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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5. 05(일)
새벽 5시 경 일어나서 일정을 많이 하기 위해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의정부 성당 새벽미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5시 2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찌푸린 날씨 속에 약 20분을 을 걸어서 어제 저녁때 왔던 의정부 성당에 갔다. 미사는 6시, 장소는 대성당이 아니라 사적지 성당이다.
미사 후 다시 숙소로 와서 짐을 챙겨 농협 앞 버스 승강장에서 갈곡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 1시간 정도를 미니버스를 타고 달렸는데 승객이 별로 많지 않아서 앉아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뒷자리라서 남은 간식 도시락을 꺼내 아침밥을 때웠다.
갈곡리 성당 - 한국전쟁 남매 순교자 기념순례지이자 파주 지역 중심 교우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182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5
교우촌과 공소 시대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 갈곡리 성당(옛 갈곡리 공소)이 자리한 갈곡리(葛谷里)는 옛날부터 칡이 많은 곳이라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칡울, 또는 칠울로도 불렀다. 산세도 험하여 6.25 전만 해도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 하여 ‘스르내미’ 고개라 불렸다. 스무고개, 이십령 등 이런 고개는 전국적으로 많다. 험한 고개에는 산 짐승이나 도적의 출몰이 빈번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은 시대인 19세기말이었다. 그 이전 박해시대 때에 이미 홍천과 인근 풍수원으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해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 김연배 프란치스코 ·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칠울이나 우고리 지역이 옹기촌이 된 것은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질의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성당 앞마당도 실제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고 한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소속 칠울 공소가 설립되었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면서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다.
갈곡리 교우들이 1936년에 마련한 공소 강당이 6.25 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자 옛 강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김창석 타대오 신부와 미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55년 1월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갈곡리 공소(현재의 성당)을 건립하여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됨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의정부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의정부교구는 교구의 대표적 공소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갈곡리 공소의 칠울 강당을 개보수하여 2008년 11월 20일 축복식을 가졌다. 오랜 세월로 낡고 불편해진 강당의 기본적인 외관과 틀은 보존하면서 지붕과 바닥 공사 등을 새로 해 신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성당 맞은편에 아담하게 흙집으로 보수된 칠울 강당은 한 번에 10-30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으며, 주일학교나 단체에서 피정 · 연수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임시 사제관으로 쓰고 있다.
갈곡리는 오랜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경기북부 지역 신앙의 요람, 성소 못자리-성직자, 수도자 20여명 배출되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 故 김남수 루카 신부, 김충수 보니파시오 신부, 최준웅 바르나바 신부, 故 최영식 마티아 신부, 김영욱 오셉 신부, 강명호 마르코 신부, 최영선 알렉산델 수사, 故 최무임 마리이사벨 수녀, 故 최 미카엘라 수녀, 故 김 안나 수녀, 故 김 루시아 수녀, 김영희 에스텔 수녀, 김충연 마리폴 수녀, 최영락 라파엘라 수녀, 진혜경 아녜스 수녀, 김 스텔라 수녀
본당 승격과 순교자 기념 순례지 지정
의정부교구는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갈곡리 공소를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승격하고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갈곡리 이해 12월 8일 준본당 승격 후 첫 본당의 날 행사를 갖고 공소 설립 120주년 기념하며 새로 단장한 성모상 축복식을 가졌다. 10월 13일에는 김치호 신부와 김정숙 수녀 순교 69주년을 기념하며 성당 마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조성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김치호(金致鎬, 1914-1950) 신부는 1914년 3월 31일 교우촌 갈곡리 공소의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1927년 덕원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 사제 성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다니며 수도 생활에 동경심을 키운 그는 1938년 4월 9일 덕원 수도원에 입회했고, 1942년 5월 1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뛰어난 독일어 실력으로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폐병을 앓아 고생하기도 했다. 1949년 5월 북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었고, 1950년 10월 5일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숙 마리안나(1903-1950) 수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으로 1950년 10월 17일 황해도에서 공산당에게 피살되어 순교하였다. 1921년 수녀원에 입회하여 1928년 첫 서원, 1934년에 종신서원을 한 김정숙 수녀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 봉삼 유치원에서 1926년 9월부터 순교하는 날까지 교육사도직 활동을 했다. 1950년 10월 15일 유엔군의 상륙으로 퇴각하던 공산당이 들이닥쳤을 때 유엔군인 줄 알고 나온 사람들이 많이 처형되었다. 공산당은 수녀들을 찾아내 밖에 세웠고, 군중들이 달려들어 총, 칼, 낫, 도끼, 몽둥이 등으로 수녀들을 때렸다. 김정숙 수녀는 처참한 상태로 피를 토하며 극도의 고통 속에 이틀을 버티다가 17일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생존 수녀와 우익청년들에 의해 성당 옆에 묻혔다.
다행히 순교한 김치호 신부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의 한 명으로, 김정숙 수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한 명으로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중이다.
아침 8시 10분쯤에 미니버스는 우리를 내려놓고는 가버렸다. 큰길 옆에 커다란 갈곡리 성당 표지석이 서 있어 우리가 잘 찾아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약 3-4분 걸어 성당 경내에 들어왔다. 여기서도 다듬은 성당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갈곡리 성당(칠울공소)이라는 제목 아래 성당의 연혁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교회의 공식 기록인 뮈텔주교의 일기에 갈곡리 성당이나 칠울 공소가 나오는 사례를 뽑아내어 갈곡리 공소의 깊은 유서를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갈곡리 성당의 상징적 인물인 김치호(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마리안나) 수녀가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이어서 성모 촛불봉헌대가 있다.
1955년에 지은 석조 성당이 작고 귀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벌써 70년을 이어온 것이다.
성당 내부는 천장과 벽면이 정갈한 흰색으로 주황색 제대 및 교우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교우석도 100명은 충분히 앉고도 남을 공간이다. 제대 뒤 벽면에는 십자고상과 유리화가 장식되고 좌우 벽감에는 성모상이 있고 성모상 좌우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 6.6)라는 성구와 “기도하고 인내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자.”라는 교훈식 슬로건이 걸렸다.
밖으로 다시 나오니 성전 둘레 잔디밭 가장자리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울타리 한쪽에는 큰 날개가 그려진 판자벽이 있는데 야외 무대인지 단순한 가림막인지 용도를 알 수 없다. 만 리를 날아갈 것 같은 날개다. 우리의 영성도 이처럼 크게 비상했으면 좋겠다. 의자가 마련된 것으로 보아 천사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사진을 찌기도 하는 것 같다.
성당 길 건너는 김정숙 수녀의 본명을 딴 마리안나의 집이 있다. 간이식당 겸 회식 장소 등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원래 성당 보수시 임시 성당이었다고 한다.
신암리 성당을 가려는데 택시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 교우 자매님을 만나 물었더니 택시 회사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다. 버스로는 불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일이 택시를 이용하기도 어렵기에 상주하는 주민들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08시 40분. 택시 연결이 되어 출발했다.
신암리 성당 - 이춘근 순교기념 순례지이자 의정부 지역의 신앙의 요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264-3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4 89번길 27-32
양주의 신암리는 파주의 갈곡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교우촌이다. 다들 옛날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산골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모여들어 옹기를 구우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당시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와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일대는 바로 이들 교우촌들이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찾은 1900년대 초 서울 종현 본당(현 명동 성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이들 공동체가 토대가 되어 천주교신앙이 형성되었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는 신암리 공소에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 신암리에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때 사제들은 복사와 신자들을 대동하여 문산까지 왔고 신암리 공소에서는 회장과 신자들이 60리 산길을 걸어서 와서 사제를 맞아 신암리로 모셨다.
당시 신암리 공소에는 3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고, 박성로 프란치스코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1919년에는 서산 본당의 주임이었던 안학만 루카 신부가 송도본당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24년까지 재직했고 1924년 10월 27일 그 후임으로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평북 의주 본당에서 개성 본당으로 부임해 왔다. 서 바오로 신부는 신암리 공소와 우고리 공소를 사목 방문하였고 바로 다음해인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 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초대 주임신부의 임명은 늦어져 2년 후인 1927년 5월이 돼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 파주 · 포천 · 가평 ·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당시의 공소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3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었음에도 사제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가난했던 농촌의 교우들이나 공소회장의 처지가 얼마나 딱했으면 신부님을 내보내게 되었을까? 그 안타까움은 이해가 간다.
1933년 9월 26일 신암리 공소에 새로 개축된 경당에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주례로 이하삼 회장 등 신암리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79위 순교복자 첨례 대축일 미사가 거행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5년 12월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의정부 주교좌 성당 역사 참조)
6.25 전쟁 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세례자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면서 2005년 3월 30일 본당 승격 80주년을 맞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도시 지역 신자들의 피정 공간으로 공소를 개방하는 등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섰다.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였고 10월 5일 신암리가 고향인 서울대교구의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 성전을 예수성심과 이곳 출신 순교자로 알려진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의 성상과 성물 등을 완전히 갖추고 2015년 10월 24일 이경훈 신부 주례로 준공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의정부교구 이기헌 베드로 주교는 2018년 8월 24일자로 신암리 성당을 이곳이 고향인 이춘근 라우렌시오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했다.
이춘근(李春根, 1915-1950년) 라우렌시오 신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는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아버지 이공명(바오로)와 어머니 홍 베로니카 사이에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왜관 수도원 이근재(부르나)가 그의 동생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예수성심학교에 수학하였다. 1939년 6월 24일 명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황해도 사리원 본당 보좌, 충청도 장호원 본당 보좌로 사목활동을 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생활에 매력을 느껴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여 1942년 첫 서원을 했다. 1948년 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사제를 청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이춘근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활동하던 중 공산당의 횡포가 심해지자 평양 외곽의 순안 공소로 피신해 신자들을 돌보았다. 이춘근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다른 신부들과 함께 체포되어 행발불명이 되었다.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이 후퇴했던 10월 5일 평양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춘근 신부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일원으로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09:40 신암리 성당 주차장에 도착. 성당은 바로 위에 있다.
성당 경내에 들어서자 붉은 색 벽돌조 신암리 성전이 먼저 나타난다. 건물벽에 고동색 게시판 3개가 나타나 미리 신암리 성당을 알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하나는 신암리 성당 소개이고 다른 둘은 순교자 박 다미아노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의 소개이다.
지금까지 밝혀져 있지 않은 박 다미아노의 순교와 묘지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 다미아노의 고향은 평안도 박천. 강원도를 거쳐 당진에서 붙잡혀 해미로 압송되었다. 12명이 고을 감영에 수용되었고 박 다미아노는 죄인 중에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12명 중 골목방에 수감되었다. 치명하는 날이 되자 12명을 마지막 문초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앞에 높고 누구든지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 중 한 사람이 먹여 살려야 할 식솔이 많아 하는 수 없다고 하면서 배교하였다. 그러나 박 다미아노를 비롯한 11명을 일제히 십자가를 들어 입을 맞추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다렸다. 그러자 배교했던 사람도 뉘우치면서 잠시 유혹에 빠졌다면서 배교를 번복하였다.
박 다미아노는 마지막으로 참수를 당하였다. 참수 당시 회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던 부인 한 마리아가 망나니들이 돌아가고 난 뒤 남편의 머리를 앞치마에 싸서 근처 소나무 아래 땅을 파고 묻었다. 다음날 시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한 마리아는 다시 묻었던 곳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다시 소나무 아래에 묻고 큰돌 하나를 얹어 두었다. 그후 묘지는 증손인 박복선 파피아노(신암리 공소 회장 역임)가 젊은 시절부터 33년 간이나 매년 묘를 돌보았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그 무덤 자리에 비슷한 무덤이 복수로 들어서고 지형이 바뀌어 무덤을 식별하기 어려워 실묘를 했다. 그 결과 박 다미아노는 무명 순교자로 잊혀가고 있는 상태다.
순교자 박 다미아노, 이춘근 라우렌시오 안내판
이런 연유로 신암리 성당에서 순교자 박 다미아노가 공경을 받게 된 것이다. 앞에서 신암리 출신 이경훈(李庚薰)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건립하여 예수성심과 이곳 출신 순교자 외고조부인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고 했지만 위의 기록을 보면 이곳 출신이라는 것도 신부님의 외고조부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다.
마당에는 성모동산과 쉼터가 있다. 그리고 성전 뒤로는 사제관 겸 교육관 박 다미아노관이 이어져 있고 그 사이 앞마당에는 또 하나의 성모동산 격인 성모 부조상과 우뚝 솟은 전나무 둘레에 독특한 십자가의 길이 둘러져 있다.
일단 성전 내부는 천정이 높고 널찍하다. 제단 벽에는 십자고상이 붙었고 역시 작은유리화 4개가 높다랗게 십자형으로 그려져 걸렸다. 제대 뒤 감실 조각도 의미가 있다.
양쪽 벽면에는 길다란 창문의 유리화가 있고, 벽의 가운데 높이를 지나가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각상이 아니고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져 있는 것이 또한 독특하다.
성당 내부 뒤편에 역사전시실이라는 조그만 방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람 전시실이 아니라 사람은 들아 가기가 어렵고 유리창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데 두 개의 고서 전시대가 있다. 그리고 벽면에 패널로 성당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고해실 앞문에는 고해소 들어오기 전 양심성찰문이 걸렸는데 모두 25개항으로 치열하게 성찰하는 내용들이었으며 노인세대를 위해 보청기도 준비되어 있다.
보청기를 보니 우리 성당에서 전례 봉사자들이 미사 전 일일이 난청 교우들에게 장착해주는 것이 생각나서 사무실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성당 엠프에 송신기를 설치하기만 하면 성당 경내에서는 어디든지 이어폰만 귀에 꽂으면 편하게 쓸 수 있다고 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효과도 좋다고 적극 권한다. 일반 보청기와 달리 이런 것을 복청기라고 부르는데 생각해보니 외국 박물관에서 이미 사용해 본 적이 있다.
바쁜 와중에도 신부님으로부터 강복을 받고 바로 참회와 속죄의 성당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