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분홍 블라우스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날
정혜경
좁은 집에 옷장까지 꽉 채워 있으면 더 비좁아 보인다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입지 않는데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사 천으로 만들어진 꽃분홍 내 블라우스가 눈에 띈다.
이 블라우스는 어느 날 내가 군계일학 같았었다는 아주 대단한 자신감을 일깨워주었으므로 행여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불면 다시 입어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아무리 보아도 촌스러운 그 블라우스를 간직하게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오월 하순경 잠시 여정으로 혼자서 고향을 방문 한 적이 있었다. 호주 오기 전까지 친정식구와 이웃하며 살았던 산비탈 동네에 머물게 되었는데 빠듯한 삶에 비싼 비행기 삯과 바쁜 시간을 투자하고 정해진 볼일만 보고 다시 호주로 돌아와야 한다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시드니로 돌아가는 날까지 뒷산 약수터에 오르기로 했다.
그곳은 내가 호주로 오기 전 49년 동안 나를 지켜 봐 주었던 내 삶의 일부이며 휴식, 그 이상의 풍부한 내 감성의 자양분까지 제공해 주었던 마르지 않는 샘이었기 때문이다. 급한 여정으로 산에 입고 갈 옷 까지는 준비하지 못했던 터라 큰언니 방 옷걸이에 걸려 있던, 단지 헐렁해 보여 선택한 아사 꽃분홍 브라우스를 내 베이지색 스판바지 위에 걸쳤다. 사실 그 블라우스는 어릴 때 심하게 귀를 앓아 한글만 겨우 익힌 큰 언니가 가난과 고생으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감춰 보이고 싶었던 의향으로 샀던 수많은 붉은 옷들 중에 유난히도 밝은 꽃분홍이었다. 촌스럽긴 했으나 약수터까지 왕복 한 시간 삼십 분, 잠깐 산책하는 정도로 생각했고 약수터의 추억으로 들뜬 마음이 다른 사람들 눈에 쉬이 띄일 것이라는 짐작은 못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차림을 하고 아침마다 약수터 주변으로 오는 여자들은 이마에 플라스틱 챙이 달린 띠 모자에 같은 디자인과 칼라의 등산복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이었으며 이른 아침인데도 선글라스를 걸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색상과 디자인의 등산화를 어김없이 신었고 무엇이라도 하나 빠졌거나 더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약속이나 한 듯이 검고 회색의 젊잖고 세련된 색상들 틈에서 아사 꽃분홍 브라우스를 입은 키 큰 나는 홀로 봄 나비가 되어 휘젓고 날아 다녔으니. 힐끔거리며 처다 보는 부담스런 눈길의 첫날과는 달리 며칠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오히려 점차 쾌감까지 만끽하며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며칠이 지나자 나를 알아보는 어떤 아저씨는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하며 인사까지 한다. 싫지 않아 살짝 미소까지 지어 주었다. 다음 날, 앞서 가는 대머리 아저씨를 공손하게 제쳤더니 “왜 혼자 오십니까? 하고 또 말을 건넨다. ‘왜 혼자 오다니..,
질문이 이상했지만 아사 꽃분홍 브라우스에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넉살스럽게 “그러는 선생님은 왜 혼자 오셨어요” 하고 물었다. 같이 올 사람이 없다는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아니 저렇게 대놓고 속보이는 소리를 하다니 부인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인지 산에 동행할 여자 친구가 없다는 말인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는다. 퍼뜩 지나 갈 수 있는 길을 오 분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걸으며 이제 모르는 사람과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혼자되어 늙어가는 남자가 외롭다고 절규하는 대답에 나 또한 반백을 넘겨 가면서 더 이상 무서울 것 없는 여자는 자신의 뻔뻔함과의 싸움에서 그러나 총총 걸음을 재촉했다. “하이” “굿모닝”하며 쌩하고 내달리는 자전거 위에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을 실룩거리며 산악자전거로 산을 오르는 건장한 호주의 남자들이 생각났다. 애보리진의 땅 위에 자기들의 나라를 건설한 남자들이다. 망치로는 못이 박히지 않는다는 단단한 검추리 나무를 닮았다는 호주 남자들 내가 살던 시드니 산악 길에서 미끈하고 키가 큰 그들만을 보아 오다가 내 고향 부산 대청동 산비탈에서 피난민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없이 산을 지키고 있는 질긴 소나무를 닮은 남자들을 만나자 나는 속으로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약수터 오솔길에서 말을 걸던 남자들은 확실히 나에게 잃어버린 감정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문득 꽃뱀으로 몰리는 나의 모습과 제비족에게 꼬임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이 갑자기 나를 허둥대게 한 것이다. 인기척이 없어 뒤돌아보니 그 남자는 한참 뒤에 처져 오고 있었다. 걸음을 늦추어 왜 같이 올 사람이 없는지 진지하게 다시 물어볼 용기는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그 봄, 오솔길 잡목들 사이로 소나무처럼 질긴 삶을 살아 왔을지도 모를 그 남자의 가슴에 어쩌면 나는 봄 처녀가 되어 그의 감정을 휘휘 젓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나는 블라우스를 쳐다 볼 때마다 또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이 아사 분홍 블라우스를 입지 않았어도 그 남자가 같이 올 사람이 없다고 말을 걸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