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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敎爲本 持法有恆
恆=恒의 本字
덕교위본 지법유항
德의 敎育으로 근본을 삼고,
法을 가짐이 但心단심이 있어야 한다.
원문출처= 예문유취(芸文類聚) 군부 - 하남군(河南郡)
傅子曰: 傅嘏爲河南尹 治以德敎爲本 然持法有恆
예문유취(芸文類聚)는, 唐초기에 성립된 유서이다.
624년, 구양순(歐陽詢) 등이 高祖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하였다. 전100권.
(隋代)의 북당서초(北堂書鈔)와 당의 초학기(初学記),
백씨육첩(白氏六帖)과 함께 사대유서(四大類書)로 일컫는다.
현존하는 중국의 유서로써는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당대 이전의 시문과 가부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며, 이미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전거를 따른 것도 많다.
이 책은 46부로 분류되어 있으며, 부마다 또 자목(子目) 727개를 나열하였다.
분류의 편차는 고사를 앞에 두고 모두 그 출처를 주(注)로 달았다.
또한 인용된 시문은 거의 모든 시대를 주를 달았다.
구양순은 서문에서 "무릇 구류백씨(九流百氏)가 그 설하는 것이 같지 않다"
(夫九流百氏,為說不同)며
그 청화(淸華)를 따서 그 취지와 개요를 채집하려 한다"(卒欲摘其菁華,採其旨要)고 했다.
당시 구양순의 사망 후 60년이 넘은 시점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부하(傅嘏)는 자가 난석(蘭石)이고, 북지군(北地) 이양현(泥陽) 사람이며, 부개자(傅介子)의 후손이다. 큰 아버지 부손(巽)은 황초 중(黃初, 220~226)에 시중상서를 지냈다.
부자(傅子)에 따르면 : 부하의 할아버지는 부예(睿)이고, 대군(代郡)태수를 지냈다. 아버지 부충(充)은 황문시랑을 지냈다.
부하는 약관(弱冠, 20세)에 이름을 알렸으며,
부자(傅子)에 따르면 : 당시 하안(何晏)의 걸출한 언변이 왕족들 사이에서 뛰어나게 나타나고, 등양(鄧颺)은 일을 막힘 없이 잘 처리하여 일당(徒黨)을 모으며 여염(閭閻)에서 명성이 있었다. 하후현(夏侯玄)은 귀한 신하의 아들로 젊었을 때부터 무거운 명성이 있어 집안의 우두머리(宗主)였는데, 이들이 모두 교제하고자 하였으나 부하가 받아들이지 아않았다. 부하의 친구 순찬(荀粲)이 이상하게 생각해 부하에게 물었다.
“하후태초(夏侯泰初, 하후현)는 지금 시대의 뛰어난 호걸로서, 허심탄회하게 교제를 원하고 있는데, 둘 사이의 교제가 이루어 진다면 더 좋을 것이 없겠지만 만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곧 원한이 생길 것이오. 현명한 두 사람이 친해지지 않는다면 국가에도 이롭지 않지만 친해진다면 인상여(藺相如)가 염파(廉頗)에게 머릴 숙인 것처럼 될 것이오.”
부하가 답했다.
“태초(泰初, 하후현)의 뜻은 그가 헤아리는 것이 크지만 능력은 헛된 소리에 합치되어서 실재적인 재주가 없소, 하평숙(何平叔, 하안)은 원대한 것을 말하고 있지만 정실을 가까이하며, 변론을 좋아하지만 진실성이 없어서 이른바 ‘이로운 말을 잘하지만 나라를 뒤엎을 사람’이오. 등현무(鄧玄茂, 등양)는 하는 것은 있지만 끝맺음이 없으며, 밖으로는 명리를 욕하면서 안으로는 단속하지 못하여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말을 많이 하면 틈이 많이 생기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투기하면 친한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오. 내 입장에서 이 세 사람을 보니, 모두가 장차 자기 집안을 패망시킬 사람들이오. 이들을 멀리 하여도 오히려 화가 미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들을 가까이 하겠소?”
사공 진군(陳羣)에게 불려가 연이 되었다. 그 당시 산기상시 유소(劉劭)가 관리들에 대한 근무 평가 제도(考課法)를 만들었는데, 이 일을 삼공의 관소에게 토론하게 되었다. 부하는 유소의 주장을 비난하며 논술했다.
“황가의 제도는 방대하고 깊으며,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묘하고 심원하다고 들었는데, 만일 재능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실행될 수 없을 것이고, 신비함을 체득하여 그것을 밝히는 것은 그 인물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의 제도가 훼손된 이후로 성인의 도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정미한 말은 이미 손실되었습니다. 여섯 경전은 더럽혀지고 하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성인의 도는 방대하고 깊지만,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우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소의 관리에 대한 근무평가 논의는 비록 이전 시대의 임용과 파면에 관한 문장에서 근거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 제도는 정말로 결여되고 산실되었습니다. 예 중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대의 전례가 있는 것뿐입니다. 밖으로는 후(侯)와 백(伯)을 세워 번국(藩)의 울타리로 구복(九服)을 지키고, 안으로는 여러 관직을 세워 여섯 개의 직책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토지에는 천자에게 바치는 일정한 세금이 있고, 관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모든 관리는 모두 임무를 맡고 있고, 사농공상의 백성들은 맡은 일이 다릅니다. 때문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이치가 있고, 관리를 선발하고 파면하는 제도는 쉽게 실행되었습니다.
대위나라는 여러 왕들(百王)의 뒤를 이었고,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의 공적을 계승했지만, 제도로는 정돈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건안(建安, 196~220) 이래로부터 청룡(青龍, 233~237)에 이르기까지 신은 같은 무력을 갖고 동란을 다스리고 제위의 기초를 공고히 했는데, 흉악하고 반역하는 자를 한 번에 쓸어내고, 남아 있는 적을 소멸시키며, 전쟁 깃발을 거두었다가 폈다가 했기에 매일 정무를 처리할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군대를 다스릴 때, 권력과 법률을 함께 사용하고, 관리는 군사와 국정 두 방면을 통하여 임명되며, 때에 맞게 적절히 처리하여 정치의 변화에 대응합니다. 과거의 제도를 오늘 시행해도 사태는 복잡하고 내용도 다르므로 적용이 곤란합니다. 그러한 원인은 적합한 법령을 만들면 오래 시행할 수 있지만, 간혹 현실의 수요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제정한 법령이 당시의 수요에는 부합되지만, 후세에 전해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직을 세워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근본이며, 법령에 따라 실제를 고찰하고 이미 제정된 법규를 감찰하여 면려하는 것은 끝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법령의 세칙 또한 확정되지 않았으며, 국가의 정도 존중되지 않으면서 근무평가를 하는 제도가 선행되는 것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을 정하는 것과 유형과 무형의 도리를 구분할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이전에 선왕이 재능 있는 사람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주 안에서 품행이 단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학교에서 도의를 가르치고 덕행이 갖추어져 있으면 현자라고 불렀고, 도덕을 닦은 자는 능자라고 불렀습니다. 향로는 왕에게 현자와 능자를 기록하여 바치고, 왕은 그것을 경의를 갖고 수리하여 그 현자를 기용할 경우는 지방으로 나가 장이 되게 하고, 그 능자를 선택할 경우에는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여 해정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선왕이 인재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지금 국가의 백성들은 경성으로 나아가는데, 여섯 향에서 추천한 적이 없고, 그 인재를 선발하는 직무는 이부(吏部)에 전임되었습니다. 품행을 살펴 선발한다면 실제 재능은 반드시 적합하지 않을 것이고, 다소의 공로를 갖고 평가한다면 덕행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으면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낮은 제도를 갖고 평가를 해도 인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제도를 통합적으로 서술하고, 국가의 전범에 전체적으로 조력하는 것은 내용이 심오하고 뜻이 넓은 것이므로 모두 얻기는 어렵습니다.”
정시(正始, 240~249)초, 상서랑에 임명되었고, 황문시랑으로 옮겼다. 그 당시 조상(曹爽)이 정권을 장악하고 하안(何晏)이 이부상서로 있었는데, 부하는 조상의 동생 조희(羲)에게 말했다.
“하평숙(何平叔, 하안)은 겉모양은 조용하지만 속마음은 간사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근본적인 일에 힘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먼저 당신의 형제를 미혹시키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진 사람은 조정에서 멀어질 것이고, 조정의 정치는 파괴될 것입니다.”
하안 등은 마침내 이 때문에 부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는데, 사소한 일을 계기로 하여 부하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집안에 있으면서 형양(熒陽)태수로 임명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태부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은 그에게 종사중랑이 될 것을 청했다. 조상이 살해된 뒤,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었고,
부자(傅子)에 따르면 : 하남윤(河南尹)은 안쪽으로는 황제의 도읍(帝都, 낙양)를 포함하고, 밖으로는 수도권(京畿)을 통치하며, 고대의 육향육수(六鄕六遂, 주나라 때 지역의 행정 단위)의 통치자를 겸한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지방의 출신자가 같이 사는데, 호족, 귀족, 상인들, 북방민족들이 많다. 사방에서 이익을 쫒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범죄도 많다. 예전에 하남윤(尹司馬)이었던 사마지(芝)가 그곳 기강을 크게 바로잡았고(太簡), 그 다음 하남윤 유정(劉靜) 역시 꼼꼼하게 다스렸는데(太密), 후임 하남윤 이승(李勝)은 느슨하게 해서, 원망의 소리를 들었다. 부하는 사마지 통치의 법을 세우고, 유정 통치의 안목을 날과 씨로 삼아 옷을 만들어 이승이 훼손한 것을 점차 기웠다. 군내에 700명의 관리가 있었으나 이중 반은 옛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다.
하남(河南)에서 오관원(五官掾) 공조(功曹) 전선(典選)의 관직에 속한 사람들은 그 지역(本國) 사람들에게 관직을 주었으며, 다른 지역(異邦) 출신 사람들은 쓰지 않았다. 부하는 이 덕에 랑(良)으로 기용되었는데, 관청에서 직책을 나누어 나중에 순서대로 심사했다.(考核) 이런 식으로 출신지에 의해 인사를 하자 법을 지키는 게 한결같았는데, 문서를 범하는 일이 없게 하고 올바른 못을 보였으며, 형사 재판(獄訟)에서는 매(檟楚)를 쓰지 않아 실질적으로 이득이 되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작지 않고 백성의 일에 크게 이익이 되도록 천거하자 백성들이 나쁜 일에 대한 발자취가 사라지고, 그런 일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공로가 빛나고(赫赫) 명성을 떨쳐 관리와 백성들이 이후에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었다.
상서로 승진했다. 부하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진이 처음으로 제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하였고, 관위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배했으며, 고대 제도와 다르다. 한과 위는 진의 관제를 따랐으며 줄곧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유생과 학사는 모두 삼대의 예제로써 현재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그 예제가 넓고 깊어 그 시대 정치와 합쳐지지 않았으며, 일과 제도가 위배되었고 명칭과 실질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대를 지났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국면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대적으로 관제를 개정하고, 고대에 의거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황실이 매우 어려운 시기이므로 변혁할 수 없다.”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스스로 오(吳)를 토벌하려는 의견을 저술했는데, 세 명의 정토장군이 바친 계책은 각기 달랐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부하에게 방문하자 부하가 대답했다.
“옛날 부차(夫差)는 제나라(齊)를 누르고 진나라(晉)를 이겨서 위세를 중원에 떨쳤지만 고소대에서 최후를 만났고, 제의 민왕은 영토를 병합하고 변방을 개척하여 국토가 천 리나 확대되었지만 몸은 국가의 전복을 밟았습니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에 증명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은 친히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병합한 후에 야심에 차고 욕망이 가득해져 흉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선문후(宣文侯, 사마의)는 원대한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손권은 죽었고, 어린 고아는 제갈각(諸葛恪)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오나라를)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겠지만 그 목숨을 강남에서 연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의론하는 사람들은 간혹 배를 띄워 장강을 건너 형주를 소탕하려고 하고, 간혹 사방의 길로부터 동시에 진격하여 그 성이나 보루를 공격하기를 원하며, 간혹 변방지역에서 대규모의 둔전을 행하여 기회를 타서 행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모두 적을 공격하여 취하는 일상적인 계책입니다. 정병이 출발하였을 때부터 물러날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적을 침략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군주와 신하를 거짓으로 칭하고, 길흉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며, 또 그 총대장(손권)을 잃어서 위아래로 국가의 위기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설령 중요한 나루터에서 배를 나란히 하고 성을 공고히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할지라도, 장강을 가로지르는 계책은 아마 승리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커다란 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나와서 침입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쌓아놓은 곡물을 먹고 운송하는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며, 적군을 습격하여 원정하는 노고와 비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당면한 급한 일입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10만 병사로 흉노 땅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했는데, 계표에게 당면하여 그러한 단점을 지적당했습니다. 지금 장강(長江)을 넘어 적의 영토를 밟으려는 책략 또한 번쾌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법령을 밝히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 같은 상황 하에서 계책을 펴고 뛰어난 계책을 펼쳐서 적의 패잔병을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는 필연적인 방법입니다.”
사마표(司馬彪)의 전략(戰略)에 실린 부하(嘏)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부하전(本傳)의 기록과 다른데, 이에 그 기록을 전부 실었다.
사마표(彪)(의 전략)에 따르면 : 가평 4년(嘉平, 252년) 4월 손권이 죽었다. 정남장군 왕창(王昶), 정동장군 호준(胡遵), 진남장군 관구검(毌丘儉) 등이 각기 오를 정벌할 계책을 바쳤다. 조정에서는 세 사람의 정벌 계책이 달라 상서 부하에게 물었는데 부하가 대답했다.
“옛날 부차(夫差)가 제나라(齊)를 애릉(陵)에서 진나라(晉)를 상대로 이기자 위엄이 중국을 돌았을 정도지만 고소(姑蘇)의 재앙을 면하지는 못했습니다.(구천한테 다시 지고 자결함) 제민왕(齊閔)이 흘긍ㄹ 피하고 나라를 아울러(辟土兼國) 천 리의 땅을 개간하였지만 전복당하여 패하는 것을 막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런 옛 일화들은 시작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끝이 좋은 것은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겠습니다.
손권(孫權)은 스스로 촉(蜀)을 깨트려 형주를 평정한 다음부터 교만함이 가득 차 넘칠 정도입니다. 충성스럽고 정직한 자를 죽이는 잘못을 저질러 대를 이을 자손까지 죽일 뻔했고 결국엔 그 원흉마저 죽었습니다. 상국 선문후(宣文侯, 사마의)께서는 이를 알았기에 어지러운 자를 취하고 망하는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바르다 여겨 심오한 이치로 광대한 계획을 세워 크게 시행하는 것을 건의했던 것입니다. 지금 손권이 이미 죽어 고아를 제갈각(諸葛恪)에게 맡겼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오나라를)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겠지만 그 목숨을 강표(江之表, 강남)에서 연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왕창 등은 배를 띄워서 지름길로 건넌 다음 강표(강남, 江表)를 떠돌아 다니며 백성을 거두고 땅을 약탈하여 도적의 양식에 의지하자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네 길로 나란히 쳐들어가 무력으로 다스려 몰래 딴 마음을 품도록 꾀어내어 무너지기를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는 나아가 둔전을 크게 일으켜 요충지를 압박하며 곡식을 비축하고 틈을 기다리며 때를 보아 움직이자고 했습니다. 무릇 이 3가지 계책은 모두 도적을 취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계책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능력에 따라 베풀면 공을 이루고 명성을 세우게 되겠지만, 예절에 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중에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병사를 오게 하고 세 가지 계책이 있으면 불시에 습격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도적들은 지휘관(元帥)을 잃으면 물러나서 지킬 텐데, 그러면 배와 노를 만들어 배를 몰고 나루로 진격해 견고한 성과 푸른 벌판에서 수비하는 병사들을 치면, 자기들 멋대로 계책을 내게 되어 반드시 어려운 형세가 될 것입니다. 도적들은 흩어져 60년이 지나면 임금과 신하가 세워지고 길하고 흉함을 함께 근심하며 밝은 것을 보치 못해 폐단이 생기고, 하늘은 병들고 무너지고 깨져서 병사들은 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변방을 지키는 자들은 도적과 서로 멀리 있습니다. 거기다 적은 경계병을 갖추었고 또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것은 손에 꼭 쥐고 있으니 간첩 행위가 불가능하고 우리의 귀와 눈에는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군대에 귀와 눈이 없고 정찰한 것이 상세하지 않다는 것은 큰 군사를 일으켜 거칠고 험한 곳에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요행으로 공로를 세우기를 바라는 것이고, 일단 전투에 들어간 다음에 뒤늦게 승리를 구하는 것이니 전군이 취할 장기적인 계책이 아닙니다. 오직 군사를 진군시켜 크게 둔전을 하고 굳게 지키는 것이 조금이나마 나은 계책입니다. 왕창 등에게 조서를 내려 호준(遵) 등에게 조서를 내려 험한 땅을 선택해 차지하고는 살펴가며 조치하게 하십시오.(錯置) 그러고는 명을 내려 일시에 나아가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기름진 땅을 빼앗아 메마른 땅을 밭가는 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으니 이것이 첫번째 이로움입니다. 병사들을 백성들이 사는 곳 밖으로 나아가게 하면 적들이 감히 범접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될 테니 이것이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지름길로 회유하면 투항하여 귀순하는 자가 날마다 올 테니 이것이 셋번째 이로움입니다. 경계병(羅落)을 멀리두면 첩자(閒構)가 오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이로움입니다. 적들이 지키는 곳에서 물러나면 적의 경계병들이 반드시 얕아질 것이니 이렇게 물러난 땅에서 밭가는 세력이 달라지는데 이게 다섯번째 이로움입니다. 앉아서 밥을 먹으며 곡식은 쌓이기만 하는데 병사들이 곡식을 옮길 필요도 없는 게 여섯번째 이로움입니다. 틈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곳을 빨리 결단하여 습격할 수 있다는 것이 일곱번째 이로움입니다. 무릇 이 7가지는 전쟁에 있어 가장 힘써야 할 것입니다.
도적들은 있어야 할 곳이 없으면 멋대로 재물을 취하려 할 것이고, 있어야 할 곳이 있으면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기에 살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보루에 주둔하면 서로 핍박받게 되어 주고받는 형세가 되어 지혜와 용기를 얻고 베풀어 교묘하고 졸렬한 방법을 쓰게 됩니다. 계책을 얻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을 것이며, 형세(角)가 여유 있을 때도 있고 부족할 때도 있을 것인데, 적이 형세가 좋은 상황이라면 장차 어떻게 도망치겠습니까?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려면 사람을 번거롭게 부려 힘을 다해야 하고, 가난함으로 부유함을 대적하려면 재물을 무겁게 걷어야 합니다. 따라서‘편안하게 대적하려면 힘써 일해야 하고, 배가 부르면 굶주린 이를 이긴다’하는데,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한 무리를 병사로 뽑아 천둥과 같이 몰아치려면, 은혜를 베풀고 상을 곱절로 줘서 불러야 하고 여러 방면의 넓은 곳에서 의심이 있을 것입니다. 적이 생각하지 못할 일을 통해, 경계하지 않는 곳을 파고들여야 합니다. 3년쯤 지나 왼쪽, 오른쪽으로 군사들을 이끌면(左提右挈) 적들은 얼음이 흩어지고 기와가 깨져지게 되어(冰散瓦解), 그들이 망하는 것을 편안히 지켜보면 앉아서 이득만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한나라(漢氏)가 여러 세대 동안 흉노(匈奴) 때문에 근심했는데, 조정의 모사(謀士)들은 아침부터 조정에 와서 늦게까지 일했으며, 갑주와 투구(介冑)를 쓴 장수들은 정벌하러 나갔으며, 홀과 띠(搢紳)를 지닌 관리들은 모두 흉노와 화친하자고 했는데, 용맹을 떨친 병사는 화친을 거절했습니다.(搏噬) 때문에 번쾌(樊噲)는 10만의 무리를 가로질러 흉노에 대항했고, 계포(季布)는 키가 작은 것을 꾸짖었습니다. 이신(李信)은 초나라를 20만명으로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고 요청했다가 진나라 군사들을 욕보였습니다.
지금 장군들은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 오랑캐에게 쳐들어가 곧 예전 사람들과 같은 공을 세우려 합니다. 폐하께서는 성스러운 덕으로 충직한 현자들을 도와주셔서 법을 밝히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모두 승리로 이끌도록 해 좋은 계책으로(長策) 방어하고 오랑캐들을 무너뜨려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하십시오. 옛날 병법에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우지 말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하지 말라.’ 했습니다. 계략으로 이기면(廟勝) 반드시 다스릴 수 있고, 그러면 만일 모든 길을 반드시는 아닐 것이라, 정성스레 어리석인 신하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이에 크게 경작해 핍받받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계책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부하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 해 11월에 조서를 내려 왕창 등에게 오를 정벌하게 했다. 5년(253년) 정월, 제갈각은 동관(東關)에서 쳐들어오는 적군과 맞서 싸워 (위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나중에 오나라 대장 제갈각(諸葛恪)은 동관(東關)을 막 공격한 뒤, 승기를 타고 성가를 날리며 청주와 서주로 향하려 했는데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준비를 하려 했다. 부하가 말했다.
“회수와 바다(淮海)는 적군이 쉽게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또 옛날 손권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했는데, 풍랑으로 침몰하여 익사하였고,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제갈각이 어떻게 근본이 되는 힘까지 기울여 운명을 용솟음치는 바다에 맡기고 승리를 얻기를 구하겠습니까?
한서(漢書)의 장탕전(張湯傳)에 따르면 : 장탕(張湯)은 낮은 관리에게 시켜 장안(長安)의 부유한 상인(富賈) 전갑(田甲)이나 어옹숙(魚翁叔)과 같은 무리들로부터 물품들을 몰수하게 했다.(乾沒) 복건(服虔)이 이를 두고 말했다.
“몰수하면(乾沒) 실패하게 된다.”
여순(如淳)이 말했다.
“몰수를 통해 이익을 얻으면 그 이익은 없어질 것이다.”
신 송지(松之)가 보니 : 몰수하면 실패하게 된다는 곧은 뜻을 공경하지만, 몰수한다(乾沒)는 뜻을 설명하지 않아 후련하지는 않다. 여순은 몰수를 통해 얻는 이익은 좋게 끝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어리석게 몰수를 시킨 건 사람들을 쥐어 짤 뿐이다.(干燥) 백성들을 살펴 사람들을 쥐어짜지 말고 물에 빠지게(沈沒) 하지 말아야 한다.
제갈각은 평소 북과 수군의 별 볼일 없는 작은 장수만을 보내 바다에서 역류하여 회수(淮)로 들어가게 하여 청주와 서주(青徐)에 대해 시위를 하게하고, 제갈각 자신은 병사들을 모아 회남(淮南)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제갈각은 과연 신성(新城)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하는 항상 재능과 품성의 같으면서도 다름(才性同異)에 대해 논하였고, 종회(鍾會)는 그의 관점을 종합해 논(論)을 지었다.
부자(傅子)에 따르면 : 부하는 다스리는데 통달하고 올바른 것을 좋아했으며 사리를 분별하여 무엇이 중요한 줄을 알아, 재주와 성품의 평가를 잘해 원본이 얼마나 정밀하고 작더라도 언제나 거기에 도달하였다. 사례교위 종회가 매우 어렸음에도 부하는 밝은 지혜로 종회와 사귀었다.
신 송지(松之)가 보니 : 부자에서는 앞서 하후씨(夏侯)가 끝내 패망할 것을 알았다며 함께 교우하지 않았다 하더니 여기에선 종회와 부하의 사이가 좋았다하고 있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후현(夏侯玄)은 명성이 무거워 (다른 사람들의) 근심으로 이어졌으니 분쟁의 발단은 외부에서 온 것이다. 반면 종회의 경우는 이득을 위해 움직이다가 패망한 것이기에 그의 재앙은 자기 자신이 불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하후현이 위태로워질 조짐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며, 종씨(종회)가 패망할 형세는 쉽게 보이는 것이다. 만약 부하가 하후현이 위태로워질 것은 알았으면서도 종회가 장차 패망할 것을 몰랐다면 그의 지식에는 결점이 있는 것이고, 그런 그를 통달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약 모두 안 좋게 끝날 줄을 알면서도 부하의 정이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라면 이는 사랑과 증오로 후하고 박하게 대하는데 차이를 둔 것이니 어찌 성패를 미리 알았다 하겠는가? 애증으로 후하고 박하게 대하는데 차이를 둔다는 말은 아체(雅體)또한 이지러트리니 부자의 이런 논의는 부하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다.
가평(嘉平, 249~254)말에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이 제위에 즉위한 뒤, 부하를 승진시켜 무향정후로 봉했다. 정원 2년(255) 봄,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사마경왕(司馬景王, 사마사) 자신이 평정할 필요는 없고, 태위 사마부(孚)를 파견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직 부하와 왕숙(王肅)만은 그에게 권했다. 이에 사마경왕은 친히 정벌하러 갔다.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따르면 : 부하는 경왕(景王, 사마사)에게 함께 출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경왕은 따르려 하지 않자 부하가 무겁게 말했다.
“회(淮)와 초(楚) 지역의 병사들은 날래고 관구검 등은 전력을 기울여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을 당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 장수들이 전투를 하다보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데 대세를 놓고 한 번 실수하게 되면 즉시 공의 대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당시 경왕은 눈에 난 혹을 막 째었는데 상처가 몹시 심했다. 부하의 말을 듣더니 결연히 일어나 말했다.
“내가 수레를 불러 급히 동쪽으로 가겠다.”
이로 인해 부하는 상서복야를 대리하도록 하여 함께 동쪽으로 갔다.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킨 것에는 부하의 책모가 있었다. 경왕(景王, 사마사)이 죽자, 부하는 사마문왕(司馬文王, 사마소)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문왕의 정치를 보좌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종회전(鍾會傳)에 있다.
세어(世語)에 따르면 : 경왕(사마사)의 병이 심해지자 조정을 부하에게 맡겼으나 부하는 받지 않았다. 사마사가 죽자 부하는 이를 숨기고 발상하지 않은 채 경왕의 명이라며 문왕을 허창으로 불러 사마사의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손성(浮橋)이 평에 따르면 : 진나라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모두 위나라의 승상으로 권세가 무거웠고 서로를 계승하여 왕업의 기초가 되었다. 어찌 부하 같이 몹시 작은 여기에 끼겠는가? 세어가 말하는 바는 모두 틀린 말이다.
종회는 이 때부터 스스로 오만한 기색을 보이자 부하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의 뜻은 원대하지만, 공업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하는 공적으로 승진하여 양향후에 봉해졌고, 식읍이 6백호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1천 2백호가 되었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47세였다. 태상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후라고 했다.
부자(傅子)에 따르면 : 이풍(李豐)은 부하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뛰어나다고 명성이 대단했고,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올라, 명성이 대단했지만, 부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이풍은 거짓으로 수식을 하고 의심을 많이 품고 있으며, 자기의 작은 지혜를 자랑으로 여기며 권력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있으니, 만약 기밀에 관한 일을 맡게 된다면 그가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풍은 나중에 중서령이 되었고, 하후현과 함께 반란을 꾸몄다가 부하가 말한 대로 죽었다. 부하는 젊을 때 기주자사 배휘(裴徽)와 산기상시 순감(荀甝)과 사이가 좋았지만,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 또한 진북장군 하증(何曾), 사공 진태(陳泰), 상서복야 순개(荀顗), 후장군 종육(鍾毓) 등과 친했는데, 다들 명신이 되었다.
아들 부지(祗)가 뒤를 이었다. 함희 중(鹹熈, 264~265)에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五等)가 세워졌는데 부하가 이전 황제 시대에 공훈이 빛났기에 부지를 경원자로 바꿔 봉했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 부지(祗)의 자는 자장이(子莊)고, 부하의 막내아들이다. 진나라(晉) 영가 중(永嘉, 307~313)에 사공이 되었다. 부지의 아들 부선(宣)은 자가 세홍(世弘)이다.
세어(世語)에 따르면 : 부선(宣)을 칭찬하는 글을 보면, 부선은 공명정대해(公正) 명성이 있었는데, 지위는 어사중승이 되었다. 부선의 동생 부창(暢)은 자가 세도(世道)인데, 비서승이 되었고, 오랑캐와 살다가(胡中) 죽었다. 진제공찬(晉諸公贊)과 진공경례질고사(晉公卿禮秩故事) 같은 책을 썼다.
평
평한다 : 옛날 문제(조비)와 진사왕(조식)은 공자의 존귀함을 받고 널리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기호가 같은 선비들을 모았고, 문학적 재능이 있는 자들을 나란히 나타나게 했다. 왕찬(粲) 등 여섯 명의 명성이 가장 높았는데 특히 왕찬은 항상 곁에 있는 관리가 되어 일대의 제도를 세웠지만, 그 허함을 지키고 세상을 덕으로 채운 서간(徐幹)의 순수함만은 못했다. 위기(衞覬) 또한 옛날 관례를 많이 알고 있었고, 당시 조정의 의식을 보좌했다. 유소(劉劭)는 학문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어 문체와 품행이 모두 우수했다. 유이(劉廙)는 청결한 식견을 갖고 있어 저명했으며, 부하(傅嘏)는 재능과 식견이 높아 이름이 빛났다.
신 송지(松之)가 부하(傅嘏)의 학식과 도량(識量)을 가진 무리를 보면 당시의 고유(高流)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를 평하자면 ‘재능을 써서 통달함이 나타났다.’할 수 있는데, 눈이 옹졸했고 또한 부하를 통해 아름다움을 보기에는 부족했다
[출처] 위서21 부하전(傅嘏)|작성자 playna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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