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41. 중도-쌍둥이의 역설
계율·법 지키는 것이 중도의 첫 걸음
원칙은 따르되 해석과 방식은 새롭게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도(中道)란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입장과 가능성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입장에서 본 것 모두에게 다 근거가 있고 일면의 진실이 있는 것이다. 물리현상도 그렇다는 것이 상대성원리다.
중도를 윤리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양한 입장에서 보는 여러 가지 관점을 모두 포용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한쪽의 입장만을 끝없이 주장하면 이것은 남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이다. 남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타협이요 중도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할 때 비파(琵琶) 줄의 조율을 예로 든 적이 있다. 줄을 너무 세게 조이면 끊어지고 느슨하게 늦추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지나친 고행’과 ‘그릇된 욕망’은 모두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상주(常住)와 단멸(斷滅)’, ‘삶과 죽음’과 같은 대립되는 개념이나 현상을 현실에서 어떻게 조율하는가?
미시세계에서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나 현상의 중첩이 일반적이라고 해도 사람이 직접 경험하는 거시세계에서는 이들 대립되는 개념이나 현상이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본 모든 것이 다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를 볼 때는 어떻게 될까? 일란성 쌍둥이 A와 B가 똑같이 생긴 로켓을 타고 일정한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하자.
A는 B가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B에게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B가 보면 자기는 정지해 있고 A가 움직이는 것이므로 A에게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으로 볼 것이다. 로켓이 빠르다면 한사람에게는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쪽에서는 50년 쯤 지났을 수도 있다. 상대성이론은 둘 다 옳다고 한다. 그러나 둘이 실제로 만났을 때 서로 상대방이 자기보다 젊다고 본다면 이것은 역설이다. 이것을 쌍둥이의 역설(twin paradox)이라고 부른다.
서로 만나서 비교하려면 누군가가 가속운동을 하여 상대방의 로켓에 대해 정지하여야 한다. 한사람이 관성계를 벗어나야 둘이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다. 만나서 시간을 비교하면 가속운동을 한 사람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으로 판명된다. 역설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에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다. 중도가 원리적으로 포용과 조율을 뜻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조정과 타협이 안 될 때는 무엇이 중도의 입장인가?
수행자에게는 계(戒)와 율(律)있고 세속에는 법(法)이 있다. 물리법칙은 과학자가 자연현상에서 발견한 것이고 계와 율은 성인이 인간과 사물의 연기적 관계를 고려하여 정한 것이고 세속의 법은 범인의 경험과 중지(衆智)를 모은 것이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계와 율과 법을 지키는 것이 중도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첫걸음이다. 원칙과 질서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그러나 내인(內因)이 있더라도 외연(外緣)이 달라지면 타협과 조정의 내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고정된 하나의 행동이나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시대 장소 환경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실제로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진화(進化)가 그것이다. 원칙을 지키되 그 해석과 지키는 방식이 늘 새로워야 하는 것, 그것이 중도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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