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 강화군 답산 후기(`08년10월12일)
먼고 먼 강화도 답산 길, 초가을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6시에 출발했다. 중부고속을 거쳐 여주에서 영동 고속을 이용
서울내륙 고속 김포 IC을 벗어나 강화도의 남쪽에 있는 강화초지 대교를 이용 강화군에 도착했다.
외세의 침략에 치열한 격전지 초지진을 보고, 길상면에 있는 삼량성내의 천년고찰 전등사에 도착하여 추녀 밑에
나부상도 보면서 이곳저곳 전등사 가을 음악축제 탓으로 寺院內가 사람들로 가득하다.
잰걸음에 구경을 마치고,
*첫 번째 답산지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고려 최씨 무신 집권기에 대표적인 문인으로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李奎報) 묘소로 향했다.
선생이 남긴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東明王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 東明王篇, 패관 문학(稗官文學)인
白雲小說 등을 생각하며 도착하니 온화하고 양지바른 야산에 主山 주위에는 貴砂富峰들이 拱夾護從하여 내려오는
壬子入首龍에, 癸坐丁向 남향으로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巽, 坤方의 아미산이 先生의 인품을 표현하듯 아름답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는 아담하면서도 기품있는
은자의 묘소다.
<백운거사 이규보 묘>
다시 돌아 나와 길상면 소재지에서 술 한잔을 걸치며 점심을 먹었는데 특히 강화도의 特産인 새우젓과 순무 김치는
지금도 입속에 자름 함을 느끼게 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강화 순무는 오장에 좋고, 종기를 치료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전한다. 지금 생각하니 사실인 듯 글씨가 잘 보이니 말이다.
조선시대 유교사상의 거대한 학맥을 구축해온 ‘강화학파’의 시조 하곡 정제두(鄭齊斗) 선생은 지식과 행동의 일치를
주장하는 즉 知行合一說을 근거로 하는 陽明學을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운 분으로 유명하다.
양도면사무소에서 내가면 쪽으로 가다 보면 도롯가에 푯말과 우측으로 묘소가 보인다.
묘비는 순조 3년(1803)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신대우가 짓고 서영보가 썼으며, 전방에는 정제두의 아버지인 정상징
(鄭尙徵) 과 그의 부인인 한산 이씨의 합장 묘가 있고, 뒤쪽이 하곡 선생의 묘다.
진강산에서 開帳穿心한 주룡이 起伏을 거쳐 현무봉하에서 結咽하여 밝고 부드러우면서 기세있게 변하여 귀한 혈을
결지하였으니 癸 入首에 丑坐未向으로 正養向으로 좌향을 잡은 듯 보여진다.
마음먹고 잘 찍어보자는 사진 실력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래도 아련히 보이는 회원님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마냥
그립기만 한데 죄송합니다.
<陽明學을 주창한 하곡 정제두 묘>
*하곡 선생 묘소에서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더 가면 길 왼편으로 이정표를 따라 몇 구비 돌아가니 우람한 산줄기에
폭 싸인 명당지에 김취려 장군의 묘가 나그네를 반긴다.
*김취려 장군은 신라 김씨 시조인 알지의 36대 손이며 고려 명종 2년(1172년) 출생하여 東北界를 진압한 후 대장군이
되었고, 시호를 "위열"이라 한다.
庚 入首龍 酉坐卯向에 左水到右하여 乙辰破口하였으니 自旺向이라 보이며 案山은 金山으로 入首龍에 따라 坐向을
定하는 최관 정좌입향법(催官 定坐立向法)을 사용하여 幽宅을 定한 것으로 보인다. 將軍의 墓域이 너무 검소하여 찾는
자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구나, 묘 앞에 근간에 새운 神道碑가 장군인양 위용을 과시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동북계를 휩쓸던 고려 장군 김취려 묘>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의 비인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인 가릉(嘉陵,사적 제370호)으로 왕릉이
발굴됨으로써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개석상부 8각 장대석의 용도를 비롯한 고려왕릉의 구조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24대 元宗(1259~1274)의 왕비인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 31년(1244) 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 石獸도 파괴되어 없어졌고, 돌방무덤(石室墳),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고려 24대 元宗王妃 순경태후 嘉陵>
*가릉 뒤편에 있는 강화 능내리석실분(江華 陵內里石室墳)으로 인천시 기념물 제28호다.
이 돌방무덤(石室墳)은 강화 진강산 남쪽에 있는 고려시대 무덤이다.
이 무덤은 지하에 돌방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봉분과 그 바깥쪽에 난간석과 석수(石獸)를 배치하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으로 아루어진 구조이다.
돌방무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능내리 가능 뒤편 고려 石室墳>
*마지막으로 불은면 두운리에 있는 고려시대 명신이었던 허유전 공의 묘소이다.
선생은 고려 고종 30년(1243)에 출생하여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을 거쳐 그 후 충숙왕 1년에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는 수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면사무소 부근 안내판을 따라 1.5km 정도 들어가면 커다란 묘소 안내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오르는 길엔 홍살문과 길옆으로 여러 祖上의 비석이 나열되어있으며, 斗山齋를 통하여 묘소로 오를 수 있는데 다행히
이곳에 살고 있는 後孫께서 정답게 맞아주며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 마음 편히 볼수 있었다.
許侍中公墓所는 덕정산 동쪽 자락의 天穴로 보이며 坐向은 酉坐卯向으로 案山과 멀리 朝山엔 형형색색의 귀한 砂格들이
穴場을 향해 늘어서고 있어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墓域이요, 봉분의 형태이다.
이 묘는 1988년 6원 한국선사문화연구소 주관 하에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許侍中公墓所(허유전) 안산 전경>
江華(穴口鎭)에서 답산을 마치니 벌써 4시가 지났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는 시간이다.
강화도에서 돌아오는 길은 반대 방향인 강화대교를 건너 김포나들목을 통해 오면서 괴산휴게소에서 싸늘한 가을밤
공기를 벗 삼아 영천 돔베기에 한잔하는 술 맛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답산의 부속품이 아닐까.
달리는 차는 11시가 조금 넘어서야 대구에 도착했다.
오늘도 수고하신 우리 회원님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健康하십시오..
2008년 10월 17일 淸虛堂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