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주부공(主簿公) 휘 호무(好武)
최공호무행적(崔公好武行蹟){연촌공파보}
- 주부공 묘비 -
전북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南州盛譽因於俊彦之輩出而公叅其一欽慕尤切公姓崔諱好武高麗侍中諱阿諡文成之后本朝諱霮集賢殿提學諱德之藝文舘提學是公之八世若七世之顯祖傳至諱連孫吏曹參判諱潤祖通德郞諱琬部將諱應雲參奉盖公之高曾祖禰扶寧金氏其妣也公生於華門聞習於禮薰炙於訓夙成德業齊于南原梁氏奉率以道承接由善在家潛究於性理出外玩賞好山水意在於守眞心絶於逐物尋除朝散大夫主簿守職制宜處事得平公之在也惟一於存天理養德性之一道而己生于庚寅卒以戊午七月十九日享年八十九墓判決事公墓下壬坐配公墓下有二子長宗立護軍中樞府事次龜立部將孫曾不記公之裔東鎬窃擬以文闡德余義其擧爰據其實猥爲之叙
乙卯夏
同族朱洪謹撰
남쪽 지방에는 크게 칭찬할 만한 훌륭한 인물이 많다고들 말하는데, 재주가 뛰어난 명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공(公) 또한 크게 칭찬할 만한 훌륭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공(公)의 성은 최씨요, 휘는 호무(好武)이니, 고려 문하시중 휘 아(阿), 시호 문성공(文成公)의 후손이다.
조선시대 휘 담(霮)은 집현전 제학이고, 휘 덕지(德之)는 예문관 제학인데, 공(公)의 8세와 7세 선조가 되시는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조상이다.
세대를 내려와서 휘 연손(連孫)은 이조 참판이고, 휘 윤조(潤祖)는 통덕랑이며, 휘 완(琬)은 부장이고, 휘 응운(應雲)은 참봉인데, 공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이며, 부령김씨(부안김씨)는 공의 어머니다.
공(公)은 전통 깊은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아름다운 예절을 듣고 배웠으며, 조상의 가르침에 크게 교화를 받아서 일찍이 덕업을 성취하였다.
남원양씨와 혼인하여 위로는 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시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식을 바르게 거느림에 있어서 모든 것을 도리에 온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착한 바탕에서 유래한 것이다.
집에서는 남몰래 성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살았으니, 모든 뜻은 참된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재물을 욕심내어 이리저리 찾아다니지 아니하였다.
조산대부 주부로서 근무할 때에도, 하나하나 모든 규정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집행하였기 때문에, 공(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공평함이 있었으니, 오직 하늘이 정한 올바른 도리에 따라서 덕성을 함양하는 외로운 길을 갈 뿐이었다.
경인년(1)에 태어나서 무오년 7월 19일에 향년 89세로 돌아가시니, 묘소는 암계공(巖溪公) 묘소 아래에 남쪽을 향하여 있으며, 배위 묘소(2)가 그 아래에 있다.
아들은 둘로 장자 종립(宗立)은 호군으로 중추부사이고, 차자 구립(龜立)은 부장이다.
손자와 증손에 관해서는 기록을 생략한다.
공(公)의 후손 동호(東鎬)가 글로써 바르고 착한 행동을 밝혀 주기를 원하는바, 그 성의에 감동하여 그 실상을 들어 외람되게 몇 자 적는다.
1975년(을묘) 여름.
동족 주홍(朱洪) 삼가 지음.
* 각주 --------------------------
(1) 공의 할아버지 <부장최군묘지(部將崔君墓誌)>를 근거로 고증해 보면 글을 지은 1550년(명종 5)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가까운 경인년이 1530년 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2) 2009년 5월 임실읍 대곡리에 35사단이 들어오므로 배위 묘소를 부군 묘소와 합조로 정리하고, 아래쪽에 대곡리에 있었던 장자 휘 종립의 묘소를 옮겨와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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