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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열왕기 하권 14장-19장
2열왕 14,1-16 아마츠야의 유다 통치
“아마츠야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여호아띤인데 예루살렘 출신이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만큼은 못하였지만, 자기 아버지 요아스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2-3).
요시아의 아들 아마츠야의 남유다 통치를 하였다. 역대기에는 이 부분을 '‘그는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지는 않았다'(2역대 25,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마츠야 이전의 유다 임금들 가운데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였다는 칭찬을 받은 임금은 단지 3대 임금 '아사'뿐이었다(1열왕 15,11). 한편 아마츠야는 비록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 '적당주의'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츠야와 그의 부친 요아스가 행한 행위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둘 다 처음에는 주님께 열심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우상을 숭배하였다(2역대 24,18; 25,14). 양자 모두 예언자들의 조언을 거부하였다(2역대 24,19; 25,16). 그리고 두 사람 공히 모반자들에 의해 피살당했다(19절; 12,21). 또한 둘 다 적군에게 성전의 많은 보물들을 내주었다(14절; 12,18).
“그는 자기 손에서 왕권이 튼튼해지자 부왕을 시해한 신하들을 쳐 죽였다”(5). 아마츠야는 집권 초기에 부친 요아스를 암살한 세력(12,20,21)에 의해 여러가지로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 앞에서 정직히 행해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츠야의 통치권 확립과 더불어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유다는 아하즈야 왕과 악녀 아탈야의 집권, 아람 임금 하자엘의 공격 등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졌었다. 그러나 아마츠야는 에돔과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국력 신장의 계기를 잡은 것이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요람 임금 때 유다로부터 독립하였다(8,20-22). 아마 에돔은 아람 임금 하자엘이 유다를 괴롭히는 틈을 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조금씩 차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유다의 아마츠야는 이 지역으로부터 에돔을 몰아내고 아라바 지역으로 부터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 아합 이후 이스라엘보다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남유다가 에돔과의 승리로 인하여 아마츠야가 교만해져 북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아합 이후 남유다는 계속해서 북이스라엘의 기세에 눌려 지냈는데 이제 아마츠야는 여호아스에게 정식으로 같은 지위에서 지내자고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임금은 그것을 정식 선전 포고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유다 임금 아마츠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레바논의 엉겅퀴가 레바논의 향백나무에게 ‘그대의 딸을 내 아들에게 아내로 주오.’ 하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레바논의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엉겅퀴를 밟아 버렸다”(9).
이 우화는 과거 요담이 세켐 사람들에게 말한 우화와 아주 비슷하다(판관 9,7-15).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유나 우화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를 취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의 한 표현 형태이다. 한편 여기서 엉겅퀴는 남유다를, 향백나무는 북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런데 엉겅퀴가 갑자기 교만해져서 향백나무에게 딸을 달라고 하는 요구는 당시 동등한 신분간이라야 성사될 수 있었던 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엉겅퀴'는 비천한 신분, 불신앙, 심판, 고난을, '향백나무'은 의인의 번영,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1열왕 5,9-11).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들에게 이 엉겅퀴가 짓밟히고 말았는데 이것은 엉겅퀴인 유다가 향백나무인 북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 멸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러한 여호아스의 비유가 유다의 아마츠야의 비위를 매우 상하게 했을 것이다.
유다가 엉겅퀴와 같이 교만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마츠야의 도전을 순전히 그의 교만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군사들이 유다 성읍을 엄습하고 3천명의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한 것(2역대 25,13)에 대한 일언 반구(一言半句)의 사과도 없는 여호아스의 태도에 대해 아마츠야는 더욱 분개하였음이 틀림없다.
북이스라엘 여호아스의 공격에 의해 남유다의 아마츠야의 군대가 모두 도망감으로 인해 아마츠야는 여호아스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후에 아마츠야가 모반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는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여호아스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이스라엘의 임금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예로보암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16).
2열왕 14,17-22 유다 임금 아마츠야가 죽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거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마츠야가 라키스로 도망쳤지만, 모반자들은 그의 뒤를 쫓아 라키스까지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그를 죽였다”(19).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이후부터 모반자가 왕위를 찬탈하여 그의 아들 아자르야를 임금으로 세웠다. 모반의 원인이 아마츠야가 하느님을 버렸기에 당시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임금과 제사장들 간의 충돌에 있었다고 본다. 임금은 라키스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모반자들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임금은 라키스 백성들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2열왕 14,23-29 예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 통치
예로보암 2세는 기원전 787-747년에 다스렸다. 예로보암 2세가 임금이 된 때는 유다 임금 아마츠야 통치 제25년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 임금이 같은 이름을 가진 첫 번째 임금의 ‘모든 죄’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마디로 요약함으로써 그가 지은 죄를 비난한다(14,24). 그러나 예로보암 2세는 실제로는 마흔한 해의 통치 기간 동아 모압부터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하맛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이스라엘이 소유했던 영토를 회복했고, 이스라엘에 솔로몬 시대에 비할 수 있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 인물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으므로,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27).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임금들 중에서 영토 확장에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였다. 이스라엘과의 극성스러운 경쟁국이었던 아람이 아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 3세에게 침략당하여 수도 다마스커스까지도 정복되는(기원전805년)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잃은 땅을 모조리 되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여로보암과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는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에 있어서 그 맥을 같이한다. 한편 여로보암 2세의 죄악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로 인하여 그는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
즈카르야는 예후의 4대손으로서 주님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예언(10,30) 즉 예후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임금 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서 성취된 것이다.
2열왕 15,1-7 아자르야의 이스라엘 통치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임금 아마츠야의 아들 아자르야가 임금이 되었다”(1).
아자르야는 기원전791-767까지 약 24년간 그의 부친 아마츠야와 섭정을 했다. 그러므로 그가 정식으로 등극한 해는 아마츠야가 죽은 해인 기원전767년이며 그가 단독으로 통치한 기간은 약 28년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16세에 임금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처음 섭정하기 시작한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도 그가 16세에 등극하여 52년간 다스린 후 68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 역시 그가 16세에 섭정을 시작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다.
아자르야는 아버지 아마츠야에 따라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고, 백성들이 산당에 제물을 바치는 것을 묵인하였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임금을 치시니, 그는 죽을 때까지 나병 환자로 별궁에서 살고, 요탐 왕자가 궁전을 관리하며 나라의 백성을 다스렸다”(5).
유다 임금들의 치적을 평할 떼 그 기준은 항상 다윗 임금이었다. 그러나 다윗에 비길만한 칭찬을 들은 임금은 히즈키야와(18,3) 요시야(22,2) 뿐이다. 한편 역대기기자는 아자르야, 즉 우찌아가 즈카르야 예언자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께 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2역대 26,5). 이는 그가 우상 숭배 때문에 주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교만에 의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임을 반영한 것이다.
유다 열왕들의 치적을 평가함에 있어서 주님 신앙에 대한 배교적인 행위를 일삼던 장소인 산당을 제하지 않는 것은 임금의 선악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1열왕 15,14:2 2,43; 2열왕 12,3: 15,35).
아자르야가 나병에 걸린 것은 그의 통치 말년이기 때문에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아자르야가 나병 환자가 된 후 별궁에 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들 요탐이 왕궁의 일을 돌보았는데 이 때 요탐은 적어도 15세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탐은 임금위에 오른 때의 나이가 25세이므로(33절) 아자르야(기원전 791-739년)가 나병에 걸렸던 기간은 10년 이하일 것이다.
아자르야의 이런 저주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 가운데서 고독하게 사는 인생들에게도 적용된다. 임금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무서운 저주 가운데서 살았던 아자르야와 같은 인생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육체적으로 안락하다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로마 2,9). 섭정 임금 요탐은 명목상으로 임금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사(國事) 전반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요탐은 이때 섭정을 시작해서 아자르야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2열왕 15,8-12 즈카르야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자르야 제삼십팔년에, 예로보암의 아들 즈카르야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다스렸다”(8). 여기서 말하는 '아자르야의 38년'이란 그의 부친, 즉 아마츠야(기원전 796-667년)와 함께 섭정한 24년을 합하여 계산한 것이다. 북 이스라엘 임금 즈카르야(기원전753-752년)와 2역대 26,5에 나오는 즈카르야 예언자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한편 8절에 언급된 '즈카르야'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경건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6개월 동안의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죄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9절). 북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예로보암은 백성의 종교심을 묶어 놓기 위해 우상 정책을 쓴 장본인이다(1열왕 12,25-33).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재위 22년에 죽고 그 아들 나답도 재위 2년 만에 죽고 만다(1열왕 14,13-20). 특히 그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1열왕 12,28-33). 그래서 그 후부터 그는 금송아지 우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즈카르야도 단(Dan)과 베텔(Bethel)에서 송아지 숭배를 했기 때문에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2열왕 15,13-16 살룸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우찌야 제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한 달 동안 다스렸다.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티르차에서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쳐 죽이고 그 뒤를 이어 사마리아의 임금이 되었다”(13-14). 이와 같이 살룸이 한 달 밖에 임금위에 있지 못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가를 보여 준다(기원전 747-746년). 그리고 이러한 사실 즉,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부질없는 권력욕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백성들의 의사와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자리는 아침이면 사라질 안개와도 같은 권력인 것이다. 므나헴은 즈카르야의 군대를 이끌고 살룸에게 보복했다. 이는 므나헴이 티르차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그가 므낫쎄 지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파 간의 전쟁이 치열했다는 논증의 좋은 증거가 된다.
2열왕 15,17-21 므나헴의 이스라엘 통치
“아시리아 임금 풀이 나라를 치러 오자, 므나헴은 은 천 탈렌트를 풀에게 주었다. 이는 므나헴이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 손에서 왕권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다”(19). 므나헴은 팀사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 팁사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므나헴의 이스라엘 통치는 하느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상 숭배 중에서도 금송아지 숭배에 의한 죄악을 범했을 경우에 이렇게 표현했다(1열왕 12,28-30). 그리고 이러한 말은 북왕국의 초대임금 예로보암으로부터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는 말기까지 대부분의 왕들이 악한 임금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 풀이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이에 므하헴은 일천 탈란트를 조공으로 바쳤다. 드라크마(Drachma)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할 때 은 한 달란트(Talent)는 약 6,0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돈이다(탈출38,27; 마18,24). 그렇기 때문에 은 일천 달란트라고 하면 6백만 드라크마이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약 5만원으로 계산할 때 이는 약 3,000억원에 해당된다. 이처럼 많은 돈을 주고 므나헴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기원전 747-727년) 그의 통치를 바빌론에까지 넓힐 때 지녔던 이름이다. 그의 실록에는 사마리아 므나헴이 다마스쿠스의 르친과 티로의 히람과 더불어 그의 숙국 임금들 가운데 하나로 등록되어 있다.
므나헴이 아시리아 임금에게 많은 공물을 바친 것은 요르단 동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주도록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조공을 주어 자신의 불안정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행위는 성전의 은과 금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려했던 남유다의 아사, 아하스, 히스키야에 버금가는 악행이었다.
한편 자기 동족 중 팁사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했던 므나헴은(16절) 바닥난 재정을 메우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악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지만 선한 통치자와 관료는 자기 것을 희생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한편 므나헴은 당시 정치와 경제의 지주였던 부자들에게서 토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바, 공정을 행하기보다는 자신의 배만 채우고자하는 불한당같은 지도자에 불과했다. 어느 나라든지 지도자들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결코 부흥될 수 없다.
므나헴은 아시리아 임금에게 은 천 탈란트를 주려고 모든 부자에게 은 50세켈씩을 거두었다. 은 한 세켈(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된다(탈출30,24). 그렇기 때문에 은 오십 세켈은 200일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품삯이다. 만약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10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런데 은 오십 세켈로 은 일천 달란트를 만들려면 3만명 정도의 사람에게 강제로 거출해야 했을 것이다.
2열왕 15,23-26 프카흐야의 이스라엘 통치
므나헴의 아들 프카흐야는 2년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부하 장수 페가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한다(기원전 736-735년). “그의 무관, 르말야의 아들 페카가 그를 거슬러 모반하였다. 페카는 아르곱과 아르예와 길앗 사람 쉰 명과 더불어, 사마리아 왕궁 성채에서 프카흐야를 죽이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25). 므나헴의 아들 프카흐야(기원전 736-735년) 역시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북왕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2열왕 15,27-31 페카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자르야 제오십이년에 르말야의 아들 페카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스무 해 동안 다스렸다”(27). 티글랏 필에세르(Tiglath Pileser III)의 비문을 보면 아시리아가 기원전 732년에 페카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절). 그리고 이 아시리아 임금은 기원전 745년부터 727년까지 약 18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중에서 므나헴의 통치기간 10년과 프카흐야의 통치 기간 2년을 제외하면 페카에 해당되는 통치 연수는 불과 6년 남짓하다. 그러므로 페카가 20년간 북왕국을 통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는 여기서 말하는 20년이 북왕국 내의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난 햇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국내 분쟁이 발생한 기간은 유다 임금 아자르야 38년 즉, 북이스라엘 임금 즈카르야(기원전 753-752) 때부터 남왕국 아자르야 52년까지 약 14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페카가 임금으로 단독 통치한 햇수는 6년에서 8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스라엘 임금 페카 시대에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와서, 이욘, 아벨 벳 마아카, 야노아, 케데스, 하초르, 길앗, 갈릴래아와 납탈리 온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29).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가 이끄는 이 전쟁은 기원전 739-732년에 일어났다. 아시리아 침략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임금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티글랏 필에세르는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래아와 길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는 마침내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아람 임금 르신을 처형시켰다(16,9).
“그 뒤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르말야의 아들 페카를 거슬러 모반을 일으켰다. 그는 페카를 쳐 죽이고, 우찌야의 아들 요탐 제이십년에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30).
2열왕 15,32-38 요탐의 유다 통치
“이스라엘 임금, 르말야의 아들 페카 제이년에 유다 임금 우찌야의 아들 요탐이 임금이 되었다. 요탐은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여루사인데 차독의 딸이었다”(32-33). 그의 어머니는 사제 차독의 딸이다. 차독이 사제이기에 요탐은 사제 계열과 왕족 계열의 맥을 동시에 이은 자임이 분명하다. 요탐에 대한 평은 그의 아버지 우찌아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을 일을 하였다. 그가 제사장의 딸이라고 간주되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부친보다는 성전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요탐은 주님의 집 ‘윗대문’을 건축하였다(35). '윗대문'은 안마당, 혹은 윗마당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이다. 그러나 이 문은 북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 문을 말하는데 일명 '베냐민의 윗문'이라고도 했다(즈카 14,10). 한편 2역대 27,3을 보면 요탐이 오벧 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성읍을 많이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가 수도를 요새화하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당시의 혼란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께 대한 그의 신앙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2역대 27,6).
2역대 16,1-19 아하즈의 유다 통치
“르말야의 아들 페카 제십칠년에 유다 임금 요탐의 아들 아하즈가 임금이 되었다. 아하즈는 스무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과는 달리 주 그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역겨운 짓을 따라, 자기 아들마저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1-3).
남 유다에서는 아하즈가 임금이 되는데 기원전 735년 또는 731년부터 715년까지 다스렸을 것이다. 그가 통치를 공식적으로 시작한 해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펠에세르가 무력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아하즈가 통치를 시작했을 때, 아마도 기원전 731년 전에 그는 아람 임금 르친과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 임금 페카의 침략으로 고난을 겪는다. 아하즈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죄를 저질러 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이 아들은 아하즈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자손이자 다윗 왕조의 상속자였다(2열왕 16,3; 2역대 28,7은 아하즈의 다른 아들 마아세야의 죽음을 언급한다).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아하스가 예루살렘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자기 자식을 희생 번제물로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는 몰록에게 자식을 바치는 일을 경고한 곳(레위 18,21 ;20,1-5)이 있는데 이것은 인신제사가 우상 숭배의 행위에서 벌어지는 예식의 일부분뿐만 아니라 풍조이기 때문에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이민족과 동맹을 맺지 말라고 설득하기 위해 표징으로 제시하는 이사야 7장에 ‘임마누엘’이라 불릴 사내아이의 탄생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저자는 이 열왕기 본문에서는 이사야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사야가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아하즈는 아시리아 임금인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 복종한다.
열왕기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고대 중동의 전쟁과 정치 안에 휘말리게 된다. 아시리아의 사료와 비문은 기원전 854년에 아합이 아시리아와 싸우기 위해 카르카르 전쟁에 개입하고, 예후 임금이 기원전 841년경에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3세에게 조공을 바쳤음을 알려준다. 아하즈가 아시리아 임금에게 지나치게 충성스런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유다는 자주성을 잃고 아시리아 제국에 굴종하는 나라로 전락한다.
티글랏 필에세르는 아하즈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기원전 733년 북쪽으로 진격하여 다마스쿠스를 파괴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여 납탈리, 길앗, 갈릴래아 주민들을 추방한다. 이스라엘의 페카는 살해되고 아시리아에게 호의적이던 호세아가 임금이 되는데, 그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기원전 731-722년, 15,29)이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타협한다(10-18절). 10-18절은 아하즈 임금이 저지른 경신례상의 중요한 잘못을 강조한다. “아하즈 임금은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를 만나러 다마스쿠스로 갔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즈 임금은 그 제단의 자세한 그림과 모형을 우리야 사제에게 보냈다”(10). 우리야 사제는 다마스쿠스의 제단을 그대로 예루살렘에 만들었다.
근동의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예배 대상인 우상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산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의식에 엄숙함과 신비함을 부여하기 위해서 무성한 나무 숲 아래서 제사를드렸다. 아하스는 이러한 산당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 행위를 장려했다. 그래서 그는 통치 말기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2역대 28,24).
이사야 예언자는 임금에게 아시리아 임금과 동맹 맺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었다(이사 7,4). 왜냐하면 강대국 즉, 아시리아와의 동맹은 강대국에 대한 약소국(남유다)의 종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때부터 유다는 정치적으로, 또 한 군사적으로 아시리아에 예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유다의 아하스는 자신을 굴욕적으로 비하(卑下)하면서까지 아시리아를 의지하여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잘못된 동기, 즉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들어 유다를 벌하시려는 것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막아 보려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비록 제사장 우리야가 하느님 앞에 진실된 증인이었다 할지라도(이사 8,2) 뚜렷이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아하스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에스 33,6). 반면에 세례자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과감하게 꾸짖었으며(마르 6,18),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같은 자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셨다(마태 23,1-36).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도 매일의 삶 가운데서 종교적인 개혁은 물론 정치적인 개혁까지 신경을 써서 사회가 하느님 말씀 가운데서 굳게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야 사제처럼 잠잠하면 하느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의 피값을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에스 33,6).
2열왕 17,1-23 북왕국의 종말
“유다 임금 아하즈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1).
호세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해는 1절에서 말하듯이 아하즈 통치 “제이십이년”이 아니라 ‘제이년’일 것이다. 호세아는 9년 후 아시리아를 거슬러 반역을 꾀한다.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의 후계자 살만 에세르 5세는 이 모반을 알아차리고 신속하게 보복한다. 기원전 724년 살만에세르는 사마리아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722년에 살만에세르의 후계자인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무너뜨린다.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6). 남은 북쪽 지파들은 아시리아 북쪽에 있는 하보르강 옆의 할라 성읍으로 끌려간다. 18,9-12에서 이 공격을 되풀이해서 묘사한다.
사마리아 성이 함락된 연대는 기원전 722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1,2차 침입(15,29; 16,9)으로 인해 이미 많은 백성들이 아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갔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나머지 이스라엘 지역에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있었다. 세겜으로부터의 증거는 바로 이러한 것을 증명해 준다. 5절 주석 참조. 한편 사르곤(Sargon)의 비문에는 그 당시 사마리아에서만도 남자만 약 27,29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사마리아 전체 인구의 1/3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 따라서 남자는 거의 모두 붙잡혀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네브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4,600명 정도를 포로로 잡아간 것에 비교해보면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예레 52,30).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주된 곳은 할라와 고잔 강가 하보르, 그리고 메디아의 여러 고을이었다. 그런데 할라(Halah)라는 지명은 아시리아 제국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고잔은 오늘날 '텔 할라프'(tel Halaf)로 추측된다. 그곳은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하보르 강 유역이다. 그렇지만 하보르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메디아는 지금의 이란 북서 지방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그러나 기원전 550년경 페르시아에 합병되었으니 곧 페르시아 임금 고레스 때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했음을 먼저 상기시킨다. 특히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의 사건은 후기 예언자서에서 하느님의 계약적 사건으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호세 11,1). 즉 하느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었던 계약을 기억하여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바로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다시금 저들에게 새로운 축복의 계약을 주셨다(탈출 2,23-25). 그런데도 그들은 그 같은 계약을 저버리고 하느님께 불순종하였으니 이제 다시 아시리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7).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확고히 선택하셨다. 이제 주님은 다른 모든 신을 거부하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저버리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이다. 이 구절에서 나타난 신명기계 문헌의 특징적 요소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곧 ‘주님’에 하느님을 덧붙임(신명기에만 300번 이상 나옴)에서 두드러지게 알 수 있다.
13절에 나오는 '예언자'와 '선견자'는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다. 1사무 9,9에는 "지금 예언자라고 하는 자를 옛날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두 단어를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언자'(나비)는 '선포하다', '말하다'라는 뜻의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예언자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명칭이다. 반면 '선견자'(로에 또는 호제)는 '보다'(라아) 또는 '인지하다'(하자)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는 곧 예언자의 신령한 환상을 보는 측면에서 강조점을 둔 명칭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솔로몬 임금의 통치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1열왕 11장)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해 성찰한다. 그들은 아이를 제물로 바친 것을 포함하여(17,14-18)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목록을 작성한다.
“주 저희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저버린 채, 자기들을 위하여 쇠를 녹여 부어 송아지 형상을 두 개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며, 하늘의 모든 군대를 예배하고 바알을 섬겼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16-17).
특별히 '두 송아지'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탈출 32장)이 아닌 예로보암의 두 금송아지 사건(1열왕 12,28-30)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모든 군대’란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의 모든 빛물체를 말하는데, 이들도 예배의 대상이다. 별들의 숭배는 유다 왕국에서는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형향을 받은 므나쎄 치세(기원전 752-742년) 때에 나타난다.
그리고 바알(Baal) 숭배가 처음 언급된 때는 기드온 시대이다(판관 6,25-32). 그러나 바알을 가장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 숭배에 빠지게 한 임금은 바로 아합이다. 몰록 종교의 인신 제사(人身祭祀)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가나안 족속들은 자식들 중 한 명을 택하여 몰록에게 바치면 나머지 자식들에게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한편 일월성신 숭배와 마찬가지로 몰록 종교의 인신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 역시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16,3에서 유다 아하스가 이러한 인신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들을 볼 때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행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또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글에도 이러한 행위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음을 암시한 곳이 있다(호세 4,2).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라는 것에서 점괘는 무슨 표적을 보고 점을 치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술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명 18,10에서는 몰록 숭배와 함께 이러한 점괘와 마술행위가 엄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아합 시대에 이러한 행위들이 있었던 것으로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9,22).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이 먼저 그분을 저버렸기 때문에 백성을 포기하신다. 저자는 두 번이나 백성에게 경고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언자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고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17,13.23)이라고만 적는다. 우리는 기원전 9세기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예언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았다. 기원전 8세기 중반은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한 시기인데 열왕기에는 이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유배 이후의 관점에서 기록한 경고 안에 유다도 포함시킨다(17,13.19).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로보암이 지은 온갖 죄를 따라 걷고, 그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당신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땅에서 아시리아로 유배를 떠나 오늘에 이르렀다”(22-23).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력하게 예로보암의 죄에 빠져 들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외양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을 지닌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창세 3,6). 아무튼 여기서 밝히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는 예로보암의 잘못이 컸다.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에 우상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보암은 이스라엘 왕들의 죄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단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게 마련이다(1열왕 15,26,34).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로서는 실로 사람 아히야(1열왕 14,15,16)와 아모스(아모 7,17)가 있으며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이외에 호세아, 이사야 예언자 등이 있다(호세 1,6; 9,16; 이사 28). 더욱이 기원전 1406년경에 행한 모세의 고별(告別) 설교에도 이러한 경고가 나오니 곧 "주님께서는 너희뿐 아니라 너희가 받들어 세운 임금을,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도 못하던 민족들에게 데려가실 것이고, 너희는 거기에서 나무와 돌로 된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다(신명 28,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 간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 정확히 성취된 사건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됨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의 치욕이었다. 더군다나 신명기적 역사관에 투철한 열왕기 저저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까지 계속되는 고난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경고와 교훈이라는 측면에서 되씹어야 할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열왕기 저자는 '오늘에 이르렀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열왕 18,1-7 히즈키야의 유다 통치
“이스라엘 임금,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임금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가 임금이 되었다. 히즈키야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아비인데 즈카르야의 딸이었다”(1-2).
아하자의 아들 히즈키야(기원전 715-686년)는 열왕기 저자에게 다윗 이후 비난 대신 칭찬을 받는 첫 임금이다. 그가 “호세아 제삼년”(기원전 728년)에 임금이 되었다는 말은 아버지 아하즈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이 연대는 사실상 그가 탄생한 지 4-5년 후라고 할 수 있는데, 히즈키야가 기원전 715년 왕위에 올랐을 때는 18,2에 나오는 25세가 아니라 약 19세였을 것이다. 히즈키야가 단독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해가 기원전 715년이라는 것은 18,13의 연대를 받아들인 것인데, 이 구절에는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해(기원전 701년)가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으로 되어 있다. 이 햇수는 히즈키야가 유일한 통치자로서 다스려 온 해를 가리킨다. 따라서 29년이라는 통치 기간(18,2)은 아버지와 함께 통치한 기간을 포함시켜 계산한 것이다. 이런 계산은 이사야서 연구와 이사야가 예고한 임마누엘(이사 7,14) 또는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이사 9,5)가 히즈키야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중요하다. 히즈키야는 남유다에서 조상 다윗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눈에 드는 일을 하였다.
열왕기 저자가 히즈키야를 칭찬하는 이유는 이 임금이 바알 숭배 예식이 행해지던 다른 장소와 함께 신명 12,1-4에서 금지하는 “산당들”, 제단의 “기둥들”, “목상들”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정화 작업에는 백성의 그릇된 예배 형태 때문에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 뱀(민수 21,6-9 참조)을 파괴하는 것까지 포함된다(18,4).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4).
저자가 히즈키야같은 임금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18,5) 없었다고 칭찬하는 것은 궁정식 과장법이다. 같은 표현이 후대의 요시야 임금에게도 사용될 것이다(23,25).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 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에서도 그만 한 임금이 없었다”(5).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에 대항한 일(18,7)은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 2세가 704년경 죽었을 때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반란을 가리킨다. 유다의 정치적 상황은 아하즈 임금이 아람과 아스라엘을 치려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한 이래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히즈키야는 그의 치세 처음 몇 해 동안 아시리아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산헤립이 자기 왕권을 다지면서 일어난 혼란의 틈을 이용한다. 그래서 그는 아시리아 지배 아래에서도 필리스티아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었다.
2열왕 18,9-12 사마리아가 함락되다
“히즈키야 임금 제사년, 이스라엘 임금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가 사마리아로 올라가 그곳을 포위하고, 세 해 만에 함락시켰다. 곧 히즈키야 제육년, 이스라엘 임금 호세아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이다”(9-10).
히즈키야의 영도 아래 유다는 다시금 부흥의 기치(旗幟)를 올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호세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멸망의 위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에 그 같은 환란이 임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12절). 따라서 히즈키야와 유다는 이러한 사실에서 더욱더 교훈을 받아 각성하였을 것이다.
2열왕 18,13-18,37 산헤립의 침략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에,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으로 올라와서 그곳들을 점령하였다”(13). 산헤립의 선임 임금인 사르곤 2세는 기원전722년에서 705년까지 약 17년 내지 18년간을 통치했다. 그리고 산헤립은 그 뒤를 이어 기원전 704년에 즉위했다.
아시리아의 새 임금 산헤립(기원전 704-681년)은 일단 그의 제국을 굳건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자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그 해가 701년이었다. 18-19장에는 같은 사건을 다룬 이야기 세 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18,13-16의 첫째 이야기는 히즈키야가 조공을 바쳐 전쟁을 끝내기로 한 굴욕적인 합의를 묘사한다. 18,17-19,7의 둘째 이야기와 19,9ㄴ-37의 셋째 이야기는 모두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기적적으로 보호하신 것을 찬미하는 내용이 담긴 신학적인 이야기다.
18,13-16의 첫째 이야기는 히즈키야가 굴욕적으로 조공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유다 임금 히즈키야는 라키스로 아시리아 임금에게 전갈을 보냈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면 임금님께서 부과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자 아시리아 임금은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은 삼백 탈렌트와 금 서른 탈렌트를 요구하였다”(14). 아하즈 임금때 이미 아시리아에 조공으로 금을 바쳤기에 금이 부족하여 히즈키야는 은을 모두 내 주었다. 히즈키야는 솔로몬의 경우에서처럼(1열왕 6,20-22) 성전을 깨끗케 하면서 성전의 문과 기둥에 금을 입혀 장식한 것 같다(2역대 29,17-19). 그러나 이제 그가 문짝이나 문설주에 입혔던 금까지도 벗겨서(16절) 산헤립에게 조공으로 바쳐야했던 것은 아하스 때에 이미 성전과 왕궁의 은금을 조공으로 다 바쳤기 때문에 아시리아 임금에게 바칠 삼십 달란트의 금(14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달란트(Talent)를 무게 단위로 계산할 경우 1달란트는 약 34.27kg에 해당하는 중량이다.
둘째 이야기는 18,17-19,9에서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이차 침공이야기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승리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시리아 임금은 라키스에서 타르탄과 랍 사리스와 랍 사케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 예루살렘으로 히즈키야 임금에게 보냈다. 그들이 올라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그들은 올라와 그곳에 이르러, ‘마전장이 밭’으로 가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곁에 주둔하였다”(17).
17절을 아시리아의 2차 침입으로 보느냐 아니면 1차 침입(13-16절)의 연장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견해가 다르다. 먼저 이것을 1차 침입의 연장으로 보는 학자가 있다. 이 견해의 대표자가 카일(Keil)인데 카일은 아시리아 임금이 히즈키야로부터 조공을 받은 뒤에(16절) 히즈키야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악용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 가지 않고 도리어 예루살렘을 침공했다는 것이다. 카일은 이 같은 근거로 평행구절인 이사 36,1,2를 든다. 사실 사36장의 1절과 2절은 매우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1차 침입의 연장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것을 2차 침입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아시리아의 2차 침입 시에는 에티오피아 임금 티르하카와 교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19,9) 이 티르하카(Tirhakah)는 히즈키야의 동맹 요청에 응하여 히즈키야를 도우러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와 에티오피아 간에 동맹을 체결하는데는 상당한 기간이 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침입은 2차 침입으로 보아야한다. 둘째, 1차 침입 시에 유다는 이미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어서 완전히 쇠진한 상태에 있었으니 계속해서 아시리아와 맞서 교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시리아는 기원전701년에 1차 침입을 한 후 2년 후인 기원전699년에 2차 침입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시리아 임금의 대변인 랍 사케는 히즈키야가 이집트와의 동맹에 대해 파기할 것을 전한다. “지금 너는 저 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지나지 않는 이집트를 믿는다마는, 그것에 기대는 사람마다 손바닥만 찔리게 된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바로 그러하다”(21). 이미 히즈키야가 이집트와의 동맹을 교섭 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히즈키야가 이처럼 이집트와 동맹 맺는 것을 누구보다도 비난한 사람은 이사야 예언자였다. 사실 당시에 이집트는 어느 정도 이전 세력을 되찾고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아시리아와 맞설 만한 상대는 되지 못하였다. 한편 여기서 랍 사케가 이집트을 갈대에 비유한 것은 이집트를 상징하는 나일 강변에 갈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러진 갈대 지팡이'와 '주님에 대한 의뢰'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다. 갈대, 그것도 부러진 갈대를 의지하는 자는 그 갈대가 부러질 때 껍질에 찔려 오히려 피를 흘리게 되지만(이사 36,6)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3)처럼 영원 무궁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부러진 갈대'라는 표현을 '꺼져 가는 등불'과 함께 인생의 연약함을 비유할 때도 사용된 적이 있다(이사42,3;마태 12,20).
랍 사케는 모욕적 언사로 예루살렘의 사람들의 마음을 휘잡아 놓는다. “그러나 랍 사케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주군께서 너희 주군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제 똥을 먹고 제 오줌을 마셔야 할 저 성벽 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겠느냐?”(27). 이는 곧 계속적인 악순환만 있을 뿐이며 헤쳐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즉 아시리아의 군대가 장기간 예루살렘을 포위할 경우에는 성벽위에 앉아서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일반 백성도 임금의 신하들과 함께 먹을 것이 없어서 대변과 소변을 먹어야 할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니 지금 항복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말이다. 랍 사케의 이런 말은 이스라엘 백성을 현혹하며 위협하는 것이다. 즉, 백성들이 이와 같은 말을 듣고 하루속히 항복하기를 원하도록 하려는 위협적인 술책이다.
랍 사케의 말은 당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과는 정반대된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주님께서 유다를 도와 주실 것이라는 충고(19,6.7;2역대 32,6-8)와 함께 아시리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이사 31,4-6). 그런데도 랍 사케는 지금까지 히즈키야의 사자들에게 말하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 위에 있는 백성들과 병사들을 향하여 “너희는 히즈키야에게 속지 말라”(29)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31절에서 랍 사케는 이제 마지막으로 유다 백성들을 회유하고 있다. “때가 되면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땅과 다름없는 땅으로, 곧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 빵과 포도밭의 땅, 새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겠다. 그러면 너희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히즈키야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 내신다.’ 하면서 너희를 부추길 때, 그의 말을 듣지 마라”(31).
히즈키야 임금이 랍 사케와 아시리아의 오만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대답하지 마라”(36)라는 명령을 미리 한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랍 사케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아주 효과적인 조치였다. 즉 설전(舌戰)은 오고 가는 말 속에서 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질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유다 성읍민을 자극시켜 그들의 불평을 유도, 내란 사태에 빠뜨리려는 랍 사케의 계획은 들은 척도 아니한 백성들의 자세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이 같은 사실은 하느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는 영적 교훈을 제시해 준다(야고 4,7).
2열왕 19,1-9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문의함
“히즈키야 임금은 그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두르고서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19,1). 성경에는 여러 형태의 옷을 찢는 행위가 언급되어 있다. 즉, 나병 환자의 경우에나(레위 13,45), 상징적 행동으로(1열왕 11,30), 혹은 회개할 때(22,8-20) 옷을 찢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옷 찢는 행위는 슬픔이나 고통, 분노 등을 나타낼 때였다. 여기서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슬픔과 분노를 표시한 이뿐만 아니라 임금과 하느님의 백성 모두를 무시하여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옷을 찢고 자루 옷을 두르는 것은 곧 극한 슬픔과 원통함 그리고 겸비함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히즈키야가 이러한 감정을 토로(吐露)하였던 것은 랍 사케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18,33-35). 즉 히즈키야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포위도, 백성들이 당하는 어려움도 아닌 바로 주님의 이름이 이방인에 의해 모독당한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위협과 조롱에 직면하며 보여 준 히즈키야 임금은 “주님의 집”에 들어가는 태도는 똑같은 위기 상황에 처하였어도 달리 행동한 아하스나 치드키야, 여호야킴 임금들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다(16,1-20; 23,34-24,5;24,17-25,7). 즉 히즈키야는 그들과 같이 군대나 무기의 힘으로 원수들을 대적하지는 않고 기도와 눈물과 겸비함으로 주님께 매달렸으며 하느님의 사람 이사야를 찾았던 것이다(2절).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히즈키야의 신앙 자세를 보시고서 그를 환란 가운데서 건져내주셨다(6,7, 20-37절).
2절에 아모츠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언급된다. 이는 열왕기서에서 처음으로 이사야 예언자가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부친 아모츠(Amoz)는 예언자 아모스(아모 1,1)와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예언자를 소개할 때 이처럼 그 부친의 이름과 함께 소개하는 것은 성경상의 관례였던 것 같다(14,25;1열왕 16,7).
히즈키야의 신하들은 이사야에게 현재의 예루살렘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긴박성과 어려움을 말한다. “‘이날은 환난과 징벌과 굴욕의 날이오. 아이들이 태어나려고 하는데 낳을 힘이 없구려”(3). 여인이 임신하여 해산할 능력이 없다면 아이도 산모도 모두 위태하게 된다. 여기서 이는 유다 민족이 환란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결할 능력 및 방법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히즈키야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인식은 있었으나 자신에게 그것을 헤쳐 나갈 능력이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
4절에서 자신과 백성들의 죄악은 랍 사케의 말대로(18,25)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리할지라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랍 사케의 말을 들으신다.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그의 주군인 아시리아 임금이 보낸 자요. 주 그대의 하느님께서 들으신 그 말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오”(4)라는 이사야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탄원에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우리의 죄악은 보지 마시고 원수들의 모독의 말에 분노하셔서 응답해 주실 것을 빌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히즈키야는 원수들의 막강함과 희롱의 말에 좌절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의로움에 호소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히즈키야 임금의 신하들은 이사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보라, 내가 그에게 영을 보내면, 그는 뜬소문을 듣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겠다”(7).여기서 '그에게'는 분명 랍 사케가 아닌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을 의미한다(35-37절). '영을 보내며'라는 말은 '두려운 마음' 또는 '겁 많은 영'으로 이해, 하느님께서 산헤립의 마음속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뜻한다. 산헤립은 뜬소문을 듣고 아시리아로 돌아간다. 이 말은 9절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임금 티르하카의 진군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겠다”라는 산헤립의 죽음에 관한 예언은 37절에서 성취되었다.
산헤립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하겠다던(18,17) 최초의 목표를 바꾸어 '리브나'로 떠났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보다 우선 자신의 뒤를 공격해 오는 에티오피아 임금 티르하카의 공격을 막는 것이 더 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아시리아 임금은 에티오피아 임금 티르하카가 자기와 싸우려고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아시리아 임금은 히즈키야에게 다시 사신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9).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티르하카(Tirhakah)는 기원전 71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699년경에 에티오피아의 임금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그는 약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형제 사바타가(Shabataka)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티르하카는 비단 에티오피아 임금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25대 왕조 중 세번째 임금으로서 이집트 임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손꼽혔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를 이집트임금이라 하지 않고 에티오피아 임금이라고 한 것은 그가 본래 에티오피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수많은 소국(小國)들로 나뉘어져 있던 이집트는 에티오피아의 피앙카에 의해서 대부분이 정복되었고 티르하카에 의해 그 실제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99년경 아시리아가 히즈키야를 공격하자 티르하카는 히즈키야를 돕기 위해 산헤립을 공격하였다.
2열왕 19,10-13 아시리아가 다시 위협하다
아시리아 임금은 남유다의 히즈키야에게 다시 사신을 보내어 위협을 가한다. “너희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10). 히즈키야에게 보낸 산헤립의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은 첫 번째의 그것에 비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8,19-35의 내용은 대단히 포괄적이나 여기서는 오로지 공격과 비난의 초점이 히즈키야의 주님 신앙에로 모아졌다. 이것은 산헤립이 첫 번째 사신들은 히즈키야에게 보낸 이후로 히즈키야가 더욱 더 주님께 간구하고 예언자를 찾았다는 사실 산헤립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시라아 임금은 히즈키야가 주님께 의뢰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즉 산헤립이 이같이 공박한 이유는 히즈키야가 군사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 신앙에 입각,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산헤립은 히즈키야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아무 희생을 치루지 않고서도 예루살렘을 점령, 남은 병력을 티르하카와의 전투에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2열왕 19,14-19 히즈키야의 기도
히즈키야는 사신들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처음으로 편지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편지는 국가 간의 외교적인 활동에서 사용되는 공식적인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아마도 아시리아는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편지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편지를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여기서 히즈키야의 신앙의 진지함과 주님을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히즈키야가 성전에서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 글에 나타나 있는 산헤립의 교만과 불경(不敬)을 보고 그를 책벌하시며 또한 유다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 염원하는 마음에서 였던 것이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산헤립이 보낸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글들은 주로 슬픔과 탄원의 기도 가운데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이러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인 표현은 기도의 간절함을 나타내 보여 준다. 히즈키야는 산헤립이 오만해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이처럼 인정하고 있다. 사실 많은 민족들을 정복한 아시리아의 막강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히즈키야는 더욱더 주님께 의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절에 이어 18절에서 히즈키야는 산헤립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방신들 가운데 어떤 신도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가 많은 나라들을 파괴하고 그 신들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아시리아가 그만큼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들이 실제로 생명과 능력을 지닌 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히즈키야는 비록 아시리아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 따위의 신은 대적하여 이길 수 있었으나 살아계시는 참된 신인 주 하느님(16절)을 이길 수는 없음을 하느님 앞에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19). 여기서 '이제'(웨아타)라는 전치사는 대단히 중요하다(시편 39,8). 왜냐하면 이는 곧 지금까지 드린 기도의 내용에 의거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일종의 마지막 쐐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히즈키야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이 주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무기로 하여 이방의 위협과 대결한 역사적인 사례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1사무 17,46). 카르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과의 싸움(1열왕 18,37)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히즈키야의 힘있는 기도가 유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열왕 19,20-28 산헤립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20). 20절에서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히즈키야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의 말씀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하느님께서 히즈키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2)산헤립의 교만함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3)이제 산헤립에 대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행하셨다는 연속적인 응답은 탈출 3,7-8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히즈키야의 기도에 3중적으로 분명하게 응답하셨다. 그러기에 이제 20절 이하에 나오는 산헤립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앞서 랍 사케가 큰소리쳤던 내용(18,17-35)과는 완전히 대립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임금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사야서에서 따온 이시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21-24절: 아시리아 임금의 거만함; 25-28절: 아시리아 임금에게 보내는 주님의 말씀; 29-31: 히즈키야에게 내리는 주님의 응답; 32-34: 히즈키야에게 내리는 주님의 다른 응답이다.
“주님께서 그를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경멸한다, 너를 멸시한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21). ‘처녀 딸 시온’이란 땅이나 성읍들을 가리켜 '딸' 또는 '처녀'로 비유하는 것은 판관기나 예언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적(詩的)표현이다. 그리고 '시온'은 일명 '다윗 성'이라고도 불리운 예루살렘 성읍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시온 성을 가리켜 '처녀 딸'이라고 한 것은 잦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히즈키야 때까지 한 번도 이방인의 발에 완전히 짓밟혀 본 적이 없는 사실을 곧 처녀에 비유하기 위함이다.
‘너를 경멸한다’라는 말에서 여기서 '경멸하며'(라아가)와 '비웃었으며'(비자)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민수 15,31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율법을 파괴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레 20,7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조롱하는 것을 가리킬 때, 1사무 17,42에서는 필리스티아가 다윗을 업신여기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이 단어는 산헤립의 주장에 대한 부정과 그의 손재에 대한 조롱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머리를 흔들다’는 말은 거절의 표시로 좌우로 머리를 흔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조롱과 멸시의 뜻으로 머리를 상하로 끄덕이는 것을 가리킨다(시편 22,7;예레 18,16).
“네가 나에게 격노하고 너의 소란이 내 귀에까지 올라왔으니 나는 네 코에 나의 갈고리를 꿰고 네 입술에 나의 재갈을 물려 네가 왔던 그 길로 너를 되돌아가게 하리라”(28). 28절은 아시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교만 때문임을 열왕기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네 코에 나의 갈고리를 꿰고 네 입술에 나의 재갈을 물려’ 이것은 아시리아인들이 행하던 행습을 본 따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 고대 아시리아 지역에서 출토된 비문을 보면 28절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정복된 이방의 임금들이 끌려가는 행상이 부조되어 있다(아모 4,2), 즉 에살 핫돈의 비석에 부각(腐刻)된 그림에는 정복자가 이집트의 티르하카와 티로 임금 발로의 코에 끈을 꿰어 그 끈을 쥐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 보아 훗날 므나쎄도 아시리아 임금 에살 핫돈에게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2역대 33,11). ‘네가 왔던 그 길로 너를 되돌아가게 하리라’라는 말은 7절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과 서로 연관된듯하다.
2열왕 19,29-34 히즈키야에게 내린 주님의 표징
“이것이 너를 위한 표징이다. 너희가 올해에는 떨어진 낟알에서 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는 뿌리지 않고 저절로 난 곡식을 먹으리라. 그러나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29). 29절에서부터는 히즈키야에게 주는 하느님의 축복의 말씀이다. 즉 하느님께서 히즈키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환난 가운데서 유다 백성을 지켜 주실 것임을 말한다. 이 예언적 표징의 문체는 1열왕 13,3; 예레 44,29-30과 유사하다. 이 표징의 뜻은 분명하다. 해방은 시련의 때가 지나 다음에야 올 것이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고 그 열매를 먹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2열왕 19,35-37 산헤립의 말로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35). 35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본장의 클라이막스 부분으로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7절)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여기서 '주님의 천사'는 이집트에서 장자를 쳤던(탈출12장) 천사이자 다윗의 인구 조사 때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렸던 바로 그 천사(2사무 24,15)이다. 하느님께서 이제 아시리아를 징계하시기 위해 아시리아 군대에 그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라는 수치로 볼 때 당시 아시리아 군대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아시리아의 군인들이 일시에 십 팔만 오천이나 죽은 데 대해서는 역병, 광야의 돌풍, 에티오피아 임금 티르하카(9절)의 기습 등 여러 가지 까닭 때문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고 다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예루살렘 주변지를 떠나 니네베에 머물렀다. 니네베는 티그리스 강 건너편 동쪽 언덕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기원전 12세기부터 주목을 받긴 했으나 그곳이 일약 아시리아의 수도(首都)로 발전한 것은 산헤립 때부터였다. 한편 산헤립은 귀국 후 이곳에서 상당한 기간을 지냈던 것 같다.
아드람멜렉과 사르에체르은 에사르 하똔과 더불어 산헤립의 아들들이다(이사 37,38). 그런데 산헤립이 자기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니 참으로 비극적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산헤립의 죽음을 기원전681년경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산헤립이 암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의 손자인 앗술 바니팔의 비문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기는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에 따르면 에사르 하똔은 산헤립이 죽은 후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에사르 하똔은 산헤립의 가장 어린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인 다른 형제들과 싸운 것이다.
에사르 하똔(기원전681-669)은 자기 아버지 산헤립이 다하지 못한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이집트의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유다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지독히 악랄한 통치자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그가 므나쎄의 통치기간 중 유다를 침공하여 므나쎄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2역대 33,11). 니네베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 무렵의 한 편지에는 '유대인들이 은 10마나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바, 여기에는 므나쎄의 이름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다와 베냐민 족속의 상당수를 포로로 잡아가거나 강제 이주시켰다.
산헤립의 연대기에는 이 대목의 첫 번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아시리아의 공격이 기록되어 있는데 ‘새장 안에 든 새처럼’ 히즈키야를 포위하고 어마어마한 조공을 받는 아시리아 임금을 묘사한다. 산헤립의 연대기에는 한 차례의 공격만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으나 하느님이 기적적으로 구하셨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히즈키야가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서술자가 보기 좋게 꾸몄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 시기 다른 많은 도시가 산헤립의 정벌로 파괴되었지만 예루살렘만은 그 화를 피했다. 저자는 냉엄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 가운데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하느님을 믿었다. 이러한 하느님은 객관적인 사실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이분은 신앙을 통해 생기를 얻은 상상 속에서는 권능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하느님이시며, 이 이야기에서는 이사야의 편에 서 계신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이다. 저자는 전쟁과 정치적 사건들 뒤편에 계신 하느님의 손길을 믿었고 그러한 믿음을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포위 사건을 전하는 세 개의 이야기 모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경전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