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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그의 악처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다.
사람들은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 고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마(馬)술에 뛰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히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
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 운 사람은 없겠지."
또 한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
이 물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
라고 대답하며 웃더란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한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이것이 생각의 힘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이면에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다스리면 감정은 그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 그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의 기회를 발견
할 줄 아는긍정적 발상의 주인공이 아닐런지!
4월 27일은 '악처의 날'- 소크라테스의 기일
악처(惡妻)'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Xanthippe(크산티페)’라고 나와 있다.
크산티페는 다름 아닌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부인의 이름이다.
원래 크산티페란 그리스어로 “금발의 여인 또는 금마(金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크산티페라는 이름은 우리로 치면 '금자' 또는 '금순’ 정도가 된다.
2,5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얼마나 악처였기에 이렇게 좋지 못한 뜻의 '일반명사'로 자리잡아버렸을까?
우선 현재 알려진 세계3대악처로는 ①소크라테스 아내 '크산티페', ②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츠', ③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꼽힌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또한 굉장한 공처가로 알려져 있다.
크산티페가 요즘말로 치면 “철학 좋아하네, 허튼 소리 집어치우고 돈이나 벌어와!”라고 수없이 쏘아대며 바가지를 긁어도 도저히 맞설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크산티페가 심하게 바가지를 긁어댔는데도 소크라테스가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자 화가 치민 크산티페가 그만 남편 머리에다 물바가지를 쏟아부어버렸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천둥이 친 뒤에는 비가 오는 법”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한다.
"매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또,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을 향해, "부디 결혼하시라. 좋은 아내를 갖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갖게 되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다.”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어차피 후회하게 된다.”라는 말도 남겼다.
주위사람이 ‘그토록 지독한 아내라면 헤어지면 좋지 않은가’라고 말하자, ”이 사람과 잘 해갈 수 있다면 어느 누구와도 잘 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답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향연(Symposium)」에서 스승의 아내 크산티페에 대해, “현재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만큼 참기 어려운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기술했다.
두 번째,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츠는 소프라노 가수 출신으로 불성실하고 매정한 인물로 묘사돼있다.
낭비벽이 심한데다 모차르트가 죽었을 때 치료를 핑계로 바덴바덴의 별장에서 놀고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도 대강대강 치러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래서 지금도 모차르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비엔나 상크트맑스 공동묘지(Sankt Marxer Friedhof)에 있는 무덤은 가묘(假墓)일 뿐이다.
콘스탄츠는 이후 모차르트 자필이 들어간 악보와 서한을 팔아치웠다. 더욱이 자신에게 불리한 편지는 모두 파기했다. 그리고 나서 재혼했다. 콘스탄츠를 악처대열에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이상과 같은 이유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18세 나이에 34세의 톨스토이와 결혼했다.
결혼 후 15년간은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톨스토이는 이 시기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명작을 많이 썼다. 아이도 13명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문학세계에서 벗어나 종교와 사회운동 쪽으로 옮겨가면서 가정을 소홀히 했고 갈등이 시작돼 자주 다투면서 별거생활을 되풀이했다.
기독교인이 된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이후 소피아와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82세 나이로 가출, 아스타보바 라는 한적한 시골 역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남편을 아내 소피아가 이해하지 못하고 병든 남편을 내보내 객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악처 명단에 올라 있는 이유다. 톨스토이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장례식에) 저 여자만큼은 데리고 오지 말아 달라”이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악처 명단 3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대신 나폴레옹1세의 제1부인 조제핀‧드‧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를 들기도 한다.
조제핀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자주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쟁터에서 급기야 파리로 되돌아올 정도로 바람 끼가 심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이야기로 보아서는 오히려 조세핀이 더 적격자일지도 모른다.
'3대 악처'를 두고 기독교문화권에서는 ①소크라테스 아내 '크산티페' ②구약성서에 나오는 욥(Job)의 아내(이름 미상) ③영국의 종교 개혁자이자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 을 꼽기도 한다.
기독교 문화권이건 아니건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는 그 어떤 악처명단에서도 항상 1위에 올라있다.
한편「소크라테스의 아내」라는 저서를 낸 일본의 작가 사토아이코(佐藤愛子) 씨는 “소크라테스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남자와 결혼하면 그 어떤 여자건 모두 악처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월27일은 소크라테스의 기일로 “악처의 날”이라고 한다.】
생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소크라테스 철학사상의 특 징과 의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는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
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넷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Brian Crain / Piano And Cello Duet With Yujeong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