를 한 식탁에 앉혀보자
-묵은지와 오늘의 불맛-
두 사람을 오늘의 식당으로 초대해 보자.
김치찌개를 끓인다.
이인로가 말한다.
"좋은 묵은지를 써야 하네."
맞다. 덜 익은 김치로는 깊은 맛을 내기 어렵다.
문학도 같다.
좋은 작품을 충분히 읽지 않고, 고전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언어의 전통도 모른다면 표현은 쉽게 얇아진다.
이규보가 옆에서 말한다.
"묵은지가 아무리 좋아도 어제 끓인 찌개와 똑같다면 오늘
손님이 왜 먹겠는가."
이 말도 맞다. 좋은 재료를 가지고 오늘의 맛을 내야 한다.
문학에서 전통과 창조는 적이 아니다. 뿌리와 새순에 가깝다.
뿌리만 있고 새순이 없으면 살아 있는 나무라 하기 어렵다.
새순만 있고 뿌리가 없으면 바람 한 번에 쓰러진다.
가령 '어머니'를 쓴다고 하자.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이 말은 뜻으로 보면 옳다. 문학적으로는 너무 많이 사용되었
다.
여기에 신의(意)를 보태야 한다.
아침 식탁을 자세히 본다. 어머니는 생선을 굽고, 살이 많은
가운데 토막을 자식 앞에 놓는다. 자신은 꼬리 쪽을 가져간다.
그 장면만 쓰면 된다.
"생선 한 마리에도
집안의 서열이 있었다
어머니 앞에는
늘 꼬리부터 놓였다.”
'희생'이라는 말이 없다. '사랑'도 없다.
그런데 둘 다 있다. 이 문장 뒤에는 오랜 효와 가족 서정의
전통이 있다. 동시에 오늘의 밥상이라는 자기 발견이 있다.
용사(用事)와 신의(意)가 제대로 만날 때, 시가 이런 방식으로 깊어진다. 옛것을 충분히 익혀라. 옛것에게 대신 써달라고 하지는 마라.
X. 신의(意)란 무엇인가
-아무도 보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일-
창작 강좌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말 가운데 하나가 있다.
"남들이 쓰지 않은 것을 쓰십시오.
듣는 순간 막막해진다. 세상에 남들이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꽃은 수천 년 동안 쓰였다. 달도 쓰였다. 사랑도 쓰였다.
"고향, 어머니, 아버지
죽음, 외로움, 이별
가을..."
모두 셀 수 없을 만큼 쓰였다. 그렇다면 시는 끝났는가.
아니다. 소재가 낡은 것이 아니라 시선이 낡을 수 있다.
달은 오래된 소재다.
달을,
"밤하늘의 아름다운 보름달”이라고 쓰면 익숙하다.
그런데 가난한 집 창문 위에 걸린 달을 보고,
"하늘이 식구 수를 잘못 세어
하나 더 내놓은 빈 밥그릇"
이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달이 된다.
달의 둥근 모양과 밥그릇의 둥근 모양만 연결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의 허기와 텅 빈 달의 이미지가 만나고 있다.
신의는 이런 데 있다. 같은 사물을 보되 관계가 달라진다. 어머니 역시 오래된 소재다.
수많은 시인이 어머니를 썼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생활 장면 하나를 발견하면 된다. 어린 시절 밥상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밥을 조금씩 자식 그릇으로 옮겨놓았다고 하자.
그 장면은,
"어머니는 밥을 푸실 때마다
식구 수보다
자신의 배를 먼저 줄이셨다."로 바뀔 수 있다.
또 오래된 장갑 한 켤레를 보자.
한쪽 장갑에 구멍이 나 있다.
평범하게 보면 낡은 장갑이다.
그런데 손가락 한 마디가 빠져나온 흔적을 보며,
"추위가 가장 먼저
아버지의 검지부터 찾아냈다."라고 쓸 수 있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겨울, 노동, 가난...
세월이 장갑 구멍 하나에 들어왔다.
이것이 신의의 핵심이다. 새로운 사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
다. 사물과 인간 사이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관계를 발견하는
것, 그 관계가 발견되는 순간, 오래된 소재도 다시 태어난다.
꽃도 다시 쓸 수 있다.
달도 다시 쓸 수 있다.
어머니도 다시 쓸 수 있다.
사랑도 다시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 "그것을 어떤 관계 속에서 다시 볼 것인가" 이다.
신의는 발명의 기술이 아니다. 발견의 훈련이다. 시인은 세상
에 없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늘 있었지만 아직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관계에 처음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다. 그 이름이 새로울 때
익숙한 사물은 비로소 시가 된다.
☆대지문학회·시민대학 에스프리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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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청람 김왕식
학교 종이 저녁 하늘에 풀리면
아이들은 노을을 밟으며 집으로 왔다
논둑마다 메뚜기 한 철 뛰어오르고
책가방은 자꾸만 들판 쪽으로 기울었다
감나무 우듬지 빨간 감 하나
해보다 늦게까지 마을을 밝혔고
장독대 곁 봉숭아 씨방은
손끝에서 작은 폭죽처럼 계절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멍석 위에 햇고추를 펴고
햇살의 붉은 살점을 뒤집어 말렸으며
아버지는 어둑해진 들녘에서
볏짚 냄새 묻은 저녁을 지고 돌아왔다
굴뚝 연기 피어오르는 집집마다
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불빛처럼 번졌다
귀뚜라미가 담장 밑 밤을 켜면
숨바꼭질하던 아이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대문 앞에 서면
어머니 목소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가을밤은 어찌 그리 넓었던가
평상 하나에 온 식구와 달빛까지 앉았으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의 눈에
별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이었다
그때의 가난은 빈 그릇이 아니었다
서로의 몫을 조금씩 덜어 채우는 밥상이었다
세월은 그 집을 가져가고
그 목소리와 그 얼굴도 데려갔지만
가을만 오면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먼저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