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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DuqH4nGCl1c
동영상 강의는 성부 하느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삼위 일체 신앙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고백하는데 그 중에서 성부 하느님은 어떤 분이가? 란 주제에 대해서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호칭들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어요. 주님의 기도로 시작 기도를 드리고.
슬라이드를 보시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시작부분을 설명하셨어요. 라틴말 텍스트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하신 내용
이렇게 신경은 성부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 만물의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모든 볼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 인간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라고 볼수 있겠죠.
이런 모든 것들을 만든 만물의 창조주가 곧 성부이다는 것이고, 이 고백은 무로부터 창조라는 교회의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무로부터 창조, 라틴말로는 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 창조는 당연하게도 성경에 기반합니다. 성경만 보더라도 마카베오, 시편, 이사야, 지혜서 등등에서 무로부터 창조에 대한 언급을 만날수 있어요.
그중에 한 절을 슬라이드로 보시면,
물론 세상 창조에 대한 성경의 서술은 다양합니다. 무로부터 창조에서 진술하는 성경도 있고 또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창세기 1,1절부터 시작하는 첫째 창조 이야기.
이 첫째 창조이야기는 무로부터 창조라기 보다는 혼돈에서 질서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서술합니다.
히브리말로는 tohu wa bohu, 번역한다면 꼴없고 비어있는 세상이 하느님의 영과 함께 꼴있고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이 됩니다.
첫째 창조 이야기는 주변 세계의 창조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기에 창조에 대한 고대 세계의 사상들이 반영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어둠과 빛, 물과 땅, 죽음과 생명의 갈등 구조가 그 이야기 안에서 발견됩니다.
첫째 창조 이야기가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며 시작되었다면,
창세기 2,4절부터 시작하는 둘째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의 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첫째 창조 이야기에서 엿새날 하느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인간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흙의 먼지로 빚어져 코에 숨이 불어넣어지는 존재로 소개됩니다.
이렇게 첫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초월적 신관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내제적 신관이 엿보입니다.
둘째 창조 이야기가 전개되며 새로운 갈등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라고 말씀 드리면 쉽게 이해하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범죄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갈등 구조가 드러나기 시작하는데요. 이 갈등 구조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구세사의 기저에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구세사의 진행을 위한 역동성을 제공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창세기 1장부터 ~11장, 그러니까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부터 바벨탑 사건까지를 조금 아우르면서 성경이 창조주 하느님에 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나? 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영이 창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숨이 인간에게 불어지면서 생명체가 되었다. 라는 것을 우리 기억하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창세기 전반부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창세기 12장부터 그 양상을 전환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부르는 하느님과 축복이라는 신학적 테마가 등장합니다.
하느님은 성조들을 축복하고, 성조들을 그 축복을 지켜내는데 그 과정에서 성조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또는 인류는 점진적으로 하느님에 대해 알아갑니다.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은
모세와 함께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성조들의 하느님이 그들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약의 흐름은 이제 창조주에서 해방자로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합니다.
탈출기 6,3 우리에게 약간 아! 이런 구절이 있었나???? 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전능한 하느님
히브리어 EL-Shaddai
엘 샫다이라는 호칭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어원에서 나왔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주석가들은 토로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분명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현대 번역가들은 EL-Shaddai를 전능한 하느님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그리스어 번역본(셉뚜아진따)에서 엘 샫다이를 팥토그라토르,라고 번역했고,
라틴어 번역본(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에서는 옴니포텐스,라고 번역했는데
그 번역의 영향으로 현대의 번역본들은 EL-Shaddai를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느님의 옛 호칭 샫다이를 사용하며, 탈출기 6,3절이 의도하는 바는 성조들의 신적 체험을 야훼 신앙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런 수용을 통해 야훼 신앙의 시간적, 공간적, 신학적 지평이 확장됩니다. 그 수용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시기까지 확장되고 약속의 땅의 상속과 소유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며,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의 인연에 대한 신적 설명이 성립됩니다.
성조들에게는 엘 샫다이의 체험이 있었지만 그들은 야훼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신앙의 단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보다, 듣다
두 번째 단계는 알다, 믿다
첫 번째 단계인 보다와 듣다는 인식의 어떤 출발 단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알다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탈출기에서도 보면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그 목적이 뭐냐하면?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야훼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조들은 보다와 듣다의 단계에 머문 반면, 탈출 사건과 함께이스라엘은 알다와 믿다의 단계로 올라간다.
그 시작은 야훼의 이름을 아는 것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탈출 6,6.8을 반복적으로 나는 야훼다 라는 명사문이 나옵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알게 된 이스라엘은 이제 야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야훼를 향한 제의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제사와 연결되어 있죠? 그런데 제사 드릴 때 자신이 누구를 향해 제사를 드리는지 그 신의 이름을 모른다면 제사드릴 수 없겠죠? 이제 야훼라는 이름을 알게 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야훼를 향한 제사가 가능한 제의 공동체가 됩니다.
탈출기의 진행에 따라 이스라엘은 점점더 분명하게 야훼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탈출하고 갈대바다를 지나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더이상 파라오에 노예가 아니라 야훼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정체성은 시나이 계약을 통해 확립됩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분, 성조들을 축복하신 분,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분으로 고백됩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엘 샫다이 외에도 다양한 하느님의 호칭이 나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살렘의 임금이며, 엘 엘리온의 사제로 소개된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한 뒤 소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14,22절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위 문장을 직역해보면,
나는 나의 손을 높이 한다. 야훼를 향하여 EL-Elyon. 하늘과 땅을 지은이
여기서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창세기 14장이 야훼계 전승이기 때문에 야훼라는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전승적인 차원에서,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한 탈출 6,3은 엘로힘계 문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도 엘로힘계 문헌을 찾아보면 그와 같은 전승 안에서는 야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손을 높이 한다. 야훼를 향하여 EL-Elyon. 하늘과 땅을 지은이, 라는 부분에서 창세기 14장과 탈출기 6장의 전승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이 텍스트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EL-Elyon
신명기 32,8과 시편 82,6에서도 언급되는 EL-Elyon은 민족과 영토의 경계를 넘어서는 창조주로 소개됩니다.
시편 73,11 "하느님이 어찌 알 리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어찌 알아채리오?"과 시편 107,11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업신여긴 탓이다.을 보면 EL-Elyon이 고대 근동의 창조신 "EL"과 같은 신입니다.
그런데
2사무 22,14 주님께서 하늘에 우렛소리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당신 소리 울려 퍼지게 하셨네.
시편 18,14 주님께서 하늘에 우렛소리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당신 소리 울려 퍼지게 하셨네.
시편 21,8 임금이 주님을 신뢰하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애 안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에서는 "EL-Elyon"을 '야훼'와 동일시합니다.
창세 21,22부터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계약에 관해서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자, 아브라함은 그에 항의하였고,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정식으로 계약을 맺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소들과 양들을 주며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 일곱 마리는 그 계약의 증인 역할을 할 신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계약을 맺으며 신에게 맹세를 한 것으로 보이며, 그리하여 그곳은 브에르 세바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히브리어 Sheva,는 맹세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계약을 기억하기 위해 에셀 나무를 심고 증인 역할을 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창세 21,33
위 부분을 직역하셨는데요.
여기서 아브라함이 부른 신의 이름은 야훼 EL-Olam인데 직역하면 영원의 EL, 영원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EL-Olam 야훼는 영원의 EL이다. 입니다.
히브리어 Olam은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넘어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문맥에서 신의 영원함과 함께 그 계약의 영원함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브에르 세바에 엘 올람을 섬기는 제의가 있었을 것이고, 이 이야기는 그 제의를 야훼화하는 신학적 치환을 위한 원인담이라고 생각합니다.
EL-Olam 이라는 호칭은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도 발견되는데, 신성의 왕적 차원이 강조되는 문맥에서 이 호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호칭을 살펴보았어요. 주로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이 세 호칭이 발견됩니다.
오늘날 교의신학을 공부하시면서 신론이라는 과목을 배우시는데, 그 신론에서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단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에 대한 세 호칭과 이것을 연결해 보면,
엘 샫다이는 옴니포텐스와 엘 엘리온은 옴니시엔스와 엘 올람은 옴니프레젠스와 각각 연결시켜볼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야훼에 대한 세 호칭내지는 야훼라는 이름을 알기 이전에 성조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면서 하느님과 연결시켰던 이 세 호칭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악이나 야곱의 경우는 어떨까요? 라는 것은....다음편을 기대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