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징광사지에는 왕사급 비석을 품고있던 귀부와 이수가 잡초속에 묻혀있다.
징광사는 조선 최대 규모의 출판단지를 운영하고 화엄법회를 열어 8도의 스님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절은 높고 험한 곳에 자리했으니
어느때 이곳 절경을 찾아 이루었던가
깊이 들어가 어둠을 벗어나고
고요히 앉아서 번뇌를 씻네
향기로운 차한잔에 눈꽃이 피어나고
벗과 나눈 술한잔에 저녁놀이 어리네
맑은 바람 옥자루를 따라 일고
시원한 바람 몸을 스치네
고려 명종때 문인 김극기가 징광사를 참배하고 남긴 차시이다.
광양 옥룡사.강진 월남사.보성 징광사는 그 당시 최고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이름을 떨친 명찰이었지만 지금은 폐사되어 향화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이다.
다음은 영월스님이 남긴 징광사 중창기이다.
낙안벌과 서쪽에 금화산이 있다.그 가운데 절이 있으니 바로 징광사이다.산은 높고 물이 맑은 곳이다.숲은 깊고 계곡은 고요하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즐기는 은자가 살기에 적합하다.
금강의 성품으로 지혜의 꽃을 피우니 금화라고 하였다.부처의 지혜처럼 넓은 바다에 아침해가 떠올라 어둠을 거두어 가니 징광이라 부른다.
지혜의 꽃을 피우고 자비의 향기를 전했던 징광사의 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비신이 사라진 귀부와 이수만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한 인도의 마라난타가 길지를 찾아 남도에 세개의 절을 지었다고 한다.영광 불갑사.나주 불회사.보성 징광사가 바로 그곳이다.우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중심의 차문화 역사를 배우고 있다.백제의 역사가 복원되면 차문화의 역사도 500년 이상 올라간다.
화순에서 쌍봉사를 창건한 철감선사도 신라 헌덕왕 17년 (825년)당나라에서 남전보원의 선맥을 전수받아 징광사에 머물렀다고 한다.침굉집에 나오는 기록이다.
끽다거 화두로 유명한 조주스님도 남전의 제자이니 철감선사와 사제지간이다.
징광사는 정유재란때 왜구들의 방화로 전소되었다.
인조 4년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덕높은 영월대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징광사를 다시 재건하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징광사가 자리한 금화산은 지혜의 꽃을 피운 석가모니를 뜻한다.그리고 옆의 존제산은 본래 존자산이었다.
가섭존자가 부처님을 시봉하는 모습이다.고려때 충렬왕이 남도의 명산을 순행하다가 존제산으로 개명하었다.금둔사가 있는 금전산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가 수행하는 성소이다.오봉산은 부처님의 최초 제자인 오비구를 상징한다.
제석산은 도리천의 제석천왕이 계시는 하늘세계이다.벌교에서 순천을 넘는 진토재는 중생들이 죽으면 한줌 흙이 된다는 의미이다. 벌교의 부용산은 피어나는 연꽃봉우리이고.낙안의 너른 옥토벌판은 안락국토 극락세계이다.
천치재는 부처님과 하느님이 함께하는 곳이고 석거리재는 불법의 진수를 깨닫기 위해 법거량하던 장소이다.
조선중기 보성군에 불교문화를 꽃피운 중심은 징광사였다.화엄학의 대가이며 선지가 깊은 백암성총 큰스님이 주석하면서 부터이다.
징광사는 조선 최대의 출판단지를 만들고 차문화의 초석을 이룬 성소가 폐사지가 되어 잡초만 무성할뿐이다.
사진 1번. 비신이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크기를 보면 도갑사의 수미왕사 탑비 규모이다.
사진 2번 벌교상고에서 방치되어 있다가 보성문화원으로 옮겨 보관중인 용두이다.이제까지는 징광사입구 무지개다리 수박교의 용두로 알려져왔다.
사진 3번 답사팀들과 자세히 살펴보니 징광사지에 있는 귀부의 용두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데 귀부의 용두로 보인다.
용두가 제자리를 찾으면 징광사지의 귀부와 이수또한 보물급 문화재로 지정받아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할수 있을것이다.