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6. 혜초스님의 歸唐과 신라 유학승
9C 중반 이후 禪法 수학…구산선문 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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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스님이 말년을 보낸 중국 오대산> |
사진설명: 혜초스님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연구하고 한역하는 등 중국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세수 80살이 된 780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사진은 중국 오대산 중대에서 본 오대산 전경. |
30세 이전인 신라 성덕왕 22(723)년 인도로 출발한 혜초스님은 727년 11월 상순 신강성 쿠차에 도착, 대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4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때문에 쿠차에서 언기를 거쳐 장안에 도착했을 당시 혜초스님의 나이는 많아봐야 30살 정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남아있는 자료에 80세 경 입적한 것으로 돼있으니, 귀당(歸唐) 후에도 50여 년간 더 살았다.
이 50년 동안 혜초스님은 중국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실 〈왕오천축국전〉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혜초스님이 중국으로 돌아와 50여 년 동안 “중국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으로 돌아온 이후 혜초스님은 줄곧 수도 장안(서안)에 머물렀다. 적어도 개원 21년(733) 정월 초하루부터는 장안의 천복사(소안탑이 있는 곳)에서 스승 금강지와 더불어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이하 천비천발대교왕경)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했다.
〈천비천발대교왕경〉을 연구한 지 8년 후인 개원 28(740)년 정월. 금강지스님은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漢譯)을 시작했고, 혜초스님은 필수(筆受)를 - 경전을 번역할 때 역어를 전수하여 필기하는 것 - 맡았다. 그러나 한역이 끝나기 전인 741년 가을 금강지스님이 입적하자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금강지스님의 유언에 따라 〈천비천발대교왕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인도로 보내졌다.
금강지스님이 입적 한 후 혜초스님은 금강지스님의 제자이자, 금강지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온 불공삼장(不空三藏)에게 〈천비천발대교왕경〉을 배웠다. 당 대력 9년(774) 10월 장안의 대흥선사에서 강의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학자들 중에는 이 연대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774년 6월에 불공삼장이 입적했던 것. 어찌됐던, 당시 혜초스님은 이미 당나라에서도 유명한 고승이 돼 있었다. 불공삼장이 대력 9년 5월7일 남긴 유서에 혜초스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내가(불공삼장) 지금까지 30년 동안 밀교의 비법을 전해 준 제자가 제법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부의 - 五部. 밀교 금강계의 불부(佛部), 금강부, 보부(寶部), 연화부, 갈마부를 말함 - 경전을 연구하고 익혀 일가를 이룬 제자만도 여덟 명이 됐으나, 이제는 여섯 명만 남았다. 오대산 금각사의 함광(含光), 신라의 혜초…등등이다. 후학들 가운데 의문에 부딪히는 자가 생기면 너희들이 그들을 인도해 법등(法燈)을 끊이지 않게 할 것이요, 그로써 나의 은혜를 갚을 지어다.”
말년에 오대산 입산…건원보리사에서 여생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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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나라로 돌아온 혜초스님이 밀교경전을 연구한 천복사의 소안탑. |
기록에서 보듯 혜초스님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 중 한 명이었고, 분명한 신라인이었다. 게다가 금강지 - 불공 - 혜초로 이어지는 중국 밀교의 정통을 이어받은 스님이었다. 불공삼장이 입적 한 후 혜초스님과 동료들은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스승의 장례에 보여준 황제의 은혜에 감사드렸고, 스승이 세운 사원을 존속시켜 줄 것을 청원했다. 불공삼장이 입적한 후에도 혜초스님은 수년간 장안에 머물렀다. 그러다 780년 불공삼장과 인연이 깊은 오대산으로 올라갔다.
불공삼장은 오대산에 금각사(金閣寺)를 세웠고, 첫 제자인 함광스님도 여기서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오대산 금각사는 멋진 사찰이었던 것 같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중국을 순례한 일본 엔닌(圓仁)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엔 이렇게 묘사돼있다. “사찰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금각(金閣)을 열고 대성(大聖)인 문수보살께 참배했다. 보살은 푸른 털의 사자를 타고 있었는데, 얼굴은 금빛이며 단정하고 근엄하기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중략). 2층으로 올라가 〈금강정유가〉의 다섯 불상에 예배했다. 이는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이 나라를 위해 만든 것인데, 인도 나란다사의 모양을 본 뜬 것이다. 각 불상은 2명의 협사(脇士)를 거느리고 단 위에 나란히 안치돼 있다. 3층에 올라가 ‘정륜왕유가회’의 다섯 금불상에 예배했다. 불상과 보살의 수인과 얼굴 모습은 2층과 달랐다.”
오대산에 들어갈 당시 혜초스님의 나이는 이미 80줄에 들어선 때였다. 은퇴의 처소로 금각사가 아닌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로 잡고, 전에 손댔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을 20일 동안 재록(再錄)하기도 했다. 이후의 혜초스님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오대산에서 세상을 떠났으리라. 신라에서 태어난 혜초스님은 중국을 거쳐 천축까지 갔다가 중국에 돌아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 중 불교교류에 기여하고, 중국불교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혜초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6월13일 조계사주지 지홍스님, 문화부장(현 도선사주지) 혜자스님, 아주대 변인석교수, 중국 선유사주지 궈센스님 등 한국과 중국 사부대중 300여명은 중국 섬서성 주지현 선유사 복원부지에 - 선유사에서 혜초스님은 기우제를 지냈었다 - ‘혜초스님 기념비 제막식’을 가진 바 있다.) 끝내 신라로 귀국하지 못했지만 혜초스님은 항상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자세를 잃지는 않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천축에서 읊은 시가 〈왕오천축국전〉에 있기 때문이다.
월야첨향로(月夜瞻鄕路) 달밤에 고향 하늘 바라보니
부운풍풍귀(浮雲颯颯歸) 뜬구름 시원스레 흘러가누나.
함서참거편(緘書參去便) 소식 적어 그 편에 부칠 수 있으련만
풍급불청회(風急不聽廻) 빠른 바람은 아랑곳 않네.
숙국천애북(孰國天崖北) 내 나라는 하늘 먼 북쪽
타방지각서(他邦地角西) 이곳은 남의 땅 서쪽 모퉁이.
일남무유안(日南無有雁) 무더운 남방엔 기러기도 없으니
수위향림비(誰爲向林飛) 누가 계림으로 날아가 소식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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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1년 6월13일 중국 섬서성 선유사 복원부지에 세워진 혜초스님 기념비. |
사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중국에 건너간 스님 가운데 천축까지 다녀온 스님들도 적지 않았다. 혜초스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었다. 백제의 ‘겸익(謙益)스님’이 바닷길로 인도에 가 5년간 머무른 후 인도 스님과 불경을 모시고 돌아온 일(526년)도 있었다. 겸익스님이나 혜초스님이 천축에 갈 수 있었던 것은 6세기 초부터 시작된 ‘입중구법(入中求法) 스님’들의 경험이 축적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라에선 ‘각덕(覺德)스님’이 처음으로 중국에 가 불법(佛法)을 공부하고 진흥왕 10년(549) 귀국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삼국으로 갈라져 있었고, 중국도 남북조시대였다. 그럼에도 삼국의 많은 스님들은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경전을 가지고 왔다. 중국에 당나라(618년)가 들어서고, 한반도가 신라로 통일된(668년) 후 ‘입중 행렬’은 더욱 성행했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통일이 이뤄지자 온갖 사람들이 신라에서 당나라로 들어갔다. 위로는 왕공(王公)에서 아래로는 노예에이르기까지, 갖가지 신분과 직업의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갔다. 공부하러 가는 사람, 장사하러 가는 사람, 과거를 치러 당나라 관직에 오르기 위해 가는 사람 등등 통일기의 신라인들은 수없이 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남으로 회하(淮河) - 하남성에서 발원하여 안휘, 강소성을 거쳐 흐르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강, 이 강을 경계로 강남 강북을 가른다 - 어귀에 이르는 해안 지대엔 신라인들이 특히 많았고, 황해와 동지나해 해상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심지어 중국 땅 깊숙한 돈황까지 신라인들이 진출했다.
도의.혜철 등 ‘화엄’ 대신 ‘선’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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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1년 6월13일 조계사 주지 지홍스님(맨 왼쪽)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기념비 제막식 모습. |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간 사람 가운데 스님들이 특히 많았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경전과 불상을 구하기 위해 구법행(求法行)에 나선 스님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한중불교문화교류사〉(진경부, 황유복 지음), 〈신라중대 입당구법승 연구〉(여성구. 국민대 박사학위논문) 등에 의하면 통일 이후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사람 가운데 이름이 남아있는 스님의 숫자만 해도 80명은 족히 넘는다. 중국에 건너가 공부한 신라스님들에 관한 기록은〈고승전〉〈속고승전〉〈송고승전〉〈불조통기〉등 곳곳에 전한다.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사람 가운데 스님들이 특히 많았던 것처럼, “당나라에 와 있던 외국 스님들 가운데 신라 출신 스님들이 단연 다수를 차지했다(고병익 전 서울대 교수)”. 저간의 사정은 최치원이 찬한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무릇 길이 멀다 해서 사람 못가는 곳 없고, 사람에게는 못 갈 나라가 없다. 그렇게 때문에 동쪽 나라(신라) 사람들은 유자(儒者)건 스님이건 간에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몇 겁의 통역을 거쳐 말을 통하면서 공부하러 간다.”
9세기 중엽 일본 천태승 엔닌(圓仁)스님이 10년간(838~847) 중국에 머무는 동안, 엔닌스님은 도처에서 신라 스님들을 만났다. “산동 등주(登州)에서는 신라 스님들이 200명을 상대로 신라 말로 〈법화경〉을 강독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적어 놓고 있다. 엔닌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목차만 보아도 ‘표류한 신라인을 만남’ ‘신라 상인을 만남’ ‘적산법화원에 도착’ ‘신라인의 추석절’ ‘적산원에 불경 강의 의식’ ‘신라관, 발해관 방문’ 등등 신라 관련 기록이 상당히 많다.
9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에 들어간 신라 유학승들은 ‘화엄’ 등 교학 대신 선(禪)을 배워왔다. 도의, 혜소, 현욱, 혜철, 무염, 이엄, 형미선사 등이 당나라에 가 불법(佛法)을 공부했는데, 공부하는 동안 중국스님들과 나눈 선문답 등의 기록이 〈조당집〉, 〈경덕전등록〉, 〈역대법보기〉, 〈지월록〉 등에 남아있다. 귀국한 선사들은 우리나라 곳곳에 ‘아홉 선문(禪門)’을 개창, 후삼국과 고려 초의 혼란을 극복하는 ‘사상적 대안’을 제공했다. 당시 개창된 선문이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원류’임은 물론이다. (구산선문 선사들의 행적은 다음 호에서 구체적으로 조명합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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