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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93) - 천년이 차매
본 문 : 계20 : 7 ~ 9
계20:7~9 입니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천년’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을 드린 바가 있어 어는 정도는 이해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난 회를 마치면서 ‘천년’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드릴 것을 약속한 바 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92회 때의 본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전에 설명은 분석적 설명이었지만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성경적 정리를 해드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살아나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이 왕 노릇이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여 하나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것, 곧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 즉 십자가의 삶은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공박(攻駁)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세상을 심판 한다’라고 성경은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 같은 제사장의 노릇이 이 땅에서는 어떻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 받는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아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게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은 직후부터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며, 마귀는 이제 그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 노릇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 마귀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된 성도들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바로 계20:1~6절의 다른 각도에서 본 성경적 설명입니다.
오늘의 본문 계20:7절의 ‘천년이 차매’, 곧 ‘천년’이라는 표현은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고 ‘상태’의 개념으로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제한된 수명과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영생’이라는 ‘상태’를 ‘천년’이라고 이해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개념이지 하나님 나라의 묵시 세계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묵시 세계에서 ‘시간’으로서의 ‘천년’은 표현될 수 없는 그림입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자연의 현상들을 인간이 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른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변화를 인간이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이 ‘천년’이라는 것을 시간으로 보게 되면 풀리지 않은 문제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천년이라는 기간이 차면 사단이 잠시 풀려난다는 것인데,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천년이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천년왕국이란 죄와 악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진 기간인데, 천년이 흐른 후에 어디에 숨어있던 사단과 그의 추종 세력들이 다시 집단적으로 등장하여 예수님께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의 긴 통치의 의미는 무엇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천년이 차면 사단이 잠시 풀린다’고 했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설명할 때, 사단의 공격이 아주 거세어진 상태라고 대체적으로 해석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년’이라는 것을 기간으로 보지 않고 ‘상태’로 이해를 하게 되면 그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는 ‘사단이 결박당했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사단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성도들을 이기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를 아무리 공격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기에 ‘사단이 결박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여전히 공격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단이 우리를 이기고 있다’라고 성경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천년’이라는 것을 ‘기간’이 아닌 ‘상태’로 이해하게 되면 그런 문제들이 쉽게 해결이 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 선 것입니까?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는 2,000년 전에 섰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2,000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창세전의 택해진 모든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집니다.
벧전1:20을 봅니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미리 준비되신 분이신데,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 받은 모든 인간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8: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묵시 속에서 창세전에 이미 서 있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부터 그 효력은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모두에게 유효한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효력은 언제부터 나타난 것입니까? 아담 때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십자가의 효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사단은 결박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천년’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십자가의 효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 구원을 받은 그 시점부터 이미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미 ‘천년’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어 아시겠지만, 그 설명은 우리의 ‘시간과 경험’에 익숙한 이유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시적으로 골고다에 서 있었던 2,000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을 드렸지만, 아담 때부터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7절의 “천년이 차매”라는 말씀의 ‘천년’을 기간으로 보지 않고 ‘구원이 주어진 상태’로 이해하면, ‘천년이 찼다’라는 말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헬라어로 보면, ‘천년이 찼다’라는 구절에서 ‘찼다’라고 번역이 된 ‘텔레오’(τελέω)라는 단어는 어떤 계획을 ‘완성하다, 끝마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천년이 완성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원대하신 작정과 예정 속에서 그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천년이 찼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천년이 차게 된 시점’은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이지만, 묵시 속에서는 이미 창세전에 그 천년이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천년이 찬 후에 ‘사단이 잠시 옥에서 풀려난다’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벨, 셋,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사단은 그들을 참소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기를 보면 이미 구원받은 욥이 사단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습니다. 이 욥의 경우는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을 향한 공격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의인인 욥에게 사단의 공격을 허락하셨지요?
하나님은 욥을 향한 사단의 공격을 통해 무언가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욥은 사단의 공격으로 ‘믿음’을 배우고 ‘진정한 ’의‘를 배웁니다. 욥기 전체의 내용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입니다. 욥이 사단의 공격으로 그 진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단의 공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우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자신들이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배우며,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는 데’ 사용되어지는 도구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곳이나 복음이 떨어지는 곳마다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잘 포장되어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입니다. 이런 악이 드러나서 공격하는 상황을 ‘사단이 놓였다’ 혹은 ‘사단이 풀려났다’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허락 하의 사단의 공격이란 ‘의인들의 성숙과 성장’ 동시에 ‘악의 실체의 폭로’를 목적으로 허락되는 사단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사단의 놓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위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지요. 계시록에서의 ‘천년’이란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주어진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년’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경험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인간적 관점에서 쉽게 설명하기 위해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시적인 구속사역이 성취 되었던 그때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를 ‘천년’이라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이 땅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난 바로 그때부터 이미 ‘천년’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역사적 관점과 묵시적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은 사단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의적으로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 전부를 전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탄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때로는 사단의 공격을 허용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이지,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누구시며, 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우리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경험을 통해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사단이 잠시 놓였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잠시’라는 표현은 ‘영원’과 대조되는 이 땅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던 모든 시대에 사단은 결박당해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단은 잠시 풀려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잠시 놓여난 사단의 공격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 안에서 발견되는 ‘악’ 때문에 자신에 대해 치를 떤 적은 없습니까?
내 안에서 발견되는 ‘치사함, 더러움, 격분, 위선’ 등 이러한 것들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열매로 맺어놓은 것이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더러운 인간들이 토해 놓은 ‘이 세상의 것들’ 그리고 그 더러운 세상의 발자취인 ‘역사’ 자체를 분토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묵시는 시간을 벗어나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묵시’를 ‘시간’ 속에서 풀려고 하면 종종 곡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단이 잠시 놓여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내게 만드시고,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 잠시 허락 하에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을 ‘영적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적전쟁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여러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이은 8절을 보면, 그 놓여난 사단이 땅의 사방 백성들을 미혹하여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내용은 에스겔 38~39장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겔38~39장에서는 ‘곡’이라는 왕은 ‘마곡’이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왕인데, 강력한 연합군을 형성하여 ‘포로’로부터 회복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여기에서 ‘곡’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은 처참한 패배를 하고 만국은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의 모티브가 오늘의 본문 계20:8절에서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곧 용으로 상징된 사단과 교회공동체와의 영적 전쟁임을 지난 92회 강해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전쟁에 대해 일반적 견해는 마지막 종말 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일어날 전쟁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 일어나고 있는 영적 전쟁의 내용을 마지막 종말의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우리와는 상관없는 그런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전쟁은 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 가장 치열하게 치러질 영적 전쟁을 예시함과 동시에 그 영적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우리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치르고 있는 작은 영적 전쟁들도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택함을 얻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미혹해서 성도들을 공격하게 합니다. 성도들 안의 오염과 부패성을 격동시켜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 8절을 보면 마귀 사단이 구원 얻은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그 전쟁의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곧 마귀 사단에게 미혹 당한 곡과 마곡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22:17을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축복합니다. ‘문’ 곧 성문은 성내의 주민들과 성읍의 안녕을 지켜 주는 방어물인데, 이러한 문을 얻고 열어젖힌다는 것은 성읍을 점령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이 원수를 물리치고 약속된 성읍 가나안을 점령할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성읍을 지키는 대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쉽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을 어떻게 대적을 합니까? 마귀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을 심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부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으로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꾸 눈에 보이는 땅의 것들을 바라보게 하고, 이 땅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습니까? 아니면 그 언약을 대적해서 이 세상을 붙들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그 전쟁은 미래에 있을 어떤 한 큰 전쟁을 의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계20:9절,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세속주의자들이나 미래주의자들의 주장하는 해석과는 달리, 우리는 이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 ‘음녀와 짐승들이 멸망하는 전쟁’, 그리고 ‘바벨론이 멸망하는 전쟁’ 등 다니엘서나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전쟁 등은 모두 같은 전쟁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몇 번이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까? 세속주의자들이 문자적 해석이 말하는 것처럼 므깃도 골짜기에서 중공군 2억 그 추종 세력인 연합군들과 이스라엘 군대가 싸우는 전쟁입니까? 당시는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를 때였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즉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을 공격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있는 곳이면 그 모든 곳에서 그 영적 전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을 공격하는 그들의 결국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불이 내려 그들을 삼켜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그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성숙을 위해 잠시 동안 사용되다가 결국 멸망으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의 이야기는 이미 구약의 다니엘서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다니엘2장을 보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환상을 보았는데, 커다란 신상을 보게 됩니다. 그 신상은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인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뜨인 돌 하나가 그 신상을 박살내고 그 돌이 태산이 되어 온 세상에 가득한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 그 신상은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메대와 바사, 헬라, 로마와 같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바로 그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상을 뜨인 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시고 세상에 가득 차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그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바벨론→매대와 바사→헬라→로마→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세상의 힘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세상의 힘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신상의 모습이 사람 모양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만들어 내는 역사 전체가 바로 그렇게 박살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상의 환상인 것입니다.
그 그림이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과 거짓 선지자와 짐승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 마치고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서입니다. 그 엄청난 선물 앞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은혜로, 선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선한 일을 행한다’고 말씀을 합니다.
요5:29절을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에 보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자들, 즉 구원을 얻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전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행해야 하는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단순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구제하는 일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을 정죄 하실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선한 일은 바리새인들도 할 수 있었던 그런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착한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사도행전을 보지요.
행10:38절을 엽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에 보면, ‘착한 일을 행하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 ‘착한 일’이 요5:29의 ‘선한 일’과 정확히 같은 단어입니다. 행10장의 ‘착한 일’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그 앞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부으시니까 착한 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착한 일’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성도들에게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요15:26절을 찾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16:7~8절을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며 장래에 이 세상이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 곧 ‘착한 일’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행위에 앞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가며, 우리 인간의 장래가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지를 깨달아 언젠가 종말을 맞을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우리에게 그 엄청난 은혜의 선물을 안겨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다른 말로 내가 죽어 하나님과 이웃이 덕을 보는 십자가의 삶으로 바꾸어 사는 것을 ‘착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일’이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착한 일’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착한 일’을 하게 만들어버리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로 지어져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1:6절을 봅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도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누가 시작하셨다고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우리의 삶속에서 성령을 좇아 사는 ‘착한 일’이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착한 일’을 신학에서는 ‘새 창조의 진행’ 혹은 ‘구원의 현재시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처럼 성령에 의해 이끌려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시적인 열매로 맺히는 것이,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그리고 장래 일에 대해, 구원에 대해, 점차 깊이 알게 됨으로 나에게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공동체를 통해도 하나님 나라를 조금씩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선한 일’ 곧 ‘착한 일’이 여러분에게서 나오고 있는지 확인하시며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길 바랍니다.
첫댓글 계시록(93)강해 수고하심^ 감사하며
착한일 선한일/우리의 삶속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