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노르웨이 뢰텐 지역의 허름한 방에서 태어났다. 산모는 당시 결핵을 앓았고 태어난 아기도 허약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결핵으로 숨졌고 9년 뒤엔 한 살 터울인 누나 소피에도 결핵으로 숨졌다.
1889년엔 신경쇠약을 앓던 아버지마저 숨졌다. 아버지는 오슬로에서 병원을 개업한 의사였는데 원래 성격이 편벽되고 이상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스무 살 아래이던 아내를 잃게 되자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이상하게 굴었다.
뭉크는 점차 죽음에 대한 불안의식이 고조되었다. 어린 시절,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죽음을 응시하는 눈은 점점 내향적으로 되었다.
그는 죽음을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 의식하였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유난히 죽음에 관한 소재가 많았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병든 아이〉〈병실에서의 죽음〉 〈지옥에서의 자화상〉 등, 죽음 의식이 밑바닥에 깊게 깔려 있었다.
핏빛 하늘을 등지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 유혼(遊魂) 같기도 했는데 이 강렬한 〈절규〉를 처음 본 것은 1960년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라는 책 표지에서였다. 세월이 제법 흘러(1996) 나는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절규〉 앞에 섰었다. 실제 그림의 배경은 오슬로 에케베르그 공원 근처였다. 뒤로는 바다가 보이고 공간 바닥에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
뭉크의 친구가 바로 이곳에서 자살하려 했었고, 우울증을 앓는 여동생은 마침 내려다보이는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다고 한다. 뭉크의 눈에는 노을 지는 빨간 하늘이 피처럼 붉은 하늘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절규〉를 그리고 나서 일기에 이렇게 썼다.
어느 날 저녁때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 도시가 퍼져 있고, 피요르드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멈추어 서서 피요르드를 둘러보았다. 해는 서산에 지고ㅡ구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처럼, 나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절규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을 진짜 피처럼 그렸다. 색채가 절규를 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켜 자주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45세 무렵이었다. 여성으로부터 쫓기며 시달림을 당하는 느낌을 가졌고, 친구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여자들이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어떤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인들이란 영원히 남자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는 일종의 흡혈귀로 생각했다. 한 여인과 살고 있는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죽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뭉크는 80세의 긴 인생을 혼자서 보냈다. 삶에 대한 내향적인 태도에서도 그 노이로제적인 성격을 엿볼 수가 있다.
1907년, 독일에서 아홉 달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다. 이듬해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오슬로의 피요르드 호숫가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의 모티프는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주목하게 된다.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지키는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생 동안 줄곧 따라다녔다. 나는 일찍부터 삶이 가지는 비참하고 위험스러운 점을 알게 되었으며, 또 지옥의 죄의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배웠던 것이다.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 그 때문인지, “나는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는 평화로운 사람들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내 그림 속 인물은 살아 숨 쉬고 그걸 느끼며 고통받고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뭉크는 평생을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다 간 화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간이 겪는 고통과 외로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그림에 담아냈고, 역으로 그 점이 우리를 위안하는 게 아닌가 한다.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이 내 일생 동안 줄곧 따라다녔다’는 그에게서 나는 부쩍 친근감을 느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두더지처럼 나는 그런 예술가가 아니면 애정도 흥미도 어떤 관심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