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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혜산(實惠山)(가지산(迦智山))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백암산(白岩山), 중산(中山), 보두산(步斗山)에 이른다. 이 면(面)의 동쪽은 백암산(白岩山)의 정상인 백암봉(白岩峰)을 중심으로 하여 산내면(山內面)과, 서쪽으로는 보두산(步斗山)에서 내려온 비학산(飛鶴山)의 능선(稜線)을 사이에 두고 상동면(上東面)과, 남쪽으로는 단장천(丹場川)을 경계로 해서 단장면(丹場面)과 밀양시(密陽市), 북쪽으로는 백암봉(白岩峰), 중산(中山), 보두산(步斗山)의 능선(稜線)을 경계로 하여 각각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이 면(面)의 뒤쪽으로는 큰 산이 둘러 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산내면(山內面)의 동천(東川)과 단장면(丹場面)에서 내려오는 단장천(丹場川)이 합류(合流)되어 단장천(丹場川)을 이루면서 이 면을 통과하여 응천강(凝川江)으로 흐른다.
조선(朝鮮) 초기(初期)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시대에는 중동면(中東面)으로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의 동쪽에 있었으며 상동면(上東面)과 하동면(下東面)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중동면(中東面)이라고 했다. 지금의 산외.산내.단장 등 세 면을 포괄하는 넓은 구역이었다. 산외면(山外面)은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17세기 초에 방면(坊面)을 정비할 때 천화면(穿火面)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이 면(面)의 발상과 중심지가 천화령(穿火嶺)의 아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 산외면(山外面)에 해당하는 방리(坊里)로는 희곡(希谷), 금곡(金谷), 남가곡(南佳谷), 와야(瓦野), 죽원(竹院) 등 5개리(個里)였다. 그 후 천화면(穿火面)을 중초동(中初同).중이동(中二同).중삼동면(中三同面)으로 분할한 일이 있다. 그러다가 1880년대에는 중초동(中初同).중이동면(中二同面)을 폐합하여 천화면(穿火面)으로 환원하였고, 중삼동면(中三同面)은 단장면(丹場面)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高宗) 32)에 천화면(穿火面)을 분할하여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과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으로 나누었다. 이 면(面)의 동쪽에 있는 백암봉(白岩峰)을 경계로 하여 그 안쪽에 있는 중초동면(中初同面)을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이라고 하고, 그 바깥쪽에 있던 중이동면(中二同面)을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으로 했다. 이 때 본면(本面)의 방리(坊里)로는 희곡(希谷), 금곡(金谷), 죽동(竹東), 죽서(竹西), 와야(瓦野), 엄광(嚴光), 남기리(南沂里) 등 7개이(里)가 있다. 방리(坊里)의 표기(表記)도 다시 변경되었는데 죽원(竹院)이 죽동(竹東), 죽서(竹西)로 나누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남기(南沂).엄광(嚴光).금천(琴川).다죽(茶竹).금곡(金谷).희곡리(希谷里) 등 6개의 법정리(法定里)를 이루었으며, 1918년 1월 20일에 행정구역의 명칭 변경에 따라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에서 산외면(山外面)으로 개칭되었다. 1965년에 6개 법정리에 소속된 자연 부락을 조정하여 19개의 행정리로 재편성하였다. 유적으로는 금천리의 지석묘군(支石墓群)과 고분군(古墳群), 다죽리(茶竹里)의 지석묘군(支石墓群)과 고분군(古墳群) 등이 있고, 또 봉성사지(奉聖寺址)와 엄광사지(嚴光寺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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