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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수보리(復次須菩提)야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일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하면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또 수보리야, 이 도리는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이 이름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는 경지에서 여러 가지 선법(善法)을 닦으면 곧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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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를 여러 번 부르니까 미안하신지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야."라고 하셨습
니다. 미안하지만 또 부를 수밖에 없다는 부처님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시법(是
法)이 평등(平等)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일새, 이법은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
다."는 이 구절 하나만 건져도 금강경을 공부한 보람이 있습니다. 이 법은 모든 존
재가 갖고 있는 진리와 이치가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연필과 만연필도 평등하고,
남자와 여자도 평등하고 중생과 부처도 평등합니다.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완전무결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등을 차별합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 나이든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전부 평등하다는 뜻
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어릴 때 출가하여 강원 생활도 함께하고 중
노릇을 한 스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행자라는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
른 형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은 포교를 많이 하고, 또 어떤 스님은 한
평생 선방에서 참선 수행하고, 어떤 스님은 일평생 강원에서 후학에게 경전을 가
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불법이 좋아서 열심히 정진하고 경전 공부를 하
면서 가르치고 책을 만들고 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제 도반스님은 경전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불사하고 포교하면서 열정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똑같습니다. 사실은 평등한 겁니다. 시밥은 평등하여 무유고하다, 이
도리를 알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한편 일체 선법을 무아(無我) · 무인(無人) · 무중생(無衆生) · 무수자(無壽者)의
자세로 닦고, 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의식도 없고,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도 없고, 중생이라고 하는열등의식도 없고, 수자라고 하는 한계의식
도 사라진 마음자세로 선법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차원 높은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상(四相)이 사라졌다는
것은 나와 상대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부모이고 자기 자녀인데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상을 많이 냅니다. 상을 내게 되면 조건이 붙습니다. 무아 · 무인 · 무중생
· 무수자가 안 되기 때문에 조건이 붙게 되고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실 부
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선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 자식조차도 제대로 선법을 행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시존일관 네 가지 상(相)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강조
하는 것입니다. 상이 있는 한, 상을 내세우는 한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깐잠깐 평화롭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옆에서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그 순간에 불행해집니다. 부처님의 말씀, 금강경을 공부해
서 그 참뜻이 몸에 밸때 진정한 평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
2019년 5월21일 연화장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